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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774화 (774/1,329)

4화. 인연의 끈 (1)

얼떨떨한 표정을 짓자 이경석이 눈을 찡긋거리며 활짝 웃었다. 이젠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는 얼굴이었다.

송재덕 교수, 박승준 교수, 이경석.

얼굴 못 본 사이 같은 관심과 열정을 공유하기 위해 서로가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가장 어색하고 힘들었을 박승준 교수가 새롭게 보였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지동훈 교수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김 교수, 기다려 줘서 고마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하윤호부터 다 고마워. 신현수 선생하고 나도 부탁할게. 우리 파트에서 라파로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같이하자.”

조용한 미소에 걸린 의미가 시나브로 다가왔다. 기분이 급격하게 좋아졌다.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제자리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문인지 식당이 왁자지껄했다.

유난히 생기가 넘치는 것 같았다.

“선생님, 사위 때문에 기분 좋으시겠습니다. 지훈아, 경아는 왜 안 오니? 왜? 고성문 선생님까지 오셨는데 왜 안 보여? 무슨 일 있어?”

“허험! 송 원장, 많이 피곤해 보여서 내가 오지 말라고 했어. 와야 밥밖에 더 먹어? 쉬어야 할 것 같아.”

“그래요? 많이 아픈 건 아니죠? 근데 넌 누구니? 너 처음 본다. 처음. 우리 과 인턴이야? 진우야, 얘 누구니?”

송재덕 교수의 눈에 송진우 옆에 앉아있던 단발머리가 딱 걸렸다. 이제야 오하석을 본 모양이었다. 본의 아니게 참석해 제대로 인사도 못했을 것이다. 김지훈의 눈짓에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인턴 오하석입니다. 현재 구미에서 근무 중이고 일반외과 지원했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미 지원 사실을 모두 알고 있을 텐데 모두들 새삼 반색했다. 교수들이 오하석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올해도 미달이 염려돼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인데 첫 여자 인턴 지원이라니 꽤 놀랐을 것이다.

“그게 너였구나. 너. 하석이. 오하석 맞지? 이리 와서 여기 앉아. 여기. 구미 갔을 때 왜 널 못 봤을까? 왜 못 봤지? 수술실에 들어왔었니?”

“예. 들어갔었습니다.”

“그랬구나. 그랬어. 어쩐지 얼굴 보는 순간 감이 딱 오더라. 야! 너 머리도 짧은 게 천생 외과 의사다. 외과 의사. 키도 나랑 비슷한 게 좋다. 좋아. 근데 이름이 뭐라고?”

“오하석입니다.”

“그래. 니가 하석이구나. 하석이. 잘했다. 잘했어. 대장하자. 대장. 첫 대장 외과 여의사. 얼마나 멋지니? 멋지다. 멋져. 하석아, 네가 하석이 맞지?”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는지 어지러울 정도로 오하석이란 이름과 대장 소리를 반복했다. 송재덕 교수가 콕 찍었으니 4년 내내 귀가 따갑도록 들을 것이다.

“근데 그놈은 일 잘하니? 너랑 무슨 관계야? 오빠야?”

이런 질문 많이 들었다.

“오만석 선생님이요?”

“그래. 그래. 나쁜 놈, 버르장머리 없는 놈, 덩치만 큰 놈. 그놈 말이야. 에휴! 말하기도 힘들다. 앞으로 놈놈놈이라고 불러야겠다. 놈놈놈이 오빠구나. 오빠. 만석이 하석이. 좋다. 좋아.”

“친오빠는 아니고요 그냥 성만 같습니다.”

“어쩐지 네가 나만해서 이상하다 했다. 허허허! 놈놈놈이 오빠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놈 닮으면 큰일 난다, 큰일. 막 나가면 안 되잖아? 막. 그치? 내말이 맞지?”

남자 중에서 꽤 작은 송재덕 교수가 여자 중에서 꽤 작은 오하석을 보며 좋아 죽었다. 어째 웃는 얼굴마저 비슷한 것 같았다.

여의사의 이점일까?

교수들의 반응이 확실히 달랐다.

시선 집중, 관심 폭발이었다. 체력 문제부터 여자만이 갖는 불리함까지 거론됐다. 조용히 듣고 있던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파격적인 말을 했다.

“우리 과에 속 좁은 놈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한 달에 한 번은 눈치 보지 말고 쉬어라.”

“감사합니다.”

오하석도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의사라는 직업이 갖는 특성 덕에 이런 점에서는 남녀라는 사실에 구애받지 않았다.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배려해야 하는 일이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지만 말이다.

“좋은 생각이네. 이젠 나이 먹어서 곧 끝나겠지만 우리 와이프도 많이 힘들어 해.”

신기동 교수까지.

펠로우와 전공의는 찬밥이었다. 심지어 오늘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김지훈도 대화에 끼지 못했다. 본의 아니게 젊은 피끼리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선생님! 그런 수술을 구미에서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왕 하실 거면 여기에서 하셨어야죠. 송진우, 너 운도 좋다.”

“정이 식으신 거지, 뭐.”

“진우를 데리고 가신 이유가 이거였다면 전 정말 실망입니다. 선생님, 올라오시면 무조건 제가 퍼스트를······.”

“강병옥 선생님, 찬물도 위아래가 있습니다.”

이혁원이 강력하게 항의하자 나종진에 강병옥까지 가세했다. 이제 곧 3, 4년차가 된다는 사실에 겁을 상실한 말까지 나왔지만 그만큼 친하게 지냈다.

절대 미안한 일이 아니건만 김지훈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쩔쩔 맸다. 이내 수술 얘기가 나오자 눈이 빠릿빠릿해졌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말과 돌아서면 잊어도 되는 말들이 오갔다.

마음 편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시간이 꽤 지났다. 자리를 끝내야 할 무렵 이준영 교수가 조용히 손짓했다. 대화 삼매경에 빠져 있던 김지훈이 본능적으로 달려갔다.

“경아는 괜찮은 거지? 왜 안 왔어?”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처럼 기쁜 일이었다. 떠벌릴 일이 아니라지만 스승에게는 알려도 좋을 것이다.

“사실은······.”

귓속말에 이준영 교수가 나직한 헛기침을 터트렸다. 축하한다는 한 마디 말쯤은 할 줄 알았는데 눈길 한 번 주고 끝이었다. 고성문도 고경아에 관한 말은 하지 않았기에 튀어나오는 서운함을 쑥 집어넣었다.

간만에 가진 자리가 끝났다.

인사까지 다 하고 교수들이 떠나기를 기다렸다.

송재덕 교수가 고성문에게 슬쩍 다가가 뭔가를 말했다. 무슨 말인지 고성문이 활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함께 있던 교수들의 시선이 김지훈에게 향했다.

“축하한다. 몸조리 잘하라고 해.”

“지훈아, 교수야, 이제 진짜 어른이 되는구나. 애 키우는 거 힘들다. 힘들어. 앞으로 밥 얻어먹으려면 경아 많이 아껴 주고 도와줘야 된다. 잘했다. 잘했어.”

축하 소리가 쏟아졌다.

송진우의 입인지 후배들까지 우르르 몰려들어 별소리를 다 해 댔다. 얼굴이 화끈거리면서도 기분이 붕 떴다. 그런데 가장 축하해 주어야 할 이준영 교수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말도 없이 사라질 스승이 아니었다.

‘어디 가셨지?’

잠깐의 소란이 가라앉고 하나둘 집으로 향했다. 이혁원과 나종진이 무척 아쉬워했지만 2차를 외칠 분위기가 아니었다. 지금은 마님에게 집중해야 할 때였다.

“선생님,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술 한잔해야 하는데 미안하다.”

“아닙니다. 선생님은 들어가셔야죠. 괜히 술 먹었다가 쫓겨나시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맞는 말이다.

“그래. 들어가. 진우야, 하석아, 내일 3시쯤 출발하자. 병원 앞으로 와.”

입가에 웃음이 잔뜩 걸린 고성문이 다가왔다.

“김 서방, 가자.”

“아버님, 이준영 선생님이 안 보이시네요. 기다렸다가 인사드리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아까부터 안 보이네. 어딜 간 거야?”

그때 어디서 많이 본 차 한 대가 섰다. 스르륵 창문이 열리며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지훈, 경아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이것저것 샀다. 고성문 선생님, 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어! 고마워. 조심해서 가.”

김지훈이 멍하니 멀리 사라지는 차를 보았다.

과일 바구니 하나와 꽃다발을 들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꽃 가게와 과일 가게는 보이지 않았다. 은은히 풍겨오는 꽃향기 속에 스승의 마음이 실려 있었다. 한겨울 찬바람이 스르르 자리를 비켜 주었다.

온 가족이 다 모였다.

일이 바빠 집에도 제대로 못 들어가는 서정호,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친형 같은 정훈철과 한수임까지 얼굴을 보였다.

임산부 두 명을 상석에 앉히고 대화의 꽃을 피웠다.

고경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고경순이 덩달아 또 한 번 축하를 받았다. 아직 출산은 멀었지만 언니이자 임신 초기를 지난 선배로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최문옥 여사와 한수임이 좋을 때라는 말을 연발했다. 입가에 걸린 미소를 보니 기쁘고, 행복하고 가슴 벅찼던 때가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김지훈도 덕담과 함께 때 이른 축하주 많이 받았다. 즐거워 어쩔 줄 모르는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모습에 행복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아이를 낳은 것도 아니고 가졌을 뿐인데 너무 고마웠다. 왠지 지나치다는 생각에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서정호의 말에 정신 바짝 차렸다.

“동서, 내가 이런 말하기 그렇지만 집에 꼭꼭 들어가. 잘못하면 찬밥 정도가 아니라 이혼 당한다. 먹고 싶은 거 있다면 무조건 사 가고 혹시 입덧 심하게 하면 옆에서 비상대기 해. 그래야 인생 편해진다.”

정훈철의 말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지훈아, 좋은 친구,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없는 핑계도 일부러 만들어서 만나는 게 세상이야. 우리 그 정도 사이는 되잖아? 서 검사, 안 그래?”

“그럼요.”

“그런데 왜 원주로 안 가고 서울로 왔어.”

“발표가 있어서 겸사겸사 올라왔습니다.”

“학회 있었어?”

별생각 없이 수술에 관한 말을 꺼냈다. 조기 대장암을 반 복강경, 반 개복으로 시행했다는 소리에 정훈철이 상당한 흥미를 보였다.

“요새 복강경이 대세로 떠오른다고 하던데 암 수술까지 가능하단 말이야? 그 수술 여러 병원에서 하나?”

“글쎄요. 다른 수술은 몰라도 대장암 수술은 학회에서 발표해 봐야 알 것 같습니다. 복강경으로 완벽하게 한 게 아니기 때문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되네요.”

“그래? 난 잘 모르지만 대단하게 들린다. 어쨌든 다른 의사들이 시행한 수술은 아니라는 말이잖아.”

서정호가 거들었다.

“형님, 처음이라면 대단한 정도가 아니죠. 어느 분야나 선구자가 제일 중요하지 않습니까?”

“선구자? 서 검사 말이 맞네.”

김지훈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말해 놓고 보니 자기자랑 같았다.

“별거 아닙니다. 스승님 앞에서는 말도 못 꺼냅니다. 환자에게 도움이 됐다는 게 다행이죠.”

“스승님?”

“이준영 선생님이요. 제 영원한 스승님이십니다.”

정훈철의 눈이 반짝였다.

무슨 이유인지 학회 장소와 날짜까지 물었다.

김지훈이 손사래를 쳤다.

살벌한 질문이 쏟아질 텐데 카메라 앞에서 망신을 당할 수도 있었다. 아직 정립되지 않는 수술법이기에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도 한몫했다.

“형님, 혹시 카메라 들고 오시려고요? 어휴! 저 울렁증까지 있습니다.”

“김 교수, 요즘 들어 사람들이 건강과 의학 정보에 얼마나 민감해진 줄 알아? 우리 일 중 하나가 정확하고 유익한 정보를 전달하는 거야.”

대꾸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권한이 있다고 해도 학회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사이 모든 절차를 해결하고 카메라까지 들고 오진 못할 것이다.

“지훈 씨, 잠깐 나 좀 봐요.”

때마침 오늘의 주인공 고경아 마님의 말이 들렸다.

잽싸게 하명한 일을 마치고 가족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한동안 즐거운 자리가 이어졌다. 밤이 늦어서야 정훈철 부부가 일어났고 서정호와 고경순도 집이 편하다며 함께 일어섰다.

배웅을 하고 들어서는 길에 고성문이 김지훈을 불렀다.

“김 서방, 고마워.”

“예? 아닙니다. 제가 장인어른께 감사하죠.”

“그런가? 그 마음 평생 잊지 마.”

다음 날 점심까지 함께하고 구미로 향했다.

김지훈이 고경아의 손을 꼭 잡은 채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고성문이 맛있는 거 사 주라며 찔러 준 봉투가 무척 무거웠다. 마지막까지 고경아와 자신을 챙기던 최문옥 여사의 마음은 그 이상으로 가슴에 박혔다.

“김 서방, 밥 꼭 챙겨 먹어. 건강이 최고야. 경아야, 지금은 약도 못 먹을 때니까 감기도 안 걸리게 조심해야 한다.”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모두 사랑하는 사람이자 아무 때나 찾아가도 활짝 웃으며 반겨 주는 좋은 친구였다. 그 모든 인연이 다 고경아에게서 비롯됐다.

“사랑해요.”

뒷자리에 누가 있는지 생각지도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눈물 나게 행복한 이틀이었다. 송진우는 얼굴이 벌게졌고 오하석은 부러워 죽겠다는 눈치였다.

언감생심.

이제 시작하는 놈들이 결혼 3년째에 접어드는 김지훈과 고경아를 넘보다니 아직 멀고도 먼 일이었다.

마지막 2주 남았다.

일주일 후에는 최철한이 모든 일을 주관하고 책임져야 한다. 남은 기간 동안 가장 중점을 두어야 할 일은 복강경과 혈관 수술 그리고 전공의 교육에 관한 마지막 점검이었다.

수술해 놓고 집도의가 사라지면 환자 불안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제 슬슬 손을 떼 진료와 수술부터 조정해야 한다. 한결 편해질 것이다.

두 달 반에 걸친 치열하고 힘들었던 시간에 대한 보상일지도 몰랐다. 시작만큼 중요한 것이 끝이다. 달콤한 보상을 즐기려면 긴장 풀지 말고 확실하게 마무리 지어야 할 것이다.

최철한과 머리를 맞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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