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85화 (785/1,329)

9화. 세상은 넓다 (2)

세상 보는 눈이 좁으면 발전도 더딘 법이다.

눈앞에 닥친 일에만 매몰되면 반드시 습득해야 할 지식과 정보조차 늦게 접할 수 있다.

각자 쌓은 경험과 지식의 정수를 발표하는 학회는 이를 만회할 중요한 자리였다.

박수 소리가 연이어지며 분위기가 한껏 고조됐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발표에 몰입했던 김지훈이 흠칫 놀라 송진우에게 눈짓을 했다.

어느새 11시가 넘었다. 이제 30분 후면 발표다.

발표당 대개 3~40분 정도 시간이 주어지는데, 한 시간이나 배정됐다. 이준영 교수의 요구가 있었겠지만 학회 임원들이 동의했다는 것은 그만큼 관심 사안이라는 말이었다.

밖으로 나와 예행연습을 하며 송진우와 호흡을 다시 한 번 맞췄다. 서서히 긴장이 치솟기 시작했다. 발표도 하기 전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못 궁금했다.

예상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막 정리하는 순간 밝은 불빛이 비쳤다. 강한 열기까지 느껴져 눈가를 찡그리며 고개를 돌리던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카메라맨을 대동한 정훈철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진짜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형님! 정말 오신 거예요?”

“휴우! 길이 막혀서 하마터면 늦을 뻔했네. 김 교수, 서울 올라오자마자 거창하게 시작한다. 방송 결정됐으니까 발표 잘해. 아 참! 점심 식사하기 전에 이준영 교수님하고 인터뷰 잡아 놨으니까 어디 가지 마.”

“이준영 선생님이 인터뷰를 하신다고요?”

“좋다고 하시던데, 왜? 스승님이 결정하면 제자는 당연히 따라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보자는 말씀을 하셨구나.’

발표 끝나면 당연히 볼 텐데 굳이 보자고 말한 이유가 인터뷰일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 명예나 명성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데 무슨 영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스승에 정훈철까지 부담 백배다.

짝짝짝짝짝!

박수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렸다. 앞선 발표가 끝난 모양이었다.

각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소리로 주변이 어수선해졌다. 칭찬과 회의적인 시각, 심각한 표정과 별것 아니라는 표정이 뒤섞이는 가운데 5분간의 짧은 휴식 시간이 끝났다.

훅 숨을 내뱉은 김지훈이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수많은 고민과 어려움 속에 이룬 성과를 발표할 시간이 다가왔다.

카메라 불빛에 어깨가 더욱 무거워졌고, 그 탓인지 참석자들의 시선마저 달라졌다.

슬라이드 조명과 카메라 불빛 사이로 수많은 의사들의 얼굴이 보였다. 미리 배포한 발표지를 보며 저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좌장으로서 반대편 단상에 앉은 이준영 교수가 김지훈과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오전 마지막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김지훈 선생, 시작하세요.”

나직한 헛기침으로 긴장을 풀었다.

“안녕하십니까? S 병원에서 펠로우로 근무하고 있는 김지훈입니다. 오늘 발표의 주제는 라파로의 확장 가능성입니다. 몇 가지 질환의 케이스를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케이스는 충수돌기 주변 농양입니다.”

이준영 교수의 수술까지 가장 케이스가 많다.

복강경을 도입한 다른 병원에서도 이미 시도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정신 바짝 차리고 더욱 확실하게 발표해야 할 질환이었다.

주요 수술 장면을 찍은 슬라이드가 돌아갔다. 동시에 본격적인 방송 촬영이 시작됐다.

찰칵! 찰칵!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같은 질환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경우들을 설명했다. 예상외로 많은 케이스 수에 참석자들이 눈가를 좁혔다.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놀라움 사이로 묘한 불신의 기운이 감돌았다.

‘설마 펠로우 2년 차가 저 수술을 다 하진 않았겠지? 몇 개나 직접 했는지 모르지만 병원 케이스를 모두 몰아 준 것 같네. 이준영 교수가 김지훈을 키우려고 작정한 모양이야.’

일정 지위 이상에 오른 의사들 중 많은 이들이 후배나 제자의 성과를 공유한다. 때론 비난받아야 마땅한 일까지 벌어지지만, 반대로 확실하게 밀어주기도 한다.

의사 개개인의 위상에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가 맞물리는 곳이 대학 병원이기 때문이었다.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기에 전적으로 잘못된 추측은 아니었다.

분위기가 조금은 묘해졌다.

찜찜한 느낌이 다가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발표에 전념했다. 참석자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알 수도 없고, 굳이 직접 수술했다고 강조할 일도 아니었다.

“두 번째 케이스는 정복되지 않은 탈장과 장 폐쇄 환자에게 시행한 수술입니다. 장 조직이 약해 우려를 많이 했지만, 기구 조작에 숙달됐다면 장 손상 없이 끝낼 수 있는 가능성이 적지 않습니다. 장 봉합 역시 경험에 달린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 슬라이드.”

찰칵! 찰칵!

수술 장면이 벽 한 면을 가득 채웠다.

모든 참석자들이 같은 관심을 보일 수 없는 일이다. 대세로 떠오르는 수술법이라고 해도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저기에서 간간이 들리던 웅성거림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집중하고 있었다.

박리하는 과정과 봉합하는 과정을 설명하자 어디선가 의아함이 섞인 탄성이 터졌다. 직접 수술한 의사가 아니고는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퍼스트가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인데, 설마 김지훈이 이 수술을 다 했단 말이야? 뛰어나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럴 수가 있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던 의사들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졌다.

이준영 교수가 수술했다면 경쟁 관계에 선 의사들 사이에서 이미 말이 돌았을 것이다.

분명 듣지 못했다.

자신들도 모르게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역시 누가 집도했는지가 관건이라는 표정이었다.

“세 번째 케이스는 담낭농증입니다. 환자 상태가 상당히 나빴고, 개복이 불가능해 라파로로 시행했습니다. 계획된 수술이 아니었기 때문에 임기응변으로 대처했습니다.”

갑자기 책자 넘기는 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불과 며칠 전에 한 수술이라 미처 관련 내용을 학회에 넘기지 못했다. 그 탓에 발표지에 실리지 않은 데다 다른 질환도 아닌 담낭농증이었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시선이 슬라이드 화면에 집중됐다. 사진만으로도 담낭의 염증이 살벌하게 보였다.

담낭 동맥부터 역으로 잡아가는 과정이 이어지자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일반외과 의사라면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운 과정인지 확실하게 알기 때문이었다.

“간 효소 수치가 각각 천을 넘었고, 혈소판은 5만 이하였습니다. 응고인자까지 비정상이었기 때문에 출혈이 적지 않았습니다. 무사히 수술을 마쳤고 다행히 환자도 회복을 보였지만, 담낭농증은 라파로 여부를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질환으로 생각됩니다.”

담도에 T-tube를 삽입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살짝 벌어진 틈을 막는 마지막 봉합 장면이 끝날 때까지 고개를 길게 뺀 채 눈을 떼지 못했다.

모두들 써전이기에 수술 적용 질환만이 아니라 기술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둘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누군가는 콧등을 잔뜩 찡그렸다.

기구 조작이 대단히 능숙하지 않으면 결코 진행할 수 없는 수술이었다. 자신들의 경험을 대입하면서 의문이 더욱 증폭됐다.

‘설마 장 폐쇄와 담낭농증을 모두 혼자 한 거야?’

‘이준영 교수 손이 분명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펠로우 2년 차 혼자 할 수 있는 능력은 없어.’

놀랍다는, 혹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에 설마라는 생각까지 뒤엉켰다.

또 다른 의문이 뒤따랐다. 과연 발표된 케이스를 할 수 있는지였다.

다른 의사의 경험을 자신의 수술에 고스란히 적용하려면 그만한 실력과 손이 따라야 한다.

발표된 사례들을 생각하며 김지훈, 혹은 이준영 교수와 자신의 손을 비교하는 참석자들의 얼굴이 굳어 갔다.

담낭농증 슬라이드가 다 돌아갔다.

김지훈이 다음 슬라이드로 넘기려던 송진우에게 중단하라는 손짓을 하며 잠시 멈칫거렸다.

송진우와 나눴던 말이 떠올랐다.

자랑하기 위해, 명예나 명성을 얻기 위해 발표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학회라는 사실을 배제하고 자신의 실수마저 솔직하게 말할 수 있어야 했다.

결국 모든 써전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수술 중 한 가지 큰 실수를 했습니다.”

난데없는 말에 참석자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약간은 과도한 반응에 김지훈이 슬쩍 숨을 내뱉었다.

실수로 단정 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까지 가감 없이 자세하게 설명했다.

“간과하기 쉬운 부분조차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실수에도 불구하고 회복을 보인 환자에게 고마울 뿐입니다.”

갑자기 사방이 소란스러워졌다. 자신의 실수라는 말이 생각지도 못한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실수를 인정하는 것 자체가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이었고, 득이 되는 일도 아니었다. 어쩌면 견제와 공격의 빌미가 될 수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 이면에 숨은 의미가 일종의 충격을 주었다.

김지훈이 집도를 했단 말이기 때문이었다.

생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괜히 말했나? 아니지. 내 실수를 아는 것이 누군가를 살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야.’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누군가는 과욕이었다고 비웃을 수 있었다. 어차피 각오하고 말했다. 이준영 교수의 입가에 걸린 미소만으로 충분했다.

‘학회에서도 실수라고 여긴 부분을 말할 줄 몰랐네. 녀석! 번번이 날 놀라게 하는구나. 고맙다.’

입술을 오므리며 눈가를 찡그리던 김지훈이 어깨를 흔들며 다음 케이스에 집중했다.

마지막 케이스만 남았다. 오늘 발표의 하이라이트다.

참석자들의 눈이 번쩍였다.

학회 발표지에는 이론적 토대와 경과 등의 개요만 실리기에 어떤 식으로 수술했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기 대장암을 개복이 아닌 복강경으로 동일하게 수술했다는 사실 자체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발표장 분위기까지 확연하게 달라졌다.

‘설마 내가 처음 시도한 수술인가? 반 개복이나 다름없는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은근한 기대 속에 긴장과 불안이 느껴졌다.

김지훈이 훅 숨을 내뱉었다.

“마지막 케이스는 대장 용종의 점막 하부를 침범한 조기 대장암 수술입니다. 아시다시피 대장과 대장을 연결할 수 있는 기구가 없기 때문에 개복을 병행했습니다. 슬라이드 보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슬라이드가 돌아가는 순간 회의실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집도의가 누구든 어떤 식으로, 어떻게 수술했는지 생생한 경험을 원하고 있었다.

“다음 슬라이드.”

찰칵! 찰칵!

김지훈의 침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장 많은 슬라이드가 돌아갔다.

에스 결장 동맥 결찰과 장간막 박리 장면에서는 마치 자신들이 수술하는 것처럼 숨을 죽였다.

드디어 가장 관심이 집중된 부분이 나왔다.

대장과 대장을 연결하는 과정이었다.

6센티미터 정도 배를 열고 대장을 연결하는 과정이 나오자 여기저기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가 터졌다. 간단한 것 같지만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이었다.

허탈한 듯 들려오던 소리도 잠시, 참석자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생각의 차이, 실력의 차이가 여실하게 느껴진 것이다.

저렇게 간단한 방법을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라파로로 장간막 절제까지?

내 수준에서 시도할 수 있을까?

설마 이 수술도 김지훈 혼자 한 것은 아니겠지?

수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단 한 케이스기 때문에 결과를 확신할 수 없습니다만 회복이 상당히 빨라 입원 기간은 대략 3~4일 정도 단축됐고, 환자가 느끼는 통증 역시 확연하게 감소했습니다. 조기 위암과 더불어 조기 대장암에서도 유의한 수술법으로 고려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상입니다.”

팍! 팍! 팍!

전등불이 켜지며 회의실을 환하게 밝혔다.

일단 발표가 끝나면 뜨거운 박수부터 터져 나와야 하는데 조용하기만 했다. 왕성한 활동을 하는 의사들은 심각했고, 대선배라 할 수 있는 의사들은 눈가를 좁힌 채 김지훈을 응시하고 있었다.

김지훈의 얼굴이 약간은 상기됐다.

‘후우! 별문제 없이 잘 발표한 것 같은데 반응이 왜 이렇지? 무리한 수술이었다는 말인가?’

발표 내내 슬라이드에만 집중하며 긴장을 풀지 않았다.

첫 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대단한 환호와 뜨거운 호응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적이 감돌 정도로 고요한 회의실 분위기에 왠지 등짝이 서늘해졌다.

여전히 조용했다.

‘이 분위기는 뭐지?’

송진우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잠시 분위기를 본 이준영 교수가 마이크를 당겼다. 불안할 정도로 의외의 반응이었지만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도리어 당연하다는 것 같았다.

‘지훈아, 불안해할 것 없다. 생각하지도 못한 수술을 봤기 때문이야. 나도 네 리포트를 봤을 때 그랬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좌장으로서 먼저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담낭농증 수술 시 간에 연결된 조직이 상당히 많이 남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염증 조직을 그 정도로 남겼는데, 라파로로 수술하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까? 송진우 선생, 그 부분 슬라이드 다시 보여 주세요.”

어제 하지 못한 질문을 바로 던졌다.

혹여 있을지 모를 제자의 곤란함을 걱정하기보다 충분히 대답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었다. 성격이 원래 그렇기도 했지만 눈동자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역시 남다른 스승이다.

김지훈은 이준영 교수의 제자다. 끊임없는 불길에 단련될 대로 단련됐다.

전공의 4년과 펠로우 2년을 날로 보내지도 않았다.

이 정도 질문에 대처하지 못한다면 제자 자리를 스스로 내놓아야 할 것이다. 스승의 무뚝뚝하면서도 날카로운 질문에 불안함마저 사라졌다.

“담낭농증 수술은 어쩔 수 없이 시행했기 때문에 예외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확실하게 대처하지 못한 점 역시 인정합니다. 단, 기술적 토대를 충분히 쌓고 신중을 기한다면 개복과 다름없는 결과를 보일 것으로 확신합니다.”

대답을 하는 순간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슬쩍 입가를 만 이준영 교수의 눈에서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인지 알아챈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며 가공할 화력에 대응할 준비를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학회장에서 스승과 제자의 싸움 아닌 싸움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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