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91화 (791/1,329)

2화. 학회가 가져온 여파 Ⅲ (2)

감당하기 힘든 신뢰였다.

조기 대장암과 비교할 수도 없는 의미이자 성과일 텐데, 그 흔한 욕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자신도 왕성하게 활동 중이면서 제자에게 모든 것을 주고자 하는 것 같았다.

스승의 마음에 보답하는 길은 확실하게 준비해 성공하는 것뿐이었다.

강한 각오를 다지던 김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급히 병동으로 올라가 회진 돌기 직전인 이경석과 박승준 교수를 찾았다.

김지훈에게 대장암 컨설트를 냈다는 사실에 의아해했지만, 복강경 수술을 원한다는 소리에 이내 수긍했다.

모두들 자신의 파트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히 강한데, 무척 고마운 일이었다.

‘이해해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도 잠시, 설명을 듣던 이경석이 손사래를 쳤다.

“조기가 아니라 1기라고? 게다가 암 발생 부위가 하행결장이잖아. 박리할 수 있겠어?”

가장 핵심적인 의문이었다.

솔직하게 말할 일이었다.

“개복 가능성을 충분히 얘기하고 시도해야 할 것 같아요. 일단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수술 여부를 결정해야겠지만, 그보다 먼저 수술 팀부터 짜야 합니다. 그래야 성공 가능성을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지 않겠어요? 경석이 형, 오늘 저녁 어때요?”

“우리가 들어간다고? 이준영 선생님은?”

“이미 말씀드렸는데, 우리가 책임지고 수술하라고 하셨습니다. 조기 대장암이었거나 부위가 좋았으면 형이 집도하는 게 맞는데, 이번은 양해해 주세요. 같이하실 거죠?”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경험해 보지 못한 수술이 주는 불안과 두려움은 대단히 크다. 거듭된 양해와 더불어 이준영 교수의 말이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사실 김지훈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지난주 벌어진 이경석의 복강경 수술을 생각할 때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물론 퍼스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수술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보강할 필요가 있긴 했다.

“집도의 문제가 아니잖아. 퍼스트가 잘 받쳐 줘야 후복막 박리를 할 수 있을 텐데, 난 담낭 절제 외에는 다른 수술이 경험이 없어.”

“기본은 어느 수술이나 똑같습니다. 그럼 형은 수술에 참여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다른 문제는 일단 논의부터 하고 상의하죠. 8시에 봐요.”

말이 길어져야 자신 없다는 소리만 들을 것 같았다. 일단 못 박고 자리를 끝냈다. 이경석이 눈가를 찡그리며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입원 환자가 적은 덕을 봤다. 조기 대장암 자료를 다시 보며 생각할 시간을 얻었다. 관건인 후복막 박리도 눈에 그리면 그릴수록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구 삽입 위치 조정하고, 후복막과의 경계만 확실하게 찾으면 할 수 있을 것 같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박승준 선생님의 도움도 필요하겠어.’

8시가 다가오자 뜻밖의 걱정거리가 생겼다.

퇴근 후 시간은 이제 김지훈이 아니라, 고경아와 배 속 아이 것이다. 혈관 수술이 없는 날에도 제때 퇴근을 못한다니 난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정에 충실하고자 마음먹었는데, 뜻대로 될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일상다반사였다. 더구나 학회와 주말 통화를 기점으로 특별하게 잘나진 남편이다. 십분 이해해 줄 것이라 믿었다.

‘별말은 없겠지만, 최대한 빨리 끝내야 뭐 먹고 싶다고 할 때 사 올 수가 있는데. 경아 씨, 미안해요.’

전화 한 통화 하고 자료를 찾은 김지훈이 빠르게 정리를 시작했다.

창밖이 어두워질수록 점점 뒤통수가 서늘해졌다. 엄지이자 마님인 고경아가 어디선가 그윽한 눈길로 미소를 지으며 째려보고 있었다.

내일 수술도 없는데, 꼭 오늘 해야 해?

좋은 말 할 때 빨리빨리 정리하고 와라.

스카우트 제의받았다고 간이 부은 건 아니지?

환청까지 들려 은근히 다급해졌다.

8시 정각, 파트를 가리지 않고 모두 의국에 모였다. 심지어 신현수와 지동훈 교수도 참석을 자청하며 강한 흥분과 기대를 감추지 못했다.

대장암 1기를 복강경으로 시도한다!

그것도 하행결장암이다.

이 역시 처음 시도하는 수술이 분명했다.

김지훈이 수술 전반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단 한 번뿐인 조기 대장암 수술 경험의 위력이 대단했다. 대장 내시경과 복부 CT를 확인하는 동안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심지어 송재덕 교수를 대신해 대장 파트를 이끌고 있는 박승준 교수까지 말이다.

“김 교수, 가능하겠어?”

“확신하기 어렵지만, 가능성이 없진 않습니다.”

그 말만으로도 여러 생각이 드는지 저마다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

수술 계획을 세우며 논의하는 내내 거의 모든 전권이 김지훈에게 주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한 자신감을 보이자 신현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이런 수술을 앞두고 겁도 내지 않네. 저런 자신감이 어디에서 나올까? 경험과 노력이겠지?’

마지막으로 수술 팀 구성이 남았다.

수술의 난이도와 성패를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퍼스트를 서야 할 이경석은 심각했고, 박승준 교수는 참여할 기회가 없다는 생각에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집도의는 누가 보아도 빤한 일이었다.

김지훈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신현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수술은 집도의만큼 퍼스트가 중요해. 경석이 형과 현수 중 누가 실력이 나을까? 차이가 난다고 해도 수술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니까 스승님도 별말씀 안 하셨겠지. 해당 파트에서 하는 것이 맞아. 애초 결정대로 밀고 가자.’

고난도도 문제지만 상당한 의미를 가진 수술이었다. 조기가 아닌 1기 대장암이기에 한발 더 나아가는 것이다.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한 후, 마지막 결정을 내렸다.

“기본적으로 개복과 술기가 다를 것은 없지만, 기구 숙련도를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퍼스트는 이경석 선생님이 서시고, 박승준 선생님은 세컨을 서 주시면 좋겠습니다.”

내심 기대를 했는지 신현수가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힐끗 눈길을 준 이경석이 침을 꿀꺽 삼켰다.

‘현수가 서야 성공 가능성이 더 높아질 텐데.’

“김 교수, 정말 퍼스트 서라고?”

“그럼 누가 서요? 전 주에 라파로 하는 거 보니까, 그렇게까지 말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대신 경험이 단 한 번이라도 많으면 좋으니까, 이준영 선생님께 라파로 달라고 부탁하셔야 합니다.”

돌연 헛기침을 하며 얼굴까지 허예졌다.

이준영 교수 앞에만 서면 다들 왠지 모를 위압감에 움츠러든다. 심지어 김지훈도 어려워하는데, 감히 수술을 달라는 말을 어떻게 꺼낼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번 수술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 정도 준비는 하셔야 박리할 때 손을 맞출 수 있습니다.’

박승준 교수는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었다.

“김 교수, 세컨도 기구를 잡아야 할지 모르는데 내가 제대로 설 수 있을까? 애초에 참관만 할 생각이었으니까, 차라리 신현수 선생이 서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정말 놀라울 정도로 변했다.

지동훈 교수가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았던 이유였다. 지금도 이 모습이 본모습이라는 듯 옆에 앉아 당연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쨌든 그 점은 이미 충분하게 생각했다. 송재덕 교수에게 인정받은 써전의 손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김지훈의 판단이었다.

“수술 팀 전체 호흡이 잘 맞아야 하는데, 경석이 형하고 손 정말 잘 맞으시잖아요. 다른 라파로에 비해 각자의 역할이 크긴 해도, 기구만 손에 익히면 큰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이혁원, 내놔.”

김지훈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예?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까 수술 방에서 다 봤어.”

“그건 또 언제 보셨어요?”

이 와중에도 행동이 아니라 말부터 나오다니, 점점 과감해지는 이혁원이었다. 하긴 4년 차 치프를 앞두고 있으니 대우해 줄 때도 되긴 했다.

“너희들은 뛰어 봐야 다 내 손바닥 안이야.”

‘형수님이구나. 이번 주는 연습하기 글렀네. 아니지. 수술 준다고 하셨으니까 하나 정도는 남기실지도 몰라. 가만? 대장암 환자라고 해도 김지훈 선생님이 집도를 하시니까 이번 수술 써드는 내 거 아닌가?’

의국 책상을 열자 기구 몇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간절한 바람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하나도 남김없이 몽땅 집어 든 김지훈이 박승준 교수에게 기구를 내밀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연습하라는 의미였다.

중견에 가까운 교수가 펠로우의 손을 마다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기구를 잡으며 눈가에 힘을 주었다.

박승준 교수의 변화가 새삼 놀라웠다.

마지막 한 자리가 남았다.

눈치를 보던 나종진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김지훈이 집도의라는 사실에 고무된 이혁원이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게다가 수술 팀 이름이 나올 때마다 신현수까지 움찔거렸다. 참여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였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자칫 써드 자리마저 뺏길지 몰랐다. 하지만 대장 파트 환자다. 정당한 권리 주장이자 당연한 일을 두고 머뭇거리면 안 된다.

“선생님, 그럼 제가 써드 서면 됩니까?”

“그럼 누가 서? 라파로 욕심만 부리지 말고, 어떻게 수술하는지 잘 봐. 이혁원 너도 마찬가지야.”

안도의 한숨 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남은 한 놈은 반드시 잡아야 할 기회를 놓쳤다는 듯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신현수는 티도 내지 못했다.

다음 말은 필요 없었다. 수술이 없거나 시간 나면 송진우와 강병옥은 자동 참관이다. 복강경에 목을 맨 이혁원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벌써부터 긴장한 수술 팀을 보던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경석이 형, 이번 수술을 발판 삼아 케이스 꼬박꼬박 쌓아서 학회에 발표하세요. 스카우트 제의 들어옵니다. 부담되지만 기분 은근히 좋아요.’

부담스럽던 스카우트 제의마저 가볍게 생각될 정도로 상당히 즐겁고 유쾌한 시간이었다.

자! 늦었지만 집에 충실해야 할 때였다.

(준비는 잘 끝냈어요? 나도 내일부터 준비해야겠네. 들어올 때 순대하고 어묵 사 와요.)

오더를 내리는 고경아의 목소리가 밝았다.

그 덕에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에 힘이 팍팍 들어갔다. 휘휘 휘파람을 불던 김지훈이 흠칫 놀라며 부리나케 달렸다. 가뜩이나 추운데 찬 음식은 좋지 않다.

식으면 큰일 난다.

헉헉!

한겨울 칼바람이 눈과 코를 마구 찔렀다.

맛있게 어묵을 먹는 모습에 미소 짓던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문득 스카우트 조건이 떠올랐다. 조금이라도 몸이 편해지면 어디선가 툭툭 튀어나왔다. 끈적끈적 뒤통수에 달라붙었던 모양이었다.

‘아! 정말 무시하기 힘든 제안이긴 해.’

결정해서 알려 달라는 날이 2주 가까이 남았는데, 왠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그동안 생각지도 않았던 돈, 명예, 명성이라는 단어까지 오락가락했다. 구미 경험 탓인지 무엇보다도 최고의 시설과 지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고민할 거리가 아닌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따로 놀고 있는 머리와 가슴을 한데 모아 꾸깃꾸깃 접었다. 가슴에서 나오는 소리가 더 강력한지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음 날, 송재덕 교수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훈아, 교수야, 경석이하고 박 교수하고 라파로 대장 한다고? 좋다, 좋아. 그러면 우리 이 교수는 뭐 하니? 노나? 아니지? 그치?”

“진료하는 날입니다.”

송재덕 교수의 얼굴에 미소가 넘쳐흘렀다.

“진료? 그래, 그래. 이 교수 자기는 이제 빠져도 된다. 우리는 애들만 있으면 되잖아. 그치? 내 말이 맞지? 지훈아, 교수야, 네가 시작했으니까 끝까지 책임져라. 이젠 네가 라파로 대장이다. 라파로 대장. 좋다, 좋아.”

아예 확정적인 말투로 바뀌었다. 이준영 교수의 얼굴에서 완전히 표정이 사라졌다.

“허험! 근데 놈놈놈 동생은 언제 오냐? 왜 안 보여? 왜?”

“놈놈놈 동생이요?”

“하석이 있잖아. 오하석이. 나쁜 놈, 나갔다 온 놈, 덩치만 큰 놈 동생 하석이. 그놈 대장 시켜야 하는데 왜 안 보이지? 설마 놈놈놈처럼 도망갔나? 아니지? 그치?”

“전공의 시험이 끝나야 픽스턴을 돕니다. 다음 달에 오니까 조금만 기다리시죠.”

꼬박꼬박 대답하던 김지훈이 눈을 반짝였다.

잘하면 오하석 덕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소리에서 벗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조금 더 강한 유인이 필요했다.

“하석이가 꽤 똑똑하고, 일 딱 부러지게 잘합니다. 대장 파트 선택하면 선생님 마음에 쏙 드실 겁니다.”

“그렇지? 그래. 네 말이 맞다. 지훈아, 교수야, 하석이도 오는데 이참에 그냥 눌러앉자. 둘이 라파로 대장 하면 얼마나 좋으니. 경석이하고 박 교수는 대장, 너랑 하석이는 라파로 대장. 좋다, 좋아.”

막연한 기대가 여지없이 깨졌다.

오하석이 오면 쌍으로 듣게 생겼다.

대장 소리가 난무했지만 이준영 교수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무관심이 최고라는 듯 송재덕 교수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대신 이경석에게 묵직한 눈빛을 날리고 있었다.

“라파로를 달라고?”

단 한마디에 이경석이 흠칫 놀랐다. 입술에 침을 바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 대장암 수술을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다른 부위도 아니고 하행결장이라서 퍼스트를 제대로 서야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 같습니다.”

이경석이 나름 열심히 설명했다.

아무 말도 없었다.

분명 허락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어려운 사람이 바로 이준영 교수였다. 먼저 말을 꺼낸 김지훈마저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그냥 주신다고 하지. 뜸은 왜 들이실까?’

속으로만 대범했다.

이준영 교수가 스윽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 머문 얼굴은 이경석이 아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왠지 난감한 질문을 할 것 같았다.

김지훈이 고개를 푹 숙였다.

“신현수, 어떻게 생각해?”

다행히 당첨 면했다.

그런데 신현수에게 왜 물어볼까?

조용히 회진 준비하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투지를 감추고 있던 신현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당연히 수술 팀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한 걸까?

‘대장 파트로 수술 팀을 꾸리라고 하신 거 아니었나? 내가 잘못 들었나? 현수 실력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었네.’

김지훈도 눈만 껌벅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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