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45화 (745/1,329)

9화. 당당하게. (2)

민혁기 원장은 언제나 소탈했고 과장들은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각자 자신만의 분명한 개성과 색채가 보였지만 전체와 잘 어울렸다.

한두 사람도 아닌데 눈에 보이지 않는 알력과 다툼이 없을 리 없다.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기 때문에 가능한 모습이었다.

원장이나 과장이라는 자리에 앉은 사람이 갖춰야 할 또 하나의 자세를 보여 주고 있었다. 무작정 지시를 내리고 무작정 따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권한을 가진 사람일 경우 더더욱 그럴 것이다.

본의 아닌 금주 기간이다.

김지훈의 손에 들린 술잔 속 술이 찰랑찰랑 흔들렸다. 술기운이 자욱하게 퍼져 갔지만 눈은 점점 말똥말똥해졌다. 뒤돌아서자마자 잊어도 좋을 말 속에 뜻밖의 배움이 있었다.

좋은 사람들과 만나면 좋은 자리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무슨 이유인지 하성원 원장에 대한 생각이 더욱 많아졌다.

“경아 씨, 만에 하나 이사회에서 하성원 원장에 대한 말이 나오면 내가 보고 들은 것 모두 말하는 게 좋겠죠?”

회식 후 나른함에 빠져 있던 고경아가 조용히 손을 잡았다. 언제나 포근하고 마음을 편하게 하는 온기가 느껴졌다.

“지훈 씨에게 부담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피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닐 거예요. 너무 직설적으로 말하지만 말아요. 모든 사람이 지훈 씨를 좋게 볼 수는 없잖아요.”

항상 힘이 되는 고경아였다.

살포시 안으며 미소를 머금던 김지훈이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불길이 갑자기 치솟았다. 그동안 틈만 나면 손잡고 눈 마주치며 깨를 털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엄마, 아빠의 몸과 마음이 편안해야 예쁜 아이를 낳는다. 하성원 원장 문제는 일상적으로 받는 스트레스가 아니라 예외적인 일이었다. 이럴 때는 서로를 꼭 안고 잠만 자는 것이 마땅했다.

이제 날도 제법 쌀쌀했다.

서로의 체온을 느끼기 딱 좋은 날이었다.

하성원 원장과 이사회라는 고비를 잘 넘기면 좋은 일만 벌어질 것 같았다. 어쩌면 이미 반쯤은 넘었을지도 몰랐다.

다음 날 아침 대장암 3기 환자를 찾았다.

의사나 환자나 마음이 급한데 하필이면 목요일이다.

이번 주는 물 건너갔다.

대장암 수술은 준비 기간만 최소 3일 정도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수술 전 대장을 깨끗이 비워야 수술 후 감염을 막을 수 있기에 절대 줄일 수 없다. 게다가 환자도 쇠약해진 상태라 체력을 회복시킬 시간까지 요했다.

“환자 분, 보호자 분, 수술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 필요한데 이번 주는 촉박하네요. 다음 주에 하시는 것이 안전할 것 같습니다.”

“혹시 복강경으로는 안 되나요?”

엉뚱한 말이었지만 환자나 보호자 입장에 서 보면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정성호 과장님께 들으셨죠? 안타깝지만 아직까지 암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복강경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한동안 대화가 이어졌다.

충분히 설명했지만 내심 찜찜했다.

‘이러다 대구로 가는 거 아냐?’

고민스러운 표정도 잠시 보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 고마웠다. 일반외과가 처한 상황과 구미 첫 메이저 수술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시작이 좋았다.

좋은 일만 벌어질 것 같다는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목요일 일과를 마친 김지훈이 파이팅을 외쳤다. 외래 환자만 무려 다섯 명을 본 것이다.

실밥 풀러 온 환자 두 명에 복강경 수술 문의가 세 명이었다. 담석증과 담낭 내 종물로 증상이 미약하거나 수술이 두려워 미뤄 왔던 환자들이었다.

담석증은 미룰 이유가 조금도 없다.

“다음 주 월요일로 수술 스케줄 잡겠습니다. 금요일에 입원하셔서 필요한 검사 받으세요. 퇴원은 목요일 정도 생각하시면 됩니다.”

불안해 하던 환자가 안도의 웃음을 보였다.

담낭 내 종물은 상황이 다르다.

“환자 분은 담낭 내 혹이기 때문에 보다 정밀한 검사가 필요합니다. 결과 확인하고 화요일 아니면 수요일에 수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혹시 나쁜 병은 아니겠죠?”

“초음파에서는 양성으로 보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별다른 이상이 없다면 복강경으로 무난하게 할 수 있습니다.”

금요일 외래도 다르지 않았다.

정말 반갑고 기쁘게도 쉴 만하면 환자가 왔다. 게다가 정성호 과장이 위암 환자까지 보냈다. 진료를 마친 후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주 내내 정규 수술이 잡힌 것이다.

비록 하루에 한두 건이었지만 3주 만에 자리를 잡는 모양새였다. 그사이 응급실 환자도 절대 한가하지 않을 정도로 왔다. 혈관 수술 역시 잊을 만하면 떴다.

‘이젠 밤낮으로 제법 바빠지네.’

과장이 바쁘면 전공의에게 떡고물이 떨어지는 법이다. 갈수록 서울 전공의와 몰골이 비슷해지는 조성민과 송진우의 입이 찢어졌다. 집도는 갓 지은 밥이자 피로 회복제였다. 김현철만 ‘왜 아뻬는 오지 않냐’며 심하게 울었다.

다 같이 힘차게 외쳤다.

만족스럽지 않다고 해도 카르페 디엠!

피곤할수록 아자! 아자! 아자!

김지훈이 한가함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그 시간 누군가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고급 일식집, 조용한 방.

하성원 원장이 이사 세 명과 마주 앉아 심각한 안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이 세 번째 만남이었다. 하윤호를 구명하기 위한 자리였지만 지나친 면이 있었다.

상황이 다급해졌기 때문이었다.

조카라고해도 전임 강사에 불과하고 불미스러운 일을 오래 끌 이유가 없었다. 자리보전을 위해서라도 적정한 선에서 끝내려 했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신동철 이사장이 내 자리까지 거론하다니 어디까지 일을 키울 셈이지? 병원 내규가 있는 이상 이사회를 통과하지 못하면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어. 분명 하윤호를 걸고넘어질 거야. 반드시 징계 수위를 낮춰야 해.’

이제는 말 그대로 한배를 탔다.

절박함은 자신이 가진 인맥을 모두 동원하게 했다. 혈연, 학연, 지연을 불문하고 징계위원회에 참석한 의사들에게 압박을 가할 수 있는 모든 사람과 연락을 취하고 부탁했다.

상대가 이사장이기에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사들의 협조를 약속받는 것이었다. 그동안 쌓은 친분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보다 강력한 힘과 영향력이 필요했다.

‘왜 이렇게 안 오지? 설마 날 피하는 건 아니겠지?’

잠시 후 뜻밖의 얼굴이 보였다.

정승옥과 양천석의 아버지 양 회장이었다. 지난 권력이지만 아직 영향력이 남은 권력과 돈이 가진 마법과도 같은 힘이었다.

하성원 원장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걸렸다.

절박함을 최대한 감췄다.

“늦으셨습니다.”

“길이 많이 밀리네.”

정승옥은 가벼운 목례만 했고 양 회장이 예의 거드름을 피우며 자리에 앉았다.

“번거롭게 자꾸 자리를 청해서 죄송합니다. 정 차관님, 양 회장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게 돼 죄송합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제 불민한 조카 때문에 뵙자고 했습니다.”

이제야 정승옥이 입을 열었다.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그 문제는 다 끝난 거 아닙니까? 제가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도울 힘이 있어야지요?”

구석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하윤호가 움찔거렸다. 정승옥의 성격을 볼 때 확실한 거절 의사였기 때문이었다. 하성원 원장이 재빨리 술 한 잔을 따르며 말했다.

“정 차관님, 제 말씀부터 들어 보시죠. 하 교수가 미흡한 점이 많지만 해임까지 당할 정도는 아닙니다. 제 조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솔직히 징계위원회의 결정에 무리한 면이 많습니다. 재심을 여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가요? 제가 병원에 관련된 일에서 손 뗀지 오래됐고 징계 문제는 내부에서 해결해야 하는 일 아닙니까?”

“이사회에서 최종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우리 병원 자문을 맡고 계시니까 조금만 신경 써 주십시오. 저나 하 교수나 평생 잊지 않을 겁니다.”

말의 시작은 하윤호였다.

이사회 소리에 이사 중 한 명이 눈가를 좁혔다.

“재심과 이사회가 내일입니다. 시간도 촉박한데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원하는 것이 뭡니까?”

‘볼 때마다 같은 소리군. 맨입으로는 힘들고 부담도 어떻게든 지고 싶지 않다 이거지?’

“그동안 이사님들 섭섭하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정 차관님은 물론 양 회장님 자제 분 수술할 때 신경도 많이 썼고요. 그 점을 알아 주십시오. 징계 철회가 어렵다면 스스로 옷 벗는 정도로 감경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사들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철회라! 부담이 상당히 큰 문제입니다. 해임과 자진 퇴사도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군요.”

하성원 원장의 눈가가 날카로워졌다.

‘온갖 편의 다 봐주고 양 회장까지 연결해서 돈 좀 만지게 해 줬는데 어렵다는 말밖에 안 나와?’

“어려운 일이라는 건 잘 알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젊은 사람의 장래를 이렇게 망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 교수, 뭐해?”

하윤호가 무릎을 꿇고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억울하다는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이번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혀 차는 소리가 나직하게 들렸다.

하성원 원장이나 하윤호 입장에서는 어떤 의미가 담겼든 개의치 말아야 할 일이었다.

“정 차관님, 이 자리에 계시지 않지만 권 이사님과 친분이 무척 두텁다고 들었습니다. 아홉 분의 이사님들 중 네 분만 협조해 주시면 자진 퇴사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젊은 사람 하나 살리는 셈치고 도와주십시오. 차관님 수술 받을 때 한밤중까지 기다린 사람입니다.”

“그땐 고마웠습니다. 권 이사와 얘기는 해 보겠습니다만 깐깐한 사람이라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병원을 위해 많은 일을 해 주셨는데 설마 권 이사님이 차관님 말씀을 한 귀로 흘려듣겠습니까?”

정승옥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확실치 않았지만 더 이상 말을 끌었다가는 역효과가 날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 남았다.

“양 회장님.”

투기꾼처럼 합법과 불법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사람은 체면이나 명예에 민감하다. 손에 쥔 돈만큼 자리 욕심이 많아 항상 자신의 힘을 내보이길 원한다. 물론 자신이 생각하는 합당한 대가도 당연히 바란다.

미처 말도 꺼내기 전에 입이 열렸다.

“수술 전에 약간 불미스러운 일이 있긴 했지만 우리 아들 수술 잘해 줬는데 내가 도와야지. 차 이사하고 개인적인 친분이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 우리 이사님들도 나랑 생각이 다르진 않을 겁니다.”

양천석이 생각난 하윤호가 움찔거렸다.

양 회장은 아직 전말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런 자리일수록 내가 직접 참석해야 힘이 될 텐데 안타깝네. 하 원장님. 좋은 방법 없습니까?”

원하던 말이 나왔다.

하성원 원장의 입가가 말려 올라갔다.

“마침 일종의 자문 역할로 정 차관님도 참석하십니다. 이사님들께서 잘 말씀해 주시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참석하실 수 있을 겁니다.”

“허허! 그래요? 잘됐네. 이참에 이사장님과 안면도 텄으면 좋겠군. 마침 좋은 물건이 하나 나왔는데 서로에게 큰 득이 되지 않겠습니까?”

“일만 잘 해결되면 자연스럽게 성사될 겁니다.”

걱정 말라는 듯 미소를 보인 하성원 원장이 슬그머니 이사들 앞에 상자 하나씩 내밀었다.

금빛 보자기가 반짝반짝 빛났다.

“제 마음과 우리 하 교수 아버님의 마음이 담긴 작은 선물입니다. 섭섭하지 않으실 겁니다.”

웬만한 돈에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을 정도로 꽤 행세하는 집안이다. 설마 자식 일에 돈을 아끼진 않았을 것이다. 정승옥은 눈가를 좁히며 손도 안 댔지만 양 회장은 입술을 쭉 내밀었다.

‘웃긴 인간이네? 공짜를 왜 안 받아? 전직 차관이면 뭐해? 돈 없으면 서러워지는 거야.’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상자를 당긴 이사 중 한 명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원장님도······.”

하성원 원장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더 뜨거운 불이 발등에 떨어진 당사자다. 신동철 이사장의 눈치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몇몇 사람만 알고 있다지만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윤호는 일개 전임 강사지만 자신은 중앙 의료원 원장이다. 잃을 것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말이었다. 오늘 자리를 만든 결정적 이유도 하윤호가 아니라 사실 자기 자신 때문이었다.

다급함이나 절박함을 보이면 약점을 잡히고 도리어 불리해질 수도 있었다. 때론 어떤 책임이라도 질 것처럼 적절한 연기가 필요한 때가 있다.

바로 지금이었다.

‘이번 사태의 핵심은 하윤호 저놈이야. 해임이 확정되면 나도 문제가 되지만 자진 퇴사로 결정되면 내 책임을 물을 수가 없어. 그렇다고 내 자리까지 보전해 달라고 하면 무리한 일이라고 생각할 게 빤해. 도리어 피해를 볼까봐 불안해 할 수도 있겠지.’

“저야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누릴 만큼 누렸습니다. 조카 일이 걸린 이상 책임질 부분이 있다면 당연히 책임져야죠. 제 걱정은 마시고 하 교수만 신경 써 주십시오.”

참 대범하고 살뜰한 작은 아버지였다. 그러나 다들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런 말에 가장 민감한 양 회장이 본능적으로 숨은 뜻을 눈치챘고 보답이라도 하듯 큰소리를 뻥뻥 쳤다.

‘잘되면 내 덕이고 안 되면 협조를 안 한 이사들과 하 원장, 당신의 능력이 모자란 탓이지. 어느 쪽이든 손해 볼 일 없겠군.’

“그럼 걱정할 게 하나도 없네요. 여기 모인 분들이 누군데 하 교수 한 명 책임 못 지겠어? 자자! 술이나 한 잔하고 오늘 밤은 편하게 잡시다. 김 이사님, 오 이사님, 저번에 투자 아주 잘하셨습니다.”

“어이구! 양 회장님 덕분입니다.”

“나야 뭐 버티는 인간들 때문에 골치 아프긴 했지만 땅 사고 판 것밖에 없습니다. 투자하는 분들에게 몇 배로 돌려 드리는 것이 제일 중요하죠. 하하하!”

“감사합니다.”

“제가 이래 봬도 푼돈은 취급하지 않습니다. 남는 건 없고 한몫 챙겨 달라는 소리에 골치만 아프거든요. 이사님들 정도는 되셔야 투자할 맛이 납니다. 다음에 또 좋은 물건 나오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정승옥이 입맛을 다셨다.

돈이란 놈은 묘해서 한 번 엮이기 시작하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특히, 검은 돈이나 지하에 숨은 돈은 더욱 그렇다. 아예 상종을 말아야 한다.

‘이사들 얼굴 봐서 왔지만 올 자리가 아니었네.’

“전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야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성원 원장이 깜짝 놀랐다.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 없지만 가리는 사람은 있는 법이다.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양 회장의 말이 찜찜했지만 정승옥의 힘이 반드시 필요했다.

“정 차관님, 왜 벌써 일어나십니까? 귀한 자리인데 식사라도 하시고 가시죠.”

“아닙니다. 그럼 이만.”

정승옥이 일어난 자리에 덜렁 상자 하나가 남았다. 급히 일어나 식당 밖까지 나갔던 하성원 원장이 허탕을 쳤다.

‘눈치가 이상하네. 혹시 다른 생각을 하는 거 아냐? 정승옥이 없어도 이사 네 명은 확보한 셈이지만 불안해. 권 이사에게 한 번 더 연락해야겠군.’

이사 다섯이면 징계 철회고 넷이면 자진 퇴사로 결정 날 것이다. 단 한 명의 입이 자신과 하윤호의 장래를 좌우하는 상황이었다.

저녁 늦도록 전화통에 불이 났다.

권 이사와 차 이사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지만 예의상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직접 집에까지 찾아가 제법 묵직한 선물 상자를 전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제길! 이사 중에는 날 거론한 사람이 없다는데 도대체 누가 날 걸고넘어진 거지? 송 원장인가? 이번 일만 무사히 끝나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 주지.’

하성원 원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금경태가 제 풀에 넘어지지 않았으면 차지할 수 없는 자리였다. 후배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마음에도 없는 미소까지 지어 가며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먼데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하윤호와 하성원 원장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긴 밤이 지났다. 드디어 운명의 날인 토요일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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