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한 고비를 넘고. (1)
하성원 원장에 대한 의혹과 비리를 들으며 무슨 말이 나올지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자리를 걸고 협박했던 말들이 아직도 생생했다.
“김 교수, 불편한 자리겠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됩니다. 하성원 원장과 여러 차례 만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징계 요청을 한 이후 원장실에 간 적이 있습니까?”
김지훈이 눈빛을 굳혔다.
“예. 있습니다.”
“그때 무슨 말이 오갔습니까? 그 당시와 유사한 일은 또 없었습니까?”
하성원 원장과 정면으로 눈이 부딪쳤다.
의료계의 중추이자 대선배와의 싸움이었다.
의사이기에 앞서 병원에 몸담고 있는 직원이자 교육을 담당하는 교수다. 문득 지금은 일개 교수가 아니라 구미 일반외과 과장으로서 이 자리에 섰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하고 당당하게 말할 일이었다. 윤재철은 개략적인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예를 원하고 있었다. 다소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절로 펴졌다.
“하윤호 교수 징계 때문에 만났습니다. 취소하라는 말을 안 들으면 전임강사 임용이 힘들다고 했습니다. 또한 벨기에 대사 부인 수술 때 수술 팀 구성을 두고 부당한 압박을 받았습니다.”
“부당한 압박이라니요?”
“신현수 교수가 퍼스트를 서기로 했기 때문에 하윤호 교수를 배제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수술 팀에 참여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이사들이 수군거렸다. 벨기에 대사 부인 수술에 대해 모르는 이사는 없었지만 내막까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교수 세 명이 들어가면 더 좋은 일 아닙니까?”
“의도가 순수하고 실력이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했을 겁니다. 하윤호 교수는 복강경 수술을 전혀 할 줄 모릅니다. 또한 주치의 자격까지 요구했습니다.
“그 문제는 김 교수가······.”
윤재철이 콧등을 찡그렸다.
“하성원 원장님, 조용히 해 주세요. 발언 기회는 다시 드리겠습니다. 김 교수, 계속하세요.”
“환자를 적절하고 안전하게 치료하기 위해서 주치의는 반드시 수술에 참여해야 합니다. 하윤호 교수와 하성원 원장님 역시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 수밖에 없습니다.”
“환자 치료보다 개인적인 이득을 앞세웠단 말입니까?”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 소리가 터졌다.
“임용 문제를 들을 때 실제적인 압박으로 느껴졌습니까?”
“전 펠로우입니다. 그렇게 들릴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병원을 그만둘 각오까지 했었습니다.”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교수에게 할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하윤호 교수는 하성원 원장이 직접 추천하고 임용했습니다. 혹시 혈연이기 때문에 도리어 실력이 어떤지 모를 수 있었을 것 같습니까?”
김지훈이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의사이기 때문에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봅니다.”
“근거가 있습니까?”
사전 절차에서 했던 말을 반복했다. 그중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될 만한 환자를 강조했다. 지방종을 수술한 양천석이다.
“외과 의사라면 기본 중의 기본인 수술입니다. 그런 수술도 못하는 상황이라 제가 대신 수술했습니다. 실력이 다소 부족하다면 혹시 모를 수 있지만 절대 오인할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성원 원장이 강하게 반발하며 일어섰다.
“윤 이사님, 이번은 발언 기회를 주셔야 합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실력을 알기 위해서는······.”
그 순간 양천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벌떡 일어나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윤 이사님, 제가 한 마디만 해도 되겠습니까?”
굳이 편을 나눈다면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말투도 눈치도 좋지 않았다. 하성원 원장에게 유리한 말이 나올 표정이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상황 판단이 빠른 윤재철이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말씀하세요.”
“정말 김 교수 당신이 내 아들 양천석을 수술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말을 안 한 겁니까?”
“주치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윤호 교수가 맞습니다. 다만 수술 중간에 출혈이 발생했고 해결할 능력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제가 대신했습니다.”
양 회장의 눈이 사나워졌다.
“출혈? 문제가 될 정도로 피가 났다는 말입니까?”
“불행히도 양천석 환자의 경우 문제가 될 정도의 출혈이 발생했습니다. 잘 해결됐기 때문에 후유증이 동반되지 않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항의 대상인 하윤호는 이 자리에 없지만 주치의로 추천한 사람, 하성원 원장이 눈앞에 있었다.
평소 아들 사랑이 유난하다 못해 눈살까지 찌푸리게 하는 양 회장이었다. 개판 오분 전인 아들을 보면서도 남자는 그래야 한다면 좋다고 웃는 사람이었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들의 옆구리에서 피가 철철 나는 모습을 상상한 모양이었다. 순간 눈이 뒤집힌 양 회장이 이를 부드득 갈며 손가락질을 했다. 어떤 자리인지 생각지도 않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 원장, 실력도 없는 놈한테 내 아들 수술을 맡기다니 나한테 이럴 수 있습니까?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이 자리에 참석까지 했는데 도대체 날 뭘로 본 거야?”
탁자 위에 놓인 물 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씩씩거리며 하성원 원장을 노려보았다. 한소리 더 하려고 손을 들다말고 멈칫거렸다.
이제야 주변이 보인 것이다.
감정과 사업은 별개다. 아무리 아들이 귀해도 이를 지키지 못하면 남의 돈 따먹는 일은 불가능하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참석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더구나 대가를 치르게 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신동철 이사장을 보며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이사장님, 소란을 피워서 정말 죄송합니다. 어렵게 얻은 아들 놈 일이라 실례를 범했습니다. 오 이사님, 김 이사님, 전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네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이사 두 명의 표정이 확연하게 변했다.
앞으로 영향력을 유지하며 자신들에게 득이 될 사람이 누군지 빤했다. 하성원 원장은 절대 아니었다. 이미 달콤한 돈맛에 취해 반쯤 코가 꿰인 상황이기도 했다.
“험험!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인사 전횡 문제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김지훈을 부른 신동철 이사장마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하성원 원장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동분서주한 일이 독화살이 돼 가슴에 박히고 있었다. 결코 하윤호를 임용한 탓만이 아니었다. 도화선일 뿐이었고 증거가 없다는 생각도 오산이었다.
끝나지 않았다.
윤재철의 눈짓에 평소 수족처럼 부렸던 비서가 녹음기를 틀었다. 줄줄이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쏟아져 나왔다. 마지막에 김지훈과의 대화가 나왔다.
- 사유? 이따위 것들이 사유가 될 것 같아? 너 병원에 붙어 있고 싶으면 당장 내 말대로 해. 어디서 펠로우가 건방지게 자기 윗사람을 고발해? -
- 뭐해? 올해로 끝내고 싶어? -
하성원 원장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자신도 비리에 연루될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던 비서에게 완전히 발목 잡힌 것이다. 틈틈이 섭섭지 않게 쥐어 준 돈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도리어 녹음기 옆에 그동안 준 봉투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단 돈 만 원이라고 해도 액수가 아니라 돈의 성격이 문제였다.
“도대체 뭐하자는 겁니까? 사람이 흥분하면 마음에 없는 말도 나올 수 있고 비서에게 수고했다고 돈 몇 푼 집어 준 게 무슨 죄가 됩니까? 이런 식으로 나오면 명예훼손에 해당될 수도 있습니다.”
악에 바친 반발이었다. 비난에 찬 눈초리도 피할 수 없었다. 철석처럼 믿었던 세 명의 이사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하성원 원장이 배신감에 이를 악물었다.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이 병원에 몸담은 세월이 얼만데 이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고작 펠로우밖에 안 된 놈입니다. 누가 더 믿을 수 있고 누가 더 공헌을 했겠습니까?”
놈? 공헌?
엄연한 직장이다. 사석에서도 함부로 하면 안 되는 말이다. 아무리 어리고 후배라고 해도 직장 동료는 존중해야 마땅했다. 평소 부려 먹을 사람으로만 봤던 것이 틀림없었다. 김지훈 자신에게 국한된 일만은 아니었다.
분노가 치솟았다.
‘저런 사람이 계속 원장을 한다면 희망은 없다.’
들은 말뿐이었기에 할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성원 원장을 더 이상 선배로서, 원로로서 존중할 수 없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려도 됩니까?”
모든 사람의 귀에 똑똑하게 들렸다.
윤재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미 병원 교수 인사 문제를 조사해 주십시오. 정식으로 요청 드립니다.”
민혁기 원장에게 들은 말과 상황을 전했다. 신동철 이사장과 윤재철이 다소 놀란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생활했기에 민 원장님이 저런 말까지 했지? 과장이라고 해도 펠로우에 불과한데 말이야.’
정말 감자 넝쿨처럼 파도파도 끊이지 않고 비리와 전횡이 터져 나왔다. 구체적 증거가 부족해 보류해 두었던 구미 병원 서류까지 이사들에게 전해졌다.
여기저기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하성원 원장이 꿀 먹은 벙어리가 돼 이빨만 악물었다. 일생 동안 쌓아 온 경력이 모두 휴지 조각으로 변할 상황이었다. 타개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사회 결정이 나기 전에 내가 먼저 나가는 게 최선이야. 내 경력과 인맥이면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어. 신동철 이사장도 체면을 생각하면 더 이상 일을 키우진 못하겠지.’
일신상의 이유로 사퇴 또는 퇴직.
이것만큼 흐릿하면서도 유용한 방법은 없었다.
“이사장님,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자리에 연연할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더 이상 내가 필요하지 않으신 것 같은데 알아서 처신하겠습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모두들 알아들을 수밖에 없는 말이다. 무리 없이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었다. 소문 퍼지면 병원 입장에서도 좋을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신동철 이사장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타협은 없다는 얼굴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원장님이 이 자리에 있든 없든 이사회는 오늘 결론을 낼 겁니다.”
꽉 문 이빨 사이로 분노에 찬 신음이 삐져나왔다. 당장이라도 박차고 나가야 했지만 하성원 원장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윤재철이 힐끗 김지훈에게 눈길을 주었다.
‘과장으로서 역할을 고민했다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겠지? 우리는 하성원 원장만의 문제가 아니라 병원의 미래를 위해서도 그걸 원하고 있어.’
“김지훈 선생, 구미로 파견됐는데 상황이 어떤 것 같습니까? 일반외과 문제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사안과 동떨어진 질문에 모두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질문에 숨은 의미를 몰라 잠시 당황했던 김지훈이 눈을 반짝였다. 비약일지 모르지만 구미로 간 이유가 단순히 과장 부재 때문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차근차근 구미 병원 상황을 설명하고 추가로 나올 질문의 요지를 잘 파악하는 것이 먼저였다.
“여건이 상당히 안 좋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인 것 같았습니까?”
“같은 의사로서 말씀드리기 그렇지만 전임 과장들의 근무 자세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였습니까?”
보고 듣고 느낀 대로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하성원 원장이 또 관련됐다. 일부 이사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이번 기회에 지원 문제까지 말할까?’
윤재철의 목소리가 정신을 번쩍 뜨이게 했다.
“적절한 해결 방안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유 없는 질문은 없다. 분명히 이 자리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을 것이다. 잠시 머릿속을 정리했다.
“짧은 생각이지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인사 문제를 투명하게 처리했으면 합니다.”
“어떤 식으로 했으면 좋겠습니까?”
“외람된 말씀이지만 중앙 의료원이든 이사회든 한두 사람에게 너무 강한 권한을 주면 왜곡된 인사가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의사만이 아니라 간호사, 기사, 행정직에 있는 직원들도 모두 한 식구라는 점을 감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신동철 이사장과 윤재철의 입가에 미세한 미소가 걸렸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하윤호 교수만이 아니라 전임 과장들 문제 역시 인사 실패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개인적인 인연에 좌우된다면 지금 근무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의욕을 꺾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짧은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과한 반응이었다. 펠로우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말 나온 김에 다른 건의 사항은 없습니까?”
분위기가 점점 이상했지만 윤재철의 질문이다.
“구미 병원에 지원을 늘려 주십시오. 근무 환경이 열악하면 누가 의욕을 갖고 일하겠습니까? 비록 근무가 2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구미에 한해서 전공의 순환 근무를 시행해 주십시오. 자칫 전문의 배출에 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신동철 이사장이 흡족함을 감추지 못했다.
‘실적 문제로 풀어 가려 했는데 그새 많이도 느꼈네. 현실을 보는 눈도 그렇고 생각까지 더 깊어졌어. 이혁민 과장에게 현수를 보내자고 말해 볼 걸 그랬나?’
미속 속에 아쉬움이 살짝 걸렸다. 신현수에게 듣기를 바랐던 말이기 때문이었다. 기회가 주어지면 김지훈 이상으로 잘할 것이다.
시선을 맞춘 윤재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어요. 자리에 앉아도 좋습니다. 이사님들, 김 교수는 이제 펠로우입니다. 불과 몇 달 만에 깨닫고 건의한 내용을 누가 듣고 누가 개선해야 합니까?”
하성원 원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중앙 의료원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이를 잊고 부원장님의 권한까지 제한했습니다. 고언을 교묘하게 피하며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만 일한 사람이 있습니다.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사님들 모두 그에 합당한 결정을 내릴 것이라 믿습니다.”
시작은 권고사직이었지만 분위기가 급변했다. 평소 한배를 탔다고 여긴 이사 세 명까지 고개를 돌렸다. 도리어 자신들의 허물을 덮을 생각인지 적극적으로 나섰다.
“듣고 보니 그동안 저도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이사로서의 불찰을 용서해 주십시오. 권고사직으로 끝낼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감사 결과까지 종합해서 처리해야 할 사안입니다.”
“다른 의견 있으십니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신동철 이사장이 결론을 내렸다.
“모든 감사가 완료되는 다음 주 수요일에 이사회를 다시 열겠습니다. 사안이 변한만큼 권고사직을 넘어서는 중징계가 불가피하며 민형사상의 책임까지 반드시 묻겠습니다. 따라서 하성원 원장의 자진 퇴직 또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상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책상 위에 놓인 근거 자료만 한 뼘이 넘는다. 단호한 목소리에 하성원 원장이 꼼짝도 하지 못했다. 며칠 늦춰졌을 뿐 누군가에게는 파멸,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