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한계를 인정하는 것도 치료다. Ⅰ (2)
병원 전체로 보면 지금도 생사를 오가는 환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생각과 달리 유난히 몸과 마음이 처졌다.
‘그동안 운이 좋았어.’
중환자실 환자에 입원 환자도 많아져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회진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수술 방으로 향했다. 마음이 심란할 때는 도리어 바쁜 일상이 편한 법이다.
옷을 갈아입는 사이 최철한이 조성민과 나직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성민아, 당분간 라파로는 내가 퍼스트를 서야 되겠다. 미안하지만 메이저도 그래야 할 것 같은데 이해하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세컨 열심히 서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어?”
“참관만 해도 배우는 놈이 있는데 세컨이면 양반이죠. 다른 수술도 있잖아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치프가 퍼스트를 설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지만 일단 잘 마무리됐다. 수술실로 들어오는 최철한의 눈빛에서 단단한 각오가 느껴졌다.
김지훈이 긴 숨을 내쉬며 눈빛을 굳혔다.
두 달 후면 전과 똑같은 상황이 다시 벌어지겠지만 드디어 구미 일반외과가 모든 구성원을 채웠다. 어느 것 하나 등한시할 수 없었다.
새로운 각오로 임할 때였다.
그 첫날, 첫 수술인 복강경 수술이 시작됐다.
최철한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퍼스트 자리에 섰다.
손놀림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단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김지훈도 평소처럼 별말 없이 수술을 진행했다. 연이어진 두 개의 수술이 불과 3시간 만에 끝나자 최철한의 얼굴이 더욱 진지해졌다.
‘퍼스트를 서니까 또 다르네. 라파로에 관한 한 이준영 선생님 못지않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두 달밖에 안 남았는데 정신 바짝 차리고 배워야겠어.’
조성민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전문의는 뭐가 달라도 달라. 처음 퍼스트 서시는데 나보다 훨씬 잘하시네. 그런데 김지훈 선생님이 최철한 선생님도 태우실까?’
은근히 호기심이 동한 조성민이 김지훈의 동선을 놓치지 않았다. 잠시 후 휴게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엿듣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걸리며 뼈도 못 추릴 것이다.
그래도 기대 만발이다.
마주 앉은 최철한이 수술을 되새기며 입을 열었다.
“김 과장, 많이 미숙해 보였지? 선배가 아니라 전공의 가르친다고 생각했으면 좋겠어.”
대단한 부담을 느끼는지 눈가까지 찌푸리며 수술 중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선배에게 각별한 김지훈이기에 웃으며 화기애애하게 대답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전공의 교육과는 다르지 않은 문제였다.
더구나 두 달 후에는 혼자 복강경 수술을 하며 전공의 교육까지 해야 한다. 유석재가 올 때면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야 할 것이다.
“선생님, 지금 이 시간만은 후배를 떠나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얼굴에 철판 깔고 눈에 걸렸던 부분을 매섭게 지적했다. 선배라고 해도 구미 과장을 할 사람이기에 결코 봐주지 않았다. 이미 장인어른을 태운 경험도 있다.
화르륵 불길이 날고 얼음처럼 차가운 비수가 날았다. 최철한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창백해지길 반복했다. 처음부터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공의처럼 가르쳐 달라고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입으로 말이다.
아얏 소리 한 번 하지 못했다.
첫 수술의 끝을 뜨겁고 차갑게 마무리한 김지훈이 훗날을 기약했다. 이제 시작이라는 눈빛이었다.
‘죄송하지만 집도할 때는 정말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일 분이 한 시간 같은 태움의 시간이 끝났다. 바짝 마른 입술과 거친 호흡을 달래기 위해 냉수 한 잔 마시던 최철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김지훈이 한 말 때문이었다.
“어제 수술 때문에 말씀 못 드렸습니다. 빨리 인수인계 받으시고 과장 맡으셔야죠.”
최철한이 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구미 근무하는 동안에는 계속 맡아 줘. 난 라파로만이 아니라 메이저 수술도 다시 배워야 해. 과장이 교수에게 배우면 이상하잖아?”
김지훈의 눈도 동그래졌다.
“선생님, 무슨 말씀이세요? 2개월만 더 근무하면 서울로 가야 하는 제가 어떻게 과장을 합니까?”
“석재하고도 의논한 일이야. 수술도 제대로 못하면서 과장을 맡을 수는 없어. 선배나 나이가 아니라 실력과 능력이 먼저잖아? 내 말대로 해.”
“선생님! 중환자실 환자도 있어서 안 됩니다.”
최철한이 눈가를 좁히며 더욱 진지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이준영 선생님이나 이혁민 선생님이 중환자실에 환자 있다고 다른 일 못하셔? 김 과장도 앞으로 올라갈 일만 남았는데 그냥 수술만 하고 살 거야? 대학 병원 교수는 개인 병원 의사하고 많은 면에서 다르다는 거 잘 알잖아? 갈수록 책임이 무거워져.”
최철한이 전공의 때처럼 빡빡한 목소리로 정곡을 찔렀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공연히 환자 핑계 댔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하지만 김지훈의 말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서울 가는 날까지 나 잘 가르쳐 주고 과장 해.”
딴청 부리며 버텼다.
“아닌 건 아닙니다. 순서라는 게 있죠.”
서로 과장을 맡으라니 옆에서 보면 훈훈한 모습이겠지만 당사자들은 심각했다. 시간이 가도 결론은 안 나고 옥신각신 말싸움만 벌어졌다.
“정말 이럴 거야?”
입을 꾹 다물자 최절한이 목소리를 높였다.
“김지훈 선생, 내가 의국 선배지? 나 치프 때 1년차였잖아? 마지막으로 오더 내린다. 잔말 말고 과장 해. 오더야,”
“선생님, 지금은 전공의가 아니잖아요?”
“어쭈! 지금 학교 선배한테 덤비는 거야?”
그 말 한마디로 전세 역전이다.
태우는 사람과 타는 사람이 자리를 맞바꾸었다. 최철한이 무섭게 몰아쳤고 김지훈이 결국 꼬리를 말았다. 선배 말 안 듣는다고 이마에서 식은땀이 날 정도로 탔다.
‘어후! 최철한 선생님, 아직 죽지 않으셨네.’
컵에 남은 냉수는 김지훈 몫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마지막으로 깨갱 소리 한 번 냈다.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이다.
“솔직히 제 말이 맞죠. 원장님께 물어보면 누가 하는 게 맞는지 답 딱 나올 겁니다.”
“원장님도 나하고 같은 생각이실 거다.”
그때 마치 짠 것처럼 민혁기 원장이 휴게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인지 이용철 과장, 정성호 과장, 주덕현 과장까지 줄줄이 들어왔다.
“설마 첫날부터 둘이 싸우는 거야?”
김지훈이 반색을 했다.
전공의 시절로 돌아갔다.
“원장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그게 아니라요.”
원장 입장에서는 당연히 구미 붙박이인 최철한이 과장직을 수행하길 바랄 것이다. 그렇게 단단히 믿은 김지훈이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다 동원해 어린아이 고자질하듯 입에 침을 튀겼다.
순리를 따르는 당연한 말을 기대했다.
민혁기 원장이 웃음이 터트리며 뜻밖의 말을 했다.
‘허허! 자리 욕심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모른 척하고 경력 쌓을 기회로 이용할 수 있는데 한사코 마다해? 이러니 징계 건도 모두 김 과장 편이었겠지.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네. 수술 욕심 말고 또 무슨 욕심이 있을까?’
“둘 다 틀린 말은 아니야. 그럼 내가 원장으로서 결정할게. 김지훈 선생이 계속 과장 해. 수술 배워야 하는 사람한테 뭘 요구하는 거야?”
“그래. 끽해야 두 달인데 서로 고집부릴 일이 아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김 과장, 그냥 해. 그게 서로에게 편한 일이야. 과장이 뭐 대단한 보직이라고 이 난리야?”
어라?
이용철 과장도 모자라 정성호 과장까지?
완전히 구석에 몰린 김지훈을 보던 민혁기 원장이 최철한을 보며 슬며시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김 과장, 서로 양보하고 선후배를 존중하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어. 하지만 가끔은 어쩔 수 없이 책임을 맡아야 할 때가 있는 법이야. 이왕 한 달 했는데 두 달 더 하면서 과장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배우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야.”
“그럼요. 김 과장, 원장님 말씀이 맞다. 배고프다. 최철한 선생, 점심 먹으면서 겸사겸사 정식으로 인사하자.”
올 때처럼 우르르 몰려 나갔다.
최철한이 씨익 웃으며 눈길도 주지 않았다.
‘지훈아, 욕심 부리지 않아 정말 고맙다. 네가 후배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뒷모습을 보던 김지훈이 긴 숨을 푹 내쉬었다. 선배들은 결코 책임을 넘기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회가 왔을 때 경험하라는 말이었다.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식당으로 가던 도중에 슬쩍 중환자실로 들어가자 어느 틈엔가 최철한과 주덕현 과장이 뒤에 서있었다.
“선생님, 식사부터 하시죠.”
“과장님 환자는 원래 밑에 교수가 하는 법 아닙니까? 나도 환자 확실하게 알아야 김 과장 오프 때 대처하지. 예전처럼 안달복달하지 말고 오프 때는 제수씨하고 푹 쉬어. 말 나온 김에 당직날 정하자. 내가 월수금 설게.”
“예? 제가 3일 서야죠.”
“당직 날이 많아야 수술을 많이 할 거 아냐? 수술 욕심 너무 내지 마.”
그래도 선배에 대한 예의가 있는 법이다.
“이런 문제는 과장이 결정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말 잘했네. 과장이 평일에 3일씩이나 서는 게 말이 돼? 어떻게 밑에 교수보다 당직을 더 서? 예의가 아니다.”
대답도 듣지 않고 최철한이 마치 자신의 환자인 것처럼 환자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 주덕현 과장과 치료 방침을 두고 심각한 대화까지 나누었다.
주임 교수 환자를 해당 파트 교수가 대신 보는 일은 일종의 관행이다. 체력 때문이라도 나이 많은 교수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 김지훈도 실제로 그렇게 해 왔지만 대우 받을 처지나 위치가 아니었다.
‘철저하게 과장 대우를 하실 생각인가?’
전보다 훨씬 더 무거운 책임감이 다가왔다.
존중받고 대우받는 일 이상의 것이 필요한 자리가 바로 과장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도 이대로 끝낼 일이 아니었다.
삼고초려!
두 번 더 시도했지만 단칼에 잘렸다. 간만에 연속으로 새카맣게 탔다. 깨끗이 생각 접고 환자에게 집중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네. 그래. 딱 두 달만 과장하자. 대신······.’
김지훈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최철한은 양보한 대가를 뼈저리게 치르고 말 것이다. 뜻밖의 잡음이나 불만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일단 환자에게 집중하는 것이 먼저였다.
관사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덕에 퇴근 후에도 쉽게 중환자실 환자를 찾을 수 있었다. 일요일 밤에 이어 송진우가 거의 킵을 도맡다시피 환자 곁을 지키고 있었다.
“환자 분, 어때?”
“오전과 비슷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현철이는 뭐하고 네가 계속 킵을 해?”
“병동 일도 많고 응급실에 환자까지 있습니다. 새벽에 교대할 생각입니다. 선생님은 왜 또 나오셨어요? 걱정하지 마시고 들어가십시오.”
잠시 곁을 지키다 중환자실에서 나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보호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노모와 아내의 눈에서 두려움만 보였다.
송진우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평소와는 약간 다른 눈빛으로 노모를 보았다. 의료봉사 때 보았던 그 눈빛 그대로였다.
어머니가 생각나는 모양이었다.
화요일 아침,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응급실 보고를 받는 김지훈의 등 뒤로 최철한을 비롯해 전공의와 인턴까지 모두 도열해 있었다. 은근한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최철한의 결정이었다. 김지훈이 애써 살려 놓은 일반외과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싶다는 의지였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첫 걸음과 다름이 없었다.
최철한의 가세는 확실한 변화를 가져왔다.
차츰차츰 정상 궤도를 찾아가던 일반외과가 달아올랐다. 회진부터 분위기가 미묘하게 변했다. 최철한과 전공의에 인턴까지 도합 6명이 회진을 돈 덕인지 환자들이 보내는 신뢰가 더욱 강해졌다.
두 명의 교수가 진료를 시작한 이상 강한 상승효과까지 나타날 것이다. 외래 환자가 늘고 응급실은 더 이상 롤러코스트를 타지 않기를 바랐다.
김지훈은 과장으로서, 교수로서 항상 자신의 역할을 고민하며 최선을 다했다. 라파로는 물론 다른 수술까지 모두 들어오는 최철한은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휴게실 문이 전보다 더 자주 열렸다.
세컨 선다고 방심하고 있던 조성민까지 호출됐다.
복강경만큼 수술 팀 전체가 수술 과정을 환히 볼 수 있는 수술은 없다. 녹화 테이프를 활용하면 참가 여부와 관계없이 생생하게 복기까지 할 수 있다.
“세컨 눈에는 모니터가 안 보여? 이리 와.”
송진우도 예외는 없었고 김현철은 일에 지쳐 안쓰러운지 유일한 열외였다. 대신 아뻬와 눈 시뻘건 선배가 있다. 수술 기록으로 타고 ‘다시’ 소리 무진장 들어야 했다.
인원이 한 명 더 늘었는데 어째 더 혹독해지는 느낌이 물씬물씬 풍겼다. 옆에서 지켜보던 주덕현 과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지경이었다.
“김 과장, 이러다 애들 다 나가는 거 아냐?”
“유석재 선생님 오시기 전까지 최철한 선생님 혼자 근무하시잖아요. 아직 멀었습니다.”
좌우로 흔들리던 고개가 위아래를 오갔다.
또 하나의 정규 수술이 끝났다.
의미가 상당한 날이었다.
세 번째 암 환자 수술이자 최철한과의 첫 메이저 수술이었다. 다른 암 환자 수술도 줄줄이 남아 있다. 내과와의 협진이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김지훈의 손은 눈부실 정도였고 최철한은 퍼스트의 수준이 얼마나 높을 수 있는지 여실하게 보여 주었다. 그 와중에 마무리를 받은 조성민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휴게실 문이 열렸다.
설마 이번에도 최철한까지?
복강경 수술이 아니다.
조성민만 조용히 뜨거운 처분을 받았고 암 수술 복기에 전원이 참가했다. 수술 전 이론 준비와 어울려 더욱 탄탄한 지식을 쌓을 수 있는 자리였다.
점점 바빠지는 하루하루였다.
킵까지 겹쳐 눈이 더욱 뻑뻑해진 조성민이 턱이 빠져라 하품을 하며 말했다.
“아! 피곤해. 어떻게 김지훈 선생님은 수술보다 컨퍼런스 할 때가 더 무섭냐. 그 덕에 수술이 쏙쏙 눈에 들어오긴 했지만 오늘 밤이 점점 두려워진다. 대장암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하지?”
어제 위암 수술을 준비하며 식은땀이 삐질삐질 흐를 정도로 호되게 탔다. 그래도 웃을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때맞춰 온 위궤양 천공 환자 수술을 받은 것이다.
물론 수술 후 휴게실로 직행했다.
비슷한 수술로 연거푸 타는 경우 흔치 않다. 아직도 지난밤의 여운이 남았는지 어깨까지 부르르 떨었다. 송진우의 눈에 부러움이 잔뜩 맺혔다.
‘나도 수술하고 타고 싶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조성민이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