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82화 (782/1,329)

8화. 인연의 끈 Ⅴ (1)

고민 끝에 민혁기 원장을 찾았다.

“김 과장, 무슨 일이야? 벌써 회식할 시간이 됐나?”

금요일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회식조차 마음에 걸렸다. 마음 같아서는 취소하고 싶었다.

그러나 떠나는 자리고, 이런 이유로 함께 밥도 못 먹는다면 병원 내 누구도 웃고 떠들지 못할 것이다.

환자의 고통과 아픔을 달고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바로 의료진이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환자가 좋아져서 다행이다.’

“원장님, 한 가지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뭔데? 회식비는 내가 낼 테니까 걱정하지 마.”

가벼운 농담에 마음이 편해졌다.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중환자실에 환자가 한 명 있습니다. 딸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은비입니다.”

“아! 그 환자? 말 들었어. 김 과장하고 무슨 인연이 그렇게 깊어? 상당히 심각하다고 들었는데 좋아졌나?”

“생각도 못할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는 중이긴 합니다.”

민혁기 원장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수술한 지 이틀도 안 됐잖아? 라파로로 한 덕인가? 어쨌든 김 과장이 아버지하고 딸을 다 살리는 꼴이네. 기분 좋은 인연은 아니지만 절대 나쁜 인연도 아니다. 수고했어. 다 김 과장 덕이야.”

“아닙니다. 혹시 집안 형편도 들으셨습니까?”

민혁기 원장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대충 들었어. 제때 치료를 못하니까 어려운 사람들이 더 아플 수밖에 없지. 그깟 쌀 몇 가마 나오는 논 조금 있다고 의료 보호 환자도 아니라 걱정이네. 보험 안 되는 항목도 많은데 치료비를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병원 걱정과 환자 걱정이 뒤섞였다.

원장 입장에서 경영 문제를 우선순위에 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개 과장이자 내일이면 떠나야 한다고 해도 반드시 한 가지 부탁을 해야 했다. 은비 가족이 처했던 상황, 현재 직면한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원장님, 죄송합니다만 이 환자만은 병원에서 전액 부담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형편이 비슷한 환자가 있는 것도 압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인연 때문인지, 은비가 너무 어려서인지 그냥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전액 무료로 치료해 달라고?”

민혁기 원장이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자리에서 당장 승낙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경영 문제가 아니더라도 고려해야 할 문제가 많을 것이다.

입술을 모은 채 톡톡 책상을 두들기던 민혁기 원장이 입맛을 다셨다.

“나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야. 부원장인 이 과장, 원무과, 총무과하고 상의해 볼게. 김 과장이 그동안 한 게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언제 결정이 날까요?”

“내일 떠나지? 그 전에 결정할게.”

“감사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몇 번이나 부탁하고 돌아서는 김지훈을 보던 민혁기 원장이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구미 병원은 지역사회 병원이다. 당장의 손해나 부작용보다 앞으로 가져올 이득이 훨씬 클 것이다.

무엇보다 김지훈의 마음이 고마웠다.

‘몸만이 아니라 마음도 치료할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 때론 이런 방식도 괜찮을 거야. 흐음! 치료비가 꽤 나올 텐데 이걸 어떻게 처리하지?’

원장 혼자 전권을 갖고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원만한 협의하에 김지훈과 은비에게 가장 바람직한 결과를 전하고 싶었다.

총무과, 원무과 부장과 머리를 맞댔다.

“이제 이틀 됐는데 본인 부담만 이백이 넘는다고?”

“수술비에 중환자실 비용만이 아니라 고가 약제들이 워낙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보함 안 되는 항목도 많고요. 앞으로 상당히 많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뒤늦게 연락을 받고 참석한 이용철 과장이 크게 웃었다. 예상보다 훨씬 큰 액수에 눈가를 찡그리던 민혁기 원장이 꽥 소리를 질렀다.

“한두 푼도 아닌데 왜 웃어?”

“수술 동의서에 김 과장이 서명한 걸 보고 왠지 분위기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딱 맞았네요. 원장님, 병원 평판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환자도 드라마틱하게 좋아지고 있다는데, 기분 좋게 전액 지원해 주시죠.”

“기분 좋게? 땅 파면 돈이 어디서 쑥쑥 솟아나? 부원장인데 나한테만 맡기지 말고 병원 운영에도 신경 좀 써.”

민혁기 원장의 눈이 쭉 찢어졌다.

“총무부장, 원무부장, 액수가 적잖은데 어떻게 생각해?”

“김 과장님 덕분에 흉부외과까지 적자 면했습니다. 예전이었으면 손해가 얼마나 났을지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픕니다. 병원 전체로도 2개월 연속 흑자를 냈고, 지원까지 늘었습니다. 본인 부담만 면제니까 별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누구 한 명 눈살 찌푸리지 않았다.

진료로 얻은 수익만이 아니라 중앙 의료원의 지원까지 생각하면 김지훈 덕에 숨통 확 트인 것이 사실이었다.

“앞으로 적자 나면 우리 모두 월급 깎아야 한다는 거 알고 말하는 거지? 후회하지 마.”

핀잔 아닌 핀잔 속에 일사천리로 원장 결재까지 이뤄졌다.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모처럼 자신들에게 주어진 작은 사회적 책무를 다했다는 사실에 모두 웃었다.

도장을 찍은 민혁기 원장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퇴원 때까지 비용을 생각하면 내 재량을 넘는 것 같네.’

권한이 크다지만 원장도 결국 월급쟁이다. 이런 부담을 흔쾌히 감수할 수 있는 이유는 김지훈이 자신의 몫 이상을 한 덕이었다.

원장실에서 나온 김지훈이 수술 방에 들러 고경아를 찾았다. 민혁기 원장의 얼굴을 봐서는 전액이 아니더라도 일정 부분 경감해 줄 것이라 믿었다.

해 주고 싶은 일이 또 하나 있었다.

문제는 병원비만이 아니었다. 송철성이 무사히 회복돼도 당분간 은비가 먹고, 자고, 입을 것이 필요했다. 겸사겸사 부원장인 이용철 과장에게도 부탁할 참이었다.

“이용철 선생님은 어디 가셨어요?”

“아까 전화받고 나가시던데요.”

“그럼 회식 때 말씀드려야겠네. 경아 씨, 다른 게 아니고 은비 있잖아요.”

김지훈이 은비의 처지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송철성이 완전히 회복돼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은비 혼자 모든 일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날이 언제일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은비를 보면 학교 다닐 때 생각이 나요. 나는 혼자서 헤쳐 나갈 힘이라도 있었지만, 이제 14살밖에 안 된 은비는 쉽지 않을 거예요.”

고경아가 미소를 머금으며 김지훈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모든 책임을 불사하고 송철성을 수술한 김지훈이었다. 진료도 수술도 없는 주였지만, 눈이 새빨개진 이유가 바로 은비였기에 이해하고도 남았다.

“알았어요. 지훈 씨 덕에 구미 와서 수당도 더 받았는데 그 정도 못하겠어요? 14살이면 아이 같아도 자존심이 꽤 강할 때예요. 은비 기분 나쁘지 않게 잘 말해야 해요.”

크게 고민하지 않고 선뜻 동의했다.

“고마워요.”

“마침 퇴근할 때니까 바로 집에 갔다 올게요. 이번은 이해하지만, 또 그러면 안 돼요. 우리도 먹고살아야죠.”

활짝 웃으며 퇴근 준비를 했다.

무조건 고마운 일이었다.

고경아가 평생의 반려자라는 사실은 행운 그 자체였다.

그 덕인지 막 수술 방으로 들어오던 이용철 과장에게 더없이 기쁜 말을 들었다.

“김 과장, 치료비 걱정하지 마. 전액이야.”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치 자신의 일인 양 허리를 반으로 접는 김지훈을 보며 이용철 과장이 크게 웃었다.

사랑한다는 말처럼 감사하다는 말 역시 아무리 많이 들어도, 아무리 많이 해도 질리지 않는 말일 것이다.

수술 방을 나오던 김지훈이 힘차게 어퍼컷을 날렸다.

카르페 디엠!

무조건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현실이 아무리 암울하다고 해도 분명 감사할 수 있는 순간이 있기에 우리는 내일 또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

회식 가기 전, 전공의들과 함께 송철성 환자를 찾았다.

“우리 은비… 잘 있죠?”

의료진도 믿기 힘들 정도로 급격하게 좋아지고 있지만 다른 사람을 걱정할 상태가 아니었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자기 자신보다 은비 걱정이 앞섰다.

딸을 향한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이었다.

“은비는 잘 있으니까 아버님은 걱정 마시고 마음 편히 계세요. 은비를 위해서 하루빨리 일어나셔야죠.”

희미한 미소까지 머금었다.

회복세에 들어섰다고 해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내일이면 떠나야 하기에 챙겨야 할 문제가 많았다. 세심하고 꼼꼼하게 주의할 점 등을 상의하고, 특히 은비 문제를 강조했다.

“성민아, 현철아, 만석이에게 얘기 들었지? 환자분만이 아니라 은비에게도 신경 많이 써 줬으면 좋겠다.”

“걱정하지 마세요. 안 그래도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저희도 자주 만나 보고 있습니다. 환자 상태를 누구에게 설명할지 몰라서 갑갑하긴 합니다.”

위중한 환자의 경우 의사는 항상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유일한 보호자가 14살 아이라는 사실에 여러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철한 선생님, 만석이하고 잘 상의해. 생각 같아서는 일주일 더 있다 가고 싶다.”

다들 말이 없었다. 어쩌면 정말 그렇게 하기를 바랄지도 몰랐다. 그러나 피치 못할 경우가 아니라면 반드시 서울 병원에 복귀해야 한다. 송철성 환자가 최악으로 치닫지 않는 한 말이다.

결코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조성민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 환자 때문이 아니라 선생님이 조금 더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라파로 못해 봐서?”

“예. 그거라도 핑계가 되면 좋겠습니다.”

“자식! 매일 태우기만 했는데 뭐가 좋다고. 열심히 해. 그래야 최철한 선생님이 라파로를 주시지. 오만석, 김현철, 너희들도 정신 바짝 차려. 언제 또 나 볼지 몰라.”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구미 생활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잘 따라와 준 후배들에게 고맙기만 했다.

어깨를 한 번씩 두드려 주었다.

본의 아니게 작별 인사를 미리 했다.

전공의 내내 순환 근무를 해 이런 일은 익숙한 줄 알았는데 보통 서운한 것이 아니었다. 공연히 먹먹해졌다. 3개월 동안 쌓인 정 때문에 코끝이 찡해진 건지, 바람이 찬 탓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만 가서 회진 준비해. 난 중환자실에 있을 테니까 회식 같이 가자.”

면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한시름 덜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송철성의 얼굴을 보니 가장 하기 힘든 일과 하기 어려운 말이 남았다. 돈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만, 돈이 다는 아닌 모양이었다.

송철성은 길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상황이 허락해도 짧게 얘기하는 것이 도리어 한 아이의 아버지를 위한 길일지 몰랐다.

“아버님, 어떠세요? 아직도 많이 불편하시죠?”

“은비가 걱정되네요. 전 한결 낫습니다.”

언제나 은비가 먼저다.

말 한마디도 힘든지 얼굴을 찡그리며 숨을 헐떡였다. 삭막한 중환자실 분위기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기계음, 코 줄, 소변 줄, 수액 줄까지 모든 것이 불편하고 괴로울 것이다.

정확한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까지 회복된 것만 해도 천운이었다.

“우리가 잘 데리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에 언제까지?”

“곧 올라가실 수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최대한 빨리……. 치료비가…….”

말꼬리를 흐렸다.

우려했던 일이었다. 아픈 몸이 먼저인데 정신이 들자마자 은비와 치료비부터 걱정하고 있었다. 상상 이상으로 절박하게 살아온 것이 분명했다.

미리 대처하길 정말 잘했다.

“그 문제는 병원에서 해결하기로 했으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은비도 아버님이 병원에 있는 동안 잘 지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게 무슨…….”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치료비는 안 내셔도 되고, 은비도 우리가 보살피겠습니다. 돈 걱정하지 마시고 아버님은 몸만 신경 쓰세요.”

이제야 알아들었다.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하던 송철성의 눈가가 벌게졌다. 호흡이 살짝 가빠졌지만 가슴이 먹먹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아버님, 계속 제가 치료했으면 좋겠는데 내일 구미 근무가 끝나 서울로 올라갑니다. 다른 선생님들이 저 대신 최선을 다할 거니까 안심하고 치료받으시면 됩니다.”

“예? 서울이요?”

송철성이 순간 손을 떨었다.

구미 병원에서 수술받은 동네 사람에게 우연히 김지훈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자신보다 더 소중한 은비를 살려 준 사람이기에 결코 잊지 않고 살았다.

한 번은 꼭 은비와 함께 찾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여름에는 농사일로, 겨울에는 일용직으로 일해야 하는 현실은 좀처럼 발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어느 날,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병원 갈 시간조차 없어 약국 약으로 버텼다. 급기야 피로감까지 극심해졌지만 몸이 약해진 탓으로 알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다가왔다. 119에 실려 오며 혼미한 정신에도 은비만 떠올랐다.

구미 병원으로 가자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라면 자신을 치료해 주고, 혼자 있어야 하는 은비까지 챙겨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지나친 욕심이라며 손가락질해도 은비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 바람대로 자신은 의식을 찾았고, 은비의 눈물도 닦아 줄 수 있었다.

그런데 떠난다니.

송철성의 심장이 헐떡였다.

이해하고도 남았다.

김지훈이 떨리는 손을 꼭 잡았다.

“아버님은 은비를 위해서 다른 생각 마시고 치료만 잘 받으세요. 절 믿으시면 됩니다. 결코 은비 혼자 있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면회 때 웃으셔야 합니다.”

송철성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7개월 후면 한 아이의 아빠가 되지만, 그 마음이 어떨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한동안 말을 잃었던 송철성이 김지훈의 손을 잡았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붉어진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고맙다는 말이 아니라 마음이 담긴 한 방울의 눈물이 고마웠다. 울컥 밀려오는 감정을 묻고 웃을 수 있었다.

잠시 후, 은비가 오만석과 함께 들어왔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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