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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784화 (784/1,329)

9화. 세상은 넓다 (1)

김지훈이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스승에겐 평생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면이 있다. 환자와 제자의 교육에 관한 한 적절한 선이나 타협이 없다는 점이었다.

준비할 시간 부족했다고 핑계 대지 말고 단단히 대비해야 했다.

리포트를 다시 읽고 슬라이드까지 확인한 이준영 교수가 묵직한 입을 열었다.

‘그사이 담낭농증까지 라파로로 했어? 볼 때마다 날 놀라게 하는구나.’

“환자는 어때?”

“다행히 회복세에 들어섰습니다만, 간염에 전신 상태까지 워낙 불량해 아직은 지켜봐야 할 상황입니다.”

‘라파로로 끝낸 것만 해도 다행이야. 네 한계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눈에 보이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시작이다.

이준영 교수의 눈빛이 변했다.

“개복보다 시간이 훨씬 더 걸릴 수밖에 없는 라파로를 선택한 후 도리어 시간에 중점을 둔 이유가 뭐야?”

“동맥 쪽부터 잡고 담낭을 제거한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해? 더 위험한 방법 아니었어?”

“다른 환자의 경우에도 이점이 있을 것 같아?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야?”

태울 때는 참 말도 길게 하는 스승이었다.

시간이 촉박했고, 은비와 송철성 환자를 보느라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했다. 말끝을 흐리거나 조금이라도 더듬거리면 그대로 불길이 쏟아졌다.

역시 스승이다.

회의실이 순식간에 활활활 타올랐다.

빠지직!

석쇠 위에서 잘 구워진 꽁치가 따로 없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얼굴 벌게진 송진우를 앞에 두고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열의를 갖고 학회에 참석하는 의사는 결코 만만치 않은 실력자들이다. 온몸이 지글지글 녹아내려도 지금 완벽하게 준비해야 했다.

한 시간에 걸쳐 뜨거운 불길을 온몸에 뒤집어썼다. 한 마디 한 마디 가슴에 새기는 김지훈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슬라이드만 돌린 송진우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태우시는 분이나 타는 선생님이나 정말 대단하시네.’

“내일 발표 확실하게 준비해.”

“예,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김지훈의 등에 와이셔츠가 딱 달라붙어 있었다. 이마를 훔친 손가락을 탁탁 털자 땀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어후! 오늘은 좀 세시네.’

대신 자신감을 얻었다.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던 김지훈이 갑자기 들려온 묵직한 목소리에 콧등을 찡그렸다.

“은비는 괜찮아?”

“예? 은비를 어떻게 아십니까?”

“앞으로 네가 봐야 할 은비는 수도 없이 많아. 가족 역시 환자만큼 많이 아프다는 걸 잊지 마. 담낭농증을 리포트로 작성할 때 네가 가졌던 생각도 명심해. 3개월 동안 고생 많이 했다.”

외투를 걸치며 힐끗 김지훈에게 시선 한 번 주고는 송진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무뚝뚝한 얼굴을 한 채 집으로 향했다.

스승이 은비를 알고 있다는 사실, 드물 정도로 길게 이어진 마지막 말이 가슴에 박혔다.

구미 생활이 머릿속을 스치며 그간 힘들었던 모든 일들이 싹 사라졌다.

어떤 말로도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없었다.

먹먹함을 안고 구미에 전화했다.

“만석아, 환자분 어때? 은비는?”

(아직 불안하지만 오전보다 좋아진 건 확실합니다. 은비도 제법 꿋꿋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 대기실에 있을 텐데 바꿔 드릴까요?)

“아니다. 오만석 너만 믿는다.”

지금 은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전화 한 통화가 아니라 오만석의 정성과 관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곁에 있는 의사를 믿고 의지하기를 바랐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어? 왜?

“늦었네. 이준영 선생님은 벌써 가신 모양이구나. 보자.”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꽁치가 조곤조곤 잘 다져진 후 냉동실로 직행했다. 3연타를 맞은 김지훈이 그대로 고꾸라졌고, 송진우의 벌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슬라이드만 돌려도 아프냐? 난 더 아프다.’

덕분에 더욱 철저히 대비할 수 있었다.

아픔도 잠시,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있을 학회와 고생 많이 했다는 스승의 말이 떠나질 않았다.

왠지 모를 긴장과 설렘이 밤새 꿈속을 오갔다.

새벽 6시, 습관적으로 눈을 떴다.

고경아가 차려 준 아침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목욕재계했다. 말끔한 모습은 스스로의 자신감을 북돋고, 다른 사람에게 신뢰를 느끼게 하는 법이다.

깨끗하게 다려진 양복과 하얀 와이셔츠.

김지훈과 잘 어울리는 넥타이.

은비가 사 준 하얀 손수건.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

리포트가 든 묵직한 손가방.

“지훈 씨, 파이팅!”

고경아의 응원까지.

완벽하게 채비하고 집을 나섰다.

한 시간 일찍 학회장에 도착했다.

드디어 그간 이룬 성과와 의미를 발표할 시간이 눈앞에 다가왔다. 김지훈이 강한 긴장감과 이유 모를 기대감에 훅훅 숨을 내쉬었다.

학회 진행을 준비하는 협회 임원들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명찰을 받았다. 김지훈이란 이름에 몇몇 임원들이 흥미로운 눈길을 보냈다.

“김지훈 선생, 자주 발표하는 것 같네.”

“전공의 때 한 것까지 합쳐도 몇 번 안 했습니다.”

“펠로우 2년 차치고는 정말 많이 했지. 이번 발표는 내용도 그렇고 아주 기대가 커.”

안면 있는 임원의 말에 또 다른 긴장이 다가왔다.

긴장도 풀 겸, 도움이 될 만한 정보도 확인할 겸 각종 부스(Booth)가 차려진 복도로 향했다.

몇 발자국 걷던 김지훈이 눈을 반짝였다. 그간 학회 참석을 몇 번 했지만 오늘만큼 시선을 끄는 부스는 없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저절로 발길이 멈췄다. 복강경 기구를 전문으로 다루는 의료 기기 회사의 부스였다.

‘응? 이것 봐라.’

최신 복강경 본체와 반짝반짝 빛나는 기구들이 전시돼 있었다. 모니터로 담낭절제 수술 과정까지 틀고 있어 상당한 정성까지 엿보였다.

그때 40대 정도로 보이는 사람 한 명이 재빨리 다가오다 말고 흠칫 놀랐다. 눈만 껌벅거리며 김지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잠시 어색한 상황이 연출됐다.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젊은 의사였어?’

“왜 그러십니까? 제게 할 말이 있으신가요?”

“어이쿠! 죄송합니다. 선생님이 김지훈 선생님이십니까?”

“예? 제가 김지훈인데 어떻게 아십니까? 혹시 절 보신 적이 있나요?”

슬쩍 이름표를 가리키며 웃었다.

“대흥 메디칼 대표 강호승입니다. 오늘 라파로 수술에 대해 발표하시고, 평소에도 상당히 많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이준영 교수님과 함께 근무하시죠?”

신상에 대해 어떻게 아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긴 비밀도 아니고 복강경 기구를 취급하는 회사라면 누가 복강경 수술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정도는 알아야 할 것이다.

“예, 맞습니다.”

“안 그래도 기구 소개도 할 겸 한번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찾아봬도 될까요?”

호감 가는 인상이었지만 영업 사원이다.

제약 회사나 의료 기기 회사 직원들과 개인적으로 접촉하면 쓸데없는 구설수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반짝반짝 빛나는 기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누구보다도 기구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끼며 욕심이 잔뜩 생긴 모양이었다. 국내에 도입되지 않은 기구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시간도 없는데 이어진 말에 발목 단단히 잡혔다. 김지훈이 관심을 보이자 강호승이 침을 튀겼다.

“오늘 발표 내용을 보니까 조기 대장암 환자까지 라파로로 하신 것 같은데, 많이 답답하셨겠습니다. 저도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기존의 기구를 우리 것으로 써 달라는 말씀이 아니라, 앞으로 수많은 기구가 개발될 겁니다. 선도적 위치에서 수술하시는 분이라면 새로운 기구의 필요성을 체감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선도적 위치라는 말에 왠지 어깨가 우쭐거렸다.

“최신 기구를 빠르게 구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미국과 일본에서 탄탄하게 입지를 구축한 회사와 파트너 관계를 단단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기구가 나오는 대로 소개시켜 드릴 수 있습니다. 비용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의료 기구가 다 비싸지 않습니까?”

강호승이 기회를 잡았다는 듯 홍보에 열중했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리며 입술을 모았다.

말을 들어 보니 무조건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강경 수술과 기구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히 높아 보였다. 학회에서 제작한 책자에 이미 나와 있긴 하지만 김지훈이 발표할 내용까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웬만한 열정과 노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영업 참 잘하는 사람이네.’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듣던 김지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어차피 기구 구입은 병원에서 결정하지만 의견 개진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권이 오고 가지만 않는다면 많은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라파로만큼 기구가 중요한 수술도 없는데, 내가 직접 기구를 찾아다니거나 병원만 바라봐서는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겠지. 지켜야 할 선만 잘 지키면 큰 도움이 되겠어.’

“말씀 잘 들었습니다. 시간 될 때 어떤 기구가 있는지 한번 보여 주십시오. 아! 제게 결정권이 없다는 것은 아시죠?”

“저는 소개만 해 드려도 만족합니다.”

강호승이 기분 좋게 웃었다.

결국은 돈이 목적이겠지만, 세상에 어떤 직업도 돈을 떠날 수 없다. 정당하게 서로가 원하는 것을 주고받으면 뒤탈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전시된 기구를 조작해 보며 손에 맞는지 확인하던 김지훈이 부산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손에 착 감기는 게 부드럽고 괜찮네. 자식! 기가 빠졌네. 나보다 더 빨리 와야지.’

송진우가 부지런히 달려오고 있었다. 신현수와 이경석을 비롯해 오프인 전공의들까지 우르르 몰려왔다. 맨 뒤꽁무니에 단발머리도 빠지지 않았다.

김지훈이 아쉬운 눈으로 돌아섰다.

‘본체에서 빛이 나네. 정말 욕심난다.’

“김지훈 선생님, 곧 찾아뵙겠습니다.”

강호승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학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일반외과 의사들이 하나둘 입장했다. 쟁쟁한 의사들이자, 펠로우와 전공의에겐 하늘같은 대선배들이 태반이었다.

줄줄이 서서 인사하기 바빴다.

교수들이 속속 도착했다.

“지훈아, 발표 끝나고 나 좀 보자.”

한마디 툭 던지고 무뚝뚝하게 인사를 받는 이준영 교수. 발표 끝나고 보자는 소리는 너무도 당연했기에 무심코 지나쳤다.

“그래. 그래. 다들 왔구나. 아침은 먹었니? 지훈아, 교수야, 발표 잘하자. 라파로 대장 좋다. 좋아. 너 누구니? 하석이구나. 하석이 맞지? 좋다. 좋아. 대장 하자, 대장.”

동네 아저씨 같은 송재덕 교수, 학회에 빠질 사람이 아닌 데다 대장암 수술 때문에 더욱 큰 관심을 보였다.

다른 병원 교수들도 얼굴을 보였다.

“김지훈, 신현수, 이경석, 인사드려라. S 병원의 최 과장님, H 병원의 구 과장님이시다. 전번 학회에서 뵙지 않았나? 김지훈 니 그때도 발표했었잖아.”

이혁민 교수가 뿌듯한 표정으로 펠로우들을 소개시켰다. 은연중 우리 병원 일반외과의 미래가 상당히 밝다는 자신감을 내보였다.

“예, 뵀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그래요. 김지훈 선생은 오늘 또 발표를 하네. 우리도 라파로에 신경 많이 쓰고 있어서 기대가 큽니다.”

제법 많은 의사들이 김지훈에게 관심을 보였다. 일부는 이름만이 아니라 얼굴까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곧 펠로우를 마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전임이야 당연한 일이고, 언제 조교수가 될지 궁금하네. 김지훈 선생, 병원에서 말은 없었나?”

아직 전임 강사도 안 됐는데 조교수라니 대답이 궁했다. 머리만 긁적이는 모습에 몇몇이 어깨를 두드리며 묘한 친근감을 표시했다.

“신현수 선생, 아버님은 잘 계시지? 저번에 제출한 논문 보니까 수술 상당히 많이 하는 것 같아. 잡아 올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아깝네.”

“이경석 선생, 자네도 펠로우 마치지? 박승준 교수하고 호흡이 아주 잘 맞는다고 들었어. 은근히 깐깐한 사람인데 좋은 소리 나오는 거 보니까 실력 하나는 문제없겠어.”

의사 사회는 넓은 것 같지만 의외로 좁은 구석이 있다. 전국에 산재한 대학 병원들 모두 여러 이유로 끊임없이 교수를 보충해야 하기에 촉각을 곤두세우기 마련이었다.

이혁민 교수가 헛기침을 하며 웃었다.

“아이고! 우리 병원에서 신경 많이 쓰고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어이쿠! 곧 시작할 모양입니다. 빨리 들어가시죠. 대충 인사 다 했으니까 우리도 들어가자. 김지훈 선생, 뭐 하나? 빨리 들어가자.”

서두르는 모습이 마치 집 나간 아들 단속하는 아버지 같았다.

하긴 김지훈은 구미까지 갔다 왔으니 틀린 말도 아닐 것이다. 걱정 사서 한다고 해도, 그새 누굴 만나 무슨 말을 들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가 꽤 찼다.

시작할 시간이 임박해 자리에 앉으려던 김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김지훈 이하 펠로우와 전공의는 자동 기립이다.

“아버님, 어떻게 오셨습니까?”

“나도 일반외과 의사다. 신현수 선생, 이경석 선생, 또 보네. 반가워. 김 교수, 우리 교수들은 어디 있어?”

고성문까지 한자리를 차지했다. 교수들과 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학회 책자에 코를 박았다.

의사는 평생 배워야 한다는 말이 머릿속에서 뱅뱅 돌았다.

어떻게 보면 학회는 대가라 불릴 정도로 반열에 오른 의사나 원로의 자리가 아니다. 중견, 혹은 이제 막 왕성하게 활동하는 의사들이 주축이 돼 발표를 한다.

의학 발전이라는 대명제하에 개인적인 성취만이 아니라 자신이 몸담고 있는 병원의 위상, 가르침을 준 스승의 명예까지 수많은 의미가 담긴 자리이기도 했다. 하기에 치열한 고민과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발표가 시작됐다.

간담도 부분의 최신 지견.

수백 례에 달하는 복강경 수술 결과.

췌장 수술의 최신 기법까지.

각 대학과 병원에서 촉망받는 의사들이 짧은 발표 시간을 만회라도 하듯 열변을 토했다. 쏟아지는 질문과 답변이 거듭될수록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다들 대단해. 안주하는 사람이 없네. 앞으로 빠짐없이 참석해야겠어.’

은근한 긴장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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