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46화 (746/1,329)

10화. 당당하게. Ⅱ (1)

재심에 참석하는 의사들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 주말인데 미안하네. 재심이 괜히 열리는 게 아니잖아? 이런 식이면 안 걸릴 과가 없어요. 아마 우리 병원 의사들 중 십분의 일은 옷 벗어야 할 거야.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 줘. 그놈의 정이 뭔지 나까지 힘들어지네.”

송재덕 교수와 신상민 부원장, 양승철 교수만 쏙 빼놓았다. 어떤 말을 해도 절대 소신을 꺾을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해도 이사회에서 자신의 거취를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중앙 의료원 원장이란 자리가 유효한 수단이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 시간 김지훈이 응급실에 걸린 거울을 보며 미친놈처럼 실실 웃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다크서클로 눈 밑이 검게 변했다. 확실히 혼자 근무하는 것은 무리였다.

‘아! 심하게 피곤하네.’

지난밤, 응급실이 꽤 북적인 탓이었다. 아직 롤러코스터를 완전히 면한 것은 아니었지만 평균 환자 수까지 확연하게 늘어났다. 대구로 가던 환자들이 구미 병원을 선택하기 시작한 것이다.

필요한 경우 바로 수술 받을 수 있는데다 복강경 수술이 가능하다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은 덕이었다. 특히 대구에서도 힘들다는 수술을 세 건이나 했다는 사실이 결정적이었다.

홍보를 강화한 것도 일조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김지훈과 전공의를 비롯해 의료진 전체의 노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직 부족하지만 이 추세로 가면 우리 과 수술도 제법 늘겠어. 다음 주에는 메이저 수술까지 하니까 도움이 되겠지. 일주일만 더 고생하자.’

“샘, 힘들어 죽겠어요. 밥 사 줘요. 이번 주말엔 어떻게 하지? 아! 샘 서울 가시니까 환자 없겠네. 근데 서울엔 왜 가세요?”

어느 틈엔가 쌤이 샘으로 변했다.

간호사의 투정마저 즐거웠다.

보고를 마친 조성민이 송진우를 보며 중얼거렸다.

“야! 하루하루가 달라지네. 손 빠르고 수술 잘하시니까 망정이지 예전 과장님이었으면 벌써 죽었을 거야. 진우야, 근데 수술 전에 가끔씩 따르륵 기구 잡는 소리가 들린다. 너도 들었어?”

송진우가 입술을 모았다.

무슨 이유인지 콧등을 잔뜩 찡그렸다.

‘아직도 그렇게 노력하시는데 난 아직 멀었네.’

“김지훈 선생님 별명이 리틀 이준영, 수술 킴, 따르륵 선생님 세 갭니다. 아직도 기구 연습을 하시네요.”

조성민과 김현철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말이었다.

회진을 마치고 진료실에 앉은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곧 서울에 가야 한다는 사실에 하윤호와 하성원 원장이 저절로 떠올랐다. 답답하다 못해 숨이 차다는 느낌까지 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외래 진료를 하는 순간 싹 사라졌다.

‘에휴! 내가 환자한테 치료를 받네.’

토요일에도 외래를 찾아 준 환자들에게 고맙기만 했다. 마음과 달리 몸이 힘들긴 힘든 모양이었다.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주 5일 근무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적지 않았다.

‘이 추세면 곧 진료 날과 수술 날을 구분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이제 일주일 남았는데 최철한 선생님 오시기 전에는 불가능하겠지?’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하루 일과를 일찍 끝냈다. 오후 회진부터 돌고 다음 주 수술 스케줄을 정리하는 동안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사회는 이사회고 해야 할 일을 미룰 수는 없지.’

수술과 환자 수의 증가는 전공의들에게도 큰 변화였다. 정규 수술은 당연히 치프가 퍼스트를 서야 하지만 3개월 한시적 근무를 하는 송진우도 세컨만 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현철의 집도도 문제였다.

‘쉴 때는 확실하게 쉬고 긴장해야 할 때는 정신 바짝 차려야지. 너희들은 아직 긴장해야 할 때야.’

“앞으로 수술에 따라서 퍼스트 번갈아 세울 거니까 준비 열심히 해. 농땡이 부리는 기색이 보이면 국물도 없다. 이번 주에는 내가 사정이 있어서 못 줬는데 현철이 너 다음 주에 아뻬 하자. 확실하게 준비해.”

조성민과 송진우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더욱 치열해 질 것이다. 수술 받을 날만 기다리다 지쳐 어깨가 처졌던 김현철의 눈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성민아, 다른 일 없으면 내일 점심 때 쯤 돌아올 거야. 급한 환자 있으면 일단 전화라도 해.”

“예. 걱정하지 마세요. 푹 쉬고 오십시오.”

어떤 일이 있는지 알지 못하는 조성민의 목소리가 힘찼다. 김지훈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아는 송진우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모님도 함께 계시고 주말이라고 오프를 가실 분이 아닌데 이상하네. 서울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혹시 하윤호 교수 일인가?’

“선생님, 안 좋은 일 있으신 건 아니시죠?”

생각보다 눈치 빠른 송진우였다.

김지훈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3주 내내 구미에 있었는데 안 좋을 일이 뭐가 있어? 챙겨야 할 일이 있어서 올라가는 거야. 환자가 없어서 힘 빠지긴 한다. 근데 너 오프 아니야?”

조성민이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일이 있어서 오프를 바꿨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잠깐만 나갔다 오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3년차가 없다니 조금은 불안했지만 송진우가 있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주를 정리하고 다음 주를 계획한 김지훈이 훅 숨을 내뱉었다.

“환자 잘 봐.”

이제 서울로 갈 시간이었다.

서울로 가는 내내 다음 주 수술과 환자, 구미 생활, 손일석과 고경희에 관한 얘기만 나눴다. 가능하면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고경아도 그런 눈치였다.

1시간 일찍 출발했지만 꽤 늦은 시간에 도착했다. 고경아를 집으로 들여보내고 허겁지겁 외래로 올라가자 교수들 모두 모여 재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게 인사 나눌 상황이 아니었다.

“왔나? 앉아라. 궁금한 얘기는 이따 하기로 하고 일단 재심 결과부터 기다리자.”

박승준 교수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송재덕 교수만 보이지 않았다. 일반외과에서 유일하게 재심에 참석한 탓이었다.

다들 표정이 좋지 못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징계위원회가 열리고 이사회 결정까지 기다려야 한다. 아무리 문제 많은 하윤호라고 해도 일반외과 입장에서는 괴롭고 갑갑한 일이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이혁민 교수의 말에 더욱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김지훈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이준영 교수를 보았다. 걱정할 일이 없다는 듯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신현수와 이경석이 열심히 해 주고 있는지 피로에 지친 얼굴은 아니었다. 그 점 하나는 정말 다행이었다.

무거운 침묵 사이를 묵직한 목소리가 관통했다.

“김지훈, 논문하고 실적 보자.”

조심스럽게 준비한 것을 내밀자 이준영 교수와 신기동 교수가 하나 씩 받아 들었다. 눈가에 주름까지 잡아 가며 한 장 한 장 꼼꼼하게 확인했다.

논문과 실적은 그렇다고 쳐도 세 건의 케이스 리포트가 있다. 웬만하면 반응이 있을 법한데 말 한 마디조차 없었다. 역시 누구도 따르지 못할 무뚝뚝함과 냉정함이었다.

불안한 기색을 보이던 김지훈이 슬며시 웃었다.

‘역시 스승님이 계셔야 돼. 평소와 똑같으시니까 도리어 마음이 편해지네. 정말 걱정 안 하시는 걸까? 신기동 선생님, 감사합니다.’

가장 논리적인 이혁민 교수도 다를 바가 없겠지만 과장이다. 지금은 누구보다도 재심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사람이었다. 간간히 나직한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 연락이 없었다.

재심이 예상 외로 늦어지는 까닭이 있었다.

하윤호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마지막 남은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못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갑갑한 눈빛 속에 담긴 애처로움을 본 재심 위원들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한 탓도 있었다.

‘원장님 호소가 효과를 발휘하는 건가? 제길! 자존심 상해도 바짝 수그려야 돼. 이 병원은 끝났지만 어떻게든 내 발로 걸어 나가야 다른 대학 병원에서 근무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어.’

단순히 교수직만 걸린 일이 아니었다. 오늘 결정에 명예는 물론 막대한 돈까지 달려있기에 몸부림을 쳐서라도 결과를 뒤집어야 했다.

하성원 원장도 두고 볼 처지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못마땅한 눈빛을 무시하고 변호를 자청했다. 징계 철회가 마땅하며 백번 양보해도 해임은 지나친 징계라며 경감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번 일의 내면에는 외과 내부적인 갈등과 신임 교수라는 문제도 작용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를 불문하고 모두 같은 의료인입니다.”

같은 의료인이란 말에 유독 힘을 주었다.

“동료를 지켜 주기는커녕 해를 입히고 부당한 대우를 한다면 외부에서 다가오는 풍파를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겠습니까? 병원 평판 역시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징계 철회가 불가하다면 해임을 면하게 해 주셔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와 병원을 위한 길입니다.”

마치 자신은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적극적이었다. 중앙 의료원 원장이 된 요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유 또한 그럴듯했다. 그러나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는 이상 말만 번지르르 할뿐 속 빈 강정과 다름이 없었다.

재심에 참석한 의사들의 표정이 복잡 미묘했다.

징계 심의를 한지 3주 가까이 지났다.

지속적으로 상의를 빙자한 압박과 압력에 시달렸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시간이 지나며 마음이 바뀌고 생각이 변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하윤호는 자신들과 거의 상관없는 의사에 불과했다. 재심 위원 중 일부는 귀찮음과 피로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해임은 가혹할 정도로 지나친 징계다.

그래도 의사인데 좋게 끝내자.

아니다.

병원에 끼친 해가 결코 적지 않다.

별다른 잡음 없이 진행된 첫 번째 심사 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하성원 원장과 하윤호의 얼굴에 희망이 서렸다.

시간이 꽤 흘렀다.

철회 주장은 없었지만 여전히 해임은 다소 과하다는 의견이 수그러들지 않았다. 절대 징계를 번복할 수 없다는 주장과 팽팽하게 맞섰다.

재심이 늦어지는 까닭은 이 때문만이 아니었다.

정작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송재덕 교수 때문이었다.

“우리 과 일이기도 하지만 결국 병원 일이라는 하 원장님 말씀에 십분 동감합니다. 얼굴을 들기 힘들 정도로 창피한 일이지요. 하기에 징계 건을 더욱 엄격하게 심사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다수결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의견이 분분한데 어떻게 하자는 말씀이십니까?”

“더 이상 갑론을박할 문제가 아닙니다. 첫 번째 회의 때 제 의견은 이미 냈습니다. 여러 분들의 의견도 이미 들었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더구나 재심입니다. 모든 분들이 일치된 의견을 내야 합니다.”

몇몇 의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해임과 자진 사퇴 둘 중 하나를 두고 결정하자는 말씀이시니까?”

‘이사회에서 하성원 원장 건이 처리되려면 전원이 하윤호 해임에 동의해야 돼.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모양인데 이런 일이 또 발생할 가능성이 있어. 내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는 한 절대 안 되지.’

“그렇습니다. 자진 사퇴는 징계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해임할 것인지 아닌지를 두고 결정해야 합니다. 단 한 분이라도 해임에 반대한다면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재심 위원들이 술렁거렸다.

다양한 의견이 나왔지만 징계는 확실했다. 투표로 수위만 결정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줄기차게 해임을 요구하며 전원 동의를 요구하다니 도리어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말 그대로 배수진이다.

단 한 발작도 물러설 수 없다는 확고한 의지 표명이었다. 하윤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하성원 원장도 당황했는지 입을 열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힘들고 괴로운 사람이 우리 과 교수들입니다. 그분들이 해임에 동의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개인적인 감정이나 이득에 좌우될 사람들이 아닙니다.”

송재덕 교수는 서울 병원 원장이기에 하성원 원장보다 직접적인 접촉이 더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위라는 것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준영 교수는 응급실에만 전념했고 간간히 나온 말 역시 응급 진료에 대한 협조뿐이었다. 이혁민 교수는 과장으로서 자신의 일에 충실했다. 한자리 맡아도 될 신기동 교수는 혈관 수술에 집중해야 한다며 아예 보직조차 맡지 않았다.

그런 교수들의 의견이자 입장이었다.

백 마디 말보다 행동 하나가 중요한 법이다.

심사 위원들이 다시 술렁였다.

하윤호가 사색이 됐다. 하성원 원장이 분위기를 돌려 보려 애썼지만 웅성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수습이 되질 않았다.

신상민 부원장이 나섰다.

“새로운 제안이 나왔으니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15분 간 정회한 후 만장일치로 결정하자는 송 원장님의 제안을 따를 것인지 말지 결정하겠습니다.”

15분이란 짧은 시간이 누구에게 더 유리할까?

송재덕 교수는 말없이 커피 한 잔 했고 하성원 원장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 묵묵히 듣고 있는 사람, 자리를 피하는 사람까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무슨 속셈인지 모르지만 전체 동의가 도리어 유리할 수 있겠어. 해임은 당신들한테도 부담스러운 일이잖아?’

재심이 속개됐다.

한 명 한 명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하윤호의 고개가 점점 떨어졌다.

“잘 알았습니다. 그럼 전체 동의로 해임 안을 결정하겠습니다. 한 분이라도 반대하면 자진 퇴사로 결정합니다. 송 원장님,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동의합니다.”

단호한 목소리였다. 분명히 무리한 일로 보였지만 하윤호만이 아니라 하성원 원장의 거취까지 겨냥한 승부수였다.

“그럼 투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찬반을 묻는 간단한 투표였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결코 적지 않았다. 신상민 부원장과 양승철 교수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송 원장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지만 도리어 하성원 원장의 잘못과 책임을 묻지 못하는 거 아닌가?’

송재덕 교수만이 단호한 얼굴이었다.

‘우리 모두 의사입니다. 난 우리 자신을 믿습니다.’

숨 막히는 긴장감마저 느껴졌다.

“결과 확인하겠습니다.”

한 장 한 장 개표됐다.

“찬성. 찬성. 찬성.”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피 말리는 일이었다. 하윤호가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꽉 쥐었다. 하성원 원장은 이를 악물고 재심 위원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지막 한 장이 남았다.

신상민 부원장이 꿀꺽 침을 삼키며 용지를 폈다.

이 한 장에 병원의 미래가 달려 있다.

서서히 입이 열렸다.

“찬성.”

하윤호가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