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고민. 고민. 고민. (2)
오프를 맞아 간만에 가족과 외식을 하던 최철한이 아내의 말에 피식 웃었다.
“여보, 많이 피곤해 보여요. 밥 빨리 먹고 들어가서 쉬어요. 과 살리기 전에 당신이 먼저 쓰러지겠어요.”
“그렇게 보여? 김 과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당신보다 젊으니까 체력은 좋을 거 아니에요?”
작은 미소가 큰 웃음으로 변했다.
“몇 살이나 차이 난다고. 김 과장도 점심 먹고 나면 맥을 못 쳐. 곧 서울 올라갈 사람이 나 가르친다고 툭하면 눈이 벌게지는데 내가 어떻게 놀아?”
“하긴 사실 나도 경아 씨한테 미안해요. 김 과장님 오프 날이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당신 전공의 때 혼자 있으면서 고생했던 기억이 날 정도에요.”
고경아와 다른 처지가 아니었다.
최철한이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입이 백 개라도 고맙다는 말 밖에 더 하겠어? 당신에게도 미안해. 들어갈 때 맛있는 과일 좀 사갑시다. 오늘은 응급실이 편안하게 지나갈지 모르겠네.”
관사에 도착한 최철한이 30분도 안 돼 침대에 쓰러졌다. 요란하게 코를 골아 거실로 쫓겨 난 아내가 아이들을 단속하며 티브이 볼륨을 줄였다.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역시 사람이 중요하고 마음이 중요하다.
그 시간 김지훈이 진료실 불을 밝히고 있었다.
구미에 와 고민이 끊이질 않았다.
하나를 해결하면 바로 또 다른 생각이 다가왔다.
이젠 웬만큼 굴러갈 정도로 환자와 수술이 늘었다. 부족한 인력도 오만석이 합류해 한시름 덜었지만 문제는 서울로 간 이후였다.
사람이 부족한 것은 힘으로라도 때울 수 있다. 내년에 유석재와 신임 1년차가 합류하면 일정 부분 풀릴 것이다. 결국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개개인의 능력이었다.
‘최철한 선생님이 계시니까 내가 없어도 전공의 교육은 확실하게 이루어지겠지. 그렇다면 결국 최철한 선생님의 능력이 핵심이란 말인데.’
최철한은 수술 경험을 상당히 축적한 전문의다.
대부분의 수술에 있어 집도 능력이 충분하고도 남았다. 따라서 구미에 온 이유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인 복강경 수술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지금까지 퍼스트를 선 게 몇 건이나 되지? 그 정도면 이미 집도 시기가 늦었을 지도 몰라. 서둘러야겠어. 혈관 수술도 신경 써야 하는데 바쁘다. 바빠.’
이제 예비 동작은 끝났다.
본격적으로 집도를 대비한 트레이닝을 시켜야 했다. 학교 선배이자 전공의 선배이며 전문의인 최철한을 상대로 말이다.
‘전공의라고 생각하고.’
으스스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각오를 다지던 김지훈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고민거리가 줄줄이 이어지며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일반외과 상황이 갈수록 열악해 지고 있었다.
앞으로 전공의 지원자가 줄면 줄었지 원래 인원대로 회복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지금처럼 앉아서 기다리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먼저 움직여야 한다.
이혁민 교수도 재원들을 미리 점찍었다.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었고 김지훈 역시 눈도장을 찍은 인턴이 있었다. 여자라고 해서 일반외과 못한다는 것은 편견에 불과했다.
관건은 오하석의 마음이었다.
‘하석아! 곧 우리 과 돌지? 잘해보자.’
으스스함에 서늘함이 더해졌다.
마지막 고민.
의사라면 평생 피하지 못할 고민이었다.
대장암 환자 컨설트가 하나 왔다.
건강검진 중 발견된 에스 결장 내 용종(polyp)에서 암이 발생한 환자였다. 점막에만 국한됐다면 용종을 제거하고 추적 관찰하면 된다.
불행히도 점막 하부를 깊숙이 침범했다. 복부 CT 상 임파선 전이나 원격 전이는 없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전이가 발생하는 부위다.
같은 조기 대장암이고 현미경 차이에 불과했지만 치료법은 완전히 달랐다. 점막 하부까지 침범한 암은 배를 크게 열고 에스 결장과 주변 임파선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
극과 극인 것이다.
환자는 물론 의사 입장에서도 난감할 정도의 차이였다. 환자에게 가해질 심리적 육체적 손상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현수와 함께 했던 조기 위암 수술이 생각났다.
대단히 어렵겠지만 복강경으로 대장과 주변 조직의 절제 시도는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공 가능성 자체가 상당히 희박했다. 설령 성공한다고 해도 잘린 대장을 이어줄 기구 자체가 없었다.
결국 개복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아무리 운이 좋아도 라파로로는 반만 가능하네. 아니지. 이어줄 수 없다면 불가능하다는 말과 다름이 없구나. 좋은 방법이 없을까?’
욕심이라는 것을 빤히 알았지만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복강경을 계속 떠올린 탓인지 자연스럽게 석사 논문과 케이스 리포트가 생각났다. 한동안 진료실에 머물던 김지훈이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응급실로 향했다.
구미보다 아뻬 많은 동네는 없을 것이다.
아뻬 밭이라는 명성이 사라졌다고 해도 여전히 많았다. 나란히 누워있는 두 명의 환자를 진찰한 김지훈이 보호자와 상의를 했다.
한 명은 마른 체형이라 굳이 복강경을 권할 이유가 없었다. 남은 한 명이 문제였다.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았는지 터진 정도가 아니라 충수돌기 주변 농양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게다가 살집이 제법 붙어있었다.
복강경의 진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기회였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어떻게 참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고름 집이 잡혔기 때문에 개복하면 절개 창이 상당히 클 겁니다. 수술 후 통증도 심하고 절개 창 감염 등의 합병증까지 발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생 많이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복강경으로 수술하는 겁니다. 배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개복과 다를 바가 없지만 그 외의 문제는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던 보호자가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했다. 가운에 새겨진 이름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혹시 선생님이 오신지 얼마 안 되셨다는 그 분이신가요? 복강경 전문의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복강경 전문의?
그럴듯하지만 있지도 않는 말이 돌다니 소문 제법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개인적으로 무척 기분 좋은 말이라고 해도 구미 일반외과가 우선이었다.
“저만이 아니라 우리 과 선생님들 모두 복강경 수술을 많이 시행하고 있습니다. 혼자 하는 수술도 아니고요.”
복강경 전문의라는 소문 상당히 강력했다.
보호자가 별 다른 고민 없이 동의했다.
첫 아뻬 수술이 준비되는 동안 조용히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조성민을 불렀다. 이어진 말에 깜짝 놀랐다. 김지훈은 별다른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성민아, 만석이 준비시켜.”
“예? 아뻬 주실 겁니까?”
복귀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오만석에게 아뻬를 준다니 그간의 일을 생각할 때 놀라운 일이었다. 조건이 안 되면 어떤 수술이든 절대 메스를 건넬 김지훈이 아니었다.
판단 근거가 있을 것이다.
스승만큼 손이 큰 오만석에겐 열정과 재능이 있었다. 2년차 말이라는 위치와 곧 구미를 떠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준비 확실하게 해. 내가 가고나면 후배들 가르칠 사람이 누군지 알지? 곧 4년차 치프 되잖아. 농양 환자는 라파로로 할 거니까 최철한 선생님이 들어와야 할 것 같다. 내가 연락할게.”
혹시 집도와 퍼스트를 이어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젖어있던 조성민이 콧등을 찡그렸다. 아쉬운 일이지만 김지훈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조성민이 휴게실 문을 열며 눈짓했다.
김지훈 말에 각오 단단히 한 모양이었다. 대범한 오만석이 당황할 정도로 다시 소리가 무자비하게 들렸다. 송진우와 함께 대기하고 있던 김현철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왜 다들 점점 무서워지죠?”
“나보다 더 무서워? 아! 김지훈 선생님은 빼고.”
송진우의 말에 고개가 뚝 떨어졌다.
첫 번째 환자가 올라왔다.
오만석의 긴장과 각오가 엿보였다.
김지훈과 최철한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조성민도 눈에 보일 정도로 실력이 확 늘었다. 특히 같은 년차인 송진우의 수술 실력은 충격 그 자체였다.
‘진우부터 따라 잡아야 해.’
김지훈이 조용히 퍼스트 자리에 섰다.
오만석은 곧 3년차가 된다.
단순히 경험 축적을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사소해 보이는 면까지 고려해야 할 때였다. 앞으로 어떤 기준을 갖고 수술해야 하는지 환자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깨달아야 할 때였다.
수술이 시작되기 전 김지훈이 손가락을 벌렸다.
“오만석, 이렇게 마른 환자 절개 창이 3센티미터를 넘기면 안 되겠지? 못할 것 같으면 자리 바꿔.”
“아닙니다. 잘할 수 있습니다.”
강한 긴장감이 커다란 덩치에 매달렸다.
몇 달의 공백이 있었다지만 1년차를 마쳤고 열악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했던 오만석이었다. 기대한 대로 눈썰미까지 있었다.
첫 집도부터 김지훈의 방법을 시도했다.
손이 너무 큰 게 단점이긴 했다. 손가락 하나가 절개 창을 가득 메울 지경이었다. 용케 시야를 확보하며 아뻬를 배 밖으로 꺼내느라 한동안 낑낑 댔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
김지훈이 말없이 기다렸다.
빨갛게 익은 아뻬가 툭 튀어나왔다.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김지훈이 가장 강조하는 부분을 잊지 않았다. 타이 하는 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복귀 후 첫 집도를 만족스럽게 잘 끝냈다.
“수고하셨습니다.”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
그동안 본 대로 휴게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이미 이론 때문에 탄 경험이 있다. 치프인 조성민까지 수술 후 새카맣게 타는 것을 봤기에 단단히 각오했다.
나름대로.
‘헉’소리가 문밖으로 삐져나왔다. 잠시 후 휴게실에서 나온 오만석의 이마에 땀이 흥건했다. 맥이 다 빠졌는지 ‘쿵’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이런 면에서는 훨씬 강인하고 대범한 송진우마저 놀랄 정도였다.
거구를 못 이긴 의자가 삐그덕 삐그덕 비명을 질렀다. 한동안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오만석이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진우야, 너하고 비교하면 어떻게 보여?”
라이벌 의식인가?
송진우가 피식 웃으며 아무 말도 없이 수술실로 향했다. 쿵쿵 뒤를 따라붙은 오만석이 체구를 이용해 위압적으로 내려다보았다.
답을 달라는 강렬한 눈빛이었다.
“아직 내가 더 낫다는 생각 안 들어?”
오만석이 씨익 웃었다.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맙다. 얼마 안 남았어. 각오해.”
빠지직! 두 개의 눈빛이 허공에 불꽃을 튀겼다.
전공의는 전초전에 불과했다.
두 번째 수술이 시작됐다.
Periappendiceal abscess.
(충수돌기 주변 농양)
Laparoscopic Appendectomy.
(복강경을 이용한 충수돌기 절제술)
밤중에 난데없이 연락받고 퍼스트를 서게 된 최철한이 눈가에 바짝 힘을 주었다. 이미 한 차례 본 수술이고 부른 이유도 짐작됐다.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얼마나 의미가 큰 수술인지 각인도 확실히 된 상태였다.
난데없는 연락은 고경아와 이 간호사도 받았다. 최철한과 생각이 다르지 않았기에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하고 집중했다.
나직한 인공호흡기 소리.
에어가 주입되는 소리.
수술실을 환하게 밝히는 모니터 불빛.
단 한 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수술 팀.
김지훈이 긴장을 풀기 위해 가끔씩 목을 돌렸다.
한 번의 경험으로 숙달되거나 쉬워지는 수술은 없었다. 긴장과 땀의 연속이었다. 고름을 제거하고 아뻬를 절제하기까지 두 시간 넘게 걸렸다.
‘저번은 양반이었네.’
경험이 쌓일수록 같은 질환도 수술 난이도가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이 강하게 다가왔다. 해결 방법은 오로지 끊임없는 노력과 경험 밖에 없었다.
최철한에게 복강경은 여전히 무리일 것이다. 집도를 위해서는 더 발전해야 했다. 모든 관계를 잊고 오로지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는 사실만 기억했다.
화르륵!
한층 강해진 불길이 타올랐다.
강하고 따끔한 지적에 최철한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졌다.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도 들지 못했다. 마지막 말에는 수술 때보다 더한 긴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늦어도 1-2주 후에는 라파로 집도를 시작하셔야 합니다. 제가 서울로 올라가면 혼자 라파로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지금 이 상태로는 문제가 많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최철한은 심각한데 오만석은 난리가 났다.
“와우! 와! 응급 수술을 이렇게 할 수도 있네.”
연거푸 감탄을 터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배꼽 속에 숨은 상처를 빼면 5밀리미터에 불과한 절개 창 두 개로 수술을 끝냈다.
담낭 절제만 복강경으로 하는지 알았던 오만석의 눈에는 신기원이나 다름없었다. 복강경의 유용함과 김지훈의 실력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진우야, 나 복귀하길 정말 잘한 것 같다.”
“진작 돌아오지.”
건강한 동료 한 명 더 생겼다는 생각에 송진우가 진심으로 기뻐했다. 라이벌은 강병옥만이 아니라 일반외과를 택한 모든 전공의들이었다.
환자나 보호자는 오죽할까?
복강경 전문의란 소리가 연거푸 들렸다.
소문이 말 등에 올라탈 것이다.
모두가 곤한 잠에 빠졌을 무렵 바이탈이 흔들리는 환자가 왔다. 후다닥 일어나 찬 물에 세수하고 응급실로 내달린 송진우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오만석이 이미 바이탈을 잡고 있었다.
커다란 덩치가 무색할 정도로 민첩하게 움직였다. 곧바로 비장 절제술이 시행됐고 환자는 무사히 깨어났다. 일과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다. 피곤이 바위덩어리처럼 어깨를 짓누를 때인데 오만석이 펄펄 날았다.
다들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송진우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응급 수술만 뜨면 힘이 더 나는 것 같네.’
어쨌든 한 사람이라도 정규 수술 때 못지않은 열정과 열의를 가졌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실수와 부족함을 메워줄 것이다.
세 건의 수술이 그렇게 끝났다.
일과 개인적인 삶은 별개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 한 번으로도 이미 관계가 틀어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과장 자리까지 후배에게 양보한 최철한에게 특히 고맙게 생각해야 할 일이었다. 고민까지 터놓고 상의할 수 있어 더욱 고마웠다.
일과를 끝내고 최철한과 함께 관사로 돌아가던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리며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김 과장,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안 좋다.”
“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고민이 있긴 합니다.”
“무슨 고민인데 그렇게 심각해?”
귀를 기울이던 최철한이 깜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