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개운한 마음으로 시작하자. (1)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이 많아지는 사람이 또 있었다.
박승준 교수가 엉거주춤 망설였다.
“박 교수, 뭐해? 빨리 가자.”
이혁민 교수의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
하윤호와 함께 도매금으로 넘어가도 할 말이 없었다. 스스로 자신했던 실력마저 김지훈의 수술을 확인한 순간 과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박 교수, 뭐하니? 뭐해? 배 안 고파? 자긴 펠로우 아니다. 빨리 가자. 빨리.”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내 허물을 모두 덮어 주시는 건가?’
누군가를 찾았다. 가장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던 박승준 교수가 멈칫 발을 떼지 못했다.
‘선생님, 다시 시작해야죠.’
지동훈 교수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펠로우들만 남았다.
김지훈을 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오늘 벌어진 일의 주역이다. 그것도 모자라 남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수술에 도전했고 성공시켰다.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구미에서 말이다.
‘경석이 형까지 다들 왜 이래?’
신현수, 이경석과 함께 번쩍이는 눈빛을 보내던 손일석이 고개를 흔들며 두 손을 들었다.
“제길! 니 얼굴 보니까 할 말이 없다. 스트레스 받은 얼굴이 아니라 힘들어 죽겠다는 얼굴이네. 매일 당직 선다면서? 잠은 제대로 자?”
“조금씩 힘들어져서 그렇지 잠은 잔다.”
“김지훈 입에서 힘들다는 말이 나와? 구미에서 어떻게 사는지 대충 답 나왔네. 경석이 형, 현수야, 눈에 힘 풀자. 노력하는 놈 이길 장사 없다고 하잖아. 이젠 칼바람에 칼춤까지 출 모양이다.”
결코 운이나 재수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상상도 못할 고민과 노력 때문이었다. 신현수마저 인정해야 했다. 대신 머릿속에 든 것을 토해 내야 할 것이다.
“인정. 대신 첫 시도한 수술들 하나도 빠짐없이 설명해. 설마 혼자만 알고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누구 말인데 거역할까?
함께 나가지 않으면 발전은 없다. 최고의 써전이라는 목표에 근접도 하지 못할 것이다. 마치 눈앞에서 수술을 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설명했다.
쏟아지는 질문과 답변, 각자의 견해까지 때 아닌 열기가 치솟았다. 하윤호와 하성원은 이미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라이벌 의식 속에 숨어 있던 갈증을 면했다. 더불어 하루 종일 가슴을 밟고 있던 긴장까지 풀어졌다. 그 탓인지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느껴졌다. 서로에게 특히 손일석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다.
오가는 눈빛이 하나로 통일됐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무엇을 먹을지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손일석이 귀중한 깨우침을 던졌다. 물론 개인적인 감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런 날 우리끼리 먹어도 좋지만 각자 자신의 짝과 함께 먹으면 기쁨이 두 배로 느는 법. 칼바람 속에서 하루하루를 처절하게 살아가는 사내라고 해도 사랑이 빠지면 시체지. 이젠 칼춤인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기에 불이 났다.
불고기가 지글지글 끓어오를 무렵 펠로우들의 짝이 하나둘 들어왔다. 맏언니 격인 이경석의 아내를 중심으로 여자들이 한 상 차지했다.
“형수님, 갈수록 젊어지시네요. 도대체 비결이 뭐죠? 원래 타고 나셨구나. 서연아, 넌 어째 의사가 아니라 모델 같다. 세련미가 철철 흘러요. 형수님, 구미 생활은 괜찮으십니까? 혹시 반갑고 모두가 즐거워할 소식은 없나요?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고경희가 잔뜩 기대를 하며 눈을 반짝였다.
“우리 경희는 너무 완벽해서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내겐 너무 과분해. 경희야, 날 사랑해 줘서 고마워.”
역시 못해도 두 발 이상 빠른 놈이다.
손일석이 화려한 말발로 순식간에 자리를 장악했다. 다들 입맛을 다셨지만 이미 단련이 될 대로 된 김지훈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고경아에게 그윽한 눈길 한 번 주고 소주 한 잔을 탁 입에 털어 넣었다. 마음 편한 술자리에 감동의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도대체 이게 얼마 만인가!
아사 직전까지 몰렸던 술 벌레들이 가물에 단비 만난 듯 모두 몰려나와 춤추고 노래했다. 허가 받은 오프에 하윤호 일까지 개운할 정도로 깔끔하게 끝나 거리낄 것이 없었다.
외치지 않을 수 없다.
카르페 디엠!
한동안 손일석과 여인들 위주로 돌아가던 대화가 술기운과 함께 병원 일로 옮겨졌다.
첫 번째 화제는 단연코 김지훈이었다.
징계 건과 더불어 이사회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부터 시작해 구미 생활까지 이어졌다. 신현수는 지금도 미련이 남는지 틈만 나면 복강경 수술을 거론했다. 구미 병원 상황을 얘기할 때는 눈빛까지 번쩍여 왠지 살벌했다.
“문제가 많았네. 이번 주는 그렇다고 치고 다음 주에 수술 좀 있어?”
일주일만 빨랐어도 할 말 없을 뻔했다.
솔직하게 대답하면 된다.
“얼마 없어. 라파로 몇 개에 위암, 대장암 하나씩 있고 탈장 정도? 혈관도 한두 개?”
다들 눈이 찢어진 채 말이 없었다.
천생 외과 의사들이었고 그 탓에 오늘도 모든 대화가 결국 수술로 귀결되고 있었다. 남자 입장에서 얼핏 별 쓸데없는 얘기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여인들의 대화가 훨씬 다양하면서도 화려했다.
“이런 날은 다른 얘기 좀 해요. 병원에서 살면서 또 병원 얘기를 하고 싶을까?”
핀잔은 덤이다. 그러나 송충이가 솔잎만 먹고 싶어서 먹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밖에 모르기 때문일 테고 두 번째 화제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일석아, 어떻게 된 거야?”
“말 마. 수통 가서 딱 보이는 게 환자는 얼마 없는데 왔다 하면 난리 통인 거야. 근데 짱박은 의사들도 그렇고 나도 손을 놓았던 탓인지 대처를 제대로 못하겠는 거야. 한 마디로 죽을 맛이더라.”
“그래서?”
“더 배우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이 있어? 우리 병원 응급 센터 무지하게 쌩쌩 돌아가잖아. 위에다 파견 근무 내지는 위탁 교육을 건의했더니 어느 정도 긍정적이었는데 이놈의 결정이 안 나는 거야. 손 많이 비볐다.”
말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지만 결코 웃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가끔씩 눈가를 찌푸리는 것이 가슴에 남는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군 생활 중 발생한 부상은 극과 극이다.
팔팔한 나이기에 대부분 간단한 치료로 회복된다. 반면 수도 통합 병원으로 응급 이송될 정도면 목숨을 위협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일반외과와 관련된 부상이 동반되면 더욱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총상은 말할 것도 없고 군 장비가 위험한데다 어마어마하게 무겁잖아. 잘못 깔리면 답 없다. 뼈 부러지는 걸로 끝날 일이 아니야.”
“그렇겠네. 장갑차, 탱크, 총. 생각만 해도 겁난다.”
“치료도 치료지만 일단 사고가 안 나야 하고 만일 난다면 그 순간부터가 정말 중요해. 골든타임 뼈저리게 느꼈다. 오늘은 헬기 안 뜨나? 참! 지훈아, 너도 구미에서는 과장이니까 처신 잘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래서 사람은 경험이 중요하다니까. 군대나 우리나 계급사회 아니냐. 윗대가리가 될수록 책임도 그만큼 많이 져야 돼. 그걸 잊으면 상관으로서 자격 미달이다. 잊지 마.”
“오빠, 고운 말 써요. 윗사람.”
고경희의 뾰족한 목소리에 분위기가 홱 돌변했지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었다. 잠시 과장이라는 직분에 대해 생각하던 김지훈이 딱딱 손뼉을 쳤다.
“머리 아픈 일 간신히 해결됐는데 무거운 얘기는 그만하자. 하여튼 정말 잘됐다. 재밌는 일은 없었어?”
손일석에게는 군대 얘기가 가장 재미있을 것이다.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신현수가 쓰윽 눈길을 주며 안경을 고쳐 썼다.
의미심장한 말이 흘러나왔다.
“일석아, 너 혈관 수술도 들어가고 싶다고 했지? 내년 2월이면 신기동 교수님 얼굴 며칠밖에 못 볼 수도 있어.”
“무슨 소리야?”
이경석이 씨익 웃었다.
“천하의 하오문주도 군대는 어쩔 수 없구나. 아직도 부족해서 연수 또 가신단다.”
눈이 점점 커졌다.
“으아악! 어후!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왜 나한테는 말씀을 안 하셨지? 나 정말 군 생활 열심히 하고 착하게 살아왔는데 이런 불상사가 왜 벌어지는 거야? 누구 농간이야?”
비명까지 질렀다.
누구보다도 손일석의 마음을 잘 알고 있을 고경희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오빠 소리만 연발했다. 이경석의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다. 큰일 났지? 일석아, 후임 혈관 외과 주임 교수가 누군지 알아?”
“앗! 그렇구나. 후임이 누군데요?”
이런 문제를 빼먹을 손일석이 아닌데 충격이 컸던 모양이었다. 이경석 옆에 바짝 붙어 귀를 활짝 열고 있었다.
“아직 정해지진 않았지만 지훈이나 현수 중 한 명이 하게 될 것 같아. 수술실에서 타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잘 보여라.”
신임 교수가 오지 않는 한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의외로 심각했다. 닫힐 줄 모르던 입을 꾹 다문 손일석이 눈에 잔뜩 힘을 주었다.
김지훈과 신현수를 번갈아 보며 머리를 굴렸다.
‘총상에 대비해서라도 혈관 수술 경험을 꼭 쌓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저 자식들 목을 조를까? 아니야. 역효과를 볼 수 있어. 또 손바닥 비벼? 친구 놈들한테?’
살살 눈치를 보는 모습에 이경석이 고개를 흔들었다.
“너도 걱정되지? 네 손으로 직접 불 질렀다는 생각은 안 들어?”
“제가요?”
“쟤들 눈빛 봐. 군대 간 놈이 배운다고 설친 부작용이 안 보여? 얼마나 자극을 받았는지 눈이 다 시뻘게졌네. 나는 무슨 죄냐.”
진퇴양난이었다. 일이 잘 풀렸다는 생각에 김지훈과 신현수가 어떤 놈인지 잊었다. 이경석도 다르지 않았다.
‘군대 2년에 머리가 굳어 가는구나.’
손일석이 침을 꿀꺽 삼키며 슬그머니 물었다.
“지훈아, 현수야, 우리 친구지? 맞지?”
“당연히 친구지.”
“그치? 우리 프렌드 맞지? 친구 사이에 허물이 있으면 안 되잖아.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강호의 도의가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았는데 설마 요구 조건이 있는 건 아니지?”
김지훈과 신현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겠지. 오늘 너 하는 거부터 보자. 신 교수, 동의?”
“전적으로 동의.”
“하하하! 그럼 평소처럼 하면 되겠네. 내가 워낙 너희들 생각을 많이 하니까 특별하게 할 일은 없잖아.”
눈치가 안 좋다.
“형님들, 제 술 한 잔 받으시죠.”
돌연 정색을 하며 두 손으로 공손하게 술을 따랐다. 거만한 표정으로 술잔을 받은 김지훈이 툭툭 어깨를 두드렸다.
“동서, 앞으로 잘해 보자. 생각해 보니까 우리 인연이 보통 깊은 게 아니야. 내가 그냥 다 위에 있네.”
“하하하! 형님, 알아서 잘 모시겠습니다.”
“일석아, 번지수 잘못 찾았어. 구미 3개월 길다.”
“앗! 신 교수님이 계셨군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맏언니의 입에서 요란한 웃음이 처졌다.
술자리가 웃음바다로 변했다.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오갔다. 간만에 알코올을 대량 섭취한 펠로우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친구와 동료, 가족이란 이런 존재들일 것이다.
함께 고민하고, 함께 걱정하고, 함께 앞으로 나가고.
“지훈아, 언제 내려가?”
“내일 아침 일찍 가야죠.”
“오프도 없다면서 푹 쉬었다 가, 인마.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세상 뭐 있어?”
“맞는 말씀입니다. 이놈의 세상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저 자식들 앞에서 설설 기어야 하죠? 불공평해. 신의 아들이라는 놈들하고 싸우려니 너무 힘들어요. 형! 형은 내 마음 알죠? 경희야!”
“일석아! 나도 저 자식들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
“손일석, 니가 뭐가 힘들어? 하윤호 때문에 스트레스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알아? 난 그동안 두 다리 쭉 뻗고 잔 적이 없어.”
“난 하성원 원장까지다. 아버님 고민하는 모습을 보는 게 생각보다 훨씬 힘들더라. 지훈이 저 자식은 생각도 못한 수술까지 하고. 죽겠다.”
신현수도 간만에 소주잔을 계속 비웠다.
자욱한 술 냄새 속에 어지러운 말들이 오갔다.
2차는 필수다.
남자들만의 자리다.
김지훈은 물론 신현수까지 어지간히 마셨다. 하윤호와 하성원 원장의 일까지 잘 마무리된 덕분이었다. 손일석과 이경석도 나름의 이유로 거나하게 취했다.
사람도 골뱅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 밤이었다. 처음에는 반색하던 포장마차 주인아주머니가 혀를 차고 말았다.
“교수들이 이러면 어떻게 해? 아주 그냥 다 떡이네. 떡. 이 교수, 자기는 애도 있잖아?”
“우리 마누라가 재운다고 했습니다. 지훈아, 마시자.”
내일 아침 깨고 나면 몇 마디나 기억할까?
드문 일이다.
아내의 허락이 있다면 가끔은 그래도 좋을 것이다. 한 번쯤 속 시원하게 가슴속 깊숙이 꾹꾹 눌렀던 말을 내뱉어야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는 법이다. 불행히 술 이외에는 다른 수단도, 시간도 없는 것이 바로 외과 펠로우의 생활이었다.
꽤 늦은 시간이 돼서야 술자리가 끝났다.
고경아와 고경희의 시끄러운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그대로 곯아 떨어졌다. 손일석이 누구와 자는지 신경도 쓰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구미 생활 편하긴 편했던 모양이다.
손일석은 아직도 한밤중인데 김지훈과 고경아는 벌써 구미 내려갈 준비를 끝냈다. 아직 허락되지 않은 금단의 땅을 언제 밟을지 몰라 고경희를 단단히 단속하고 집을 나섰다.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술 작작 먹으라는 잔소리 사이로 전화벨이 울렸다.
띠리리리! 띠리리리리!
혹시 손일석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