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절실하게 원하면 방법이 나온다. (2)
‘실력이 뛰어나다고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이 아닌데 정말 대단하네. 우연한 일이 아니라 그만큼 환자를 생각한단 말이겠지? 이제 30대 초반인데 곧 대가 소리 들을지도 모르겠어.’
환자에 대한 열정과 의학적 지식 그리고 써전에게 필요한 기술을 모두 겸비한 의사는 제법 많이 볼 수 있다. 여기에 창의성까지 갖춘다는 것은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니다. 사소한 차이가 큰 변화를 이끌어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책상 위 수북하게 쌓인 자료들을 본 정성호 과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짐작대로 결코 우연한 일만은 아니었다. 무수한 고민과 노력이 엿보였다.
시간이 지나며 대장암 환자 수술 계획을 확실하게 잡았다. 또 다른 계획도 가시거리에 들어왔다. 최철한이 복강경으로 집도할 적절한 환자를 진료한 것이다.
대장암 수술을 위해서도 반드시 집도 경험이 필요했다. 그래야 복강경 수술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질 테고 확실하게 도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최철한 선생님, 이 환자 확실하게 파악하세요. 다음 주 화요일에 라파로로 담낭 절제할 겁니다.”
강한 어조에 감을 잡았다.
눈가를 굳히던 최철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음 주 화요일?”
“예. 며칠 안 남았으니까 철저하게 준비하세요.”
“그날 대장암 환자 수술 있잖아? 괜찮을까?”
“환자가 일이 있어서 그날밖에 없습니다.”
최철한이 꿀꺽 침을 삼켰다.
처음 시도하는 수술의 어시스트와 첫 복강경 집도가 겹치지만 지나친 걱정이자 불안이었다. 복강경 수술에 상당한 부담을 느낀다고 해도 감당해야 할 일이고 사실상 구미 과장이다.
무엇보다 인정받는 써전이다.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선생님이 힘들다고 하면 제가 어떻게 수술할 수 있겠습니까? 전 선생님을 확고하게 믿습니다.”
최철한이 입술을 모았다.
선배든 후배든 자신을 확실하게 믿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힘이다. 그동안 최선을 다했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자신감을 갖고 한 발 도약할 때였다.
“고맙다.”
“절 가르치신 분께서 하실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도 여러모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첫 집도라고 해서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 후배들 교육도 하셔야죠. 저 혼자는 힘듭니다.”
피식 웃음이 터졌다.
즐거운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김지훈의 말 때문인지 난리에 난리가 겹쳤다.
수련 때 동기들 중 가장 뛰어났던 치프, 지금까지 칼을 놓지 않았던 전문의, 후배 교육에도 일가견이 있는 최철한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복강경만이 아니라 들어가는 수술 족족 전공의들과 머리를 맞댔다. 때론 큰 소리가, 때론 나직한 상의가, 때론 기분 좋은 웃음이 터졌다. 물론 강도는 약하지만 누군가 한 명은 필히 불길에 휩싸였다.
아주 심하게 전에 보지 못한 정도로.
태우는 스타일은 달라도 결과는 같았다.
“으아! 최철한 선생님도 무섭다.”
비명을 지를 정도로 무섭다는 최철한도 무서운 사람이 생겼다. 김지훈이 복강경을 할 때마다 중간중간 기구를 넘겼다. 처음에는 첫 복강경 집도에 대비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맞는 말이었다.
문제는 어마어마한 후폭풍이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박리할 때 간 쪽에 너무 붙이면 출혈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어떻게 했는지 못 보셨습니까?”
“동맥 잡을 때 클립이 확실하게 반대편으로 나왔는지 지금 확인해야죠. 동맥 놓치면 개복입니다.”
폭탄 발언까지 터졌다.
“첫 집도 미루고 싶으십니까?”
수술실에서만 나오면 최철한이 전공의 1년차로 변했다. 평소에 깍듯하기만 한 김지훈의 어디에서 이런 화력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눈가에 걸린 각오를 놓치지 않았다.
‘집도만이 아니라 어시스트를 제대로 서기 위해서는 더 노력해야 돼. 상상도 못할 의미가 담긴 첫 시도를 나 때문에 실패할 수는 없어.’
강하게 밀어붙이기만 하면 교수끼리 혹은 교수와 전공의 사이는 절대 유지될 수 없다. 풀어 줄 때는 확실하게 풀어 주고 따스한 말 한 마디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점을 잊은 사람은 없었다.
일반외과 전공의 의외로 단순하다.
오프 때 확실하게 재우고, 밥 같이 먹고 맥주 한 잔 하면 다 풀어진다. 다른 생각을 하기 힘들 정도로 피곤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김지훈이 틈만 나면 고민에 잠겼다.
부담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수술 전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처음 시도하는 수술인 만큼 스승의 조언이 간절히 필요했다. 스승의 눈은 김지훈이나 최철한과 수준 자체가 다르다. 섣부른 계획은 치도곤이다. 고경아와 어시스트 문제까지 상의해 최대한 깔끔하게 정리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스승님, 조기 대장암 환자 한 명이 있습니다.”
그간의 상황과 함께 수술 계획을 말했다.
묵묵히 듣기만 했다.
“어렵게 동의를 받았는데 의미가 있을까요?”
(성공하든 실패하든 의미가 없는 수술은 없어. 이번 수술은 차고도 넘쳐. 언제 하기로 했어?)
조바심이나 불안 따위는 느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다음 주 화요일에 합니다.”
잠시 말이 없었다.
항상 경험하는 일이지만 오늘따라 어색했다.
“참! 그날 첫 수술로 최철한 선생님이 라파로 첫 집도를 합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선배라고 생각하지 말고 확실하게 처신해.)
“예. 알겠습니다.”
(이번 수술까지 모두 케이스 리포트 작성해.)
“일단 성공해야······.”
(넌 충분히 할 수 있어. 만에 하나 실패하면 왜 실패했는지 발표해. 학회 한 달 남았다.)
‘충분히’ 라는 말이 가슴에 콱 박혔다. 스승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응원이었다. 원했던 조언은 없었지만 달리 생각하면 수술 계획에 문제가 없다는 말이었다.
남은 것은 결국 확실한 준비뿐이었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툭 전화가 끊겼다.
‘정말 하나도 안 변하시네.’
부풀어 오른 마음도 툭 가라앉았다. 대신 자신감을 얻었다. 이번 수술만큼은 앞만 보고 달려 기필코 성공하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김지훈과 최철한이 쉬지 않고 노력을 경주했다.
한 주가 저물고 주말이 지났다.
드디어 두 번째 고민거리이자 욕심을 낼 수밖에 없는 오하석이 눈앞에 나타났다. 바쁜 와중에 작전까지 짰다. 사실 배운 대로 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하석아, 열심히 하자.”
“예. 선생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말로만 하는 건 소용없어. 내일까지 어제 수술한 아뻬 환자 한 명 있으니까 리포트 써 와.”
“리포트요?”
응급실, 내과를 연이어 돌고 난 후유증이 얼굴에 가득한 오하석이 말문을 잃었다. 일반외과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바빠져 언제 시간을 내야 할지 몰랐다.
과장이 시시콜콜 방법까지 알려 줄 필요는 없다. 나이가 한두 살도 아니고 인턴 말인데 알아서 잘해야 할 일이었다. 못 쓰면 대가는 치러야 할 것이다.
쓰라리고 살벌하게.
“내일 아침까지 제출해야 하나요?”
이쁘고 욕심나는 인턴이다.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점심 먹기 전까지.”
단발머리가 휘청거렸다. 오전 일과를 생각하면 아침이나 점심이나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꽤 긍정적인 성격이다.
“알겠습니다. 가 보겠습니다.”
단발머리가 쪼르르 누군가를 찾아 달렸다. 없던 일도 아닌데 인턴만 긴장한 것이 아니었다. 오만석이 송진우를 보며 오하석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하석아, 진우 대신 오빠가 도와줄까?”
“헤헤! 선생님은 힘만 세잖아요.”
“하긴 저 자식이 공부는 나보다 잘했지. 잘해 봐. 근데 너 왜 요새 오빠라고 안 불러? 내가 싫어졌어?”
헤헤 소리에 다른 때와는 다른 의미가 담겼다.
오하석 때문인지, 오만석에게 바짝 신경을 쓴 탓인지 김지훈도 뜻하지 않게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됐다.
시간을 다투는 응급 환자가 뜰 때마다 보인 오만석의 유난한 흥분 때문이었다. 응급실에서는 날아다니고, 수술실에서는 눈이 번쩍번쩍 빛나고, 병실에서는 환하게 웃으며 환자를 보았다. 누구나 힘들어하는 새벽에 수술을 해도 말이다.
묘한 궁금함이 따라 붙었다.
“오만석, 넌 어떻게 정규 수술 때보다 응급 수술할 때 더 활기가 넘치는 것 같다.”
“바이탈 흔들리는 환자를 보면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됩니다. 정말 흥분됩니다.”
“가슴이야 누구든지 떨리는 거 아니야?”
오만석이 고개를 저었다.
“그거 하고는 확실히 다릅니다. 전 생사를 오고가는 환자가 수술 받고 눈을 뜰 때마다 우리 과가 마술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술?”
“죽음을 앞둔 환자를 우리 손으로 살려 내지 않습니까? 제가 우리 과에 느끼는 가장 큰 매력이 바로 그겁니다. 제겐 보람이고 행복입니다. 가능하다면 외상 전담 의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손일석의 말과 함께 중증 외상 환자에 대한 고민이 떠올랐다. 오만석의 생각은 알지만 아직 전공의다.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다른 문제 다 떠나서 몸이 버틸 것 같아?”
오만석이 소리 내 웃다 말고 헛기침을 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제게 그런 말씀하신 분이 처음이라 그만······. 힘, 체력하면 접니다.”
자신 있다는 얼굴이었다.
세월이 지나면 생각이 바뀔지 모르지만 눈여겨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김지훈 자신도 중증 외상 환자를 수술할 때마다 비슷한 느낌을 받긴 했다.
복귀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성급한 판단은 금물이었다. 어쨌든 자신의 목표를 향해 달리는 후배는 어여삐 여겨야 한다. 마침 응급 수술이 끝난 후였다.
잠시 후 오만석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최철한의 얼굴에서 긴장이 떠나질 않았다.
자신이 집도하지만 김지훈 앞으로 입원한 상태기에 더욱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또한 첫 집도를 기점으로 복강경 수술 환자도 진료하게 될 것이다.
이번 수술에 말할 수 없는 의미가 담겼다.
‘오늘만은 응급실이 조용했으면 좋겠다.’
준비 또 준비.
노력 또 노력.
점심 식사 후 대장암 환자를 떠올리는지 마치 수술하는 것처럼 꼼지락거리는 김지훈의 손이 눈에 박혔다. 얼핏 수련 때 들었던 김지훈의 별명이 떠올랐다.
따르륵 선생!
평생 노력한다면 더 우스꽝스러운 별명일지라도 자랑스러울 것이다. 그동안 최철한도 틈나는 대로 수술 방에서 기구들과 벗했다. 늦었다고 해도 실수하지 않으려면 더 친해지고 더 손에 익어야 했다.
까만 밤이 하얗게 지났다.
드디어 최철한의 첫 복강경 집도날이 밝았다.
하늘도 첫 집도 성공을 기원하는지 지난밤 응급실에 살짝 바람만 불었다. 회진을 돈 후 최철한이 가장 먼저 수술 방으로 향했다. 김지훈도 긴장된 얼굴로 대장암 환자를 찾은 후 뒤를 따랐다.
수술 방이다.
모두들 오전 수술 준비로 부산했다.
각 과 과장들이 옷을 갈아입으며 최철한에게 미소를 보냈다. 민혁기 원장 아니면 정성호 과장의 입을 통해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다.
“최철한 선생, 수고해.”
평소 주고받지 않는 말까지 건넸다.
잠시 후 김지훈이 들어와 잠깐 동안 수술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환자가 옮겨졌다는 노티를 받고 천천히 수술실로 향했다.
환자의 두려움과 불안이 보였다.
김지훈이 미안한 눈빛을 보냈다.
주치의와 집도의가 다르다는 사실은 항상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의료 상황에서는 솔직함이 역효과를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큰 병원과 유명한 의사, 작은 병원이면 과장만 찾는 성향이 바뀌지 않는 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을 이끌어 갈 의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필요악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긴장은 긴장일 뿐 수술과 마취 준비는 다름이 없다. 각자 자신이 맡은 역할에 충실했고 어느새 수술 준비가 모두 끝났다. 구미 근무를 시작한 후 첫 복강경 수술이 시작되기 직전이다.
띠! 띠! 띠! 띠!
안정적인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렸다.
최철한이 집도의 자리에 섰다.
훅 숨을 내뱉으며 과도한 긴장을 풀었다.
김지훈이 퍼스트 자리에 섰다.
불안은 금물이었다. 차분한 눈빛으로 안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그동안 경주해 온 노력이 훌륭한 결실로 나타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첫 집도이기에 고경아가 어시스트를 맡았다.
기구를 가지런히 정리한 후 최철한을 보며 살짝 미소를 보였다. 마스크에 가려지고 눈가에 걸린 미소지만 응원의 마음이 충분히 전달됐다.
“마취 시작합니다.”
이용철 과장의 말에 최철한이 길게 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눈을 감고 수술 과정을 상기했고 어시스트들 모두 자신의 역할을 되새겼다.
그때 수술실 문이 열렸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옮겨졌다.
순간 수술실이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