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90화 (790/1,329)

2화. 학회가 가져온 여파 Ⅲ (1)

김지훈이 입을 열지 못하자 과장은 물론 진충기마저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조건에 혹하지 않으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김 교수, 우리 병원은 확고한 비전을 갖고 있어. 필요하다면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을 거야. 지금처럼만 해 준다면 개인적으로 큰 성과를 얻을 것이라고 확신해. 오늘 제시한 조건이면 김 교수 나이 때는 생각도 못할 정도로 파격적이야.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알겠지?”

국내 최대 규모와 최고 시설을 자랑하는 병원 과장의 말이었다. 반듯한 자세를 유지하던 진충기도 가세했다. 날카로운 눈매는 여전했다.

“김 교수님, 나와 함께합시다. 과장님 후원 아래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정말 최고의 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쓸데없이 경쟁에 힘을 소모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나 그렇게 속 좁은 놈 아닙니다.”

더 높은 직급을 맡긴 하지만 복강경 파트를 확실하게 공유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학회 때 들은 말과 받은 느낌을 생각하면 상당히 의외였다.

혹시 스승에게 할 스카우트 제의를 자신에게 잘못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과장님,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지금 당장 답을 드릴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당연한 일이지. 2주 정도 시간 줄 테니까 그때까지 결정해. 기존 멤버들과 경쟁을 피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해 온 대로만 하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거야.”

“김 교수님, 같이 일합시다. 우리 병원 수준을 생각해 봐요. 과장님과 내가 끌어 주면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겁니다.”

속마음이 어떻든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탓에 거의 한 시간이 넘도록 대화를 나누고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어리둥절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펠로우 입장에서는 생각도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조건이었다. 외과 센터에 꼭 합류해 달라는 말이 귓가에서 아른거렸다. 경력 있는 교수라고 해도 거부하기 힘든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당장 상의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경아 씨, 어떻게 생각해요?”

고경아도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마주 앉은 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들썩거리던 엉덩이도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당사자라고 해도 무방한데 의외로 담담했다.

“나야 더 좋은 여건에서 근무하길 바라지만, 유리한 점이 있으면 불리한 점도 있지 않을까요? 의사들 텃세도 만만치 않잖아요. 지훈 씨가 신중하게 잘 생각해서 결정했으면 좋겠어요.”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다.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도 있기 마련이다. 고경아가 중요한 점을 아주 잘 찍어 주었다. 아직도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김지훈에게 좋은 약이었다.

“그렇죠? 역시 내가 장가는 잘 갔어.”

침착해질 만하니까 고경아가 갑자기 크게 웃었다. 베개를 잡고 구르다 못해 바들바들 몸까지 떨었다. 방금 전까지 담담했는데 의아할 정도로 좋아 죽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

“그럼 안 좋아요? 누가 이런 제안을 받겠어요? 결혼해서 얼굴도 제대로 못 본 보람이 있네. 엄마한테 전화해서 자랑해야겠다.”

큰일 날 소리다.

김지훈이 손사래를 쳤다.

“아버님 귀에 들어갈 게 빤한데 절대 안 돼요. 스승님도 금방 아시게 될 테고, 그러면 입장 곤란한 정도가 아니잖아요. 신경 쓰는 건 나로 충분합니다.”

“마음은 있나 보네요?”

“나도 사람인데, 그런 조건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어요? 스승님만 아니면 고민할 일도 없었을 텐데.”

고경아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럼 결정 났네요. 이준영 선생님이 함께 가시지 않는 한 등 떠밀어도 안 갈 거잖아요.”

맞는 말이다.

스승과 떨어져 다른 병원에서 근무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결코 돈이나 자리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그놈의 유혹을 뿌리치기 무척 힘들었다. 욕심을 가진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주말 내내 끙끙거렸다.

가끔 뭔가 먹고 싶다는 고경아 마님의 오더가 떨어져 부리나케 달릴 때가 마음 편했다.

확실히 머리가 복잡하면 골머리를 싸매는 것보다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최고인 모양이었다.

싱숭생숭한 가운데 월요일을 맞았다.

학회에 이어 방송이 입에 올랐다.

“지훈아, 교수야, 너 이러다 연예인 되겠다. 연예인. 의료봉사, 대사 부인에 학회까지, 움직이면 방송이네. 부럽다, 부러워. 이 교수, 자기도 말 잘하더라. 병원에서도 그렇게 좀 살자. 말을 하니까 얼마나 좋니, 얼마나. 내 속이 다 시원하더라. 이 과장, 신 교수, 내 말이 맞지? 그치?”

이준영 교수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입을 열려다 말고 예전 모습으로 돌아갔다.

화제의 중심에 선 김지훈 역시 웃음기만 보였고, 다들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말만 했다.

‘어휴! 신경 쓰여.’

무슨 이유인지 스승의 얼굴을 보는 순간 스카우트 제의가 생각났다. 더욱 심란해진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곧 서울 올라온 후 첫 번째 수술이 시작된다. 수없이 해 온 담낭 절제술이지만 산만하면 실수하기 마련이었다.

다행이었다. 수술하는 동안 잡생각이 싹 사라지며 마음이 편해졌다.

대신 엉뚱한 놈이 상당히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무시하기 힘들 정도로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이혁원, 나한테 할 말 있어? 뭐야?”

“전 주에 약속하신 걸 혹시 잊으셨는지 해서요.”

“약속? 내가 무슨 약속을 했는데?”

“어후! 이러시면 안 되죠. 저도 성민이만큼 열심히 했습니다. 종진이도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왜 이러세요? 선생님, 차별하시면 안 됩니다. 그건 죄악입니다.”

투덜투덜 불만이 가득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물론 조성민 이상의 실력을 가진 이혁원이었다.

수술 욕심을 부리는 모습이 도리어 듬직해 보였지만, 숱하게 타면서 배운 게 있다. 복강경 수술이 대세 중 하나라고 해도, 사소한 실수가 개복을 유발할 수 있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구미는 정말 보기 드문 예외일 뿐이었다.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죄악이라고? 말 잘했다. 기구 다룰 능력도 없는 놈한테 함부로 수술 주는 게 가장 큰 죄악이야.”

“선생님! 제가 그렇게 능력이 없나요? 정말 안 주실 겁니까? 열심히 하겠습니다.”

‘자식! 몸이 달았구나. 일단 내 주변 정리부터 하고 차근차근 해 보자. 아직 시간 많다.’

“하는 거 봐서.”

툭 던진 한마디에 이혁원이 곧바로 반응했다.

“간호사, 혹시 수명 다 된 기구 없어요? 폐기 처분하지 말고 생기는 대로 우리 줘야 합니다. 인생이 걸린 문제예요.”

간호사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 넉살이 이렇게 늘었을까?

한 살 두 살 먹어 가는 나이와 5년째 접어드는 병원 생활 덕만은 아니었다. 직장 동료, 선후배를 떠나 인간적으로 친해진 덕이 제일 클 것이다.

그래도 김지훈은 못 이긴다.

김지훈이 가볍게 어깨 한 대 두드려 주고 외래로 내려갔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없자 그놈의 스카우트 제의가 또 머리를 치켜들었다.

뭐라도 해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이번 주 예약된 진료와 수술을 확인했다.

좀처럼 집중이 되질 않았다.

불현듯 이유 모를 짜증이 팍팍 솟구쳐 얼굴을 찌푸리는 순간 송진우의 벌건 얼굴이 보였다. 이혁원의 등쌀에 시달리게 만든 결코 밉지 않은 원흉이었다.

“무슨 일이야?”

“컨설트 하나 왔습니다. 양승철 교수님께서 빨리 봐달라고 하십니다.”

응급 환자라도 뜬 것일까?

가운을 걸치고 소화기 병동으로 달려갔다.

양승철 교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쁜 숨을 달래며 꾸벅 고개를 숙이자 대견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전공의 시절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속이 꽉 찰 대로 찬 김지훈이었다.

“김지훈 선생, 빨리 왔네.”

“무슨 환잔데 직접 찾으셨습니까?”

“대장암 환자야.”

“예? 대장암 환자를 왜 제게…….”

“원래 박승준 교수한데 보내려고 했던 1기 대장암 환잔데, 갑자기 라파로로 수술받기를 원하네.”

“라파로로요?”

“주말에 방송 본 모양이야. 환자들 의외로 정보에 민감하잖아. 다행히 임파선 전이나 원격 전이는 없지만, 조기가 아닌데 가능하겠어? 우리 김지훈 선생이라면 할 수 있겠지?”

성급하게 대답할 수술이 아니었다.

“일단 검사 결과 확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빨리 봐줘.”

‘대단해. 이름에 얼굴까지 확실하게 알렸으니 날개를 달았네. 그만한 자격과 능력이 있어. 품성은 더 좋고.’

양승철 교수가 기분 좋게 웃으며 외래로 내려갔다.

컨설트 때문에 굳이 김지훈을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전공의 때부터 눈여겨보았기에 얼굴 한번 보려고 했는지도 몰랐다. 과를 떠나 열심히 일하고 성과를 낸 후배가 기특하기 때문일 것이다.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뷰박스 앞에 섰다. 송진우가 재빨리 차트를 펼치며 복부 CT를 걸었다.

검사 결과를 확인하던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기 대장암 수술 이후 1기 대장암도 복강경으로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 왔다.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기회에 은근한 흥분이 다가왔다.

‘원격 전이와 임파선 전이가 확실하게 없고, 대장 벽도 깨끗하니까 가능하겠어. 조기암보다 더 광범위하게 제거해야 하니까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어라? 이거 뭐야?’

복강경 수술 가능성에만 매달리다 정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지나쳤다. 에스결장이나 평행결장이 아니라 하행결장에 암이 발생했다. 아랫부분이 모두 후복막에 묻혀 있는 바로 그 하행결장 말이다.

“진우야, 여기 하행결장 맞지?”

송진우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학생들도 아는 걸 왜 물어보시지?’

“예, 맞습니다. 선생님, 라파로로 가능합니까?”

“후복막을 기구로 박리해야 하네. 어이구!”

대답 대신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엄두도 내지 말라는 경고음이 울렸다. 무리하게 박리를 시도하면 자칫 대장이 찢어지거나, 후복막에 손상을 줄 가능성이 높았다. 애초에 개복을 한 것보다 결과가 나쁠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담낭농증 수술이 휙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암이라고 해도 염증 없는 조직이 훨씬 박리하기 쉽다.

스멀스멀 욕심이 고개를 내밀었다.

철저히 준비하고, 최고의 수술 팀을 꾸린다면 가능할 수 있다는 일종의 확신이 다가왔다. 더욱이 언제든 힘을 보태 줄 최고의 써전들이 등 뒤에 버티고 있다.

생각나는 사람은 딱 셋이었다.

간담도 및 복강경의 대가인 스승, 대장 파트를 확실하게 책임지고 있는 이경석, 박승준 교수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고려해야 할 요인이었다.

눈가를 좁힌 채 CT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송진우가 눈을 반짝였다.

김지훈이 갖는 두려움은 수술 그 자체가 아니라 환자뿐이었다.

잠시 후 환자를 만났다. 방송을 봤다더니 바로 알아보았다.

“김지훈 교수님이시죠? 언제 수술받을 수 있습니까?”

복강경 수술이 가능한지 묻지도 않았다. 암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최신 수술에 대한 막연한 믿음과 강한 기대를 보였다. 마치 복강경으로 수술받으면 그 자체로 완치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상당한 부담이 느껴졌지만 환자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기에 더욱 신중해야 했다.

“죄송하지만, 먼저 검토를 해 봐야 확실하게 결정할 수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기존 수술 방법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언제쯤 알 수 있을까요?”

“늦어도 내일 저녁에는 말씀드리겠습니다.”

결정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환자에겐 좋지 않다. 오늘 당장 논의해야 했다.

병실을 나온 김지훈이 서둘러 컨설트 용지에 1차 답변을 적었다.

<오늘 검토 후 최대한 빨리 수술 방법 결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지훈 배상->

“진우야, 차트하고 검사 결과 챙겨. 가자.”

김지훈이 부리나케 의국으로 향했다. 마치 자신의 수술인 양 흥분으로 얼굴이 달아오른 송진우가 잽싸게 뒤를 따랐다.

의사로서 환자에게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말해야 한다. 김지훈도 다를 바 없었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반드시 도전할 것이라 믿었다.

김지훈의 눈에 활력이 넘쳤다. 가장 먼저 상의해야 할 사람인 이준영 교수부터 찾았다. 함께 수술할 기회라는 생각만으로도 흥분되고 신나는 모양이었다.

“선생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검사 결과를 확인하며 잠시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던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행결장 박리가 관건이지만 담낭농증을 수술한 실력이면 충분히 시도할 수 있겠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다음 환자를 위해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집도의가 결정해야지.”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구미가 아니라 서울이다. 일반적인 복강경 수술이라면 모르지만 지금은 절대적으로 스승의 힘이 필요했다. 지난 3개월 동안의 경험만을 믿을 때가 아니었다.

“선생님, 제가 집도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컨설트 네 앞으로 났어. 네 환자야. 대장암 환자니까 수술 팀도 그에 맞게 꾸려.”

수술에 참여할 의향조차 비치지 않았다.

복강경 수술이기에 김지훈 앞으로 컨설트가 나온 사실만으로도 서운할 수 있었다.

어떤 교수라도 그럴 테지만 이준영 교수다. 서운한 기색은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말할 이유가 없다는 듯 이미 가운을 벗고 퇴근 준비를 했다.

“준비 잘해.”

‘지훈아, 이제 곧 정식 교수다. 어떤 일이든 스스로 서야 할 때야. 내 의견은 상의하는 정도로 충분해.’

이전에 보였던 믿음과 차원이 달랐다. 수술의 난이도나 위험성은 고려할 조건이 아니라는 눈빛이었다. 구미에서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고 수술하라는 말이었다.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딸깍!

문 닫히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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