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83화 (783/1,329)

8화. 인연의 끈 Ⅴ (2)

송철성이 힘겹게 눈가를 닦았다. 고개 돌려 은비를 보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빠가 숨겨야 할 눈물이었고, 보일 수 있는 미소였다.

어떻게든 딸에게 웃는 모습을 보이려 했지만 아픈 몸은 그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은비가 눈물을 꾹 참았다.

“야! 아버님, 이젠 웃으시네요. 은비야, 내 말이 맞지? 잠깐 힘드셨을 뿐이야. 내일이면 벌떡 일어나시겠다.”

오만석이 과장된 몸짓으로 유난을 떨자 은비의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걸렸다.

물끄러미 지켜보던 김지훈이 조용히 뒤로 물러나 아빠와 어린 딸의 시간을 지켜 주었다.

송철성이 딸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너무도 힘없는 손길을 느낀 은비가 눈물 맺힌 눈으로 재잘재잘 떠들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 보였다. 다소 마음이 놓였지만 힘든 생활에 훌쩍 커 버린 14살 소녀의 아픈 성장일지도 몰랐다.

‘꿋꿋해 보이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는데, 어느 정도 안심하고 서울로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마음이 아프지?’

아빠와의 짧은 시간이 끝났다.

말할 힘도 없겠지만 송철성은 김지훈이 떠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직접 말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중환자실을 나온 김지훈이 은비와 단둘이 마주했다. 답답해지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가급적 태연하게 말하려 했지만 입을 열기 쉽지 않았다. 애써 담담한 미소를 머금으며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했다. 내일 구미를 떠난다는 말을 정말 하기 힘들었지만 반드시 해야 했다.

점점 눈시울이 붉어지던 은비의 눈에 한 방울 한 방울 눈물이 맺혔다.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마음이 아프다 못해 시려 오는 순간 은비가 눈가를 닦았다.

“선생님, 전 괜찮아요. 아빠 수술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꿋꿋한 얼굴로 도리어 웃었다.

그 웃음에, 그 얼굴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금 이 순간, 어렵고 힘든 시간을 아빠와 단둘이 헤쳐 온 은비는 더 이상 14살 소녀가 아니었다.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며 아빠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못했지만 자신의 일에는 강한 소녀였다. 가난을 이기고 웃으며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벌써 철이 들었구나. 내가 은비를 너무 어리게 본 모양이다. 고맙다. 미안하다. 잘 헤쳐 나가길 바랄게.’

한시름 덜었지만, 때 이르게 철든 소녀의 자존심은 강할 것이다. 병원비는 그렇다고 쳐도 이유 없는 도움을 환영할 것 같지 않았다.

고경아에게 받은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다가왔다. 무엇보다 은비의 자존심을 지켜 주고 싶었다.

때론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할 때가 있고,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럴듯한 거짓말 하나면 될 것이라 믿었다.

“은비야, 이거 받아.”

봉투를 받아 든 은비가 깜짝 놀랐다.

“이게 뭐예요?”

“생각보다 병원 생활이 길어질 거야. 너도 그동안 필요한 것들이 있잖아. 내가 주는 거 아니다. 아버지가 너한테 전해 달라는 돈이니까 소중하게 아껴 써.”

“아빠가요?”

“나한테 부탁을 하셨어. 지금은 돈을 찾으실 수가 없으셔서 내가 먼저 주는 거야. 나중에 다 받기로 했으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조용히 김지훈을 보던 은비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 같았다. 14살 어린 소녀가 어디까지 생각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까?

아마 알고도 남을 것이다.

때론 선의도 상처가 될 수 있다. 봉투 속에 든 돈이 아니라 마음을 받길 바랐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이런 것뿐이라 미안하다.’

더 이상 시간을 끌어야, 이리저리 돌려 말해 봐야 입장만 곤란해진다. 별일 아닌 것처럼 어깨를 쓰다듬어 주고는 일어나는 순간 오만석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일이야?”

“은비랑 같이 계셨네요. 별일 아닙니다. 은비야, 저녁 먹어야지. 빨리 가자. 제육볶음 나왔어. 늦으면 못 먹어, 인마. 선생님, 먼저 가 보겠습니다.”

“저녁 먹는다고? 오늘 회식…….”

은비 앞에서 회식이라니 아차 싶었다. 급히 입을 닫았지만 다 들었을 것이다. 딴청까지 피웠는데 오만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냅다 내질렀다.

“한 그릇만 먹을 건데 회식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이럴 때 목소리 줄여 주면 좀 좋을까?

어쨌든 잠시 오만석의 밥통 크기를 잊었다.

미안한 마음도 잠시, 거의 끌려가다시피 구내식당으로 향하는 은비를 보며 웃고 말았다.

오만석도, 은비도, 송철성도 걱정할 필요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누군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힘을 낼 사람들이었다.

다시 중환자실을 찾았다.

송철성이 잠에 빠져 있었다.

지난 이틀, 치열하게 싸운 송철성의 얼굴이 한결 편해 보였다. 탈출구 하나 없이 깜깜하기만 했던 마음에 한 줄기 빛이 환하게 비쳐 들었다.

‘갈 수 있겠다.’

모든 사람이 다 고마웠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는데, 이만한 인연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은비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날 저녁, 마지막 회식이자 이별의 인사를 하는 자리를 가졌다.

모든 의료진이 고마웠지만 특히 이용철 과장, 민혁기 원장, 정성호 과장, 주덕현 과장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제겐 결코 가벼운 인연이 아니었습니다. 구미 내려올 기회가 또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 과장, 그동안 고마웠어. 내려올 일 있으면 꼭 들러야 돼. 잊지 말고 자주 연락해. 아니면 한두 달 더 근무하든지.”

“제수씨, 정말 고생했어요. 혹시 김 과장이 속 썩이면 바로 연락해요. 내가 곧바로 달려가서 바로잡아 줄게요.”

“샘, 아쉬워요.”

일일이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다들 잔을 권했지만 은비와 송철성이 있어 맥주 한 모금으로 대신했다.

기분 좋은 자리였다. 언제 또 먹을지 모르는 복매운탕의 신맛이 유난하게 느껴지는 자리였다.

그렇게 구미 마지막 밤이 지나고, 마지막 날이 밝았다.

이른 아침, 중환자실부터 찾았다.

은비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송철성이 미소를 보였다. 아직 모든 지표가 불안한 상태였지만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반드시 이겨 낼 것이라 확신했다. 딸을 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기에 웃을 수 있었다.

송철성과 말없는 작별 인사를 나눴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아버님, 곧 훌훌 털고 일어나실 겁니다.’

중환자실을 나와 은비를 꼭 안아 주었다.

이별의 아픔을 느끼는지 품에 안긴 작은 소녀가 비 맞은 새처럼 떨었다. 울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앞으로는 절대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은비야!”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은비도 알 것이다.

한동안 온기를 전한 김지훈이 떨어지지 않는 발을 간신히 뗐다. 은비의 눈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작은 소녀의 눈빛을 보는 순간, 이제 정말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떠오르는 순간, 무슨 이유인지 쏟아져 나온 피고름과 송철성의 기적 같은 회복이 떠올랐다.

단순히 기적이라는 말로 치부할 수 있는 문제일까?

절대 아니다.

기적을 바랄 수 있지만 믿어서도, 의존해서도 안 되는 사람이 바로 의사다. 환자 치료는 어디까지나 의학의 산물이었고, 원인 없는 결과도 없다.

‘분명 내가 놓친 것이 있을 거야.’

힐끗 시계를 본 김지훈이 수술 방으로 향했다. 의아한 시선을 뒤로하고 수술 녹화 테이프를 찾았다. 5시간짜리를 모두 볼 수는 없었다. 상당한 양의 고름이 숨어 있었을 장소는 간 뒤편이나 장과 장 사이뿐이다.

‘간 뒤편은 확실히 깨끗했어.’

의심되는 부분이 나오는 과정을 몇 번이고 다시 틀었다.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지만, 하루 이틀 사이에 그 많은 고름이 새로 생길 리 없었다.

결국 문제를 찾았다.

‘담낭이 터져 고름이 새어 나왔는데, 복강 가장 아래쪽은 확실하게 확인하지 않았네. 그 부분에 고여 있었던 게 분명해. 시간이 촉박했다는 것은 핑계가 안 돼. 명백한 실수야.’

결과를 되짚어 유추했지만 가능성은 충분했다.

단 5분이라도 더 투자했거나, 조금만 더 세심했다면 찾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드레인을 따라 빠져나왔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고여 있었으면 송철성은 지금도 생사를 다투고 있었을 것이다.

불현듯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급박했던 수술 상황은 변명이 될 수 없었다. 짐작에 불과해도 어떤 실수를 했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책임을 통감했다.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치명적인 일이었다. 이번처럼 천운이 따라 주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내 실수에도 불구하고 회복돼서 정말 다행이네.’

김지훈이 단정적으로 실수를 인정했다.

한 번 핑계를 대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유추한 결론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다시는 티끌만 한 문제도 놓치지 않도록 반성하고 또 반성할 일이었다.

평생 잊지 말아야 할 귀중한 교훈이었다.

착잡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을 안고 외래로 향했다.

진료실을 정리하는 사이, 일반외과 식구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송진우와 오만석이 유독 아쉬워했고, 오하석도 입에 올랐다.

“송진우, 잘 가, 인마. 앞으로 볼 날 많을 거다. 오하석, 열심히 해. 우리 오씨 가문 동생 파이팅!”

“만석아, 또 보자. 고마웠다.”

묵묵히 지켜보던 최철한이 손을 내밀었다.

맞잡은 손이 무척이나 뜨거웠다.

“김 과장, 고마웠다. 또 보자.”

“선생님, 저도 덕분에 많이 배우고 갑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김지훈이 담담하게 자신의 실수일지도 모르는 일을 말했다. 거의 단정적인 말에 최철한이 눈가를 찡그렸다. 누가 보아도 명백하지 않다면 대부분의 의사가 동료 의사에게조차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또는 불가피했다는 말로 넘어가기 마련이었다.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구나.’

마지막으로 은비를 부탁하고 병원을 나섰다.

하얀색 병원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3개월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발을 디뎠던 곳이다. 많은 일이 있었고, 새로운 인연을 만났다.

차에 타는 순간까지 만감이 교차했다.

일반외과 식구들이 선물이라며 준 상자 두 개가 무겁게 느껴졌다.

뒷좌석에 탄 송진우와 오하석도 감정이 남다른 모양이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곳인데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부릉! 부르릉!

시동을 걸고 막 출발하려는 순간, 작은 소녀가 급하게 달려왔다. 손에 뭔가를 꼭 쥐고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김지훈이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은비야, 추운데 왜 나왔어?”

숨을 헐떡이며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선생님 땀 많이 흘리시는 것 같아서요. 아빠 좋아지면 꼭 인사하러 갈게요.”

무엇이 담겨 있는지 모르지만 은비의 마음이었다.

‘고맙다. 널 평생 잊지 못할 거야.’

꽉 안아 주었다.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가만히 있던 은비가 머뭇거리다 김지훈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전에 없이 따스한 온기가 오고 갔다.

“은비야, 건강하게 잘 지내.”

“안녕히 가세요.”

병원을 빠져나올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눈물을 흘렸을지, 웃고 있었을지 알 수 없었다. 구미 일반외과의 정성이 있는 한 반드시 웃게 될 것이다.

서울로 향하는 내내 은비와 송철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든 고비를 넘기고 앞으로는 건강하고 행복하기만을 진심으로 바랐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때 아닌 전화벨이 울렸다.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임승민 환자의 아내였다. 이송된 환자나 가족이 연락하는 일은 상당히 드문데, 정말 전화할 줄은 몰랐다.

(선생님, 우리 남편 어제 병실로 올라갔어요. 너무 감사드려요. 고맙습니다.)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활기 속에 행복이 담겨 있었다.

“그래요? 이제는 걷고 다 하시죠?”

(네. 경과가 좋으면 일이 주 내에 퇴원해도 좋다고 하셨어요. 선생님 덕분이에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선생님, 혹시 옆에 송진우 선생님 계신가요? 어머니가 목소리 듣고 싶다고 성화를 부리시네요.)

“진우야, 전화받아 봐.”

까딱까딱 졸던 송진우가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깜짝 놀라며 자세까지 고쳤다.

오하석이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귀를 가져갔다.

(작은 선생님, 고마워요. 내 언제 시간 되면 꼭 찾아갈게요. 우리 애비 선생님 덕분에 이젠 건강해졌어요.)

“잘됐네요. 할머니, 근데 저 서울 올라가요.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뭐? 그럼 어떻게 해! 서운해서 이걸 어쩌나?)

한동안 통화가 이어졌다. 서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진 못했지만 충분하고도 남았다.

따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의사가 된 것을 결코 후회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전화를 끊은 김지훈이 고경아를 보며 가슴을 활짝 폈다. 송철성도 임승민 환자처럼 완전히 회복될 것이란 확신이 다가왔다. 이제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학회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송진우와 오하석도 전에 없이 친근한 대화를 나누었다.

‘무지하게 친해 보이네. 1년 차하고 3년 차가 저렇게 친하면 트레이닝이 제대로 되겠어? 같은 파트 돌리면 안 되겠다. 근데 자식들, 완전히 한 쌍의 바퀴벌레네.’

바퀴벌레라니, 농담이라도 너무했다.

서울이다.

확실히 구미보다 춥다.

고경아를 고이 집에 모신 후, 송진우와 함께 이준영 교수부터 만났다. 뜻하지 않게 담낭농증을 복강경으로 수술해 감수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구미는 잘 정리했어?”

“예. 최철한 선생에게 인수인계 확실하게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귀중한 토요일 오후 시간이지만 이준영 교수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 리포트에 시선을 고정했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인 채 남모를 미소를 머금던 김지훈이 눈가에 바짝 힘을 주었다. 어디선가 뜨겁고도 서늘한 기운이 훅훅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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