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77화 (777/1,329)

5화. 인연의 끈 Ⅱ (2)

어떻게든 최선의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가녀린 소녀의 서러운 흐느낌에 가슴이 시려 왔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초조하기만 했다.

‘다시 생각해 보자. 대구로 가면 최선의 방법이 나올까? 아무도 없이 은비 혼자 무엇을 할 수 있지? 은비가 날 찾은 이유가 무엇일까?’

현실적인 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었다.

대구 병원 역시 우왕좌왕할 것이다. 모든 검사를 다시 시행할 가능성이 높았다.

다른 방법이 없기에 은비에게도 동의서를 받을 것이다. 절대 14살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수술을 받는다고 해도 개복할 것이 분명했다. 운이 좋다면 모르지만 반대라면 아버지는 사경을 헤매고, 딸은 홀로 중환자실 앞만 지킬 것이다.

아버지와 딸에겐 5년 전 일의 반복이다.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복강경이 정말 최선인지, 환자의 회복 가능성을 더욱 높일 방법인지 냉정하게 생각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수술 성공 가능성과 길어지는 마취 시간을 고려해야 했다.

이미 무너진 몸은 어떤 상황을 유발할지 모른다.

크게 열면 열수록, 수술 부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수술 후 감염부터 패혈증까지 합병증이 발생할 확률만 높아진다. 사소한 문제도 송철성은 견디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술한다면 복강경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었다. 복강경에 관한 한 대구 병원도 대안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슴에 안긴 은비가 두려움에 떨었다.

“선생님! 선생님! 우리 아빠 살려 주세요!”

“은비야, 혹시 친척분은 안 계시니?”

두려움에 차 고개만 저었다.

은비의 슬픈 눈동자가 눈에 박혔다.

믿고 의지할 사람 한 명 없는 곳에 보낼 수 없었다. 14살 어린아이 홀로 아버지의 죽음이 담긴 동의서를 작성하게 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의 당부대로 김지훈이라는 이름을 잊지 않고 찾아온 은비였다. 아버지는 자신만이 아니라 딸까지 맡긴 것이다. 비록 의미는 다르지만 운명일지도 몰랐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은비와 아버지를 지켜 주고 싶었다. 최악의 경우도, 의사로서 짊어져야 할 책임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은비의 눈에 희망과 기쁨을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조성민, 같이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어?”

“없습니다.”

무의미한 물음이었다.

있다고 해도 연고가 없다면 의미가 없었다.

김지훈이 은비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은비야, 날 믿고 하자는 대로 할 수 있어?”

“네. 우리 아빠 살려 주세요.”

아빠를 살려 달라는 말 이외에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하는 은비였다. 아빠가 쓰러진 지금 믿고 의지할 사람은 오직 김지훈 한 명뿐이었다.

결정을 내렸다.

“조성민, 수술 준비해. 라파로로 한다. 최철한 선생님 찾아서 이송 취소하라고 말씀드려.”

정확한 사연을 알지 못해 모두들 당황했다.

김지훈과 얼마나 깊은 인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당장 수술 동의서 작성부터 문제였다. 누구도 14살 아이에게 아버지의 사망 가능성을 언급할 자신이 없었다.

“선생님, 수술 동의를 누구에게 받습니까?”

“내가 사인할 거야.”

다들 깜짝 놀랐다.

사인하는 순간 법적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최악의 경우가 닥쳤을 때 연고를 주장하는 사람이라도 나타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다른 생각 하지 말고 빨리 움직여. 이용철 선생님에게 환자 상황 정확하게 노티해.”

단호한 목소리에 머뭇거리던 송진우와 오만석이 재빨리 움직였다.

응급 수술 스케줄을 들고 수술 방으로 올라가는 김현철을 본 김지훈이 은비 앞에 앉았다.

“은비야, 내 말 잘 들어.”

“선생님, 우리 아빠 괜찮은 거죠?”

“그럼. 지금은 많이 아프시지만 수술 받으면 괜찮아지실 거야. 날 믿고 기다려야 한다. 울지 마. 오하석 선생, 수술 끝날 때까지 은비하고 같이 있어 줘.”

차마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수술 중 사망할 수 있다는 사실, 수술 후 중환자실에서 얼마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 영영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 모두 마음에 담았다.

14살 은비를 위해서 기필코 복강경 수술을 성공해야 했다. 5년 전, 9살 어린아이가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왔듯 아버지 송철성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몇 날 며칠 잠도 못 자고 어린 딸의 곁을 지킨 아버지였기에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 믿었다.

사랑하는 딸을 위해.

응급처치 덕에 송철성이 가까스로 눈을 떴다. 힘겨운 호흡 소리가 들렸다.

“아버님, 저 김지훈입니다. 지금 바로 수술 들어갈 겁니다. 힘내세요.”

“김지훈 선생님!”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은비 좀……. 은비…….”

말 한마디도 하기 힘들어하면서도 은비를 찾았다. 송철성이 가진 삶의 애착과 미련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까만 얼굴 위로 아버지의 아픔이 담긴 눈물이 흘렀다.

김지훈을 잡은 손은 더 이상 굳건하게 자식을 지켜 온 43세 남자의 손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지키기에도 연약하고 애달파 누군가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손이었다.

안타까운 마음 한편으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병원에 안 왔는지 화가 날 지경이었다.

‘이유가 있겠지만, 도대체 왜? 은비를 생각해서라도 이러면 안 되잖아요.’

스테이션 앞에 선 김지훈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서명 옆에 찍힌 은비의 손가락 도장이 눈에 사무쳤다. 어리다고 해도 지금 상황을 모를 수 없는 나이였다. 죽음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도 어렴풋이나마 알 것이다. 어쩌면 지난날의 기억 때문에 도리어 선명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더 아프고 측은하고 미안했다.

최철한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우리가 수술하는 이상 이렇게 처리할 수밖에 없지만, 김 과장은 곧 떠나기 때문에 문제가 더 커질 수도 있어. 동의서를 다시 작성하는 게 낫겠다. 내가 서명할게.”

마음은 고마웠지만 서명하는 순간 그 누구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어떤 경우라도 송철성이 회복되지 않는 한 감당해야 할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더구나 집도의는 김지훈 자신이었다. 절대 동의할 수 없는 일이었다.

“5년 전에 제가 살린 아이입니다. 그런 아이와 아버지가 나만 믿고 왔습니다. 제겐 더 이상 책임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지켜 줘야 합니다.”

“대구는 대안이 안 될까?”

“대구에서도 라파로를 시도하진 못할 겁니다.”

전공의들이 콧등을 찡그렸다.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김지훈의 각오와 마음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절대 책임을 미룰 사람이 아니었다.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일만이 남은 것이다.

수술 방 앞이다.

오하석이 꼭 안고 있었지만 어리고 작은 소녀의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간이침대에 실려 수술 방으로 옮겨지던 아버지가 눈을 뜨려 안간힘을 썼다.

간신히 딸의 손을 잡았다. 은비가 비명처럼 아버지를 불렀다.

“아빠! 아빠!”

“은비야, 아빠 괜찮아.”

힘겨운 목소리에 참았던 울음이 또 터졌다. 아버지에게도, 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수술을 앞둔 환자의 북받친 감정은 또 다른 문제만 야기할 뿐이었다.

김지훈이 재빨리 사이에 섰다.

“은비야, 날 믿고 기다려. 아버님, 힘내셔야 합니다.”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고단한 시간이었겠지만 행복했을 것이다. 하기에 단둘이 살아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어린 딸의 얼굴이 눈에 밟힐 것이다.

드르륵!

수술 방 유리문이 닫히자 은비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김지훈이 조용히 은비의 손을 꼭 잡은 채 입술을 모았다.

‘은비야, 반드시 아빠의 웃는 얼굴을 보게 될 거야.’

김지훈마저 수술 방으로 들어가자 은비의 몸이 심하게 떨렸다. 오하석의 따뜻한 품도 차가운 냉기를 밀어내지 못했다. 두려움에 찬 울음이 복도를 서럽게 맴돌았다.

수술 방이 긴장에 휩싸였다.

마취가 시작되기 전 수술 팀 전원이 머리를 맞댔다.

담낭에 T-tube를 넣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담도가 문제였다. 터질 것처럼 부은 담낭 밑의 공간을 어떻게 확보할지가 관건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상의를 마친 수술 팀의 눈에 긴장이 가시질 않았다.

‘T-tube 두 개만 넣고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 담낭 내 담즙을 완전히 빼면 담도를 조작할 공간이 확보될 수 있어.’

솔직히 튜브를 넣을 공간과 담도를 확보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 오직 수술 팀의 손만 믿을 뿐이었다.

부지런히 마취와 수술 기구를 준비하는 간호사들 사이에 고경아가 보였다. 모두들 긴장과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환자도 문제지만 의료진 역시 위험에 노출됐기 때문이었다.

수술을 견딜 수 있을지 모르는 환자.

상황을 들었기에 반드시 살려야 하는 환자.

은비의 얼굴조차 몰랐지만 의료진 모두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가장 불안할 고경아마저 A형 간염이 주는 두려움을 가슴 깊이 묻었다.

의료인이기에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띠띠띠띠띠띠!

송철성의 심장이 헐떡거렸다. 이용철 과장이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김 과장, 간에 영향을 미치는 마취제는 쓰지 않지만 전신 상태가 너무 나빠. 수술 시간 최대한 단축해 줘. 간호사, A형 간염인 거 알지? 주사 놓을 때 조심하고, 수술 끝난 후 인공호흡기까지 모두 소독 들어가야 돼.”

김지훈도 장갑을 끼며 눈가를 찡그렸다.

임신 초기라 무척 조심해야 할 때였지만, 수술 방 이 간호사만으로는 대처하기 힘들어 고경아까지 나왔다. 걱정을 넘어 두렵고 불안한 마음까지 들었지만 고경아 역시 수술 팀의 일원이었다.

‘경아 씨, 정말 미안해요.’

‘내 걱정 하지 마세요. 그 정도로 부주의하지 않아요.’

“고 간호사, 이 간호사, 장갑 이중으로 끼고 절대 바늘이나 기구에 찔리지 않도록 조심해요. 조성민, 송진우, 너희들도 방심하지 마. 최철한 선생님, 우리도 이중으로 끼죠.”

복강경이기에 그나마 나았지만, 언제 어디서 불상사가 생길지 몰랐다. 환자의 혈액이 묻은 거즈도 신중하게 다뤄야 할 상황이었다.

호흡 마취제 냄새가 살짝 코끝을 스쳤다. 송철성의 눈이 너무도 쉽게 감겼다.

“수술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시작하십시오.”

김지훈이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한 각오를 다졌다.

“메스!”

피부 절개를 하고 재빨리 기구를 넣었다.

처컥! 처컥!

공기가 주입되며 서서히 담낭 주변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최철한이 카메라를 접근시켰다. 담낭이 크게 확대되는 순간 누군가 헛바람을 터트렸다.

김지훈과 최철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담낭이 여기저기 터졌다. 심한 염증으로 벽 일부가 녹아 버린 것이다.

흘러나온 고름이 끈적끈적하게 주변 조직을 뒤덮고 있었다. 마치 오물이 배 속 전체로 퍼진 범발성 복막염이 의심될 정도로 심한 통증을 호소했던 원인이었다.

터진 부분을 봉합해 회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T-tube만으로는 담낭 염증을 완화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담낭을 남긴다면 고름이 새어 나와 도리어 증세만 악화시킬 것이다.

수술 전 세운 계획은 어떤 의미도 없었다.

방법은 오직 하나, 담낭 절제뿐이었다.

수술실이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개복, 혹은 미니콜레가 보다 안전할까?

심각한 갈등에 휩싸였지만, 기구가 삽입된 절개 창을 보는 순간 절대 선택할 수 없는 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불과 1센티미터도 안 되는 크기다. 기구에 의해 압박까지 받고 있는 절개 창 사이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거즈에 묻는 피의 양상이 심상치 않았다. 미미한 양이라고 해도 언제 멈출지 알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배를 크게 연다면 감당하기 힘든 출혈이 발생할 것이다.

출혈이 최대 문제로 다가왔다.

환자는 물론 수술 팀에게 악몽과 다름없었다.

간 기능 저하와 간염에 패혈증도 모자라 출혈까지 동반된다면 어떤 환자도 견디지 못한다. 무모한 시도는 차마 은비와 눈도 마주치지 못할 상황을 초래할 것이다.

누더기처럼 너덜너덜해진 담낭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김지훈이 이용철 과장을 보았다.

누구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선생님, 담낭 절제하고 담도에 T-tube 박아야 합니다. 개복은 선택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마취를 책임져 주십시오.”

마취 시간이 엄청 길어질 것이다.

이용철 과장이 지그시 이를 물었다.

수술 전 김지훈이 어떤 마음과 자세로 들어왔는지 들었다. 동의서에 찍힌 김지훈의 서명과 은비의 손도장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불가항력이라고 할지라도 마취 때문에 환자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후우! 내 생애 최고로 어려운 마취가 될지도 모르겠군.’

“마취와 바이탈은 내게 맡기고 진행해. 간호사, 혈소판하고 혈장 더 시켜요. 적혈구 농축액도.”

최악의 상황이었다.

김지훈이 이를 악물었다.

정석대로 갈 상황이 아니었다. 절대적으로 임기응변이 필요했다.

“석션!”

담낭에 난 구멍을 통해 고름을 제거했다.

끈적끈적 엉겨 붙어 모두 제거할 수 없었다. 심한 염증으로 담낭 벽이 너무 두꺼워져 담낭 크기조차 줄어들지 않았다. 정상보다 몇 배 부어오른 탓에 T-tube를 넣어야 할 담도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제거하는 수밖에 없어.’

수술 중 고름이 계속 새어 나오면 복강 내 감염을 유발한다. 일단 터진 부분을 모두 막아야 했다.

너덜너덜할 정도로 약해진 담낭에 김지훈의 얼굴이 심각하기만 했다.

“수처!”

첫 바늘을 찌르는 순간 담낭 벽이 쭉 찢어졌다. 모니터 화면을 지켜보던 수술 팀 전체가 얼어붙었다. 보이는 것 이상으로 훨씬 심각한 상태였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오직 김지훈의 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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