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69화 (769/1,329)

1화. 한 발 더 올라서다. Ⅱ (2)

간만에 화염방사기의 뜨뜻한 온기를 뒤집어썼다. 김지훈이 후줄근해진 모습으로 환자를 살피는 사이 민혁기 원장이 부리나케 달려 들어왔다.

송재덕 교수, 이준영 교수와 마주 앉았다. 이용철 과장이 부원장으로서 함께 자리했다. 모두들 입가에 미소를 건 채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민 원장님, 잘 지내셨죠? 우리 젊은 부원장도 잘 지냈지? 하 원장 때문에 고생 많으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전에 연락드린 것처럼 해임으로 결정됐고 배임, 횡령으로 고소까지 했습니다. 우리 김 과장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서울 병원 사정이 있는데 김 과장을 구미로 보내 주셔서 제가 도리어 감사드려야죠. 이 교수님, 김 과장 같은 제자를 두어서 정말 좋으시겠습니다.”

서울 병원 교수들만 김지훈과의 특별한 관계를 안다. 대단한 비밀은 아니지만 누군가 소문을 냈다는 말이었다. 이준영 교수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송재덕 교수가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험험!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네. 이 교수, 지훈이가 언제 저렇게 발전했지? 동맥 잡고 처리하는데 가슴이 다 떨리더라. 실력도 실력이지만 누가 이런 방법을 생각할 수 있겠어? 누가?”

송재덕 교수가 침을 튀겼다.

“막상 보면 별거 아니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발상의 전환, 이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 개복은 개복이고 라파로는 라파로잖아. 그걸 섞을 생각을 누가 할 수 있겠어? 어디서 저런 창의성이 나왔을까? 어디서?”

이준영 교수가 말없이 입술을 모았다.

어떤 수술이든 첫 시도를 한 사람이 있다.

복강경 역시 누군가의 창의성과 독창성의 결과일 것이다. 그것이 곧 발전으로 이어지고 환자에겐 더 없는 유리함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번 수술은 특히 의미가 컸다.

광범위 절제가 필요한 암 수술에 복강경을 적용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분명하게 보였다. 기구만 받쳐 준다면 모든 과정을 복강경으로 끝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한계와 적용은 시간, 경험, 수술 팀의 능력이 결정할 부분이었다.

무엇보다도 제자인 김지훈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다. 노력, 실력, 품성을 모두 갖췄다. 여기에 열정과 창의성까지 겸비했다면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갈 것이다.

함께할 동료들도 결코 만만치 않다. 신현수, 손일석, 이경석은 물론 수많은 선후배가 함께 달려 나갈 것이다. 엄청난 힘을 등에 업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내가 가르칠 부분이 더 있을까?’

문득 든 생각이었지만 단 두 달 사이에 김지훈의 손은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통상의 수술을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고민하며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한 결과였다.

송재덕 교수가 상념을 깼다.

“왜 말이 없어? 왜? 누가 제자 아니랄까봐 지훈이 이름만 나오면 입이 더 무거워져요. 학회에서 발표하면 난리 날 거다. 난리. 다른 병원에서 홱 채 가는 거 아닌지 몰라. 제자라고 방심하지 말고 확실히 잡아 놔. 확실히. 오란다고 갈 놈이 아니지만 그게 예의야. 예의.”

당연한 말인데 이준영 교수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돈을 싸 짊어지고 와도 동료들을 떠날 김지훈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 때문에 생각이 더욱 많아지는 모양이었다.

‘전폭적인 후원 하에 더 완벽한 여건에서 마음껏 수술한다면 지훈이에게 가장 좋은 일이 아닐까? 스승님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생각을 하실까?’

제자가 너무 잘난 것도 탈이라면 탈이었다.

스승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우려였다.

간담도가 세부 전공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성장한 제자의 앞길을 막을지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김지훈에게 복강경은 하나의 수단이 아니라 가히 무기였다.

“여건이 안 된다면······.”

그때 김지훈이 마치 기름을 바른 것처럼 착 달라붙은 머리를 만지며 들어왔다. 손에 들린 작은 쟁반에 커피 여섯 잔이 놓여 있었다.

최철한과 함께였다.

따뜻한 믹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이준영 교수가 김지훈을 보며 웃고 말았다. 예전처럼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한 자세로 스승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았다.

제자는 어느새 스승을 넘볼 정도로 훌쩍 커 있었다. 펠로우가 된 지 이제 2년도 되지 않았다. 무서울 정도로 빠른 성장이자 발전이었다.

아직 미진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겠지만 이번 수술은 절대 아니었다. 솔직히 보는 것만으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태울 때는 활활 태우더라도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할 순간이 잇다.

바로 오늘이었다.

이준영 교수의 눈빛이 편안했다.

“김지훈, 잘했다. 오늘 수술까지 모두 발표하자. 의미가 큰 수술들이니까 확실하게 정리해. 최철한, 고맙다.”

스승이자 선배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김지훈에겐 충분하고도 넘쳤다.

헤 벌린 입이 증명하고도 남았다.

마치 전공의 1년차 때처럼.

“감사합니다.”

최철한도 이제야 어깨에 걸렸던 긴장을 모두 날려 버렸다. 소각장 불길 속에서 들었던 말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평생 기억해야 할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었다.

“지훈아, 교수야, 이제 한 달도 안 남았지? 올라오면 다른 생각하지 말고 경석이하고 박 교수에게 오늘 수술 확실하게 알려 줘야 한다. 그런데 대장 수술을 네가 더 잘하면 어떻게 하니? 이참에 대장하자. 대장. 라파로 대장 좋다.”

“한 달도 안 남았나요? 벌써 아쉽네. 원장님도 그렇지만 이 교수님은 정말 부러워요. 이런 제자 한 명 있으면 밥 안 먹어도 배가 부르겠습니다.”

한동안 칭찬이 난무했다.

흐릿해져 가는 옛 기억까지 끄집어냈다. 김지훈의 뺨이 뻘겋게 달아올랐고 함께 들어온 최철한도 많은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원장님, 마음 푹 놓으세요. 푹. 우리 철한이가 보통 내기가 아닙니다. 구미 일반외과가 불처럼 일어날 겁니다. 철한아, 널 보니까 좋다. 좋아.”

잠시 후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공의들이 모두 들어와 교수들에게 인사했다. 까치발을 한 단발머리가 송진우와 오만석 뒤에서 흔들렸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최선을 다한 후배들이었다. 장차 일반외과 중추가 될 의사들의 듬직함에 송재덕 교수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준영 교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 명 한 명 일일이 눈길을 주었다. 무뚝뚝한 표정을 여전해 그 자체로 위압적인데 송재덕 교수가 갑자기 눈가에 힘을 주었다.

“나쁜 놈, 버르장머리 없는 놈, 덩치만 큰 놈, 너 회진 돌 준비 안 하니? 치프가 여기 있다고 같이 노닥거릴 생각이야? 나갔다 들어온 놈. 잘하자. 잘. 뭐하니? 뭐해?”

부드러움 속에 엄격함을 가진 송재덕 교수다. 절대 단순 대범할 수 없다. 이준영 교수까지 스윽 눈길을 주자 오만석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화들짝 놀랐다.

후다닥! 타다다닥!

전공의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김 과장, 저놈 눈빛이 좋다. 남은 시간 잘 가르쳐야 한다. 철한아, 집 나가 밤이슬 맞아 본 놈이 생각 깊은 법이다. 잘 키워서 우리 과 대들보 하나 만들어 봐라. 좋다. 좋아. 덩치가 딱 우리 과다. 우리 과.”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누구보다도 깊은 송재덕 교수였다. 따끔한 말 속에 각별한 관심과 애정이 있었다. 스승으로 모셔야 할 사람들의 마음에 가슴 따뜻해지는 순간이었다.

한 모금의 커피 향이 입안 가득 맴돌았다.

‘맛있다.’

이준영 교수가 슬며시 일어나 수술 준비실을 찾았다. 늦은 시간까지 정리 중이던 고경아가 활짝 웃었다. 반가운 인사와 함께 흐뭇하고 편안한 미소가 오고갔다.

“경아야, 고생 많다.”

이 또한 스승의 마음이었다.

교수들의 시간이 길어지는 사이 전공의들은 회진을 위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달렸다. 하루 종일 수술 방에 있었기에 준비할 것이 많았다.

간신히 준비를 마치고 모두 스테이션에서 대기했다. 다들 한숨 돌렸다는 얼굴인데 오하석의 표정만 사뭇 달랐다. 차트를 보며 생각에 잠겼던 송진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자에 관한 한 방심하면 직격탄을 날리는 김지훈이었다. 불길 한 번 토해 내면 눈물 쏙 빠진다. 이를 잘 아는 오하석인데 약간 넋이 빠진 것 같기도 했다.

“오하석,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회진 전이다. 집중해.”

엉뚱한 말이 되돌아왔다.

“선생님, 김지훈 선생님 얼굴도 잘생기시고 정말 멋지지 않아요? 오늘 수술 보고 저 정말 감동했어요. 여섯 시간을 서 있었는데 힘들지도 않고 눈도 떼지 못했다니까요.”

송진우의 눈가가 살짝 찌그러졌다.

‘뭐? 잘생기고 멋지다고? 유부남이야.’

“그래서?”

“마음이 막 흔들리려고 해요.”

얼굴이 급격하게 시뻘게졌다.

오하석의 눈빛까지 변했다. 당황한 송진우가 눈을 크게 뜨며 허둥댔다. 오하석 말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어디선가 본 눈빛이었다.

그렇다.

김지훈이 인턴 때 수술실에서 보였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피가 난무하는 비장 절제술과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은 것 같았던 대장 전절제술은 감동이었다. 일반외과를 하게 된 결정적 이유 중 하나였다.

‘내가 일반외과를 할 수 있을까? 김지훈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오늘 본 수술을 내 손으로 하면 얼마나 뿌듯할까?’

온갖 생각에 상상의 나래까지 펼치던 오하석의 볼이 빨개지며 숨까지 살짝 가빠졌다. 마치 수술 기구라도 잡은 듯 자그마한 손을 꼭 쥐었다.

‘설마? 오하석, 너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송진우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도 열지 못했다.

오해도 이런 오해가 없었지만 남녀 간의 일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누군가의 마음과 머릿속이 심하게 헝클어졌기 때문이다.

오래전 자그마한 얼굴을 본 그 순간부터.

퉁명스러운 말이 터졌다.

“엉뚱한 생각하지 말고 탈장 리포트나 확실히 써.”

“엉뚱한 생각이요?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요? 정말 알아요?”

오하석이 까치발을 했다.

훅 치고 들어오는 눈빛과 향기로운 숨결에 송진우가 허둥지둥 차트로 눈을 돌렸다. 활활 타는 장작불에 휩싸인 고구마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때마침 김지훈이 올라오지 않았다면 낭패였을 것이다. 이준영 교수까지 온 마당인데 회진은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조기 대장암 환자에게 특히 많은 시간을 쏟았다.

“환자 분, 어떠세요? 많이 아프세요?”

몸속을 휘감는 나른한 마취 기운에 환자가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도리어 좋은 징후였다. 통증이 심하면 마취 기운도 빨리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잘 끝난 거죠?”

“예. 며칠 지켜봐야 하지만 현재로서는 만족스럽습니다. 작게 열긴 했지만 맹장 수술을 하고도 아파하는 분들이 많으니까 통증 호소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김현철이 드레싱 카를 끌고 왔다.

조심스럽게 절개창과 드레인을 덮었던 거즈를 갈았다. 작은 상처와 깨끗한 삼출액은 수술이 잘됐음을 알려주는 중요 소견이었다.

걱정과 궁금함에 고개를 내밀던 보호자가 깜짝 놀랐다.

병간호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른 환자 치료까지 보게 된다. 이미 같은 병실에 있는 대장암 환자의 절개창이 얼마나 큰지 본 후였다. 작게 연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이고! 선생님, 상처가 또 있는 건 아니죠?”

“보이는 게 전부입니다.”

보호자가 눈만 멀뚱거렸다.

맹장 수술을 했다고 해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보호자의 눈에는 복강경 전문의라는 말이 헛소문이 아니었다. 치료를 마치고 회진을 도는 내내 병실이 소란스러웠다. 이제는 완연한 회복세에 접어든 대장암 3기 환자가 잘됐다며 함께 웃었다.

어느덧 8시가 넘었다.

조성민이 허기진 배를 문지르며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들과 저녁 식사 안 하시나요?”

“식사? 나도 선생님들과 함께했으면 좋겠는데 오늘 환자 얼굴도 못 봤다고 아까 올라가셨다. 송재덕 선생님도 뭐가 그렇게 급하신지 모르겠어. 하긴 서울에 도착하면 몇 시야?”

다들 아쉬운 표정이었다.

구미에 온 이유는 빤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가까운 길도 아니다. 그런데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돌아가다니 의아하면서도 한편으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 의사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태도를 잃지 않기에 존경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배워야 할 점이었다.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 나도 회진 돌아야지. 다음 주말 오프 때 서울 올라와. 경아도 같이 보자. -

이준영 교수에게도 귀중한 주말 오프를 반납하는 이유는 십중팔구 리포트 때문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말미에 자신의 의중을 분명하게 전했다.

고경아는 곧 밥 먹자는 소리다.

수술 성공을 축하한다는 말이었다.

스승과 제자, 아버지와 아들, 선배와 후배, 직장 동료로 복잡하게 얽힌 관계가 더 없이 돈독해질 것이다. 아울러 친구처럼 친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송재덕 교수까지 말이다.

- 지훈아, 교수야, 다음 오프가 언제니? 가만있자. 내가 그때 일이… 없구나. 없어. 잘됐다. 잘됐어. 우리 뭐 먹을까? 경석이하고 현수도 부르자. 누가 당직이지? 지훈아, 교수야, 잘 지내고 대장하자. 대장. 라파로 대장 좋다. 좋아. -

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서도 몇 마디 나누지 못했지만 마음이 정말 편안했다. 스승과 송재덕 교수의 마음이 오롯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문득 똘망똘망 눈을 빛내고 있는 오하석이 보였다.

구미 와서 처음 봤는데 갈수록 이쁘고 정이 갔다. 충분히 재울 수는 없지만 점찍은 인턴 확실하게 챙겨야 했다. 방법은 하나다. 복귀 이후 쉬지 않고 펄펄 날아다닌 오만석도 챙겨 줘야 할 때가 됐다.

단, 오프 날 밥 먹자고 하면 누구나 화낸다.

특히, 인턴이 민감하다.

“오하석, 오늘 오프야? 당직이야?”

“당직입니다.”

“잘됐다. 최철한 선생님, 오늘 회식 어떠세요?”

“회식? 좋지. 오늘 같은 날 안 하면 언제 해? 하필이면 김 과장이 당직이네. 술 한잔해야 하는데 바꿔 줄까?”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이 한잔하셔야죠. 성민아. 다들 고생했는데 수술실까지 빠짐없이 불러.”

고경아는 수술실 소속이다.

일거양득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