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개운한 마음으로 시작하자. (2)
번지수 잘못 찾았다.
(조성민입니다. 선생님, 어디세요?)
“이제 출발했는데 환자 있어?”
(예, 새벽 5시쯤에 아뻬 한 명 입원시켰습니다. 언제쯤 도착하실 것 같습니까?)
“12사에서 1시 사이?”
(알겠습니다. 그때 맞춰 수술 준비하겠습니다. 죄송한데 저는 못 들어갈 것 같습니다.)
“너 오프라고 했지? 신경 쓰지 말고 일 봐. 나가기 전에 환자에게 잘 얘기해 놓고. 진우한테 맡기지.”
과장이 부재중이라고 해도 오프인 치프가 새벽까지 환자를 보다니 믿음직했다. 하기에 마음 놓고 서울 병원 일에 집중했을 것이다.
간만의 음주까지.
‘자식! 고맙다.’
구미 근무 4주째다.
이젠 제법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비록 아뻬지만 과장이 없는데도 입원했다는 것은 그만큼 신뢰를 얻었다는 의미일 수 있었다. 물론 오프인데 새벽까지 환자를 본 조성민과 전공의들의 노력도 한몫했을 것이다.
“아뻬 있어요? 어제 그렇게 술을 마셨는데 괜찮아요?”
“괜찮아요. 이 정도에 쓰러질 내가 아니지. 도착하자마자 병원 들어가야 할 것 같으니까 휴게실에서 우동이나 한 그릇 하고 가죠.”
괜찮긴 속 쓰려 죽을 지경이었다.
단무지에 가락 우동 두 그릇 후루룩 흡입하고 내쳐 달렸다. 허했던 속이 서서히 충만해졌다. 일요일 하행선은 한가했고 그 덕에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환자와 보호자를 만나 동의를 받자마자 곧바로 수술 준비가 진행됐다. 약속했던 말이 있다. 지난밤, 아뻬 이외에 환자가 없어 쌩쌩한 김현철의 눈이 기대에 차 있었다.
“진우야, 현철이 준비시켜.”
눈가에 남아 있던 술기운에는 역시 달달한 것이 최고다. 꿀이 함유된 음료를 대량으로 섭취하던 김지훈이 피식 웃고 말았다.
수술 방 휴게실에서 난리가 났다.
다시. 다시. 다시.
그간 집도는 물론 퍼스트도 제대로 서지 못했던 김현철이 송진우의 살벌한 눈빛에 처절하게 무너졌다.
“아뻬는 기본 중의 기본이야. 집도를 해야 하는데 이렇게 허술하면 제대로 끝낼 수 있겠어? 아뻬 할 줄 아는 1년차가 아니라 아뻬 정말 잘하는 1년차가 돼야 할 거 아냐? 다시. 곧 환자 올라온다. 시간 없어.”
다시. 다시. 다시.
김지훈이 입술을 모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와! 정말 살벌하네.’
교육의 효과가 있었다.
김현철은 긴장 속에서도 집중을 잃지 않았고 무리 없이 아뻬 수술을 했다. 당연히 김지훈의 성에 차지 않았다. 수술이 끝난 후 눈길 한 번 주었다.
송진우에게.
“진우야, 네 눈에도 보였지? 1년차 교육 똑바로 시키자.”
이제 휴게실은 쉬는 곳이 아니었다.
소각장이다.
송진우가 참된 내리 사랑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었다. 병실로 향하는 김현철의 얼굴은 아직도 시뻘겠고 다리마저 후들후들 떠는 것 같았다.
안타까우면서도 흡족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지만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면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이다. 겸사겸사 회진을 도는 동안 김현철이 송진우를 보며 웃고 있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선후배 사이에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애정과 존경하는 과장의 한마디 때문이다.
“수처 예쁘게 잘했네. 누가 보면 성형외과에서 수처한 줄 알겠다. 진우야, 긴장해라.”
1년차밖에 안 된 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회진을 다 돌았을 무렵 3층 병동에서 송진우를 찾는 방송이 나왔다. 불과 한 층 아래다. 번거롭게 전화할 필요도 없어 바로 내려갔다.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스테이션에 있던 정성호 과장도 따라 놀랐다.
“김 과장, 언제 내려왔어? 회진 돌았어?”
“예. 아뻬 하나 있어서 수술하고 막 회진 돌았습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진우는 왜 찾으셨습니까?”
‘어제 고생 좀 했을 텐데 얼굴이 좋네. 일이 잘 해결됐나? 하긴 김 과장 열정을 누가 따라갈까?’
“담낭염 환자 한 명 있는데 치료에 반응을 안 해. 어젯밤부터 증상이 너무 심해지네. 수술해야 할 것 같아. 일요일인데 괜찮겠어?”
예의상 하는 말일 테고 당연히 괜찮다.
곧바로 환자 보고 수술 결정을 내렸다. 담낭농증이 우려될 정도로 상당히 심한 상태였다. 복강경 생각이 났지만 아직은 신중을 기해야 할 때였다.
“미니콜레라는 방법으로 시행하겠습니다.”
정성호 과장에 대한 신뢰와 일요일인데도 나와 수술을 결정하는 김지훈의 모습에 보호자들이 망설이지 않고 수술에 동의했다.
한참 수술 준비를 할 때 정성호 과장이 슬며시 다가와 물었다.
“일은 잘 해결됐어?”
“예. 잘됐습니다.”
“다행이다. 자세한 얘기는 원장님 계실 때 하자. 아! 내일 혈관 환자 두 명 컨설트 나갈 거야.”
“두 명이요?”
“수술 받은 환자들 만족도가 높아. 나도 그렇고.”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결 편안해 보였다.
김지훈이나 정성호 과장이나.
미니콜레가 시작됐다.
송진우가 최선을 다해 퍼스트를 섰다.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환자까지 다소 말라 불과 채 두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담낭은 깔끔하게 제거됐고 순조롭게 회복된다면 일주일 이내에 퇴원할 것이다.
김현철만 성에 안 찰까?
송진우는 2년차기에, 기대가 그만큼 크기에 더 성에 안 찼다. 10분도 안 돼 김현철과 똑같은 처지가 됐다. 시뻘게진 얼굴과 이내 입가에 걸린 미소까지 말이다.
혼자 근무하는 마지막 주말의 시작이 좋았다. 다음 주 스케줄을 생각하며 관사로 돌아간 김지훈이 뾰족한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지훈 씨, 내가 한 번만 더 이런 일 생기면 가만 안 있는 다고 했죠? 전화를 해야 할 거 아니에요? 손가락은 뒀다 어디에 쓸 거예요?”
1년차, 2년차, 과장이 차례로 탔다.
일반외과 엄지는 바로 고경아였다.
심각한 외상을 고민한 손일석 때문일까?
일요일 저녁, 사이렌 소리와 계속해서 내원하는 환자로 의료진들이 몸살을 앓았다. 그간 사고가 조금만 크게 터져도 대구로 향하던 119, 사설 응급 차량만이 아니라 환자나 보호자들도 구미 병원에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환자가 미어터지면 죽어나는 건 의료진이다.
간호사와 각과 인턴들이 잰걸음을 놀려야 했다. 방사선과 기사가 장비 앞을 떠나지 못했다. 외과 의사들은 수술 방을 들락날락했고 내과와 소아과 의사들도 응급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와중에 산부인과는 열심히 신생아의 울음소리를 터뜨리고 있었다.
“김 과장, 환자 한 명 봐줘.”
“어떤 환잔데요?”
“복통으로 온 환잔데 애매모호하네. 장간막 임파선염이 의심되는데 아뻬를 배제하지 못하겠네.”
정성호 과장과 함께 환자를 본 김지훈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일단 우리가 입원시키겠습니다.”
“그래. 부탁할게.”
정성호 과장이 환자를 양보했다?
단순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내과 전공의들이 서로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과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절대 보내지 않았던 정성호 과장이었다.
지금까지 외과로 보낸 환자도 컨설트를 낸 경우뿐이었다. 환자 욕심만이 아니라 일반외과에 과장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 관점에 따라 늦었을 수도 있지만 이젠 누구보다도 강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수용할 수 있는 적정 환자를 넘지 않았다. 몇 시간에 불과한 수면에 몸은 피곤했지만 활기를 잃지 않을 수준이었다. 물론 체력 강안 김지훈에 국한된 말일 가능성이 높았다.
월요일 아침. 과장 회의 내내 민혁기 원장의 얼굴이 상당히 밝았다. 점점 더 활기를 띄는 병원 때문만이 아니었다. 하성원 원장 건을 연락 받은 덕이었다.
일과가 끝나기 전 커피 한 잔 하며 자리를 가졌다. 이용철 과장, 정성호 과장, 주덕현 과장이 궁금함을 감추지 못했다. 김지훈이 이사회 일까지 상세하게 설명하자 다들 씁쓸해하면서도 당연한 결과라는 얼굴이었다.
“자자! 이제 지난 일은 잊고 각자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내년에는 지원도 늘 것 같고 지금처럼만 운영되면 숨통이 확실히 트이겠어. 열심히 합시다. 김 과장, 수고했어. 수술 또 있지? 고마워.”
민혁기 원장의 격려 속에 혈관 수술 두 건을 마쳤다. 사방에 까만 어둠이 내렸지만 문득 신기동 교수, 손일석, 신현수가 차례로 생각났다.
어떤 수술이든 끝나고 난 후에는 항상 아쉬움이 남았다. 이번 수술도 마찬가지였다. 미진한 점은 없었는지 다시 한 번 되짚었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힘을 합치면 최고의 수술 팀, 최고의 써전이 될 수 있겠지?’
한평생 달려가야 한다고 해도 꿈이 있어, 함께 할 수많은 동료들이 있어 행복했다.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날이 갈수록 시간이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외래 환자가 완연한 증가 추세로 돌아섰다. 예약된 수술을 하며 중간에 외래 진료까지 보려니 뜻하지 않은 부작용까지 발생했다. 수술이 끝날 때까지 외래 환자가 기다려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한 것이다.
“죄송합니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죠?”
가급적 빨리 본다고 해도 기본적인 소요 시간이 있다. 한 명이라면 모르지만 두셋만 돼도 거꾸로 수술 환자와 보호자가 기다려야 했다.
불만이 없을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외래에 환자가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수술 방과 외래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왔다 갔다 해야 했다. 외래가 늘면 수술도 따라 늘어난다.
수목금 내리 수술이 추가됐다.
점점 피곤이 쌓여 가고 있었지만 이동 시간마저 아껴야 했다. 엘리베이터에 눈길도 주지 못했다. 숨을 헐떡거리며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에 간호사들이 웃고 말았다.
“과장님이 아니라 전공의 샘이네.”
“전공의 샘? 일반외과 전공의 샘들 못 봤어? 이젠 가관도 아니더라.”
과장이 바쁜데, 응급실은 밤마다 한 번씩 전쟁을 겪는데 온전할 리가 없었다. 치프인 조성민조차 심한 피곤을 떨치지 못했다. 병동에서 차트를 보다 깜빡 졸기 일쑤였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일은 기하급수로 늘어난다.
김현철은 가히 죽음 직전이었다.
급기야 수술 중 졸다 못해 무릎까지 꺾였다. 김지훈이 모른 척하고 선배들이 이해해 주지 않았다면 한바탕 난리가 났을 것이다.
한 놈만 예외였다.
피곤에 절어 얼굴만이 아니라 눈까지 벌게진 송진우가 만세를 불렀다. 조성민과 수술을 두고 싸울 필요가 없어졌다. 오프를 꼭꼭 챙기지 않으면 정규 수술에서도 졸 판이었다.
김지훈이 화력 동원하면 재도 못 남길 것이다.
“어후! 힘들어. 이러다 쓰러지는 거 아니냐?”
“이 정도면 아직 살만 한 거죠.”
“니 얼굴이나 보고 그런 얘기를 해.”
“그래도 잠은 자잖아요. 서울에서는 눈도 못 붙이는 날이 태반이었습니다. 논문도 써야 하는데 그게 더 죽겠네요.”
“그래. 너 잘났다. 헉! 논문? 으아아!”
푸념을 하는 놈이나 반박하는 놈이나 비명을 지르면서도 뿌듯해하고 있었다. 물론 김현철은 지금 이 순간에도 눈이 감겨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붉어지고 졸고 엎드려 자고.
숨 가쁜 하루하루가 지났다.
연달아 이어진 암 수술은 김지훈에 대한 시각을 또 한 번 바꾸어 놓았다. 위암은 물론 3기까지 진행된 대장암까지 깔끔하고 확실하게 끝냈다.
“야! 이게 바로 암 수술이야. 예전에 봤던 수술하고 비교가 안 되네. 성민아, 너도 그렇지?”
“어후! 김지훈 선생님 아니었으면 까막눈 될 뻔했습니다. 전 이만 타러 가 보겠습니다.”
이용철 과장의 감탄에 또 한 명의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 도중 슬며시 들어왔던 정성호 과장이었다.
‘이런 실력이 있으니까 라파로로 새로운 시도를 했겠지. 이젠 어떤 환자를 보내도 걱정할 일이 없겠어. 최철한 선생이 잘해 줘야 할 텐데.’
때 아닌 걱정까지 다가올 지경이었다.
바쁜 만큼 시간도 빨리 지났다.
그 사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지훈아, 둘 다 해임됐고 하성원 원장은 횡령과 배임으로 고발 조치 들어갔어. 액수가 크고 증거도 확실해서 빠져나오지 못할 거야.)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재산도 많은 것 같던데 뭐가 부족해서 그런 짓을 했을까?”
(욕심이겠지.)
짧은 통화였지만 충분했다.
이 시간 부로 몇 개월을 끌어왔던 지긋지긋한 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됐다고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반면교사!
초심을 잃고 교만해진다면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하윤호나 하성원 원장처럼 될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마음 편하다.’
고경아와 하이 파이브를 하고 깨끗이 지웠다.
눈 깜짝할 사이에 토요일 해가 밝았다.
일과를 마치고 지난 일주일을 되돌아보던 김지훈이 나직한 콧소리를 냈다. 궤도에 오른 일상에 석사 논문까지 완성했는데 케이스 리포트는 초안만 잡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학회 발표용인데 이러다 스승님께 맞아 죽지. 주말에 보강할 수 있을까?’
최철한이 오면 한순간에 모든 일이 술술 풀릴 것이다. 그런데 도착한다고 했던 시간이 거의 다돼도 소식이 없었다. 진료실을 오가며 기다리던 중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기다리던 전화가 아니었다.
응급실이다.
‘또 무슨 환자지? 이번 주처럼 돌아가기만 하면 대충 두 명이 근무할 조건이 될 텐데 뜻대로 될까?’
기대가 되면서도 은근한 걱정이 다가왔다.
그 시간 구미로 향하는 최철한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김 과장이 환자를 얼마나 늘렸을까? 라파로를 빨리 습득할 방법은 없겠지? 너무 늦었네. 주말에 한 번도 못 쉬었을 텐데 빨리 가야겠다.’
토요일, 고속도로 하행선은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이러저런 걱정과 함께 도착했을 때는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다. 훌쩍 예정을 넘긴 시간에 짐도 채 풀지 못하고 응급실부터 들렀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환자 리스트를 보던 최철한이 눈가를 찡그렸다. 서둘러 가운을 걸치고 수술 방으로 달려갔다. 그사이 세 번째 수술이 벌어지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