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71화 (771/1,329)

2화. 인생 최고의 행복. (2)

딱 한 번 마음을 내비쳤을 뿐이었다.

“내 말을 들었다고?”

“그래요. 기다렸었어요. 그런데 벌써 3년이 지났네요. 지금은 어떤지 선생님에게 직접 듣고 싶어요. 정리하지 않으면 점점 불편해질 것 같아요. 확실하게 알아야 전공의 수련을 제대로 받을 수 있잖아요. 난 감정 따로 일 따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오하석이 자신의 마음을 먼저 드러냈다.

얼굴이 붉어질 만도 한데 마지막 마음의 결정을 내렸는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송진우의 눈만 볼 뿐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깨끗이 정리하고 싶다고요.”

송진우가 깜짝 놀랐다.

오하석의 말을 듣는 순간 두근거리던 심장이 불방망이처럼 더욱 빠르고 격하게 뛰었다. 머릿속에서 폭탄이 터진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정리하고 싶다고?”

3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오하석만 바라보았다.

지금도 단둘이 있으면 감정이 앞서 숨이 찰 지경이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덕에 태연할 수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고백하지 못했다.

감정을 드러내는데 익숙하지도 않다는 말은 핑계였다. 솔직히 용기가 없었다.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너무 컸다.

오하석은 분명한 대답을 원하고 있었다.

미적거리거나 우물쭈물하면 두려움이 현실이 될 것이다. 늦었지만 결코 놓칠 수 없는 사랑이었다. 평생 후회할 일을 만들 수는 없었다.

송진우가 전에 없는 용기를 냈다.

“정리하지 마. 난 널 좋아하고 있어.”

“좋아한다고요? 후배니까? 그것뿐이에요?”

수없이 하고 싶었지만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말이 남았다. 때론 일방적인 사랑이 돌이킬 수 없는 거리를 만들기도 한다. 거절당할까봐 아플까봐 두려워했던 말이었다. 어쩌면 오하석을 끝까지 곁에서 보고 싶다는 마음일지도 몰랐다.

당찬 눈빛이 채근하고 있었다.

응급실에서 오하석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지 또 한 번 절실하게 느꼈다. 전공의 지원 때문이라니 뜬금없지만, 정말 상황이 이상했지만 이젠 말해야 했다.

후회하기 전에.

“오하석, 난 널 사랑해.”

“다시 한 번 말해 봐요.”

“오하석, 사랑해. 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해 왔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시뻘게진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송진우를 보던 오하석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걸렸다.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알았어요. 그럼 나 일반외과 지원할게요.”

“응? 하석아, 그게 대답이야?”

“부족해요? 이제 마음 편하게 일반외과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됐죠?”

오하석이 멍한 얼굴의 송진우를 뒤로 하고 숙소로 향했다. 오늘에야 지난 3년간 기다렸던 말을 들었다. 차가운 바람 때문인지 송진우의 마음 때문인지 눈가가 붉어졌다.

‘응급실에서처럼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꼭 지켜 줘요.’

“하석아! 오하석!”

송진우가 헐떡거리며 달려왔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말없이 병원으로 향했다. 이제야 마음을 보인 따스한 손이 자그마한 손을 꼭 잡았다.

미안하다는 듯,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한 줄기 눈물이 달빛에 반짝였다.

기쁜데, 행복한데, 가슴이 시리도록 벅찬데 왜 눈물이 나는 걸까?

다음 날 아침.

회진을 돈 김지훈이 히죽 웃었다.

구미에 온 목적을 확실하게 이뤄 가고 있었다.

최철한이 수술하는 날이다.

복강경 두 개와 치질 하나가 잡혀 있었다. 외래 진료 또한 만만치 않게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철한은 시간 나는 대로 김지훈의 수술에 참여했다. 퍼스트든 참관이든 가리지 않았다.

아직 복강경 수준을 더 올려야 했지만 한 가지 수술이 더 남았다. 일주일에 한두 건에 불과한 혈관 수술이 문제였다. 환자가 폭발적으로 늘지 않는 한 다른 방법이 없었다.

‘케이스가 너무 적지만 반드시 숙달돼야 할 수술이다. 마지막 날까지 밀어붙일 수밖에 없네.’

마침 컨설트가 두 건이나 나왔다.

드문 일이었기에 더욱 알찬 기회로 만들어야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김지훈의 표정이 으스스해졌다. 혈관 수술 중 중점적으로 지적해야 할 부분들이 떠오르면서 돌연 전의가 불타올랐다.

최철한 때문만이 아니었다.

신기동 교수의 연수.

누군가 맡아야 할 주임 교수.

3개월 간 이어지는 손일석의 근무.

김지훈 자신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수술이었다.

불타오르는 전의가 불길이 돼 치솟았다.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할 말이 있는지 조심스럽게 다가오던 오하석이 흠칫 놀랐다.

송진우가 얼굴을 붉히며 앞으로 나섰다.

“선생님, 하석이가 드릴 말씀이 있답니다.”

“응? 그래. 뭔데?”

오하석이 눈빛을 굳혔다.

“일반외과 지원하겠습니다.”

김지훈의 입이 쫙 찢어지려다 말고 꾹 닫혔다.

‘아무리 우리 과 사정이 열악하다고 해도 과장이 방정맞게 호들갑을 떨 수는 없지. 여자들 중 첫 지원이긴 해도 해마다 들어오는 1년차 중 한 명이잖아. 침착하자.’

“흐흠! 그래? 어느 병원에 지원할 거야?”

목소리가 저절로 굵직해졌다.

“서울 병원에 지원하겠습니다.”

“알았어. 서울에 연락할 테니까 준비 열심히 해. 미달이라고 해도 성적 안 되면 불합격시킬 거야.”

미달이면 당연히 전원 합격이다.

실제로 자격이 한참 모자랐던 정갑수도 그 덕에 잠시나마 전공의 생활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구미 일반외과 과장이자 중추인 김지훈의 말이었다.

오하석은 물론 송진우도 긴장한 얼굴이었다.

‘근데 진우 이 자식은 왜 같이 왔지? 미리 얘기가 오갔었나? 가만! 응급실에서도 그렇고 수상하네.’

남녀 간의 일은 간섭할 수 없는 일이다. 나름 근엄하게 말 잘했다고 생각한 김지훈이 별일 아니라는 듯 돌아섰다. 평소와 다름없이 외래로 향했다고 생각했다.

“선생님, 엘리베이터 안타세요?”

신현수에게 한시라도 빨리 전화할 생각에 계단을 내달렸다. 송진우의 말이 귓가를 휙 지나쳤다. 진료실에 들어서자마자 전화기를 잡았다.

다행히 바로 연결이 됐다.

“현수야, 내년 1년차 지원 꽉 찼어?”

(아침부터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거야? 그럴 리가 있어? 2명밖에 안 했다. 점점 줄어서 큰일이야.)

“하하하! 한 명 추가다. 오하석 알지?”

(오하석? 누군데?)

“내가 저번에 말 안 했나? 지금 구미 인턴인데 우리 과 지원했어. 여자지만 웬만한 남자 놈들 저리가라야. 이혁민 선생님께 말씀 드려.”

(여자? 할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마. 내가 보증한다. 그놈 우리 과 시키려고 고생 많이 했어. 직접 보면 마음에 쏙 들 거야. 하하하! 오늘은 아침부터 기분이 팍팍 사네.”

흥분에 찬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신현수의 목소리는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역시 웬만한 일로는 절대 동요하지 않았다. 김지훈이 유난히 호들갑을 떠는지도 몰랐다.

(네가 좋아하는 걸 보니까 마음은 놓인다만 직접 봐야 알 것 같다.)

“어허! 진국이야, 진국. 우리 과에 복덩이 하나 굴러 들어오는 거니까 잘 말씀 드려. 바쁘지? 끊는다.”

(잠깐만. 이번 주에 올라오지?)

“어떻게 알았어?”

(그런 수술을 해 놓고 모르길 바라? 이준영 선생님이 최철한 선생님에게 미리 연락하신다니까 토요일 오전에 올라와.)

“토요일 오전?”

(식사 전에 미리 발표 한 번 보자고 하셔. 리포트 확실하게 마무리하고 슬라이드까지 완성해 놓으라신다. 학회가 마지막 근무 주말이야. 진료 잘 조정하고 늦지 않게 올라와.)

찬바람이 휭 불었다.

“이번 주까지 슬라이드 만들라고? 어후! 시간이 너무 촉박하네. 언제 만들지? 알았다.”

(나도 궁금하니까 올라오면 바로 전화해.)

신현수의 마지막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긴장과 놀라움이 뒤섞인 것 같았다. 조기 위암 수술 때 함께 했기에 대장암을 복강경으로 수술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잘 아는 탓이었다.

전화를 끊은 김지훈이 리포트를 꺼내며 허둥댔다. 예상치 못한 일에 부담이 마구 몰려왔지만 오하석이 가져온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았다.

‘슬라이드라! 빨리 만들어야겠네. 가만! 발표 때 슬라이드를 누가 돌리지? 나랑 호흡을 맞추려면······.’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송진우와 오하석이었다.

이틀 전에 내준 리포트 평가를 받기 위해 온 것이다. 김지훈이 급히 표정을 수습하며 리포트를 받아 들었다. 몇 곳을 지적하며 살벌한 눈빛을 보냈다.

“오하석, 지원까지 한 놈이 이게 뭐야? 송진우, 너 교육 제대로 안 시킬래? 내가 꼭 화를 내야겠어?”

이런 일로 화를 낸다니 한 번도 듣지 못한 말이었다. 그런데 송진우는 물론 오하석도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도리어 빨간 펜이 스쳐 간 리포트를 담담하게 돌려받았다.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더 열심히 해. 이번 주 리포트는 오늘로 끝이야. 대신 둘 다 나하고 슬라이드 작업 좀 하자. 진우, 너는 학회 때 나하고 같이 발표해야 하니까 철저히 준비해.”

“제가 슬라이드 돌립니까?”

“그래. 근무 마지막 주가 학회야. 이번 주 토요일에 너도 나하고 같이 서울 올라가야 하니까 미리 당직 조정해. 아! 오하석, 너도 겸사겸사 인사하자.”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발표자이기에 내용을 완전히 숙지해야 한다는 것쯤은 말 안 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론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기도 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나온 송진우와 오하석이 서로를 보며 활짝 웃었다. 전공의 지원 문제를 꺼냈을 때 평소 보지 못한 김지훈의 근엄함을 보았다.

인턴과 전공의는 대하는 자세가 다른 법이다.

긴장 단단히 했는데 상당한 오해였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그 속에 담긴 기쁨이 얼마나 큰지 진료실 밖에서도 통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복덩이라며 좋아 죽는 김지훈의 얼굴이 저절로 떠오를 지경이었다.

“저 지원 잘했죠?”

“그래. 나도 정말 좋다. 어쩐지 엘리베이터 놔두고 계단으로 뛰실 때 이상했어. 좋으면 좋다고 말씀을 하시지.”

“선생님이 하실 말씀이 아닌 것 같네요.”

“응? 늦었어도 했잖아.”

“3년 만에요? 앞으로 자주 해야 돼요.”

송진우가 얼굴을 붉히며 딴청을 부렸다.

전공의 커플 하나 확실하게 생겼다.

김지훈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중신 애비로서 톡톡히 일조했다. 리포트다 뭐다해서 함께 할 시간 많이 만들어 줬다. 만일 일하는 분위기 살벌하기만 했으면 송진우와 오하석은 아직도 평행선을 달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혹시 결혼식 날 양복 한 벌이라도 떨어지려나?

반갑고 기쁜 마음은 여기서 접고 학회 준비에 몰두해야 할 때였다. 제법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수술까지 했다. 케이스 리포트라지만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의미가 퇴색할 것이다.

여전히 바쁜 일상 속에 일이 하나 추가됐다.

송진우와 오하석이 아주 기특한 일을 했다.

무슨 수를 썼는지 복강경 수술 장면까지 슬라이드로 만든 것이다. 뭐라고 열심히 설명하는데 컴맹에 가까운 김지훈에겐 남의 나라 말처럼 들렸다.

“진우야, 하석아, 수고했다.”

짐짓 다 알아들은 것처럼 태연하게 어깨를 두드리는 김지훈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어째 시대에 뒤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목요일 저녁.

간신히 준비를 모두 마쳤다.

미진한 부분은 이준영 교수와 상의해 보충하고 수정하면 될 것이다. 이번 주 금요일과 주말 당직은 최철한이었다. 미리 연락을 받았고 김지훈도 양해를 구했다.

“진우하고 하석이도 같이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진우는 오프고 하석이는 인사해야 하니까 신경 쓰지 마. 만석이가 펄펄 날아다녀서 별문제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는 말이 고맙기만 했다. 개운한 마음과 동시에 피로를 느낀 김지훈이 서둘러 관사로 향했다.

‘한 번만 더 연습하고 내일 밤에 출발하자.’

거실로 들어섰다.

항상 얼굴을 보이며 반갑게 맞이해 주던 고경아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럽게 안방 문을 열던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이불을 푹 뒤집어 쓴 채 자고 있었다.

‘어디 아픈가?’

배는 출출한데 하도 곤하게 자 깨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조용히 손만 씻고 라면 끓일 준비를 했다. 아무 생각 없이 팔팔 끓기 시작하는 물을 보던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최근 며칠 사이 병원에서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데 집에만 오면 유독 피곤해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하늘 같은 아내이자 일반외과 엄지다.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슬며시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불안해. 감기라도 걸렸나?’

열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요새 많이 바쁘긴 했어. 이 간호사하고 둘이 모든 수술을 담당하니까 안 힘들 수가 없겠지.’

안쓰러운 마음에 곁을 지켰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고경아가 눈을 떴다. 눈을 마주치자마자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려고 했다.

“내가 깜빡 잤나 봐요. 저녁은 먹었어요?”

밥걱정부터 하고 있다.

“알아서 먹을 테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어디 아파요?”

“아니요. 그냥 몸이 무겁네요.”

“내일 서울 올라가야 하는데 걱정이네.”

“그 정도는 아니에요. 저녁 뭐 먹었어요?”

앗! 물이 끓고 있다.

냄비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후다닥 가스 불을 끄고 새 물을 넣으려던 김지훈의 눈에 달력이 딱 들어왔다. 대구에 다녀온 지 한 달이 넘었다.

순간 가슴이 쿵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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