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인생 최고의 행복. Ⅱ (1)
부리나케 안방으로 들어갔다.
“경아 씨, 혹시·······.”
고경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원래 불규칙하잖아요. 이럴 때가 힘들어요.”
“그것 때문인지 어떻게 알아요?”
“아휴! 내가 내 몸 모르겠어요? 때가 돼서 그래요.”
시점이 딱 맞아 들었다. 자기 몸 자기가 제일 잘 알면 병이 깊어져 오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시계를 본 김지훈이 옷을 입고는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일분일초가 급했다.
테스트기다.
사용 설명서에서 하라는 대로 하고 앞에 앉았다. 그럴 리 없다는 고경아도 잔뜩 긴장한 얼굴로 눈을 떼지 못했다.
5-6분 사이에 결과가 나온다고 했다.
두근두근! 벌렁벌렁!
마치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것처럼, 합격 결과를 기다리는 것처럼, 연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째깍! 째깍!
5분이 이렇게 길 줄은 몰랐다.
이러다 몸속에 사리가 생길지도 몰랐다.
시계 한 번, 테스트기 한 번.
딸깍 분침이 움직였다.
드디어 5분이 지났다.
아무 변화도 없었다.
한 줄이든 두 줄이든 줄이 나타나야 임신 여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불량품은 아닐 것이다. 아니, 어쩌면 불량품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조금 더 기다려 보자.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째깍! 째깍!
고경아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 보라는 표정이었지만 내심 꽤 실망스러운 모양이었다. 이런 경험 김지훈은 숱하게 많다.
아! 임신 테스트가 아니라 환자를 보며 말이다.
침착하자.
아직 30초가 더 남았다.
초침이 6분을 향해 달려갔다.
이제 10초 후면 분침이 움직인다.
“아닌가 봐요. 내가 원래 생리가 불규칙할 땐 몸 상태가 이렇다니까요.”
고경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빨간 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 줄이면 실망이 이만저만 아닐 것이다.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 묻히는 순간 마치 신기루처럼 나란히 두 줄이 나타났다.
매직이다!
고경아가 또 하나의 매직을 만들어 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경아를 꼭 잡은 손이 왜 떨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두근거리던 심장이 불방망이처럼 뛰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말 한 마디 할 수가 없었다.
와락 고경아를 안았다.
폭 안긴 고경아도 몸을 떨고 있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한동안 서로를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서로에게 고맙고 감사하다는 마음뿐이었다. 빨갛게 나타난 두 줄이 더욱 깊은 사랑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고경아가 김지훈의 품을 파고들었다.
“이상해요.”
“뭐가요?”
“내 안에 우리 아이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냥 눈물이 나요. 너무 기쁘고 축하받고 싶은데 지금 이 시간이 그대로 멈췄으면 좋겠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축복 받은 순간이었다.
문득 고경아를 처음 만났을 때, 눈부시게 아름다운 신부를 맞이했을 때가 떠올랐다. 영원히 그 순간과 지금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임신은 순식간에 많은 것을 변하게 하는 모양이다.
“지훈 씨, 나 복숭아 먹고 싶어요.”
한겨울인데?
지금이 어떤 시국인데 토를 달까?
“복숭아? 내가 금방 사 올게요.”
한겨울 찬바람을 뚫고 과일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난감함이 찾아왔다. 때 늦은 과일 정도가 아니라 철 지난 여름 과일이다.
“혹시 복숭아 있나요?”
“복숭아는 여름에 나옵니다. 지금 한겨울이에요.”
가게 주인 시선이 어째 미친놈 보는 것 같았다. 모를 일이다. 혹시나 행여나 미친 복숭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 켜진 과일 가게는 다 뒤졌다.
늦은 시간에 점점 마음이 초조해졌다.
모르긴 뭘 모를까?
세상에 불가능은 분명히 있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갈 수는 없었다. 복숭아를 먹고 싶어 하는 고경아 생각에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다.
딸기, 사과, 바나나, 귤, 보이는 대로 모조리 샀다. 지갑이 텅 비었지만 가슴은 충만했다. 비록 복숭아는 없었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당당하게 과일을 내밀었다.
“아! 이놈의 복숭아가 씨가 말랐네. 대신 다른 과일 다 사 왔으니까 맛있게 먹어요.”
아침까지 평소와 다름없이 식사를 했던 고경아가 딸기 하나를 만지작거리다 한 입 베어 먹고 끝이었다. 잘 먹어야 한다고 사정을 했지만 고개만 저었다.
아! 울고 싶다.
입덧도 심리적인 요인이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붕어빵 소리가 나왔다.
방금 전에 왕복한 길을 그대로 내달렸지만 결과는 봉지 가득 남은 붕어 없는 붕어빵이었다. 한 입이라도 먹이려고 이리저리 애쓰는 사이 고경아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잠든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고 예뻤다.
‘경아 씨, 고마워요. 나 앞으로 진짜 잘할게요.’
아내에게 잘하는 일 특별한 것 없다.
얼굴 자주 보고, 필요할 때 옆에 있어 주고, 외로워할 때 말벗 돼 주고, 쇼핑과 장보기 같이하고, 설거지 알아서 하고, 술 담배 많이 하지 말고, 뱀 허물 벗듯 옷 벗지 말고, 차려 주는 대로 불평하지 말고 맛있게 먹고, 잔소리할 때 궁시렁거리지 말고, 전등 정도는 척척 갈아 주고, 주말이면 직접 밥하거나 콧바람 쐬어 주면 충분하다.
물론 월급봉투가 가볍지 않아야 할 것이다.
쉽다. 아주 쉽다.
발상의 전환은 수술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여러모로 큰 득을 가져온다. 혹여 외벌이라고 해도 아내나 남편이나 똑같이 힘들다는 사실을 인정만 하면 된다. 아니면 입장 바꿔 보자. 한여름에 청소기만 돌려 봐도 편한 사람 없다는 사실 금방 알게 된다.
쪼르륵! 쪼르륵!
정신없이 뛰어다닌 탓에 배가 홀쭉했다. 라면 끓이기 귀찮아 붕어빵과 과일로 대신했다. 고경아 입으로 들어가야 할 과일 태반이 김지훈 입으로 사라졌다.
왠지 미안하고 민망했다.
등 따습고 배부른데 잠이 오질 않았다. 나란히 보이는 빨간 두 줄이 생각날 때마다 눈이 말똥말똥해졌다. 밤새 꿈과 생각 사이를 오갔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것 같은데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다음 날 오후.
하루 종일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던 김지훈이 수술 방으로 내달렸다. 막 일과를 마친 고경아의 손을 잡고 산부인과로 향했다.
테스트기 양성은 100퍼센트가 아니다. 산부인과 의사가 정식으로 임신을 확인할 때 비로소 사랑의 결실, 아이가 생긴 것이다.
초음파실 불이 꺼졌다.
밝은 화면 속에 고경아의 아기집이 보였다. 점점 마음이 급해지며 초조함이 몰려왔다. 온갖 걱정에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이리저리 각도를 바꾸던 산부인과 과장이 웃었다.
“김 과장, 축하해. 고 간호사, 축하합니다. 대략 6주 정도 돼 보이네요. 위험한 시기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김 과장이 수술을 덜해야 할 텐데 그게 걱정이네요.”
드디어 듣고 싶은 말을 들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가쁜 숨을 내쉬는 김지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김 과장, 입 찢어지겠다. 고 간호사, 예정일이 8월 초라서 꽤 덥겠죠? 출산 때 고생할 수 있으니까 지금부터 잘 드시고 몸 관리 잘해야 합니다.”
“고맙습니다.”
초음파 용지를 받아 들었다.
그냥 하얗고 까만 배경에 동그라미 하나다. 팔다리도 생기지 않았는데 꼼지락거리는 손가락과 까만 눈망울이 보이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예쁠까?
너무 기쁜데, 너무 행복한데, 가슴 시리도록 벅찬데 왜 눈물이 나는 걸까?
벅찬 표정으로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김지훈과 고경아가 한참이 지나서야 활짝 웃었다.
“예쁘다. 경아 씨 닮아서 정말 예쁘네. 감이 딱 오는 게 틀림없이 딸이야. 야!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아빠가 되네. 경아 씨, 정말 고마워요.”
“딸인 줄 어떻게 알아요? 속으로는 아들이길 바라는 거 아니에요? 남자들은 다 그렇다던데.”
“요즘 세상에 아들딸이 어디 있어요? 아들놈들은 말도 잘 안 들어요. 난 딸이 훨씬 이쁘더라. 어이쿠! 경아 씨, 피곤할 텐데 빨리 마무리하고 퇴근합시다.”
완전히 들뜬 김지훈이 휘파람을 불며 하루 일과를 정리했다. 문득 임신 6주됐다는 말이 떠올랐다. 대구에서 한 모든 노력 이전에 이미 결정돼 있었던 것이다.
언제일까?
어쨌든 고되고 피곤한 와중에 이룬 쾌거다. 손잡고 눈만 마주친 것 같았는데 역시 궁합 잘 맞는 부부가 분명했다. 둘째도 시나브로 다가올 것이다.
외치자!
카르페 디엠!
세상에 나보다 행복한 사람 있으면 나와!
토요일 오전까지 서울에 올라가야 한다.
당일로는 무리이기에 하룻밤 앞당겼다.
조성민에게 단단히 당부하고 관사로 향했다. 고경아는 이제 왕비다. 가방에 손도 못 대게 했다. 부지런히 짐을 싸는 모습에 웃기만 했다.
“갈 길이 먼데 괜찮을까? 무리하면 안 되는데······.”
공연한 걱정이 들었지만 주말 내내 혼자 보내는 것은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이혁민 과장에게 인사해야 하는 오하석이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표를 준비해 줄 송진우와 오만석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넌 왜 나왔어?”
“여러모로 부러워서 그렇지. 잘 갔다 와.”
“여러모로? 너지? 너밖에 없어.”
“무슨 소리야? 나 아냐, 인마. 생사람 잡지 마.”
너라는 소리밖에 안 나왔는데 오만석이 손사래를 쳤다. 오만석, 오하석, 이름 이상으로 친한 모양이었다. 송진우가 눈을 쫙 찢으면서도 별말 하지 않았다. 3년 전 입이 정말 무겁다고 생각한 놈의 가벼움 덕에 역사가 시작됐으니 고마울 뿐이었다.
“다녀오십시오.”
우렁찬 목소리를 뒤로 하고 서울로 향했다.
스승 앞에서 발표할 시간이 눈앞에 다가오는데 다른 생각이 조금도 나지 않았다. 어디서 본지 모를 갓난아기가 나타나 방긋거렸다.
송진우와 오하석이 있다.
차에 타자마자 둘 다 곯아떨어졌지만 동네방네 소문낼 일이 아니었다. 아직은 위험한 시기라 입방정을 특히 조심해야 할 때였다. 슬쩍 눈치를 본 고경아가 조용히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뭐? 아이고! 잘됐네. 경아야, 이때 조심해야 돼. 몸도 그렇지만 마음이 중요해. 나쁜 생각 하지 말고 나쁜 일은 보지도 듣지도 말아야 한다. 좋은 생각만 해.)
(서울 올라가는 중이라고? 내일 진료 끝나자마자 엄마하고 바로 갈 테니까 집에 있어. 김 서방, 축하한다. 내일 보자.)
(어머! 언니, 축하해요.)
(우리 애랑 얼마 차이 안 나겠네. 잘됐다.)
여기까지는 당연한 일이지 입방정이 아니다.
고성문과 최문옥 여사의 목소리에 즐거움과 떨림이 가득했다. 온 가족의 축하와 사랑을 받고 태어날 아이는 당연히 행복할 것이다.
차창 밖으로 별 두 개가 보였다. 제법 오랫동안 밤하늘을 찾지 못했다. 이제야 그리운 이들을 떠올리다니 가슴이 아프고 시렸다.
‘어머니, 아버지, 저 조금 있으면 아빠 됩니다. 축하해 주세요. 우리 아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셨다는 걸 잊지 않도록 잘 가르치겠습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지만 그마저도 행복했다.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행복은 사라지지 않았다. 차에서 내린 송진우과 오하석이 갑자기 눈을 맞추며 휙 돌아섰다.
“사모님,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잠결에 들은 모양이었다.
“어! 들었어? 고맙다. 진우야, 사모님이 아니라 형수님이라고 불러. 누가 들으면 노인네인 줄 알겠다.”
“예. 선생님.”
벌겋게 물든 송진우의 얼굴조차 정겨웠다.
집에 도착하자 고경희가 맨발로 달려 나왔다.
“언니! 형부! 축하해요.”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행복해했다. 멈추지 않는 수다에 동참하며 귀를 기울이던 김지훈이 스르륵 잠에 빠졌다. 행복에 겨운 미소를 온 얼굴에 걸려 있었다.
다음 날 오전.
흥분과 설렘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신현수의 목소리가 무척 급하게 들렸다.
(지훈아, 올라왔지?)
“응. 조금 있다가 들어갈 건데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수술 하나 있으니까 11시까지 와.)
“수술? 무슨 수술인데 내가 가?”
(이준영 선생님 앞으로 입원한지… 예? 지금 지훈이하고 통화하고 있습니다. 바로 올 겁니다. 알겠습니다. 이혁원, 수술 준비 빨리해. 지훈아, 시간 없다. 빨리 와.)
소란스럽게 대화가 오고 가더니 전화가 뚝 끊겼다. 복강경 배우면서 이준영 교수의 스타일까지 배운 모양이었다. 그동안 꽤 피곤했는지 아직도 곤히 자고 있는 고경아에게 쪽지 한 장 남기고 병원으로 향했다.
‘날 부르신 이유가 뭘까?’
수술 때문이겠지만 신현수나 이경석이 있다.
정확한 이유를 몰라 발걸음이 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