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한 고비를 넘고. (2)
조용히 듣고만 있던 정승옥이 권 이사와 차 이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정확한 판단을 내렸고 더불어 한 명의 인재를 또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었다.
‘역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신뢰를 얻기 마련이지. 이젠 주변을 살피고 책임질 능력까지 갖춰 가는 건가? 김지훈, 오랫동안 잊지 못하겠어.’
휴가 중에 달려와 자신을 치료했던 모습과 이사들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모습이 중첩됐다. 한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딸깍!
누군가 스위치를 내렸다.
회의실이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어둠에 잠겼다.
모두가 나간 후에도 하성원 원장은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못했다. 불과 한 시간도 안 돼 처절하게 무너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윤호가 아니었어도 결국 터질 일이었다. 단지 방아쇠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되돌아 봐야 할 것이다.
일반외과 교수들도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분명 올바른 선택이었고 최선의 결과가 나왔지만 한편으로는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었다. 금경태에 이어 하윤호, 뜻하지 않았던 하성원 원장까지 일반외과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했다. 보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행동이 필요한 때였다. 어쩌면 미래를 책임져야 할 펠로우들에게 더욱 절실한 문제일 수도 있었다.
두고두고 고민해야 할 일이었다.
“모두 얼굴 핍시다. 지금까지 힘들었던 일은 싹 잊고 이제 앞만 보면 됩니다. 송재덕 선생님, 고생하셨습니다. 김지훈, 수고했다. 덕분에 모든 일이 잘 풀렸다.”
“그래. 그래. 세상 일이 다 그렇지, 뭐. 아무리 나쁜 놈이어도 한때나마 정을 줬으면 내치기 더 힘든 법이야. 이 과장 말대로 머릿속 깨끗하게 비우고 미래만 생각하자. 좋다. 좋아. 후련하다. 후련해. 허허허!”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었다. 밉든 곱든 사람 관계 무 자르듯 자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마음인지 모를 사람은 없었다.
“허어! 왜들 이래? 세상 안 무너졌다. 나쁜 놈 벌 받았을 뿐이야. 우리가 잘못한 일이 있다면 무엇인지 알고 고치는 게 중요하다. 중요해. 그래도 개운하다.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거야. 좋은 일만. 허허허!”
동네 아저씨 너털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김지훈, 잘한 일이야. 결과도 좋다.”
“설마 나만 좋아하고 있는 거야? 오늘 기쁜 날이다.”
이준영 교수와 신기동의 교수는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 덕에 분위기가 조금씩 살아났다.
“지훈아, 교수야. 커피 먹자. 커피. 허어! 현수야, 경석아, 사람이 몇인데 뭐하니? 뭐해? 지훈이 혼자 타다가 힘들어 죽는다. 너희들이 책임질 거야? 책임질 수 있어?”
후다닥! 허둥지둥!
무거웠던 마음이 고소한 믹스 커피 향을 따라 솔솔 빠져나갔다. 입안을 감도는 달달함에 김지훈이 미소 지었다. 불현듯 불쑥불쑥 찾아오는 추억 때문이었다.
‘음성에서 스승님과 마셨던 커피 맛 그대로네.’
커피 잔을 보던 이준영 교수의 눈가에도 잔주름이 잡혔다. 어쩌면 김지훈과 같은 기분, 같은 느낌을 즐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한 모금 남은 커피와 함께 끈적끈적 남아 있던 찝찝함까지 훌훌 털었다. 비 본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다. 오늘따라 모두들 정겹게 느껴졌다.
‘앞으로 우리를 어렵게 하는 일은 없겠지? 박승준 선생님 표정이 어둡긴 하지만 우리 과 선배이자 동료라는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그동안 서먹했던 사이도 금방 회복될 거야. 선생님들 말씀대로 좋은 일이다.’
“선생님, 오늘 커피가 유난히 맛있습니다.”
가장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사람이 김지훈이다. 활짝 웃으며 편안한 얼굴을 보이자 분위기가 급격하게 좋아졌다.
‘근데 일석이 저 자식은 왜 왔지?’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엉덩이를 붙였다 떼었다 하는 것이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뭔가 기대하는 표정에 살짝 흥분한 기색까지 보였다.
한동안 오늘 일에 대한 의견을 자연스럽게 주고받았다. 누구도 하윤호나 하성원 원장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충분히 전달됐다.
“이 얘기는 이쯤에서 끝내죠. 그동안 구미 병원 때문에 걱정이 많았는데 실적을 보니까 마음이 좀 놓입니다. 이준영 선생님, 라파로 중에 눈에 띄는 수술이 있습니다.”
이혁민 교수가 빙그레 웃었다.
이준영 교수가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뿌듯함과 놀라움이 분명하게 보였다.
“김지훈, 이 환자들 잘 퇴원했어?”
관심을 보일 수술은 빤했다. 역시 복원되지 않은 탈장, 고름이 잡힌 아뻬, 장 폐쇄 환자였다.
“다행히 모두 별 문제없이 퇴원했습니다.”
“어떤 식으로 접근했어? 수술 중 어려움은 없었고?”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느낌을 말했다. 복강경과 터진 아뻬, 장 조작이라는 말이 나오자 펠로우들의 긴장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야! 언제 또 이런 수술을 했어? 이 교수, 자기도 아직 못해본 수술이지? 잘했다. 잘했어. 아니구나. 큰일 났다. 큰일. 이 교수, 이러다 추월당하는 거 아니니? 지훈아, 교수야, 라파로 잘하니까 이제 대장하자. 대장. 박 교수, 경석이, 지훈이. 좋다. 좋아.”
김지훈이 피식 웃고 말았다.
‘이렇게 산만하신 분이 어떻게 만장일치를 끌어내셨지?’
아는 사람은 안다.
박승준 교수가 묘한 눈으로 송재덕 교수를 보았다.
하윤호, 하성원 원장과 어떤 관계였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도 변치 않는 믿음을 보내고 있었다. 마음이 아플 정도로 소원해진 지동훈 교수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실력보다 우선인 문제가 분명히 있었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와 희망을 주는지도 몰랐다.
‘후우! 어떻게 해야 하지?’
창피함인지 부끄러움인지 모를 감정이 스쳤다. 얼굴이 화끈거리는데 다들 고개를 빼며 실적 표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무관심이 아니라 일반외과 구성원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 주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수술을 얼마나 한 걸까?
펠로우들이 궁금함을 감추지 못했다.
빨간 펜으로 체크된 수술을 찾았다. 동시에 헛바람 집어 삼키는 소리가 터졌다. 이경석이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입술에 침을 축였다.
‘어이구! 지훈이 이 자식은 도대체 어디까지 놀라게 할 작정이야? 난 겁나서 하라고 해도 못하겠다.’
본격적으로 복강경을 배우고 있는 신현수는 아예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서늘해지는 목덜미에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냉정하기로 유명했지만 가히 충격인 모양이었다.
‘난 이제 담낭 절제술을 배우고 있는데 이준영 선생님도 시도하지 않은 수술까지 한 거야? 어떻게 장 폐쇄까지 라파로로 할 수 있지?’
강렬한 자극에 라이벌 의식이 끝도 없이 치솟았다. 슬쩍 고개를 들이민 손일석도 눈가를 찡그리며 답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군대 가 있는 동안 펄펄 나는구나. 3년이면 서당 개도 풍월을 읊는다는데 난 뭘 읊어야 하지? 지훈이 저 자식은 도대체 어디까지 달려갈 셈이야? 현수, 이 자식도 자극 단단히 받았네. 넌 나하고 비교하면 양반이니까 좀 참아 줘라.’
온갖 관심이 집중되자 어깨를 으쓱이던 김지훈이 서늘한 목소리에 자라목을 했다.
“혈관 수술은 이것뿐이야? 쯧! 환자가 없는 거야 아니면 수술을 제대로 못한 거야?”
“환자 자체가 많지 않습니다.”
“실력이 있으면 환자는 알아서 찾아와. 이런 식으로 일하면 곤란해. 경석이도 혈관 시작했어. 긴장하자.”
신현수와 이경석을 보는 눈빛이 왠지 부드러웠다.
헉! 난리 났다.
분위기 역전이다.
예상대로 구미에 가 있는 사이 펠로우들 모두 가공할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낸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연타를 맞은 손일석의 얼굴은 가히 가관이었다.
동시에 같은 말이 터졌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일석이 니는 특히 열심히 해야지. 김지훈, 혈관만 열심히 하면 안 된다. 구미 있을 때 우리 과가 왜 일반외과로 불리는지 확실하게 알고 와라.”
구미는 세부 전공의 의미가 없는 상황이다. 모든 수술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었다. 어깨에 걸린 짐까지 무거워졌다. 이준영 교수와 송재덕 교수도 은근한 입력이 실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 믿는다. 그건 그렇고 구미에선 과장인데 뭐 느낀 거 없나? 환자 말고도 일이 꽤 있을 것 같은데 어때?”
화제가 변해서 다행이었다.
이사회에서 했던 말을 다시 했다.
교수들이 입술을 모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2년차가 나갔다는 소리에 고민 많이 했는데 지훈이 네 말을 들으니까 내가 다 미안하다. 알았다. 신상민 부원장님과 잘 상의해서 순환 근무 적용시키고 자료도 미비하지 않도록 신경 쓰마. 다른 면까지 생각하고 고민해 줘서 고맙다.”
얼굴 벌게질 일이었다.
“지훈이가 생각이 깊어. 생각이. 이 교수, 봤지? 구미 보내길 얼마나 잘했어? 우리 펠로우들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잘났다. 아암! 잘났지. 잘났어. 지훈아, 교수야, 내 말이 맞지? 그치? 대장하자. 대장.”
어디에 관점을 두어야 할까?
김지훈이 머리만 벅벅 긁었다.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시간도 늦었고 밥도 못 먹었는데 한 가지만 더 말하고 이만 자리를 끝내겠습니다. 손일석, 네가 직접 얘기해라.”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한쪽에 처박혀 있던 손일석이 나직한 헛기침을 하며 일어났다.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하고 꾸벅 허리를 숙였다.
상당히 진지했다.
“제가 내년 2월부터 3개월 간 응급 센터에서 근무하며 외상 치료에 대해 배울 예정입니다. 상부에서 어제 허가가 떨어져 정식으로 말씀드립니다. 이준영 선생님,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
“예. 선생님. 신기동 선생님, 응급 센터 근무는 오후 7시부터 다음 날 9시까진데 혹시 혈관 수술도 들어가면 안 되겠습니까?”
“응급실에서 졸지 않을 수 있으면.”
“감사합니다.”
오늘은 놀랄 일투성이다.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일석을 보았다.
마치 병원으로 돌아올 것처럼 지나가듯 말했던 말이 바로 이것이었다. 군 병원에 있으니 외상 치료는 당연했고 손일석답게 혈관 수술까지 욕심을 내고 있었다.
‘어느 쪽이 주목적이야? 하긴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놈이 아니지. 저 자식은 군대 가서도 날 자극하네. 어라? 만일 내가 혈관 주임 교수를 임시로 맡으면… 으하하하!’
내심 좋아 죽다가 시무룩 풀이 죽었다.
구미 근무가 끝난 직후였다. 그때까지 신현수는 신기동 교수의 살벌한 비수를 맞으며 일취월장할 것이다. 자칫 손일석과 똑같은 처지가 될 수도 있었다.
‘하필이면! 아! 울고 싶다.’
그보다 더 서러운 일은 당분간 혈관 수술을 하기 힘들다는 사실이었다. 운이 좋아도 일주일에 한두 건일 것이다. 물론 손일석이 들으면 눈이 뒤집힐 일이긴 했다.
자리를 끝낼 즈음 신동철 이사장과 윤재철이 찾아왔다. 잠시 인사를 나누고 교수들에게 저녁 식사를 제의했다. 이준영 교수와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쉬운 순간이었다.
“2년 전에도 본의 아니게 도움을 받았는데 이번에도 김 교수 덕분에 잘 해결됐어요. 고마워요. 우리 김 교수 조언을 깊게 고민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구미에서 돌아오는 대로 윤 이사님과 함께 얼굴 봅시다.”
얼굴 벌게질 말이었다. 자리를 갖자는 말도 예의상 한 말이 아니었다. 전임 강사 임명과 처우에 대해 상의하자는 제안일 것이다.
큰일이라면 큰일을 치른 날이었다. 하성원 원장 일도 확실하게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상당한 부담을 느낄 텐데 얼굴이 무척 좋아 보였다. 김지훈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짓자 무슨 의미인지 안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이미 결정 난 것과 다름이 없어요. 해임될 겁니다. 법적인 책임을 어디까지 물을 수 있느냐만 남은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신경 쓰지 말고 구미 병원에 전념해 주세요.”
윤재철도 기분 좋은 미소를 보였다.
“김 교수, 나도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미 생활은 불편하지 않아요? 어려운 점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요. 직접 말하기 불편하면 우리 신 교수나 서연이를 통해 전해도 좋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다들 배고프겠다. 가자. 가자. 같이 먹을까? 젊은 사람끼리 먹어야 더 맛있지? 내가 다 안다. 다. 지훈아, 교수야, 중간에 서울 올라오면 전화해. 밥 한 끼 같이 먹자. 일석이 너는 군대 생활 잘하고 내년에 보자.”
“김지훈, 얼마 남지 않았지만 과장이라는 사실 잊지 마라.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적으로 과장이 책임져야 한다. 알겠나?”
“혈관 수술 기회 있으면 놓치지 마.”
내용은 달라도 모두 애정 어린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이준영 교수만 남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나며 뜻밖의 말을 했다.
“오늘 커피 맛있었다.”
다른 말은 하나도 필요하지 않았다. 처음 만난 그 날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스승이었고 언제나 제자였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다녀오겠습니다.”
김지훈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검토했던 논문을 툭 내밀었다. 곳곳에 붉은색 펜이 춤춘 흔적이 가득했다. 대가의 눈은 확실히 달랐다.
‘미진한 부분이 이렇게 많았었나?’
마지막 장을 넘기며 흠칫 놀라고 말았다.
- 이번 달까지 장 폐쇄 환자 등 세 케이스 모두 학회 발표용 케이스 리포트로 확실하게 작성할 것. -
구미 병원에 있는 사이 누가 무뚝뚝하지 않다고 했는지 아예 말 대신 글이었다.
‘후우! 이번 달이면 3주밖에 안 남았네.’
한숨을 내쉬는 김지훈의 표정이 더없이 밝았다.
이준영 교수가 오늘처럼 신경 많이 쓴 날은 없을 것이다. 이사회가 끝날 때까지 보인 눈빛에 전에 없는 걱정이 가득했었다. 일반외과와 제자를 향한 애정 없이 보일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문득 후배들의 얼굴이 왜 줄줄이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혁원이, 종진이, 병옥이 모두 잘 지냈겠지?’
저절로 허리가 반으로 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