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64화 (764/1,329)

9화. 절실하게 원하면 방법이 나온다. (1)

생각지도 못한 고민이었다.

“대장암을 라파로로 할 수 있을까요?”

조기 대장암 환자를 떠올릴 때마다 안타까움이 앞섰다. 혹시 좋은 생각이 있을지 몰라 신현수와 복강경으로 했던 조기 위암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최철한이 나직한 헛기침을 터트렸다.

수준 차이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광범위 임파선 박리와 처리해야 할 수많은 혈관을 생각하는 순간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조기라지만 위암을 라파로로 했어? 대단하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다르잖아. 조기 위암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범위가 넓고 라파로로 하고 싶어도 기구 자체가 없는데 다른 방법이 있겠어?”

“그래서 더 아쉽네요. 대장을 이어줄 기계만 있었어도 고민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점점 축적되는 경험에 김지훈이 상당한 자신감을 보였다. 최철한의 눈에는 절대 자만이나 무리한 일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라파로 집도가 문젠데 김 과장은 기구가 없는 게 문제야? 후우! 실력이 아니라 기구가 수술 한계를 결정짓다니 웃음 밖에 안 나오네.’

복강경 수술 수준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수많은 경험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노력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오며 쌓은 실력이었다. 지금도 통상적인 방법을 따르면 되는 일을 두고 김지훈은 고민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강렬한 자극이었다.

학회 발표 준비를 하던 김지훈이 부랴부랴 케이스 리포트를 수정했다.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매달렸다.

세 건이 아니라 네 건이다.

단순히 한 건 추가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케이스가 차곡차곡 쌓이고 좋은 결과를 보이면 확실한 수술법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 새로운 시도이기에 인간이라면 혹할 수밖에 없는 명성이나 명예는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물론 당사자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말이다.

바쁜 일상이 이어졌다.

병동, 수술 방, 외래, 응급실을 오가다 보면 눈 깜짝 할 사이에 하루가 저물었다. 최철한과 전공의 교육에 더욱 힘을 쓴 탓인지 밤이면 녹초가 됐다.

일주일에 두세 건씩 있는 혈관 수술로 오프 시간을 까먹는 일까지 벌어졌다. 고경아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지도 이미 오래전이었다.

그 와중에도 조기 대장암 환자에 대한 고민이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의외의 변수가 발생했다. 환자가 수술을 거부한 것이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암이라고 해도 용종만 떼면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대부분의 환자는 듣고 싶은 말만 기억한다. 정성호 과장이 시술 전 대장 절제 가능성을 분명하게 언급했지만 기억하지 못했다.

환자 탓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반드시 수술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요지부동이었다.

김지훈이 수시로 찾아가도, 정성호 과장의 말도 아무 소용없었다. 암이라고 강제로 수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너무도 완강한 태도에 어쩔 수 없다고 단념하려는 순간 환자가 퇴원을 미뤘다.

내과 치료가 모두 끝났는데도 말이다.

여전히 수술 받을 의향은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 환자를 주저앉히는 문제가 있다는 말이었다.

무엇일까?

암이라는 질환에 대한 두려움뿐일까?

수술에 대한 두려움일까?

어느 쪽이든 다시 한 번 설득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환자와 마주 앉았다.

“수술 안 할 랍니다. 암이 있는 용종은 다 뗐고 매년 대장 내시경 받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나 같은 사람은 그렇게 해도 충분하다고 텔레비전에서 똑똑히 들었습니다.

말과는 달리 불안한 기색이 분명히 있었다.

의사의 경고와 용종에 발생했다고 해도 암이라는 사실을 무시하지 못했다. 문제는 환자의 말도 안 되는 고집도 모자라 독과 다름없는 어설픈 지식까지 겹쳤다는 것이었다. 의외로 티브이를 맹신하는 경우가 많아 의사도 설득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환자 분, 그건 상태에 따라 다 다릅니다. 점막 하부를 침범한 이상 무조건 수술해야 합니다. 방송을 무조건 믿으시면 안 됩니다.”

환자가 눈가를 찌푸렸다.

“내가 사진을 보니까 용종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던데 솔직히 암은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저 환자처럼 고생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하필이면 며칠 전 수술한 대장암 환자와 같은 병실에 있었다. 수술 후 말도 못할 통증과 불편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눈앞의 두려움이 암에 대한 두려움을 훌쩍 넘어선 상태였다.

이해 못할 바가 아니었다.

“용종을 제거했어도 임파선을 따라 암세포가 퍼졌을 가능성이 너무 높습니다. 가장 확실한 치료는 대장을 절제하는 겁니다. 그래야 재발에서 최대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재발하면 그때 수술하면 안 되겠습니까?”

“재발하면 더 이상 조기 암이 아닙니다. 예후 자체가 상당히 다릅니다. 왜 병을 키우려고 하십니까?”

환자가 입을 꾹 다물었다.

결국 며칠 째 같은 말의 반복이었다.

수술을 거부한 이상 입원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환자도 내심 걱정되는지 퇴원을 하지 못했고 안색마저 나빠진 상태였다. 의사나 환자에게 모두 답답한 일이었다. 다행히 매일 대화를 나눈 덕에 조금은 속마음을 보였다.

“환자 분, 가장 두려운 문제가 뭡니까? 암이 두려운 겁니까? 아니면 수술이 두려운 겁니까?”

“솔직히 얘기할게요. 내 옆에 수술한 대장암 환자는 3기고 나는 조기라고 들었습니다. 용종도 싹 다 뗐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배 열고 속 다 긁어내면 나도 저 고생을 해야 한다는 거 아닙니까? 수술한지 한참 지났는데 지금도 진통제를 맞지 않습니까?”

“조금 있으면 통증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환자가 홱 고개를 돌렸다.

“환자 고생을 의사가 알겠습니까? 수술만 하면 끝이지. 난 암 환자 아닙니다. 용종도 없습니다. 더 치료할 일도 없으니까 내일 퇴원하겠습니다.”

마침내 수술을 두려워하는 진짜 이유를 들었다.

암 환자의 초기 특징인 자기 자신의 질환에 대한 부정이자 치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세로로 길게 연 절개 창과 수술 후 겪어야 하는 온갖 문제는 당연히 두려울 수밖에 없다.

용종에 발생한 조기 대장암이란 사실과 설익은 지식이 그런 생각을 더욱 부채질 했을 것이다. 어쩌면 아예 수술이 불필요하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지도 몰랐다.

암을 두고 타협점이 있을까?

이대로 퇴원한다면 치료 최적기를 놓치는 꼴이었다. 만에 하나 재발하면 분명히 조기 암은 아니다. 아니, 재발률은 거의 100퍼센트에 수렴한다. 지금보다 훨씬 크고 어려운 수술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5년 생존율이 뚝 떨어진다.

치명적인 일이다.

퇴원까지 하루 남았다.

환자와 보호자의 동의가 없으면 어떤 수를 써도 수술할 수 없다. 그냥 보내고 잊으면 되는 일일 수 있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방법이, 방법이.’

김지훈의 고민이 멈추질 않았다.

환자에게 가해진 부담 중 한 가지만 덜어내도 올바른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높았다. 암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수술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저기 조언을 구했다.

모두들 다른 방법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환자가 수술을 안 한다는데 무슨 방법이 있겠어? 수술 후 문제 때문에 겁나서 못하는 거라면 라파로가 대안일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잖아? 찜찜해도 깨끗이 포기하는 게 답이야.”

구미 병원은 자료 자체가 미비했고 서울이나 천안에 자료 요청을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상황을 전해들은 이경석도 혀만 찰뿐이었다.

(지훈아, 다른 방법이 없다. 솔직히 수술 거부하는 사람 못 본 것도 아니고 붙잡고 설득하는 수밖에 더 있겠어?)

수술만 하면 놀라울 정도로 좋은 예후를 보일 텐데 답답한 일이었다. 강제로 배를 열고 싶은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퇴근 후에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지훈씨, 일단 싹 잊고 머리부터 식혀요. 그래야 무슨 생각이 나도 생각이 나죠.”

“그게 좋겠죠?”

고경아의 목소리가 스르르 사라졌다.

피곤한지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었다. 이 자세 자는 사람이나 어깨를 내준 사람이나 은근히 힘들다. 조심스럽게 어깨를 빼고 베개를 받쳐 주었다.

‘요새 수술이 많아져서 경아씨도 많이 힘든 모양이네.’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이자 걱정이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평소와 다름없이 회진을 돌았다.

몇몇 환자의 드레싱 상태를 확인하며 조성민과 필요한 조치를 상의했다. 별 생각 없이 병실을 나가던 김지훈이 갑자기 손가락을 튕겼다. 드레싱을 보다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딱 떠오른 것이다.

‘이런 방법을 택한다면 혹시?’

발걸음이 바빠졌다.

남은 회진을 돌며 순간순간 생각을 정리했다.

‘이 방법도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걱정도 잠시 분명 미진하지만 환자를 설득할 수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다. 지금이 아니면 말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것이다.

수술까지 잠시 미루고 대장암 환자를 찾았다.

만만찮은 부담이 뒤따랐지만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한동안 나직한 대화가 오갔다. 환자와 보호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말씀대로 수술할 수 있습니까?”

실패는 거론할 때가 아니었다.

스스로 확신을 갖고 환자와 보호자를 설득해야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만 코 줄처럼 기본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것들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겁니까? 분명 고생 거의 안 하는 거죠? 하루만 더 고민해도 되겠습니까?”

힐난 섞인 말에 김지훈이 웃음만 보였다.

회진 돌다 갑자기 떠오른 방법이었고 성공을 장담하기 어려웠다. 환자가 의외로 좋은 반응을 보여서 그렇지 생각해 보면 전통적 방법과 큰 차이가 아닐 수도 있었다.

부담이 커졌다.

다행히 마냥 미룰 수 없지만 의외로 급하지 않은 수술이 암 수술이다. 솔직히 하루가 아니라 며칠이라고 해도 미뤄지는 시간을 고려할 이유가 없었다. 김지훈 입장에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오전 수술을 마치고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김지훈의 말을 들은 최철한이 눈만 껌벅거렸다.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해도 실제로 가능한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무리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암 수술인데 기술적으로 가능하겠어? 환자가 수술에 동의해서 다행이긴 한데 위험하지 않아?”

“경험은 거의 없지만 불가능한 수술은 아닐 겁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해야죠. 시도도 하기 전에 실패부터 생각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은근한 긴장과 강한 각오가 동시에 서려 있었다.

“내가 준비할 일은 없을까?”

김지훈이 손을 활짝 피며 말했다.

“써전의 손이죠. 다른 어떤 수술보다 퍼스트가 중요합니다. 저하고 호흡이 안 맞으면 하기 어렵습니다.”

이번 역시 처음 시도하는 방법이었다.

더구나 광범위한 절제를 요하는 암 환자다.

시작도 하기 전에 압박감을 느꼈지만 집도는 오로지 김지훈 자신의 몫이었다. 수술 전까지 최철한은 확실하게 어시스트 할 수 있는 손을 만들어야 했다.

전공의들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끝을 모르시네.”

조성민의 말에 모두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수술 결정이 나기까지 수많은 그림이 김지훈의 머릿속을 오갔다. 어디까지가 가능한 선이고 어디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고민이 끊이질 않았다.

마침내 암과 두려움과 수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환자가 결정을 내렸다. 환자만이 아니라 김지훈 자신도 수술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해 다음 주 화요일에 수술하기로 했다.

수술 계획이 구체적으로 잡혀갈수록 일반외과 전체가 은근한 긴장과 기대에 휩싸였다. 숙소에 앉아 자료를 읽던 오만석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나 같으면 에라 모르겠다하고 끝냈을 텐데 대단하시네. 수술 방법이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복잡해. 대장 절제는 생각만 해도 무섭다. 진우야, 넌 어떻게 생각해?”

“실력이 있으시니까 그런 방법을 생각해 내신 게 아닐까? 솔직히 겁난다.”

“너도 나처럼 겁나는구나?”

“아니. 따라 잡지 못할 것 같다는 겁.”

입술을 꽉 문 송진우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

‘자식! 꿈도 야무지네,’

오만석이 피식 웃으며 리포트를 쓰고 있던 오하석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오하석, 넌 왜 네 방 놔두고 우리 방에서 리포트를 쓰는 거야? 어쭈? 내과 리포트네. 겁도 없는 자식! 오하석, 오빠 갈증 난다. 우리 커피 한 잔씩 오케이?”

“오빠, 외과하고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물어 보려는 건데 왜 그래요? 이왕 타는 김에 송진우 선생님 것도 탈 게요.”

헤헤 웃음소리가 문밖으로 사라졌다. 오하석이 커피 타러 나간 사이 오만석이 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내가 하석이 친오빠였으면 넌 죽었어. 무슨 말인지 알지? 사내자식이 질질 끌기는. 힘내, 인마.”

작게 말하면 어디 덧나나?

송진우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정성호 과장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김 과장, 여기 와서 새로운 시도만 벌써 몇 번째야?”

“네 번째네요.”

“이번에는 정말 깜짝 놀라겠어.”

“우연히 떠오른 생각입니다. 일단 수술부터 성공해야죠.”

“시도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어 보인다. 결과를 떠나 최철한 선생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거야. 혼자만 크지 말고 라파로 확실하게 만들어 줘. 혈관도.”

머리 긁적일 일이었다.

속마음까지 알았으면 얼굴 시뻘게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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