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89화 (789/1,329)

1화. 학회가 가져온 여파 Ⅱ (2)

유독 자신에게만 교수 소리가 따라붙었다.

신현수나 이경석도 빤히 들었을 텐데 신경 쓰는 눈치조차 보이지 않았다. 은연중 구미에서 보인 성과와 학회 발표가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쑥스럽네. 나만 신경 쓰이나?’

어쨌든 젊은 의사 다섯이 처음으로 머리를 맞대고 유익한 대화를 나누었다. 퇴근 시간도 잊고 웃고 떠들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다.

이렇게만 가면 언젠가 은퇴하게 될 교수들을 이어 확실하게 세대를 교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고, 다들 쟁쟁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 누가 주축이 돼 이끌어 나갈지 두고 볼 일이었다.

바짝 신경 쓸 일이 한 가지 더 남았다. 당면한 병원 일 중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불과 4주 후면 연수를 떠나는 신기동 교수의 혈관 수술이 남았다. 주임 교수 자리까지 걸렸다. 펠로우 모두 관련된 일이자 상당히 강한 욕심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신현수와 이경석의 실력도 무서울 정도로 늘었을 것이다. 전과 똑같은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임해서는 탈락 확정이다.

‘이건 자존심을 떠나 엄청난 기회야.’

신기동 교수는 어떤 생각을 할까?

서울 근무 시작 후 첫 혈관 수술부터 불렀다. 한껏 기대했지만 역시 예리하고 깐깐했다.

“김지훈, 퍼스트 서.”

내리 두 개를 하는 동안 유심히 손을 보고서야 마지막 수술에서 메스를 넘겼다.

일과를 모두 마친 신현수와 이경석까지 들어와 정신 바짝 차려야 했다.

‘3개월 만이라 그런지 꽤 떨리네.’

떨리는 가슴을 애써 가라앉히고 배운 대로 한 바늘 한 바늘 착실히 침착하게 혈관을 이었다.

구미 환자들도 상당히 만족했고, 최철한까지 가르친 실력이었다. 은근한 긴장 속에서도 웬만큼 자신했다.

잠시 신기동 교수가 어떤 의사인지 잊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서늘한 눈초리를 보내다 여지없이 비수를 날렸다.

“김지훈, 너 구미에서 뭐 했어?”

“예? 열심히 했는데요.”

“과장으로 간 놈이 이걸 혈관 수술이라고 했다고? 환자들이 항의 안 해? 정신 차리자. 내가 이런 상황에서 연수를 가야 할지 모르겠다.”

끌끌 혀까지 찼다.

신현수와 이경석이 묘한 눈빛으로 서로를 보았다.

정말 김지훈 수술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자신들이 있다. 연수를 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인가 암시하는 것 같은 말에 강한 긴장이 오갔다.

김지훈은 더 놀랐다. 눈가를 잔뜩 좁힌 눈매에서 왠지 모를 섬뜩한 기운이 전해지며 온몸을 타고 흘렀다. 순간 뒤처졌다는 생각에 등짝이 축축해지고, 얼굴까지 화끈거렸다. 달콤하고 뿌듯했던 학회의 여운마저 싹 사라졌다.

‘분위기 심상치 않네. 내 수술에 문제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 너무 라파로에만 집중했어.’

더 이상 주임 교수는 문제가 아니었다. 창피당하지 않도록 치열한 노력을 경주하는 수밖에 없었다.

퇴근을 앞둔 시간에 고경아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30분 정도 루뻬와 혈관 수술 기구에 집중했다.

성에 차지 않았지만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 고경아를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고이 집으로 모시는 동안에도, 따뜻한 커피 한잔하며 티브이를 보는 동안에도 혈관이 머릿속을 뱅뱅 돌았다.

‘기죽을 때가 아니야. 아직 3주도 더 남았어.’

이 악물고 주먹을 크게 흔들었다. 액션이 좀 강했다. 혹시 마님에게 폐를 끼치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어느새 잠이 들어 있어 다행이었다.

아직 위험한 시기인데 매사에 조심할 일이었다.

환자는 얼마 없었지만 오자마자 피 터질 일과 직면했다. 다행히 본격적인 진료와 수술에 직면한 것이 아니었기에 시간이 있다고 여겼다.

단단히 잘못 생각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환자들이 줄을 이었다.

단내 나도록 설명과 상담을 마치고 나면 훌쩍 시간이 지나 있었다. 수술 예약이 차근차근 쌓여 갔지만 혈관은 그만큼 멀어지고 있었다.

역시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기는 정말 어려웠다.

진료와 수술 없는 날이라고 편할까?

구미 생활 마지막 일주간 손을 놓았고, 이번 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감을 잃을까 봐 이준영 교수의 수술을 비롯해 다른 수술까지 참관하고 나면 어느새 깜깜한 밤이었다.

일복 또한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첫 당직 때는 이혁원과 강병옥의 한탄과 감탄사를 동시에 자아냈다.

“역시 선생님이 오시니까 달라지네요.”

“다들 환자 많이 봤던데 뭐가 달라져?”

“선생님, 지금 새벽 4시입니다. 눈 빨개지셨어요.”

음! 벌써 시간이 그렇게?

어쩐지 응급실, 병동 간호사 눈이 죽 찢어져 있었다.

쏟아져 나오는 레이저 광선을 요리조리 피하던 김지훈이 화들짝 놀라 집으로 달렸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잠은 집에서 자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어여쁜 아기를 가진 고경아에 대한 예의이자 아빠의 책임이었다.

다행히 집에서 2시간이나 잤다.

그날 아침, 응급실 보고를 하던 신현수가 눈가를 좁혔다. 지난밤 벌어진 수술을 보며 불타오르는 투지에 휘발유를 드럼째 퍼붓고 있었다.

‘첫 당직 서자마자 칼바람을 날려?’

외과 의사의 힘은 역시 칼바람에서 나온다.

이론에 아무리 밝아야 많이 수술해 본 사람 앞에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한다. 응급 수술에서 밀린다면 정규 수술에서 만회하는 수밖에 없었다. 환자 한 명 한 명에게 최선을 다해 신뢰를 얻는 길만이 답이었다.

펠로우들의 치열한 경쟁과 노력이 이어졌다.

이리저리 시간은 촉박해지고, 신기동 교수의 비수는 날이 갈수록 예리하게 빛났다. 찔리고 베이다 못해 하얀 서리까지 뒤집어썼다. 그것도 모자라 신현수와 이경석이 수술할 때 퍼스트를 서라는 말에 눈물이 줄줄 흐를 지경이었다.

“후우! 김지훈, 과장 한 번 하더니 기고만장 배가 불렀구나. 현수나 경석이만 한 집도의가 없는데, 퍼스트도 서기 힘들어?”

손바닥에서 땀난다.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말로는 누가 못해? 신현수, 다음 수술 내가 집도할 테니까 퍼스트 서고, 김지훈한테 어떻게 서는 게 맞는지 확실하게 교육시켜.”

졸지에 전공의 6년 차로 전락했다.

두 눈 부릅뜨고 참관한 후 신현수의 냉정한 조언을 들었다. 누가 이혁민 교수 제자 아니랄까 봐 무척 조곤조곤했고, 마지막 말로 폐부를 쑥 찔렀다.

“지훈아, 잘하자.”

문득 동기에게도 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참 서러운 나날이었다.

김지훈이 누군가? 이 정도에 절대 고개 숙일 사람이 아니었다.

충분히 만회하고도 남을 긴 시간이 남았다.

불끈 주먹 쥐고 흔드는 것도 모자라 어금니가 부서져라 이를 악물었다.

단 1분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쉴 때 확실하게 쉬고, 고경아 마님 흡족하게 모시고, 일할 때는 오직 일에만 집중했다.

하루하루 바쁜 시간이 흘렀다.

“지훈아, 교수야, 천천히 가자. 천천히. 학회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뛰어다니니, 또. 라파로 대장 수술은 없나? 그거 누가 할까? 누가?”

“다음 주부터 꽤 바빠질 텐데 체력 관리 잘해라.”

교수들의 흐뭇한 미소가 유일한 응원이었다. 물론 스승은 신기동 교수를 압도하는 사람이다.

“라파로만 수술이 아니야. 혈관 수술 똑바로 하자.”

그간 이룬 성과는 지난 일일 뿐이었다. 툭툭 던지는 말마다 뜨거운 불길이 혀를 날름거렸다. 방심하면 언제든 쏟아져 나올 것이다.

장작불과 얼음판 사이를 오가는 한 주였다.

***

서울에 올라와 첫 주말을 맞이했다. 구미에서 고생했단 이유로 당직을 면했다.

애써 병원 일을 잊고 한가로움을 즐겼다.

느긋하게 저녁 식사를 한 후 부른 배를 두드리며 기분 좋은 여유를 즐겼다.

집안일도 도왔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온몸으로 방바닥 청소를 하고 있는 김지훈을 보며 고경아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남편의 할 일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몸이 꼭 마음을 따르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밤 9시가 지나고 있었다.

고경아가 깜짝 놀라며 티브이를 켰다. 어느새 김지훈도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평소 골치 아픈 뉴스는 가급적 피했지만 오늘은 꼭 봐야 하는 날이었다. 세상에 별일 참 많았다. 판타지보다 더 환상적인 일도 곧잘 벌어졌다.

“에휴! 세상이 점점 험악해지네.”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사건 사고를 보며 혀를 차던 김지훈이 돌연 눈을 반짝이며 바싹 다가앉았다.

고경아가 김지훈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손을 꼭 잡았다.

드디어 기다리던 방송 시작이다. 성황리에 진행된 학회 장면에 이어 선명한 병원 마크와 함께 아주 낯익은 병원 건물이 보였다.

고경아가 반색을 하며 박수를 쳤다.

“어머! 우리 병원 맞죠?”

그 순간 자막이 떴다.

<복강경 수술의 새 지평>

두 쌍의 눈이 티브이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수술하는 모습을 배경으로 아나운서의 멘트가 이어진 직후, 무뚝뚝한 목소리와 함께 젊은 의사 한 명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경아가 호들갑스러운 환호성을 터트렸다.

“어머! 이준영 선생님하고 지훈 씨네요. 도대체 티브이에 몇 번째 나오는 거예요?”

뉴스치고는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차근차근 복강경의 유용함을 설명하는 김지훈과 이준영 교수의 얼굴도 덩달아 오래 지속됐다.

자막까지 말이다.

“우리 남편 말도 잘하네.”

몇 번 방송 탔다고 예전같이 크게 쑥스럽지는 않았다. 스승과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이 즐겁기만 했다. 우쭐거리는 어깨를 간신히 억눌렀다.

정훈철이 또 하나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은비에 관한 일이 직접적으로 거론된 것은 아니었지만, 소외 계층의 의료보장 문제가 집중적으로 조명됐다. 후원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소개됐다.

“역시 훈철이 형이네. 감사합니다.”

김지훈이 마치 정훈철이 옆에 있는 것처럼 소리쳤다.

학회 발표에 인터뷰까지 한 사실보다 더 기뻐하는 모습에 고경아가 활짝 웃었다.

부부는 한 몸, 어쩌면 더 자랑스러울 수도 있었다.

전화통에 불났다.

고성문, 최문옥 여사를 비롯해 온 가족과 통화를 하며 수다를 떨었다. 정훈철, 한수임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고는 부엌으로 달려갔다.

‘난 몇 마디 하지도 못했네. 그렇게 좋을까?’

절대 서운한 일이 아니었다. 시원한 맥주 한 잔만으로도 충분했다.

카르페 디엠!

이럴 때 찾으라고 있는 말이었다.

행복은 결코 멀리 있지 않았다.

다음 날 점심 무렵, 김지훈이 집을 나섰다.

입원 환자는 거의 없었지만 이준영 교수 환자와 혈관 수술한 환자를 봐야 했다. 손이 어디가 얼마나 부족한지 모르지만, 지적당하는 이유를 빨리 찾아야 했다.

‘일주일 내내 탄 이유가 뭘까?’

방송에 대해서 김지훈은 입도 벙긋하지 않았는데, 함께 회진을 돌던 이혁원과 간호사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들르는 곳마다 힐끗힐끗 눈길을 주며 수군거렸다. 하룻밤 사이에 소문이 쫙 퍼진 모양이었다.

“처음 시도하는 수술이라던데, 정말 대단하지 않아?”

“라파로 잘하신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언제 또 그런 수술을 하셨지? 구미 가서 하셨나?”

“그게 무슨 상관이야. 수술 방 고경아 선생님은 좋겠다. 나도 저런 신랑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듣지도 못했지만, 방송은 방송일 뿐이다.

의국으로 돌아와 고민에 빠진 사이, 당직 전공의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혁원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화면 잘 받으시네요.”

“응? 뉴스 봤어?”

“그럼요. 역시 뭐든 경험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여러 번 방송 타시더니 여유가 넘치세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경험도 신경 써 주시죠. 이왕이면 과감하게. 어떠십니까?”

기승전 라파로?

“내가 아니라 네가 과감하네. 나 올라온 지 이제 일주일밖에 안 됐어, 인마. 숨 좀 돌리자.”

“선생님, 일이 달라진 것도 아닌데 숨은 왜 돌…….”

강한 항의가 치고 들어오려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조성민 때문에 대답이 궁했던 참이었다. 마침 잘됐다는 듯 재빨리 전화를 받은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경아가 아니었다. 어디선가 들은 것 같으면서도 낯선 목소리였다. 찬찬히 생각해 보니 스카우트 제의를 했던 병원 과장이었다.

후배들 앞에서 통화하기 곤란한 내용이 나올 것이다.

후다닥 의국을 나왔다.

거의 말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어휴! 거절할 틈도 안 주시고 끊으시네.’

은근히 신경 쓰였다.

통화를 끝낸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나쁜 일은 아닌데, 기분이 왜 이렇지?’

끝이 아니었다. 또다시 걸려 온 전화에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진충기가 근무하는 H 병원 과장이었다. 아예 병원 근처에서 전화를 했고, 진충기까지 함께 왔다. 직접 보며 상의하자는 말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학회 발표에 이어 방송이 불을 지른 것일까?

이렇게 되면 세 번째 받은 제의다. 규모로는 수위를 다투는 병원에서 모두 연락이 왔다. 지난 일주일 동안 스카우트에 관심조차 두지 않아 솔직히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커피 한잔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듣던 김지훈이 크게 놀랐다. H 병원 과장이 잔잔한 마음에 돌덩이를 던졌다. 조약돌이 아니라 커다란 파도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묵직한 바윗돌이었다.

신설되는 외과 센터 내 복강경 부분 책임자.

복강경 파트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

전임 강사 1년 근무 후 조교수 보장.

조교수 임용 후 2년간 미국 연수 보장.

실적에 따른 과감한 인센티브.

함께 근무할 펠로우 1인 추천권까지.

이거 뭐지?

눈이 팽팽 돌 정도로 어마어마한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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