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87화 (787/1,329)

10화. 학회가 가져온 여파 (2)

입술을 오물거리며 코를 만졌다.

‘정말 면목 없지만 은비까지 말하자.’

김지훈이 슬쩍 따라붙었다.

“형님, 구미에 송철성 환자가 있는데 은비라는 딸이 있습니다. 사정이 굉장히 딱해서 마음이 아픕니다.”

짧게 이어진 간략한 설명에도 정훈철이 무슨 말인지 다 이해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런저런 부탁 많이 들었을 것이다.

“휴우! 사정 딱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네. 알았어. 경북 지역은 내 소관이 아니라서 확실하게 말 못하지만 힘써 볼게. 도울 수 있으면 좋지.”

“매번 부탁만 드려서 죄송합니다.”

“은비를 대놓고 후원하진 못할 거야. 자존심 문제도 있고, 의외로 주변 시선이 안 좋아질 수도 있거든. 부모 잘못 만나 돈이 다인 줄 아는 아이도 있어. 어쨌든 죄송하면 자주 연락해. 나 성질나면 국물도 없다.”

“형님! 열심히 연락하겠습니다. 이왕이면 의료 보장의 문제점도 다뤄 주시면 안 될까요?”

정훈철이 입술을 삐죽였다.

“우리 김 교수, 수술만 하는 게 아니었네. 간만에 보면서 요구 사항은 또 왜 이렇게 많아?”

굽실굽실, 안절부절, 사정사정.

이준영 교수가 힐끗 시선을 주며 피식 웃었다. 언뜻 들려온 은비라는 소리에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학회에 참석한 의사들의 시선과 관심을 한 몸에 받은 김지훈이 자신의 제자라는 사실보다 더 흐뭇한 모양이었다.

‘그 마음 잊지 말고 이렇게만 가자. 이번 인터뷰도 네게 큰 도움이 될 거야. 대신 환자 보느라 힘은 훨씬 더 들겠지. 경아한테 원만 듣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생각과는 달리 뜬금없는 말이 나왔다.

“진충기 선생 잘 봐 둬. 연수 다녀와서 작년부터 근무 시작했는데, H 병원에서 상당히 기대하는 선생이야. 네게 많은 도움이 될 거다.”

둘이 대화하는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아까 잠깐 만났는데 대단한 사람이란 인상을 받았습니다. 라파로만이 아니라 다른 수술에서도 배울 점이 많을 것 같습니다.”

고분고분한 대답이었다. 이준영 교수의 입가가 살짝 움직였다.

병원 안이든 밖이든 의사들끼리 경쟁은 상당히 치열하다. 자존심, 명예, 명성, 대우 등등 모든 것이 경쟁 요인이다. 때론 경쟁이 지나쳐 반목과 질시로 변질되는 경우도 많았다.

더구나 불과 2~3살 정도 많은 진충기였다. 비슷한 연배 간에는 알력과 견제가 흔히 보이는데, 김지훈은 그런 내색조차 없었다.

실력 있는 의사는 적이 많은 법이다.

오늘 발표를 기화로 집중적인 관심 이상의 견제를 받을 수 있었다. 심한 경우 조그만 꼬투리라도 잡으면 폄하하고 비난하기 바쁠지도 몰랐다.

환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의사도 마찬가지다.

은비라는 아이를 개인적으로 챙긴 일 역시 누군가의 눈에는 비난거리가 될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이유가 붙어도 세상인심은 의외로 정의롭지 못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모든 이유로 겸손함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김지훈이 지금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기우에 불과할 것이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오늘 발표 잘했다. 마음에 든다.”

스승의 칭찬은 언제나 김지훈을 춤추게 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뷔페 음식이 맛있었고, 그 덕에 식사 자리가 더욱 화기애애했다.

무슨 말이 오가는지 송재덕 교수와 고성문이 크게 웃었고, 이준영 교수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도 유쾌한 분위기가 따로 자리 잡은 펠로우와 전공의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이경석이 김지훈을 보며 피식 웃었다.

“오늘 지훈이 네 덕에 완전히 잔칫집이다.”

“뭐가 내 덕이에요? 한자리에 모이시면 항상 즐거운 분들이잖아요. 현수야, 불고기 많이 퍼 왔네.”

포크를 들이밀고 불고기를 콕 찍었다. 그 순간 신현수의 눈가가 심하게 찌그러졌다.

‘설마 불고기 한 점 먹었다고?’

상당히 심각해 보이는 표정에 김지훈이 채 씹지도 못하고 불고기를 덩어리째 꿀꺽 삼켰다.

신현수가 얼굴을 펴지 못했다. 오늘 발표와 반응을 생각하면 속이 쓰릴 지경이었다. 최고의 라이벌이 한 발, 아니 몇 발 앞섰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예전이었으면 자존심이 상해 몸부림쳤을 테지만, 지금은 강렬한 투지가 그 자리를 메웠다.

‘지동훈 선생님하고 밤을 새서라도 더 많이 고민해야 돼. 지금처럼 가다간 라이벌이 아니라 쫓아가기 바쁠 거야. 조기 대장암에서 한 방법을 위암에서도 응용할 수 있을까? 진충기 선생도 대단한 사람이네.’

불고기가 아닌가 보다.

밥 먹다 말고 고민에 빠진 신현수를 보던 김지훈이 부지런히 포크를 놀렸다. 어느새 접시가 깨끗해졌고, 김지훈은 배를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눈초리가 좋을 수 없다.

“안 먹는 것 같아서 대신 먹었는데, 떠다 줄까?”

“됐어. 배불러.”

“그래. 평소 네 양보다 많이 푼 것 같더라. 참! 현수야, 아침에 대흥 메디칼이란 회사 대표를 우연히 만났어. 라파로 기구 전문이라는데, 같이 한번 만나 볼래?”

“기구상을?”

신현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말 들어 보니까 최신 기구를 취급한다네. 위장관 쪽이 특히 기구 한계가 크잖아. 기구만 있으면 위암이 문제겠어? 경석이 형, 형도 같이 만나죠.”

“좋지. 언제?”

“날은 안 잡았는데, 곧 찾아올 것 같아요. 아니면 지금 찾아가서 날 잡을까요? 현수야, 어때?”

복강경에 관심이 있는 의사는 누구나 느끼는 한계였다. 위장관 쪽은 특히 심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 고민하던 신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지훈이 곧바로 일어나더니, 잠시 후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명함 한 장이 눈앞에서 흔들렸다.

“우리 셋이 모두 만나야 해서, 당직 스케줄 확인하고 연락한다고 했어. 야! 시간 되면 가서 기구 좀 봐. 반짝반짝한 게 감촉도 좋고, 손에 착착 감겨서 정말 욕심난다.”

잠자코 듣기만 하던 이혁원이 갸우뚱거렸다.

“선생님, 이렇게 되면 세부 전공이 어떻게 되시는 거예요? 간담도가 아니라 라파로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너 지금 농담하는 거지?”

“뭐, 그렇긴 한데 파트를 안 가리시잖아요.”

김지훈의 눈가가 험악해졌다.

“이 자식이 큰일 날 소리 하고 있네. 우리 신현수 선생하고 이경석 선생님한테 맞아 죽을 일 있어? 파트 구분이 없는 구미라서 가능했던 거야.”

“그럼 똑같은 케이스가 있어도 안 하실 거예요?”

“당연하지. 조기 대장암이면 이경석 선생님이 하고, 장 폐쇄면 신현수 선생이 하는 게 맞지. 다 같이 함께 가는 게 최선이고, 난 죽으나 사나 간담도야. 엉뚱한 소리 하지 마.”

‘다 같이 함께 가자고?’

가벼운 말처럼 들렸지만 신현수와 이경석에겐 의외로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써전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결국 수술 실력이다. 복강경 수술에 관한 한 이준영 교수만이 아니라 수많은 의사들에게 확실하게 인정받은 김지훈이었다.

파트를 가리지 않고 자신이 하겠다고 고집 부리면 막을 도리가 없었다.

솔직히 고집을 부리지 않아도 배워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김지훈은 욕심조차 내지 않았다.

아니다. 욕심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보다도 수술 욕심이 많은 김지훈이다.

이유는 단 하나일 것이다.

최고의 써전과 최고의 수술 팀!

함께 가야만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김지훈은 잊지 않고 있었다. 이젠 아예 머릿속에 박힌 지도 몰랐다.

은연중 전해진 생각에 다들 잠시 말을 잃었다.

말하느라 먹느라, 내내 입을 쉬지 못했다. 심한 갈증에 물 컵을 단번에 비운 김지훈이 갑자기 손가락을 탁 튕겼다. 신현수와 이경석을 강렬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신현수, 3개월 동안 혈관 수술 정말 많이 했지? 경석이 형, 주임 교수 자리까지 걸렸는데 우리가 비겁하게 승부를 낼 수는 없잖아요? 신기동 선생님 연수 떠나시는 날까지 혈관은 내가 전담. 오케이?”

순간 피식 웃음이 터졌다.

다들 혈관 수술 욕심이 넘쳤다. 욕심 때문에 경쟁했고, 경쟁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주임 교수를 양보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이미 투지가 치솟을 대로 치솟은 신현수의 눈가가 더욱 냉정해졌다.

“신기동 선생님 생각이 있으시겠지. 비겁해도 난 양보 못한다. 전체로 따지면 네 경험이 더 많아.”

“나도 마찬가지야. 대장암을 건드린 놈이 혈관까지 양보하라고? 어림도 없지.”

말도 못 꺼낼 정도로 단호한 반응이었다. 김지훈이 푹 고개를 숙이며 부르르 떨었다.

‘제길! 타이밍이 안 좋았어. 미련하게 학회 발표 날 그런 말을 하면 안 됐지. 어이구! 바보가 따로 없네.’

이미 기차 떠났다.

혹 떼려다 혹 붙인 건지도 몰랐다. 그것도 두 개를 양턱에 주렁주렁 확실하게.

어느덧 마지막 발표가 끝났다. 한껏 고조됐던 열띤 분위기가 그간 소원했던 사람들로 옮겨졌다. 저마다 반가운 사람들을 찾아 대화의 꽃을 피웠다. 그중에서도 유독 이목을 집중시키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김지훈이었다.

발표 내내 받았던 관심이 조금도 식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붙잡혀 인사하기 바빴다. 처음 보는 의사들마저 소속을 밝히며 친근함을 표시할 정도였다.

“오늘 발표 인상 깊게 잘 들었어요. 김지훈 선생이 펠로우라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네요. 기회 되면 자주 봅시다.”

인사를 너무 많이 해 목이 뻐근할 정도였다.

반면 인맥이 넓지 않은 펠로우나 전공의는 슬슬 눈치를 보며 빠져나갈 궁리를 할 때이기도 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로 안면을 트고자 하는 사람 역시 적지 않았다.

진땀을 빼긴 신현수도 자의 반 타의 반 다르지 않았다. 재단 이사장 아들이라는 입장에 대선배들과도 자리를 가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송재덕 교수는 이경석, 박승준 교수, 지동훈 교수를 여기저기 인사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같은 식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박 교수하고 지 교수 덕에 내가 아주 든든합니다. 허리가 탄탄해진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 이경석 선생도 잘하고 걱정이 없어요, 걱정이.”

과도한 관심과 집중은 탈이 나기 마련이다. 주변을 살핀 이혁민 교수가 등을 떠밀었다.

“하하하! 다음에 기회 되면 자리를 또 갖기로 하죠. 김지훈, 신현수, 이경석, 오늘 저녁은 각자 집에서 하자. 늦었다. 빨리들 가라.”

일요일인 관계로 식사 자리를 잡지 않았다. 그러나 고성문과 이준영 교수가 있는 한 김지훈은 꼼짝없이 발목이 잡혔다. 요령껏 행동하며 눈치껏 하나둘 집으로 보내다 보니 어느새 달랑 혼자 남았다.

커피 한 잔 홀짝거리며 발표 내용이 담긴 책자를 뒤적이던 김지훈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전번 학회에서 처음 본 국내 유수 병원 중 한 곳의 과장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김지훈 선생, 나 기억하지?”

“예, 선생님.”

잠시 안부를 묻는가 싶더니 바로 본론을 꺼냈다.

“다행이네. 다른 건 아니고 일간 시간 되면 얼굴 한번 볼 수 있을까? 상의할 일이 있어서 그래. 내 전화번호니까 연락해요. 꼭 해야 돼.”

명함을 건네받은 김지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말로만 듣던 스카우트를 제의하시는 건가?’

안면만 있을 뿐 특별한 인연이 없는 데다 갑작스러운 말에 대답이 궁했다. 웃음으로 대충 얼버무리고 곰곰이 생각에 잠기려는 순간, 또 다른 종합 병원 과장이 다가왔다.

여러 번 본 덕에 낯이 더 익었다.

‘보면 볼수록 탐이 나. 이준영 교수가 다소 과장을 했다고 쳐도, 이 정도 실력 있는 의사 정말 찾기 힘들지. 병원이나 내게 큰 득이 될 거야. 품성도 괜찮다고 하니까 우리 병원 교수들하고도 별문제 없겠고, 때마침 확대 개편까지 맞물려서 아주 좋은 기회가 되겠어. 다른 병원들도 라파로 때문에 움직임이 많던데,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겠군.’

“김지훈 선생, 발표 잘 들었어. 내가 예전부터 눈여겨봤는데 대단하네. 혹시 오늘 저녁에 특별한 약속 있나? 없으면 식사나 같이했으면 하는데, 어때?”

어느 분야든 인재를 잡는 것은 쉽지 않다.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선점하지 못하면 헛물만 켤 수 있다.

더구나 이준영 교수가 김지훈을 특별하게 여긴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현재 근무하는 병원 의사들과도 매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적극적이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의 파격적인 조건도 마다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전공의 때부터 눈여겨본 김지훈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수술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확신할 수 있었다.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자네, 올해 펠로우 마치지? 겸사겸사 라파로하고 관련돼서 진지하게 할 말이 있어. 내가 아주 좋은 기회를 줄 수 있거든. 서로 조건만 맞으면 전폭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을 생각이야.”

보다 구체적인 스카우트 제의였다. 그것도 같은 자리에서 두 번째 제의를 받았다.

김지훈이 난처함을 금하지 못했다.

머뭇거리며 입을 열지 않자 여유 있게 생각하라면서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지금 대답하라는 소리가 아니야. 그럴 수도 없는 일이고. 다만 내가 문을 활짝 열고 있다는 사실만 알아주면 돼. 나 아무한테나 이런 기회 주지 않아. 김지훈 선생에게 어떤 선택이 가장 유리한지만 생각해. 능력에 맞는 대우를 받아야지. 의외로 간단한 문제야.”

듣기 힘든 칭찬까지 뒤섞였다. 일단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헝클어졌다.

그때 이준영 교수가 보였고, 순간 입이 탁 터졌다. 김지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말씀 고맙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저녁 약속이 있습니다. 이준영 선생님께서 기다리셔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래? 아쉽네. 우리 일간 얼굴 봅시다.”

대선배들과의 연이은 접촉이 뒤꽁무니에 달라붙는지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이준영 교수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절대 단순한 접촉이 아니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김지훈 스스로 판단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능사는 아니었다. 반대로 김지훈의 장래이기에 기다려야 할 수도 있었다.

스승이기에 머릿속이 더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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