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인연의 끈 (2)
스케줄부터 조정해야 했다.
“최철한 선생님, 이번 주부터 월화수 수술하시고 다음 주에는 모든 진료와 수술을 다 맡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당직 문제도 염두에 두시고요.”
“후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성민이, 만석이, 현철이 교육 잘 시켜 줘서 고맙고 나도 정말 고마워.”
때 이른 인사였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별말씀을 다하시네요. 남은 2주 동안 혈관에도 주력하셔야 합니다. 얼마나 중요한 수술인지, 신부전 환자들이 얼마나 예민한지 잘 아시잖아요.”
은근한 긴장이 감돌았다.
구미 일반외과의 역량을 정확히 파악해야 했다. 특히 3명의 전공의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와 개개인의 능력을 아는 것이 무척 중요했다.
“논문 때문에 성민이에게 라파로 하나 준다고 약속했습니다. 아직 빠른 면이 있어서 선생님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술 때 부분부분 시켜 보시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적절한 케이스가 있는지 신경 써 주세요.”
전공의가 복강경 집도를 한다니 서울에서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약속했고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이제 복강경은 새로운 시도가 아니라 대세 중의 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단, 제 아무리 이유가 많다고 해도 무모한 시도는 금물이었다. 아무런 대비와 준비도 없이 메스를 주는 것은 대단한 부담이자 위험이었다. 조성민은 자신의 능력을 먼저 증명해야 할 것이다.
송진우, 오만석, 김현철도 챙겨야 했다.
상황이 허락하는 한 메스를 건넸다.
아뻬 환자를 비롯한 마이너 수술?
“김현철, 준비해.”
위궤양 천공 환자 등 준 메이저 수술?
송진우가 먼저 메스를 받았고 오만석 역시 열심히 해 왔기에 줄 때가 됐다.
“오만석, 준비해.”
“선생님, 진우 주시고 전 다른 수술 주시면 안 됩니까? 선생님 가시기 전에 꼭 해 보고 싶은 수술이 있습니다.”
확실히 직설적이고 대범한 놈이었다. 전공의가 감히 수술을 선택하다니 큰소리가 날 일이었지만 김지훈은 웃기만 했다. 무슨 말인지 알만 했다.
오만석의 양보 아닌 양보에 송진우만 좋아 죽었다. 무언의 언질을 받은 조성민이 복강경에 모든 신경을 쏟은 덕에 때 아닌 칼바람까지 붙었다.
같은 년차는 초조해질 수밖에 없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전화벨 소리만 울리면 오만석이 어느 틈엔가 응급실에서 가운을 휘날리고 있었다. 원하는 수술이 안 뜨는지 갈수록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열의는 좋다만 너한테 딱 맞는 케이스가 있어야지. 바이탈이 문젠데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김지훈이 오만상을 하고 있는 오만석을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누구나 그렇지만 오만석 역시 전공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후배임이 분명했다.
최철한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달리는 후배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첫 혈관 수술이 끝나자마자 불길과 비수가 동시에 날았다.
“선생님, 혈관은 라파로 할 때보다 더 신중하고 정교해야 합니다. 오늘만 해도 서너 번 이상 제 눈에 밟혔습니다. 신기동 선생님이었으면 다신 수술 안 주셨을지도 모릅니다. 루뻬 끼고 실전처럼 연습하세요.”
여기까지는 그래도 양반이었다.
이어진 말에 쥐구멍을 찾고 싶었다.
“환자가 혈관을 3년 이상 사용할 수 없다면 애초에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우리의 경험이나 욕심 때문에 환자가 피해를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이었다. 김지훈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지극히 당연하고 맞는 말이기에 단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남은 한 명은 무사할까?
이번 주 첫 복강경 수술이 시작될 때만 해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은근한 긴장 속에 차분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다음 주에는 김지훈의 수술을 보기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조성민도 눈가에 바짝 힘을 주었다.
수술을 시작한 지 채 5분도 안 돼 김지훈이 손을 멈췄다. 모니터 화면을 보며 잠시 주변 조직 상태를 살핀 김지훈이 뜻밖의 말을 했다.
“조성민, 이 부분 박리해 봐.”
깜짝 놀란 조성민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논문을 쓰며 복강경을 주겠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남몰래 기구 연습도 피나게 했다. 하지만 실전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조성민이 눈가를 굳히며 집도의 자리에 섰다.
기구를 잡는 자세가 안정적이었다.
조심스럽게 간과 담낭 사이를 박리했다. 수없이 봤고 수없이 그려 본 과정인데 결코 쉽지 않았다. 1분도 안 돼 이마에 땀이 맺히고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김지훈은 조용히 지켜만 보았다.
계속 진행하라는 의미였다.
‘떨지 말고 침착하게 해. 손대신 기구를 사용할 뿐이야.’
서걱! 서걱!
불과 1-2 센티미터 정도 박리했다. 손에 익은 줄 알았던 기구가 도리어 낯설어졌다. 김지훈과 최철한의 실력과 노력이 어느 정도인지 이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김지훈이 냉정하게 판단했다.
‘이 정도면 노력은 충분하게 했네. 조금 더 진행시켜도 되겠어.’
조금씩 수술 부위가 깊어졌다.
아슬아슬하게 박리해 나가던 조성민이 가중되는 어려움에 훅 숨을 내뱉었다. 염증이 심하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지금까지 심각한 출혈이 발생하지 않은 것이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가슴이 뛰고 갑자기 욕심도 났다.
할 수 있다는 용기까지 치솟았다.
그 순간 냉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까지.”
아쉽기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지만 기구를 이용해 직접 박리해 보았다는 사실 자체로 붕 떴다. 수술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흥분을 지나칠 김지훈이 아니었다.
“조성민, 집중해.”
급히 들뜬 마음을 다잡은 조성민이 수술에 집중했다. 기구를 잡아 본 덕인지 김지훈이 손놀림이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손을 한 번 넘겼지만 예정 시간을 크게 넘기지 않았다. 다음 환자를 기다리는 사이 휴게실이 활활 불타올랐다. 너나 할 것 없이 탔지만 조성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전공의에겐 좀처럼 시전하지 않았던 비수까지 날렸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조성민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수술 처음 해 봐? 라파로가 무슨 대수라고 집중을 잃어? 너 그래서 메이저 수술할 수 있겠어? 환자 잡기 전에 정신 바짝 차려. 기본도 못 지킬 거면 수술할 생각하지 마. 써전이란 놈이.”
기술적인 부분 이상으로 기본을 강조했다.
“집도 경험도 없이 논문 쓸 거야? 나한테 수술 못 받으면 최철한 선생님에게도 못 받아. 더 노력해. 이제 곧 4년차 치프야. 4년차. 이래서 후배들 가르칠 수나 있겠어?”
소각장이 얼어붙었다.
다음 환자가 내려올 때까지 조성민이 입을 열지 않았다. 너무도 심각한 표정에 오만석까지 눈치를 볼 정도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눈가를 잔뜩 찡그린 채였다.
‘언제 또 기회를 또 주실지 모르지만 일단 박리 부분에 확실하게 집중하자. 내가 그 부분에서 뭘 잘못한 거지?’
눈 부릅떴다.
그리고 또 한 번 놀랐다.
기회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다시 한 번 해 봐.”
동일한 부분의 박리 과정을 받았고 결과는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단 두 번의 경험으로 익숙해질 과정이 아니었다. 마침 연락을 받고 참관을 들어온 최철한까지 가세했다.
“성민아, 처음 해 본다는 건 핑계가 안 돼. 너까지 이러니까 우리 앞날이 깜깜해지는 것 같다. 정신 차리자.”
부드러운 말이 순식간에 사나운 불길이 변했다.
푸스스!
재를 흩날리면서도 조성민이 불끈 주먹을 쥐었다. 송진우와 오만석의 부러움 가득한 눈빛을 보는 순간 자신이 얼마나 큰 기회를 잡았는지 확실하게 깨달았다.
혈관 수술이 이어졌다.
최철한이 수술 과정을 상기하며 핵심 부분을 짚었다. 당장 혼자 하라면 할 수 있겠지만 확실하게 끝낼 수 있다는 자신이 부족했다.
정말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혈관 수술을 끝냈다. 김지훈과의 평가를 끝낸 최철한이 입맛을 다시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지적할 부분이 많다는 사실에 아팠다.
덤으로 불길과 비수만이 아니라 조근조근한 목소리도 얼마나 아플 수 있는지 알았다. 김지훈에게 배워야 할 목록에 수술만이 아니라 태우는 기술도 들어갔다.
‘이건 이혁민 선생님만의 초식인데 별걸 다 구사하네.’
김지훈 역시 여러 교수들에게 사무칠 만큼 탔다는 말이었다. 그 속에 담긴 것을 스스로 깨닫고 고쳐 왔기에 지금의 손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일도 곧 추억이 된다.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기에 아쉬운 마음이 더 컸다. 문득 지난 두 달 반 동안 일반외과가 얼마나 단단해졌는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하루하루가 빠르게 흘렀다.
금요일 저녁, 고경아와 함께 일반외과만의 조촐한 회식을 가졌다. 지난 두 달을 회상하고 축하 소리 듣는 사이 하룻밤이 훌쩍 지났다.
“제수씨, 축하해요. 하석아, 너도 서울 올라가서 열심히 해. 픽스턴(Fixtern) 돌 때 찍히면 4년이 괴롭다.”
이제 일주일 남았다.
주말 당직을 끝으로 김지훈과 송진우의 당직도 마지막이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토요일 일과를 끝내고 서둘러 관사로 향하던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마지막 당직 날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휴대폰이 울렸다.
응급실에 들어섰다.
송진우와 김현철의 손이 무색할 정도로 오만석이 환자 처치에 매달리고 있었다. 약간 빨라진 박동 소리와 다소 창백한 안색은 바이탈이 흔들리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암시했다.
어느새 복부 CT까지 찍었다.
노티받은 대로 비장 파열이었다. 잦아드는 박동 소리와 함께 한동안 이어지던 처치실의 부산함이 사라졌다. 오만석이 상기된 얼굴로 다가왔다.
“선생님, 바이탈 잡았고 수술 준비 끝난 상태입니다.”
송진우에게 수술을 양보할 정도로 하고 싶었던 수술이었다. 열망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이를 모르지 않았지만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고민하고 결정해야 했다.
다행히 비장 손상은 심각하지 않았다.
“복막염 증세는 없어?”
“현재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장 파열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취과 준비되는 대로 시작하자. 송진우, 만석이랑 먼저 올라갈 테니까 환자 잘 보고 있어.”
수술복으로 갈아입은 후 오만석과 마주했다.
미주알고주알 묻고 답할 시간이 없었다.
“이 환자 수술 계획 말해 봐. 핵심 과정만 말해.”
“예. 일단 비장과 간을 먼저 확인한 후 대장 및 소장 손상 유무를 파악해야 합니다. 간 손상이 없다면······.”
줄줄줄 수술 계획이 쏟아져 나왔다. 왜 그토록 응급실에서 땀을 흘렸는지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환자를 자신의 손으로 살리고 싶다는 열망이 뚝뚝 묻어 나왔다.
‘이 정도면 할 수 있겠어.’
속마음과는 달리 김지훈이 매섭게 몇 곳을 지적했다. 오만석이 눈가를 잔뜩 찌푸린 채 커다란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쳤다.
“미처 생각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환자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안 통해. 비장 파열 환자 수술 잘못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잘 알잖아?”
메스를 넘길 수 없다는 의미였다.
냉랭한 말에 오만석의 고개가 푹 떨어졌다. 그러나 단순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범한 성격이다. 환자가 올라올 때까지 구석에 서서 중얼중얼 수술 과정을 되풀이했다.
써전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자세이자 각오였다. 짧은 기간이지만 수술 실력도 가늠했다. 무엇보다도 비장 손상이 크지 않다는 점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환자가 올라왔다.
어깨를 으쓱거린 오만석이 김현철와 함께 수술 준비에 몰두했다. 실망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눈을 크게 뜨며 집중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마음에 든다. 외상 환자에게 저 정도로 열정적인 놈은 처음 봤네. 드문 기회가 오긴 왔다.’
마취가 끝나고 각자 자리에 서려는 순간 김지훈이 툭 고갯짓을 했다. 말도 하기 전에 오만석의 눈이 번쩍였다.
“오만석, 준비해. 네가 하고 싶다는 수술이야. 제대로 못하면 내가 없더라도 다신 기회가 없을 거야.”
“감사합니다.”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 이용철 과장이 깜짝 놀라며 손가락질을 했다. 오만석이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하고는 집도의 자리에 섰다.
역시 수술 스타일은 성격과 비슷한 법이다.
과감하게 비장을 절제하고 소장 파열까지 빠르게 진행했다. 처음 하는 수술인데 겁을 내기는커녕 완전히 몰두해 눈 한 번 돌리지 않았다.
기대에 부응했다.
커다란 손으로 깔끔하게 잘 끝냈다.
만족스러운 얼굴을 감춘 김지훈이 조용히 휴게실로 들어갔다. 화염방사기를 능가하는 불길에 휩싸일수록 오만석이 눈빛은 더욱 강하게 빛났다. 재로 변한 오만석이 송진우를 보자마자 씨익 웃으며 만세를 불렀다.
단순, 무식, 대범, 착각.
과연 어느 쪽일까?
주말 내내 환자가 밀려들었다.
김지훈이 거의 모든 수술에서 메스를 넘겼다.
피곤이 가중되고 휴게실이 피바람에 휩싸였지만 전공의들의 입이 쩍쩍 벌어졌다. 기대가 너무 넘친 오만석이 수시로 응급실에 전화를 할 정도였다. 그렇게 밥값 제대로 한 마지막 당직이 끝났다.
드디어 마지막 주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첫날부터 의외의 부작용이 발생했다.
모든 진료와 수술을 최철한이 맡게 되자 환자들이 불평을 터트린 것이다. 일부 환자는 복강경 전문의에게 수술을 받고 싶다며 항의까지 했다.
진땀 빼며 사정을 설명했다. 환자들의 만족도는 말이 아니라 결과에 달렸다. 다행히 최철한의 실력은 처음과 비교하기 힘들었고 매 수술 깔끔하게 끝냈다.
“구미 병원 정말 많이 변했네. 예전에는 형편없었는데 실력 좋은 의사들이 많아졌어.”
“내가 그랬잖아. 최철한 선생님도 서울에서 수술 잘하기로 유명했다고 안 했나?”
소문이 증폭되며 선순환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세상인심과 말은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와 같다는 말이 실감났지만 무조건 바람직한 일이었다.
다들 자신의 자리를 확고하게 찾았고 만족할 만큼 바람을 이루었지만 조성민은 마지막 선을 넘지 못했다. 그래도 복강경 수술의 주요 과정은 한 번 이상 다 해 봤다.
이제 연결만 하면 되기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둘 마무리하고 정리한 김지훈과 고경아가 어느 때보다 편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당직은 모두 최철한의 몫이었고 수술 방 이 간호사도 이젠 자신의 몫을 하고도 남았다.
“꼭 휴가 온 것 같네.”
일복은 병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훈 씨, 나 떡볶이 먹고 싶어요.”
밤 10시가 넘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서정호의 말도 잊지 않았다.
“사 올까요? 나가서 먹을까요?”
손만 까딱까딱 흔들었다. 놀라운 속도로 사라지던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응급실을 지나치는 순간 뭔가 께름칙한 기분이 다가온 것이다.
그동안 일복의 근원은 병원이었다.
금방이라도 전화벨이 울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