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학회가 가져온 여파 Ⅱ (1)
김지훈과 막 인사를 나눈 의사는 국내 최고 시설과 규모를 자랑하는 병원 중 한 곳의 과장이었다. 일반외과를 크게 키우기 위해 무리한 채용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런 의사의 눈에 김지훈이 어떻게 보였을지 자명했다.
오늘도 여느 학회 때처럼 휴식 시간마다 발표 내용, 혹은 발표자에 대한 말들이 오고 갔다. 좌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것은 단연 김지훈의 발표였다.
각 병원에서 내로라하는 의사들까지 관심을 보였다. 대부분의 경우가 그러하듯 김지훈 역시 교수인 자신의 지도 속에 이뤄 낸 성과라 생각했다.
그만큼 어려운 수술이자 새로운 시도이며, 첫 시도라는 어마어마한 의미까지 있기에 은근슬쩍 떠보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김지훈의 발표가 끝난 후에도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결국 사정이라는 것이 구미 병원 파견이었고, 3개월 동안 혼자 해낸 수술이라는 말까지 했다. 한 사람이 매일 서울과 구미를 오가며 수술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보다 확실한 대답은 없었다.
거의 경악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인재는 누구나 탐을 낸다.
복강경 수술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실력 있는 의사는 무수히 많지만 새로운 경향을 이끌어 가고, 선도할 능력을 가진 의사는 극소수가 될 수밖에 없다. 모두가 갖춘 능력에 무엇인가 걸출한 면 하나를 더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지훈은 그런 면면을 갖춘 몇 안 되는 의사 중 하나였다. 특히 무한한 발전 가능성까지 내포한 젊은 나이는 거부하기 힘든 매력이었다.
누군가는 접촉해 올 것이라 예상했다. 오랫동안 보아 온 입장에서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외부 시선이 어떨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그 시점이 오늘일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제자의 장래가 달린 일이었기 때문에 깊은 고민이 필요한 때였다. 아무리 무뚝뚝해도 오간 대화 내용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말 했어?”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가슴이 뜨끔거렸다.
“연락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만날 이유가 없어서 별말 안 했습니다. 선생님, 그보다 혹시 부스 살펴보셨습니까? 우리도 라파로 기구에 신경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보니까 새로운 기구들이 많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제자지만 웃긴 놈이다.
방금 전 자신의 장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말을 들었다. 그런 일을 두고 난데없이 기구 타령이라니, 허탈한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관심을 보이는 척하자 기구 얘기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새것이긴 하지만 모니터 화질이 상당히 좋아졌습니다. 그만큼 수술도 편해지지 않을까요? 상황 되면 우리도 쫙 새 걸로 구비하면 안 될까요?”
묵묵부답이다.
김지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비용이 문제겠죠?”
“고민해 보자.”
돌아서던 이준영 교수가 피식 웃고 말았다.
다른 곳에 눈길도 주지 않던 전공의 1년 차 때 모습인지, 아니면 스승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펠로우 2년 차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만큼 여러 면에서 성장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우리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이겠지.’
졸래졸래 뒤따라오는 제자의 등을 두드려 주고 싶었지만 오히려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아무리 품 안에 품고 싶어도 김지훈에게 최선의 길을 마련해 주는 것 또한 스승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먼저 묻기 전에는 말할 놈이 아니지. 지훈아, 우리와 맺은 인연도 중요하지만 네가 후회할 선택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 부담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이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고성문과 송재덕 교수가 다가왔다.
“김 교수, 오늘 발표 잘 들었어. 이 교수, 평일에 휴가 못 주나? 내 사위지만 같이 수술 한번 해 보고 싶어. 케이스만 잘 잡으면 개인 병원에서도 담낭농증까지 가능하지 않을까?”
“고성문 선생님, 나이가 몇인데 무슨 욕심이 그렇게 많으세요? 큰일 납니다, 큰일. 이젠 젊은 의사들한테 넘길 때도 되셨잖아요? 지훈아, 교수야, 평일에는 휴가 없다. 절대 없다. 넌 라파로 대장 해야 되잖아? 라파로 대장.”
“이 사람이! 자기도 욕심을 내면서 무슨 소리야? 간담도 하는 사람을 보고 대장을 하자고 하면 어떻게 해?”
“우리 병원 일입니다, 우리 병원. 라파로 대장이 어디가 어때서요? 병원에선 사위기 전에 펠로우니까, 다른 생각 마시고 식사나 하러 가시죠. 지훈아, 교수야, 밥 먹으러 먹자. 뭐 먹을까? 한식? 중식? 일식? 뭐가 좋니? 뭐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티격태격 말싸움을 벌였다. 무척 자연스럽게 보였다. 평생 서로를 잊지 않고 이어 온 인연의 끈 때문일 것이다.
‘우리도 저렇게 되겠지?’
동기들을 떠올리던 김지훈이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전 빨리 병원 들어가서 인수인계하고 근무 준비해야 합니다. 발표 때문에 하나도 못했습니다.”
“그렇구나. 그래. 내일부터 근무 바로 해야지? 경아도 보고 싶고 말이야. 지금도 눈에 아른거릴 거야. 오래가지 않지만, 네 나이 때는 다 그런 법이다. 그런 법이야.”
“송 교수,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그래? 김 서방, 빨리 가. 이러다 밤새겠다. 이 교수, 가자.”
“아버님,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선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상대는 유수 병원의 과장들이다. 두 장의 명함과 식사 제의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모를 수 없었다.
라파로와 전폭적인 지원까지.
‘그다음에 어떤 말을 하려고 했을까?’
스카우트 제의를 받다니 얼떨떨하면서도 생각이 많아졌다. 스승의 곁을 떠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많은 면에서 다를 새로운 기회도 무시할 수 없었다.
같은 상황이라면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할 테지만 머릿속이 의외로 복잡해졌다. 뿌듯함, 신기함, 흥분과 함께 병원을 옮긴다는 생각만으로도 이유 모를 미안함이 가슴을 눌렀다.
오로지 상상뿐일진대.
이럴 땐 일에 집중해 잊는 것이 좋았다.
고경아와 통화를 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동에 들어서자 다들 반가워했다.
“김지훈 선생님, 내일부터 다시 근무하시는 거죠? 반갑긴 한데, 요새 분위기 좋았으니까 일 너무 늘리지 마세요. 당직 조금만 서세요.”
웃고는 있는데 어째 눈초리에 불안이 넘실넘실 넘쳐흘렀다.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흔든 김지훈이 의국으로 들어갔다. 간담도 파트이자 제자라면 스승의 환자를 반드시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이혁원과 강병옥이 재빨리 차트를 가져왔고, 나종진은 같은 파트도 아닌데 묘한 표정으로 옆에 앉았다. 환자 리스트를 보며 눈가를 찡그리던 송진우가 자세를 바로 했다.
어느 틈엔가 신현수와 이경석도 의국으로 들어왔다. 굳이 일요일 저녁 회진까지 돌지 않아도 되지만, 환자와 자신에 대한 열정이자 의무일 것이다.
세 달 만이라 그런지 무척 새롭게 보였다.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후배들이자 동료였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혁원과 나종진이 눈빛을 교환하며 쓰윽 팔을 잡아끌었다.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목소리가 쫙 깔리는 것이 느낌이 좋지 않았다.
“뭔데? 왜 이래? 팔 놓고 말하자.”
“일단 오늘 발표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그런데 구미에서 성민이에게 라파로를 주셨다고요?”
순간 뜨끔했다.
“응? 어떻게 알았어? 그게, 그러니까…….”
분명 송진우의 입이다. 눈에 강렬한 힘을 담아 째려봤다.
벌게진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마치 서울에서도 복강경 수술 기회를 반드시 주어야 한다는 것처럼 서슬 퍼런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저희도 이제 4년 차 되고, 선생님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도 되죠? 만일 차별하시면 머리띠 두르고 으쌰으쌰 한번 할 겁니다.”
거의 협박성 발언이다.
감히 전공의가 곧 전임이 될 김지훈을 협박하다니 하극상이 분명했다.
천인공노할 사태를 어찌 해결할지 고민하던 김지훈이 갑자기 씨익 웃었다.
배우고자 하는 후배들의 열망이 뜨겁게 다가왔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을 어지럽혔던 생각이 싹 사라졌다. 절대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스승님이 계시고 이 자식들도 있는데, 내가 가긴 어딜 가? 너희들이 있어야 최고의 써전도 될 수 있을 거야. 에휴! 사람 마음 참 간사하네.’
“고맙다.”
뜬금없는 말에 이혁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신다는 거죠?”
전공의들의 귀가 활짝 열렸다.
아무 말 없이 미소를 머금은 김지훈이 차트를 가리켰다. 무언은 곧 긍정이다. 하나하나 차트를 넘기는 이혁원의 손에 힘이 넘쳤다. 나종진과 송진우는 소리 없는 만세를 불렀다.
수북하게 쌓인 차트를 모두 확인하고 회진을 돌았다. 갑자기 나타난 새 얼굴에 환자들이 의아한 눈초리를 보냈지만, 늘 있는 일이었다. 환한 웃음과 친절함은 이내 경계를 허물 것이다.
“혁원아, 내일 수술 뭐 있어?”
“담낭 두 건 하고 탈장 하나 있습니다.”
“혈관 수술은 주로 누가 들어가?”
“반반씩 번갈아 들어가십니다.”
필요한 정보를 얻고 집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세 달에 불과한 공백이었지만 얻은 것만큼 잃은 것이 있을 것이다.
새 마음 새 뜻으로 서울 병원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그 덕인지 잠시나마 머릿속을 어지럽혔던 스카우트 제의도 기분 좋게 느껴졌다. 능력이 있기에 제의를 받았고, 그렇다면 즐겨도 좋을 것이다.
단, 여기저기 떠벌릴 일이 아니기에 고경아에게만 살짝 언질을 주었다.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좋아 죽었다.
“구체적인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말하면 안 돼요.”
“내가 애예요? 걱정 말아요. 호호호! 너무 좋아.”
입단속 단단히 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면서도 우쭐거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
서울 병원 근무가 시작됐다. 변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화목 진료에 월수금 수술, 돌아가면서 당직 서면 한 주가 금방 지날 것이다.
예전 수준으로 돌아갈 때까지 여느 때처럼 스승과 교수들의 수술을 참관하거나, 퍼스트 기회를 엿보면 된다.
단, 몇몇 신경 써야 할 것이 있었다.
첫 번째는 역시 고경아였다.
수술 방 간호사들 모두 임신 사실을 알았지만, 예외나 특혜는 있을 수 없었다. 많은 간호사들이 똑같은 과정을 겪었고, 인력 수급상 출산휴가 때까지 근무 형태를 바꿔 주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아무 변화도 없다는 사실이 김지훈에겐 도리어 변화라면 변화였다. 지금까지 병원에서는 직장 동료로 대하려 애써 왔는데, 조금만 힘들어 보여도 아내로 보였다.
‘그만두게 할까? 아니지. 경아 씨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맞겠지. 그래도 저러다 덜컥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어후! 살살 해요.’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간호과 일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안타까움에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적당히 움직여야 건강한 아이 낳는대요. 내 걱정 말고 지훈 씨 건강에만 신경 써요. 구미 3개월에 살이 쪽 빠졌네. 우리 남편 뭘 먹여야 살이 다시 찔까?”
오히려 김지훈의 뺨을 만지며 걱정이 태산이었다.
아내란 이런 존재일까?
까닭 없는 한숨만 터졌다.
할 수 있는 일은 외조 열심히 하는 것뿐이다. 아이를 가졌을 때 생각한 좋은 남편이 해야 할 일을 되새겼다. 엄청난 중압감에 까닭 있는 한숨이 이어졌다.
인정받는 직장인.
훌륭한 남편.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고경아도 직장인이자 아내다.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그동안 내 생각만 했네.’
앞으로 잘할 일이었다.
아니, 지금부터 잘해야 한다.
꿈지럭꿈지럭 설거지를 마친 김지훈이 칼을 잡았다. 칼질, 가위질, 집게질 하면 외과 의사다. 깔끔하게 깎인 사과 한 개가 접시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맛있게 한입 베어 먹는 고경아를 보던 김지훈이 콧등을 문질렀다.
‘내일도 진료할 환자가 얼마 없는데 스승님 수술 참관이나 해야겠다. 혁원이하고 종진이에게 언제 라파로 맛을 보여 줄까? 진우 그 자식도 눈빛이 심상치 않았어. 어이구! 병옥이도 있구나.’
퇴근 후에도 병원을 생각하는 이놈의 직업병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고경아와 눈을 마주치는 동안에도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두 번째는 박승준 교수였다.
이경석의 대장 수술 일부를 참관하고 목요일에는 직장암 수술까지 함께했다. 스테이플을 간신히 사용할 정도로 위치가 좋지 않았지만 호흡이 무척 잘 맞았다.
한껏 고조된 분위기 속에 수술을 마치고 웃는 모습에서 편안함과 여유를 보았다. 지난날 뭔가에 쫓기는 것 같은 눈빛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송재덕 교수님이 아예 안 보이시는구나. 하긴 분위기가 이렇게 좋은데 신경 쓸 일이 없으시겠지.’
수술이 끝난 후, 커피 한잔하자는 말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했다. 박승준 교수 스스로 알게 모르게 쌓았던 벽을 완전히 허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교수, 전에 한 말 잊지 않았지?”
“조기 대장암이요?”
“그래. 이경석 선생, 내과에서 별말 없었어? 라파로 쪽은 이경석 선생이나 김 교수가 담당하겠지만 손이 근질거린다. 시간 나는 대로 나도 배워야겠어.”
복강경 수술에 아쉬움을 보이면서도 목소리에 활기가 가득했다. 대장 수술을 독점하려 했던 일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였다.
“지 교수, 신현수 선생, 위장 쪽은 예정 없어?”
지동훈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기구 문제가 커서 섣불리 시도할 수가 없습니다. 김 교수, 신현수 선생에게 의료기 얘기했다며? 도움이 될까?”
“일단 만나 보고 어떤 기구가 있는지, 필요한 기구를 구할 수 있는지 알아봐야죠.”
“김 교수, 잡음 생길 일만 조심하면 되니까 연락해 봐.”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한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