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인생 최고의 행복. (1)
지글지글 삼겹살이 끓어올랐다. 어떻게 알았는지 민혁기 원장이 떡하니 가운데에 자리 잡았다. 계산대에서 하해와 같은 은총을 내리실 분이기에 진심으로 환영했다.
출발이 좋았다.
휴대폰은 잠잠했고 오늘 수술을 축하하며 시끌벅적한 자리가 이어졌다. 김지훈과 전공의 모두 왕성한 식욕을 자랑했다. 오하석도 의외로 잘 먹었다.
오만석이 덩치에 맞게 김지훈도 놀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먹어댔다. 잠깐 고개를 돌리면 노릇하게 익은 삼겹살이 귀신처럼 모조리 사라졌다.
“조금씩 먹자. 나 있다고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냐? 김 과장, 최철한 선생은 많이 먹어도 돼. 소고기 먹을까? 오만석, 넌 돌아온 지도 얼마 안 되는데 뭘 그렇게 많이 먹어? 저놈은 덩치만 커서······.”
“원장님,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너 열심히 하고 있지?”
“예.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핀잔도 타박도 소용없었다. 굶어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는지 삼겹살이 가공할 속도로 추가됐다. 광란의 식욕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곱창전골을 심각하게 고려 중이던 민혁기 원장이 반색했다. 이렇게 반가운 소리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마치 절실하게 전화를 기다렸던 사람 같았다.
김현철과 오하석 당첨!
풀 당직인 오만석 당첨!
오프인 송진우의 자발적인 당첨!
마지막으로 김지훈까지 당첨됐다.
응급실을 피하지 못했지만 오늘은 성공했다.
구미에 와 이만큼 넉넉한 시간을 갖고 밥과 고기에 전념한 적은 없었다. 밥심이라는 말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힘이 넘쳐 빠르게 한 건의 수술을 마쳤다.
고기인가?
오만석이 송진우를 제치고 밥값 톡톡히 했다. 송진우의 열정이 모자란 탓이 아니라 바이탈이 흔들리는 환자만 오면 눈빛이 돌변했기 때문이었다.
“진우야, 오늘은 낮밤으로 정말 최고다. 역시 우리 과는 바이탈이야. 하석아, 오빠 멋지지 않니?”
얼굴 벌게진 놈과 단발머리가 웃고 말았다.
쿵쿵 소리가 이어지자 이용철 과장이 입맛을 다셨다. 빨간 글씨가 빼곡한 응급 수술 스케줄이 연달아 올라왔다. 수술실 한 곳에서 이어 하다간 날밤을 샐 판이었다.
“김 과장, 양방하자.”
“예. 송진우, 준비하고 대기해.”
얼떨결에 메스를 받았지만 언제든 준비된 송진우였다. 수술이 끝나자 오만석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조바심이 날 정도로 능숙한 손과 재가 돼 바스러지는 모습은 강렬한 자극이자 알 수 없는 부러움이었다.
‘난 언제 칼을 잡아볼까?’
계속된 수술에 피로할 법도 한데 수술 방에서 나온 김지훈이 곧바로 대장암 환자를 찾았다. 상당히 늦은 시간에 발소리마저 죽였다.
어두운 불빛 사이로 하얀 수증기가 환자의 호흡을 도와주고 있었다. 가끔 얼굴을 찡그렸지만 잠에서 깨진 않았다.
잠시 옆에 앉아 환자를 바라보았다.
때 이른 기분일 지라도 가슴이 벅찼다.
보호자의 편안한 얼굴은 기쁨이었다.
‘대장을 이어줄 기구가 있었으면 완벽했는데.’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수술을 되새기는 동안 무럭무럭 욕심까지 피어올랐다. 기구만 받쳐 준다면 복강경의 잠재력은 무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하고 고민할 일이었다.
환자와 의사를 위해서.
그 시간 오하석도 탈장 리포트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김지훈의 눈치를 봐서는 계속 과제가 나올 것이다. 오프를 제대로 가기 위해서 당직 때 잠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창밖으로 남자 숙소가 보였다.
송진우와 오만석의 방도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잠시 상념에 잠겼던 오하석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메지어 과를 돈다고 해도,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지금 느끼는 감정은 사치가 될 수 없었다.
한겨울 찬바람이 창문을 두드렸다.
다음 날 아침.
응급실에 들른 민혁기 원장의 입이 쫙 찢어졌다.
“밥값을 하고도 남네, 더 먹일 걸 그랬나?”
“원장님, 어제 회식하셨어요? 우리는요?”
간호사들의 뾰족한 목소리를 뒤로 한 민혁기 원장이 휘리릭 사라졌다. 피식 웃음을 머금은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대장암 환자가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수술 후 경과가 상당히 궁금하면서도 걱정됐다. 복강경을 이용하고 아무리 절개 창이 작아도 환자가 큰 고통과 불편을 호소하면 의미가 없다고 보아야 했다.
하루 이틀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김지훈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진해지기 시작했다.
절반의 복강경, 절반의 개복으로 수술한 대장암 환자가 사뭇 다른 경과를 보였다. 대장을 절제한 것은 똑같은데 이틀 만에 걷기 시작했다.
배를 움켜주면서도 웃었다. 코 줄이 주는 불편도 오래 가지 않았다. 대장 운동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돌아오면서 불과 6일 후에 물을 먹을 수 있었다.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았다.
7일째 되는 날 실밥을 풀고 온 김현철이 차트 정리를 하며 감탄을 터트렸다.
“송진우 선생님, 회복이 정말 빠르네요. 이유가 뭘까요?”
“라파로 아니겠어?”
“절개 창만 작지 수술은 똑같이 했는데 참 희한하네요.”
송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배 열면 수술 내내 장을 손으로 만지잖아. 그게 다 충격이고 손상이야. 똑같이 장을 잘라도 라파로를 이용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심할걸? 라파로로 전체를 다할 수 있으면 회복이 더 빨라질 지도 몰라.”
자료를 보고 있던 오만석이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현철아, 진우 말 믿지 마라. 라파로가 아니라 김지훈 선생님이 수술하셔서 그런 거다. 손이 거칠면 개복이나 라파로나 무슨 차이가 있겠어? 우리 외과는 손이야. 손.”
무지막지한 손바닥이 허공을 휙휙 갈랐다.
둘 다 맞는 말이다.
수술 중에 손을 덜 타면 탈수록, 수술 후에는 많이 타면 탈수록 환자의 회복은 빨라진다. 그래서 실력과 열정이 있어야 하고 복강경도 필요한 법이다.
김지훈과 전공의들이 부지런히 병실을 오갔다.
불과 사흘 후 대장암 환자가 무사히 퇴원했다. 통상의 경우보다 삼사일 이상 빠른 시간이었다. 조기 대장암이라고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반쪽뿐이지만 절반의 복강경은 유용한 방법임이 틀림없었다.
환자만 큰 변화를 보인 것이 아니었다.
마치 기폭제가 된 것처럼 외래 환자가 급격하게 늘었다. 수술과 진료만으로도 김지훈은 물론 최철한까지 쉴 틈을 내기 어려울 정도였다.
고경아도 피곤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쉴 시간은 여기저기에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유로 김지훈이 무섭게 밀어붙인 탓이 꽤 컸다. 복강경과 혈관 수술이 끝날 때마다 최철한은 더욱 자신을 몰아붙였다.
조성민, 송진우, 오만석, 김현철에 오하석까지.
멀쩡한 모습을 보기 어려웠다. 대신 엄청난 기회를 잡았다. 퍼스트를 설 기회는 물론 집도 경험까지 빠르게 쌓여갔다. 하루가 다르게 손이 달라져 이제는 서울 병원도 부럽지 않을 지경이었다.
여기서 만족하고 끝낼 상황이 아니었다.
“조성민, 송진우, 논문 다시 수정해. 기구 연습은 하고 있어? 이론과 실전은 많이 다르다는 거 알지?”
“오하석, 리포트 참 잘 쓰네. 내가 본 인턴 중에 최고다. 그럼 대장암에 대해서도 한 번 써 볼까?”
“오만석, 응급 수술에만 매달리지 말고 정규 수술에도 신경 바짝 써. 그래야 실력 는다.”
“예. 신경 쓰고 있습니다.”
걱정스러운 말과 힘찬 대답도 무색하게.
쿵쿵쿵! 쿵쿵쿵!
“현철아, 바이탈 흔들리는 환자 왔다.”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오만석이 사라졌다. 눈가가 까매진지 오래인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열정 속에서 찾는 보람일 것이다.
‘너도 참 희한한 놈이다.’
고개를 젓던 송진우가 흠칫 놀라며 달렸다. 이미 간호사들까지 환자에게 매달린 상황이었다. 모든 의료진의 필사적인 노력이 오늘 밤 또 한 명의 삶을 구할 것이다.
빨간 불이 여기저기로 번지는 사이 어느 새 연말이 다가왔다. 구미 생활도 두 달이 훌쩍 넘었다. 한 해의 마지막과 또 한 해의 시작이 주는 흥분과 설렘, 두근거림에서 누구도 비껴나지 못했다.
달력 마지막 장을 보던 김지훈이 눈가를 비볐다.
해야 할 일, 챙겨야 할 일이 끝도 없었다.
학회 발표 용 리포트 작성이 거의 마무리됐지만 심적 부담은 도리어 커졌다. 참석자 대부분 수술에 있어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다.
더구나 대장암 수술까지 새로운 시도를 했다. 매서운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론적 토대를 제시하지 못하면 수술에 담긴 의미마저 퇴색될 것이다.
‘후우! 자료도 없고 아뻬 말고는 케이스까지 너무 적어. 최대한 준비하는 수밖에 없겠어.’
리포트를 다시 한 번 확인한 김지훈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공의 지원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리저리 물어보니 올해도 미달일 가능성이 높았다.
내심 오하석이 여자 인턴 최초로 지원해 주길 원했지만 아무리 눈치를 줘도 말이 없었다. 체력 문제, 혹사에 가까운 수련 환경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열악한 미래가 발목을 잡았을 지도 몰랐다.
한참 고민하던 김지훈이 머리를 톡톡 쳤다.
‘이걸 왜 고민하고 있지? 어린 아이도 아닌데 내가 강요한다고 지원할 오하석이 아니잖아.’
갑작스러운 호출에 오하석이 불안한 얼굴로 들어왔다. 툭하면 떨어지는 리포트에 하나라도 일이 더 추가되면 감당하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앉아. 한 가지만 묻자. 전공의 지원 했어?”
“아직 못했습니다.”
“마음이 가는 과는 있어?”
“그것도 아직······.”
학교 성적과 인턴 성적 모두 좋았다. 전공의 시험만 잘 보면 웬만한 과는 다 합격할 것이다. 망설이고 있다는 사실에 희망이 보였다.
“고민이 많은 모양이구나. 너한테 가장 잘 맞는 과를 정하겠지만 난 네가 우리 과 했으면 좋겠다. 물론 여자라고 예외는 두지 않아. 대신 후회하지 않을 거야.”
입술을 꼭 다문 채 말이 없었다.
생각도 못한 말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공연한 부담을 주었을 수도 있었다.
사실 교수가 권유하면 인턴 누구나 마음이 흔들리지만 일반외과는 상황이 달랐다. 돈 잘 버는 것도, 몸이 편한 것도 아니었다.
바이탈은 자부심이자 막대한 부담이기도 했다. 중환을 만나면 퇴원할 때까지 마음 졸이며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과가 바로 일반외과였다. 의대를 택한 통상의 이유를 생각하면 절대 매력적이지 않았다.
오하석에겐 인생이 달린 문제였다.
‘에휴! 체력 좋은 놈들도 힘들어하는데 쉽지 않겠지.’
김지훈도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원하든 말든 당장 답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후 뜻밖의 말이 들렸다.
“정말 후회하지 않을까요?”
마음이 있다는 말이었다.
쌍수를 들고 반길 일이었다.
다만 그 전에 힘들다고 기피하는 일반외과를 권유하는 이유를 말해줄 때였다. 성급한 판단과 결정은 중도하차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그 기간만큼 인생 허비하는 것이다.
복귀하긴 했지만 귀중한 시간을 밖에서 보낸 오만석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과를 선택하는 기준은 정말 많아. 돈, 명예, 적절한 휴식까지 누구나 원하는 것을 추구하겠지. 하지만 그것보다 유독 환자에게 집중하는 사람이 있어. 특히 바이탈과 수술하지 않으면 사람이 죽는 분야에 특별한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있지.”
지난 시간이 떠올랐다. 앞만 보고 달리는 사이 잊었던 감정과 흥분, 설렘이 다시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열정이 실렸다.
더 이상 설득이나 조언이 아니었다.
김지훈 자신의 마음이었다.
“난 오하석이라는 인턴에게서 그걸 봤어. 반드시 우리 과를 하라는 소리가 아니야. 네 속에 있는 의사로서의 열정과 꿈을 이룰 수 있는 과를 선택하기를 바라. 평생 가야할 길이 의사의 길이잖아. 나와 함께 가면 더 좋겠다.”
오하석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까지 대답을 드려야 할까요?”
귀가 번쩍 뜨일 말이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어떤 과를 선택한다고 해도 난 오하석이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믿어. 그동안 내게 보였던 그 눈빛을 평생 꼭 간직해. 올라가 봐.”
꾸벅 인사를 한 오하석이 진료실 문 너머로 사라졌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단발머리까지 제법 자랐다. 미용실에 갈 시간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언젠가는 열심히 일한 보람을 찾을 것이다.
숙소로 돌아가던 오하석이 눈가를 찡그렸다.
김지훈의 말이 머릿속을 뱅뱅 돌았다.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장암 환자 수술을 보며 전에 없는 매력까지 느꼈다. 하지만 그 전에 꼭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수련에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르는 감정이다.
송진우와 만났다.
둘 다 오프였기에 대화할 시간은 충분했다.
어떻게 말문을 열어갈 지가 문제였다.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에는 여자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의사로서 가야 할 길까지 달린 문제였다.
마주 앉아 한동안 커피 잔만 만지작거리던 오하석이 눈가에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 한 가지만 물어 볼게요. 만일 내가 일반외과를 한다면 어떨 것 같아요?”
“우리 과를 한다고? 하석이 네가?”
“왜 못할 것 같아요?”
“그건 아닌데…….. 하석아, 그게 말이지. 어후!”
“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아냐. 그게…….. 내 말은 그러니까 네가 우리 과를 하면 내 입장이 이상….. 아니다. 그러니까······.”
시뻘게진 얼굴로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해야 할 말과 들어야 할 말이 있는데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했다.
오하석이 눈을 치켜떴다.
“다른 때는 말만 잘하면서 우리 둘이 있을 때는 도대체 왜 그래요? 선생님 그런 사람이었어요? 솔직하게 말할 게요. 학교 다닐 때 무슨 말을 했었는지 다 알고 있어요.”
송진우가 흠칫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