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76화 (776/1,329)

5화. 인연의 끈 Ⅱ (1)

불길한 생각은 말자.

이제 구미에서는 그럴 일이 없다.

강하게 도리질을 한 김지훈이 떡볶이에 집중했다. 고경아가 먹고 싶다는 것은 곧 배 속의 아이가 먹고 싶다는 말인데 한 치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다행히 휴대폰은 밤새 잠잠했다.

다음 날 아침, 천신만고 끝에 구한 떡볶이가 차갑게 식은 채 식탁 위에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어렵게 사 왔건만 아이가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 울고 싶다.

입맛을 쩝쩝 다시며 송진우와 학회 발표 준비를 하는 사이 어느덧 수요일 하루가 거의 다 저물었다. 지금처럼 편하고 할 일 없는 때도 없었다. 그 때문인지 슬슬 인사부터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과 세 달 남짓에 정 많이 들었다. 챙겨야 할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미리 인사할 겸 할 말도 있어 병동부터 찾은 김지훈이 간호사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최철한 선생님이 계신데 성민이가 왜 날 찾지?’

의아한 일이었다.

병동까지 전화해 찾았다면서 말만 전했다니 더욱 이상했다. 최철한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환자라고 해도 수술실이 아닌 이상 응급실에서는 그럴 일이 없었다.

“환자 있다는 말은 없었어요?”

“혹시 올라오시면 말만 전해 달라고 했어요.”

응급실에 전화해 이유를 물었다.

“글쎄요. 환자 한 분이 있긴 한데 최철한 선생님까지 다 오셨어요. 다시 찾으면 연락드릴게요.”

‘왜 찾은 거야?’

다른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휴대폰도 있고 환자 문제가 아니라면 급할 것 없다는 생각에 때 이른 인사부터 했다. 다들 무척 아쉬워했다.

“샘, 아쉬워요. 보고 싶을 거예요.”

“모레 회식하기로 했으니까 그때 봅시다. 언제 또 볼지 모르니까 시간 되면 꼭 와야 됩니다.”

“당연히 가야죠. 어디에서 해요?”

“싱글벙글이요.”

차례차례 퇴원해 이젠 몇 남지 않은 환자들을 꼼꼼하게 살피며 오후 회진을 돌았다. 가급적이면 구미 떠나는 날 전에 모두 퇴원시키고 싶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어차피 응급실도 들를 참이어서 수술실, 외래를 차례로 찾아 직원들에게 인사했다. 이제 세 밤만 더 자면 구미를 떠난다는 사실이 훅 다가왔다.

후련하면서도 아쉽고 서운한 마음까지 들었다. 구미와 첫 인연인 고경아까지 착잡한 얼굴을 해서 그런지 인사하는 내내 기분이 묘했다.

중환자실까지 들렀고 이제 응급실만 남았다. 내내 조용한 휴대폰이 왠지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벨 소리가 울렸다.

조성민이었다.

“전화했었다며? 무슨 일이야?”

꽤나 머뭇거렸다.

(죄송합니다. 담낭농증이 의심되는 환자가 내원했는데 상태가 심각하고 상황까지 복잡합니다. 어휴! 일단 직접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답답한 목소리였다.

웬만한 일이 아니면 연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심각한 상황이라도 최철한이 있는데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담낭농증이라면 응급이다.

“혹시 최철한 선생님 안 계셔? 무슨 일 있으시데?”

(지금 진찰 중이십니다. 개복이 어려운 상황이라 고민스러운데 보호자가 선생님을 찾습니다. 미성년자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미성년자라고 했다. 어른이어도 특별한 관계가 아니라면 찾을 일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일이나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개복이 어렵다니 전화로 해결할 일이 아니었다. 응급실로 향하는 내내 환자와 보호자가 누구인지 궁금함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다.

조성민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최철한이 다급하게 손짓을 했다.

‘이 자식은 그새 어딜 간 거야?’

“김 과장, 보호자는 조금 있다 만나고 환자부터 보는 게 좋겠어.”

환자를 본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이 새까맣고 삐쩍 말랐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특별히 생각나는 일은 없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환자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상태가 너무 심각해 일단 환자에게 집중해야 할 때였다.

고열, 오한, 심한 통증까지 패혈증이 의심될 정도로 증상이 심각했다. 복부 CT는 더 심각했다. 담낭 내 담석이 유발한 염증에 담낭이 터질 것처럼 부어올라 있었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혈액검사를 확인하는 순간 절로 헛바람이 터져 나왔다. 눈을 의심할 정도로 각종 수치가 최악이었다.

간 효소인 GOT/GPT(AST/ALT)가 각각 1,000이 넘었다. 백혈구 수치는 10,000을 훌쩍 넘어갔고 혈소판 수치는 비정상적으로 낮았다.

패혈증에 빠지기 직전이었다.

“급성 간염이 동반된 것 같아 A형, B형 검사 내보냈어. 혈소판 수치가 너무 낮아 수술이 가능할지 모르겠네.”

“이 상태에서 담낭 터지면 손도 못 쓸 겁니다. 염증이 너무 심해서 항생제로 가라앉힐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수술 방법은 생각할 것도 없었다.

“위험해도 빨리 T-tube 박고 끝내야······.”

김지훈이 말을 하다말고 CT에 시선을 주었다.

담낭만이 아니라 담도에도 돌이 있었다. 담즙 정체로 담도염까지 심해지면 간 전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 자체로 사망할 수도 있었다.

다시 한 번 간을 확인하는 순간 답답한 한숨이 터지고 말았다. 경증의 간경화까지 의심됐다. 경하다고 해도 간경화는 어떤 치료에도 반응하지 않은 비가역적인 변화가 이미 진행된 상태다.

검사 결과를 종합할 때 수술 자체가 가능할지 의심스러운 상황에 몰렸다. 간 기능 악화와 혈소판 부족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김현철이 새로운 검사 결과지를 들고 달려왔다.

A형 간염 양성이었다. B형보다 훨씬 치료가 잘된다지만 치명적이긴 마찬가지였고 너무 악화된 상태였다. 게다가 혈액 응고에 관한 검사들도 정상 범위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최철한이 눈가를 잔뜩 찡그렸다.

“담낭농증에 간 기능 저하, 패혈증, 응고 장애까지 발생했어. A형 간염에 간경화는 또 어떻게 하지?”

모조리 간에서 비롯된 합병증이었다.

사방이 꽉 막혔다.

“출혈 위험 때문에 개복 자체가 문제야. 무사히 T-tube를 넣는다고 해도 수술 후 회복을 장담하기 힘들어. 사망 가능성이 너무 높아.”

모든 상황이 단단히 발목을 잡았다.

유리한 면은 단 하나도 없었다.

진퇴양난이었다.

가장 갑갑한 사람은 최철한이었다.

“라파로로 할 수 있으면 그마나 나을 텐데 담낭만이 아니라 담도에도 돌이 있잖아. 담낭과 담도에 T-tube를 각각 넣는 게 기술적으로 가능하겠어? 담낭이 너무 많이 부어서 공간 자체가 안 나올 것 같다.”

부어오른 담낭이 담도를 완전히 덮고 있었다.

무리한 조작은 새로운 손상을 유발할 가능성만 높일 것이다. 운이 좋아 성공해도 경우에 따라서 담즙이 배출되어야 할 T-tube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수술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답답한 한숨만 터졌다.

“수술만이 아니라 내과 문제도 커. 정성호 과장님이 있지만 우리 병원 시설로는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아. 대구로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김지훈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병원의 규모나 의사의 한계를 떠나 손쓰기 힘든 환자를 보면 알 수 없는 짜증이 치솟았다. 환자에게 무엇이 최선인지가 가장 중요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찬찬히 문제점을 생각했다.

무조건 출혈을 유발하는 요인을 줄여야 한다.

수술 중 가해지는 손상 범위가 관건이었다.

담낭이나 담도 주변에 가해지는 손상만이 아니라 복부 절개 크기마저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개복의 한 방법인 미니콜레도 복강경보다 손상을 훨씬 많이 주기에 대안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복강경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게 보여 개복을 피하긴 힘들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비정상적인 검사 수치를 단박에 개선시킬 수도 없다. 수술 전, 수술 중, 수술 후를 막론하고 모든 의료 자원이 총동원돼야 하는 환자였다.

병원의 능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승민 환자가 떠올랐다.

더구나 곧 떠나야 하는 입장이다.

안타깝지만 빤히 보이는 구미 병원의 한계를 두고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최선의 방법은 최고의 치료를 제공할 수 있는 병원으로 가는 것이었다.

“퇴원할 때까지 절대 안심할 수 없는 환자네요. 무리한 면이 너무 많아 보입니다. 선생님께서 결정하시죠.”

고개를 끄덕인 최철한이 쓴 입맛을 다셨다.

“김 과장이 동의하니까 마음이 한결 가볍다. 성인 보호자가 아예 없는 상황이라 난감하네. 그건 그렇고 14살밖에 안 된 딸이 울면서 김 과장을 찾았어. 어떻게 아는지 모르지만 일단 만나 봐. 난 그동안 원무과하고 상의해서 방법을 찾아볼게.”

미성년이라고 해도 14살이라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14살이요? 이제 중학생이네요. 큰일 났네. 정말 성인 보호자가 한 명도 없대요?”

“아버지하고 단둘이 살았나 봐.”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연고 없는 환자 혹은 보호자가 있어도 미성년인 환자를 가끔 본다. 수술이 필요한 경우 그보다 난감하고 답답한 경우는 없다.

누군가 책임지고 동의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14살 나이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사망 가능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보호자를 보기도 전에 측은한 마음이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일단 만나 봐야 했다.

잠시 후 송진우와 오하석이 작은 소녀를 데리고 들어왔다. 눈가가 물기로 얼룩져 있었다. 이제 중학생이기에 즐거움이 가득해야 할 눈동자에 공포와 두려움만이 보였다.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결코 낯설지 않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흐릿하기만 했다. 어떻게 김지훈이란 이름이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학생이 환자 분 딸이구나. 내가 김지훈인데 찾았다고?”

“김지훈 선생님?”

마치 기억을 더듬듯 김지훈의 얼굴을 보던 소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갑자기 잔뜩 겁에 질린 서러운 울음이 터졌다.

“선생님, 우리 아빠 살려 주세요. 제발요. 제발요.”

가운을 잡고 매달렸다.

마음은 알지만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생면부지라면 찾았을 리도, 보자마자 울었을 리도 없을 것이다. 이름이라도 알면 혹시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오를지도 몰랐다.

급히 송진우에게 눈짓했다.

환자 차트를 들고 왔다.

송철성. 43세 남자.

“환자 분 말고 이 학생 이름 없어?”

그때 14살 소녀가 울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저 은비에요. 은비.”

단 한 마디가 똑똑하게 들렸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은비? 내가 아는 은비?”

“제가 은비에요. 선생님, 우리 아빠 살려 주세요. 제발요. 제발.”

은비의 울음에 손가락 하나 까딱일 수 없었다.

기억 속 저편에 자리 잡고 있던 옛 기억이 떠올랐다.

물에 빠져 익사 직전에 실려 온 아이, 몇 날 며칠을 밤새 지켜보며 눈을 뜨길 간절하게 빌었던 나날, 허름한 옷에 흙 묻은 차림으로 달려와 한시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던 아버지, 송은비와 아버지는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제야 얼굴이 보였다.

결코 낯설지 않았던 이유를 알았다.

“은비 너구나. 네가 이렇게 컸구나. 날 기억하고 있었어?”

김지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빠가 절대 선생님을 잊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절 살려 주신 것처럼 우리 아빠도 살려 주세요. 제발요. 우리 아빠 살려 주세요. 제발요.”

작은 소녀가 엉엉 울었다.

너무도 서러운 울음에 입을 열 수 없었다.

아빠만 믿고 살았을 텐데 얼마나 무섭고 아플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은비를 빤히 보고도 몰라봤다니 안타깝고 안쓰럽고 미안했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은비를 안았다.

“선생님! 선생님!”

“은비야, 울지 마.”

의식까지 흐려진 아버지와 옛 기억이 중첩되는 순간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작은 소녀의 가녀린 등을 두드려 주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필이면 왜 은비 너니.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할 네가 왜 또 내 눈앞에 나타난 거야.’

찡한 코끝에 입술을 깨물던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 감정에 휘말렸다.

인연을 기억한다면 누구도 피할 수 없을 일이었지만 불행히도 지금은 환자를 앞에 둔 의사였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귀중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은비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은 아버지를 치료하는 것뿐이었다. 어깨를 토닥이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측은하고 미안한 감정이 뒤섞여 쉽지 않았다.

‘개복은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어. 라파로가 최선이다. 동시에 튜브 두 개를 넣을 수 있을까? 동의서는 어떻게 해야 하지? 만약 문제라도 생기면 감당할 수 있을까? 사흘 후면 떠나야 하는데 내가 수술하는 게 맞는 일인가?’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원무과와 상의를 마친 최철한이 다가와 힐끗 은비를 보며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송을 미루면 미룰수록 위험하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뭔가 깊은 사연이 있어 보였지만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김 과장, 어떻게 아는지 모르지만 빨리 보내자. 이송 시간에 대구 병원에서 지체될 시간까지 생각하면 더 이상 여유가 없어.”

대구라는 말에 은비의 울음이 더욱 서러워졌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의지할 사람 한 명 없이 홀로 있어야 할 14살 소녀의 두려움이 절절하게 다가왔다.

방법이! 방법이!

김지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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