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당당하게. (1)
고개를 흔들며 목소리를 떨쳐 낸 김지훈이 책에 집중했다. 방심은 금물이다. 수술 여부와 상관없이 한 번이라도 더 봐 두면 그만큼 머릿속에 단단히 박힐 것이다.
간호사가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한창 삼매경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깜빡 졸았던 모양이었다. 입가에 흐른 침을 재빨리 닦았다.
“샘, 서울 병원에서 전화 왔어요.”
서울에서?
이혁민 교수였다.
하윤호와 하성원 원장 때문일 것이다.
반가운 목소리인데 더욱 심란해졌다.
(김지훈, 통화하기 힘들다. 많이 한가할 줄 알았는데 바쁜 모양이네.)
역시 구미 병원 상황을 모를 이혁민 교수가 아니었다. 복강경 때문이라지만 왜 말을 안 한 것인지 새삼 알 수 없었다. 하긴 구미 근무를 해야 하는 놈이 먼저 알아봤어야 했다.
그 점에 관한 한 할 말이 없었다.
“아닙니다. 선생님. 정말 한가합니다. 오늘도 수술 한 건, 컨설트 한 건밖에 없습니다. 죽겠습니다.”
(환자 만드는 것도 과장이 할 일이다. 수술이 없으면 전공의 교육도 힘들잖아. 열흘 후면 최철한 선생도 올 텐데 연구 많이 해라. 석사 논문은 다 썼겠지?)
논문 소리만 들으면 희한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 다 썼습니다. 이번에 올라갈 때 가지고 갈까요?”
(현수한테 연락 받았지? 실적까지 해서 같이 보자. 그건 그렇고 짐작했겠지만 징계 건 때문에 전화했다. 하윤호는 문제가 아니다. 이사회에서 하성원 원장님에 대한 질문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신현수가 아닌 서울 병원 과장의 입이었다.
말의 실린 무게 차이만큼 깜짝 놀랄 일이었다.
“예? 제게 무슨 질문을 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당황할 일 아니다. 구체적인 것은 나도 잘 모르지만 이사장님 눈치가 그래. 그동안 여기저기서 불만이 많았는데 복안이 있으신 것 같다. 만일을 대비해서 미리 준비해라.)
“어떤 준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특별한 게 있겠나? 하윤호 일 때문에 들은 말 많잖아? 네가 보고 느낀 것을 잘 정리해서 솔직하게 말하면 된다.)
상당한 부담이 느껴질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졌다.
이혁민 교수의 말이 이어졌다.
(이제 2주 갓 넘어서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의사라고 해서 환자만 보고 살 수는 없다. 아랫사람만이 아니라 때론 윗사람의 잘잘못도 따져야 한다. 그것이 결국 환자와 병원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한 길이 되는 법이다. 알았나?)
“예. 명심하겠습니다.”
(남은 시간 내 말에만 신경 쓰지 말고 네 할 일 똑 부러지게 단디 해라. 끊는다.)
김지훈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윤호 징계 요청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 이혁민 교수의 말대로 일개 교수 일이 아니었다. 그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말 그대로 일파만파였다.
‘내가 아는 거라곤 이번 일에 관련된 일뿐이잖아. 하긴 자기 마음대로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자리 운운한 것만으로도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긴 해.’
이혁민 교수의 전화까지 받은 이상 민혁기 원장에게 정식으로 보고하고 허락을 받아야 했다. 이왕이면 부원장인 이용철 과장도 함께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이러저런 일로 바빴다.
양해를 구하고 어렵사리 자리를 마련했다. 그런데 정성호 과장과 흉부외과 주덕현 과장까지 보였다. 여러 사람 알아서 좋을 일이 아니었지만 민혁기 원장의 권한이다. 사안이 중대하다고 여기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김 과장, 주말에 서울 올라가야 한다고? 이혁민 과장에게 말은 대충 말은 들었는데 어떻게 된 일이야? 우리 과장들도 알아야 할 것 같아.”
구미 근무를 하는 이상 징계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말은 해야 했다. 주관은 불필요한 오해를 부를 수 있기에 최대한 객관적으로 설명했다.
다들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용철 과장을 빼고 모두 구미에 와 처음 봤다. 무조건 믿어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왠지 불안했다. 문득 세간의 시선이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신기동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민혁기 원장이 한숨을 쉬었다.
“병원이나 우리 입장에서나 좋지 않은 일이 있었네. 김 과장, 내가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만 난 자네를 믿어. 잘 해결하고 와.”
“원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 김 과장이 지금까지 한 걸 보면 믿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자신의 일에 이렇게 충실한 사람도 보기 힘듭니다. 김 과장, 힘들었을 텐데 미리 얘기 좀 하지. 나 많이 서운하다.”
기우였다.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말씀대로 좋은 일이 아니어서요.”
민혁기 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쁜 일일수록 입이 무거워야 하는 법이지. 김 과장,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혹시 힘들면 언제든 날 찾아. 응급실 문 닫고 술 한잔 하자.”
“어이구! 원장님. 좋죠.”
“이 과장도 술 너무 좋아해서 탈이야.”
믿지 못한다면 농담이 나올 자리가 아니었다. 아니, 진담일지도 몰랐다. 너무 감사하고 과분할 정도의 신뢰에 가슴이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물끄러미 김지훈을 보던 정성호 과장이 입을 열었다.
“지금은 김 과장 편을 들 수밖에 없지만 하윤호라는 사람 말을 들으면 입장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수술할 수 있겠어?”
역시 냉정하고 완전히 마음을 열지 않았다.
가슴이 쓰렸지만 당연한 말을 들었다.
무리한 수술은 반드시 문제를 만들기 마련이었다. 심리적 압박감을 이길 수 있다면 정상적으로 근무하는 것이고 반대라면 당분간 칼을 놓은 것이 마땅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산전수전 다 겪은 김지훈이었다. 금경태 때는 지금보다 더했다. 이제는 흔들릴 일이 없었고 흔들려서도 안 되는 때였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개인적인 일 때문에 환자를 등한히 하지는 않습니다. 서울 올라갔을 때 환자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게 걱정입니다.”
“대장암 3긴데 괜찮아?”
“아직 보호자 동의도 못 받았습니다.”
정성호 과장이 헛기침을 했다.
“걱정하지 말고 수술 받으라고 말했어. 환자도 동의했으니까 김 과장이 마지막 결정만 하면 돼. 흠흠! 어쨌든 생각 이상으로 멘탈 강하네. 하윤호가 정말 실력 없고 인간성마저 바닥이면 꼭 내쫓아. 그런 사람이 병원 잡아먹는다.”
아니다. 내뱉은 말과 본심은 달랐다.
어색하지만 웃음까지 보였다.
“환자에게 애정을 갖고 일 열심히 하는 써전치고 못 믿을 사람 없습니다. 김 과장, 응급실은 내가 최대한 커버할게.”
흉부외과 주덕현 과장도 강한 신뢰를 보냈다.
확실히 기우였다.
결코 개인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어 주었다. 이제 2주가 갓 지난 시점이었다.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김 과장, 감사한 일 아니야. 다 뿌린 대로 거두는 거야. 서울에서 구미 파견을 보냈을 때는 이유가 있지 않겠어? 짧은 시간이지만 여기 와서도 그렇게 행동했잖아. 내 환자까지 봐줘서 한결 마음이 편했어. 고마워.”
마음의 짐과 부담을 덜었다.
내친김이었고 조언도 필요했다.
하성원 원장에 관한 일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중앙 의료원 원장까지 언급하자 다들 놀라면서도 의아한 기색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민혁기 원장은 상당히 난감해 했다.
“그러고 보니 같은 하 씨네. 흔한 성도 아닌데 내가 왜 눈치를 못 챘을까?”
“맞습니다. 하윤호 교수가 조카입니다.”
“후우! 그래서 가까운 사람일수록 조심해야 하는데 사달이 날 줄 알았어.”
이용철 과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민혁기 원장이 입가를 매만지며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말 못할 사연이 있는지, 아랫사람 앞에서 해도 되는 말인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기에 이 자리에 불렀다. 더구나 이용철 과장은 곧 자신의 뒤를 이어 구미 병원을 책임지고 이끌어 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알아야 할 일은 알아야 하고 마침 그 기회를 김지훈이 제공했다. 한동안 눈가를 찌푸리며 뜸을 들이던 민혁기 원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김지훈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양반과 이런 일로 엮었으면 별소리 다 들었겠네. 김 과장도 대단해. 나 같은 사람은 생각도 못할 일을 했어.’
“김 과장 앞에서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인사 청탁이 유난한 분이야. 인재를 추천한다면 언제든 환영할 일이지만 대부분 탐탁치가 않았어. 다 그런 건 아니라서 개중 괜찮은 한두 명 빼고 모두 거절했어.”
정성호 과장이 눈가를 좁혔다.
“연초부터 내과 3과장 뽑으신다고 하다가 결국 없던 일로 하신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까? 혹시 일반외과도?”
“아니라고 말하기 힘들지만 다 내 책임이야. 내 눈이 잘못된 탓이지 남 탓할 일이 아니잖아. 에이구! 그 때문인지 몰라도 작년보다 훨씬 운영하기 힘들어. 돈 달라는 구석은 많은데 쪼들리는 것도 못해 먹을 짓이야.”
“설마 예산까지 제한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우리 병원 형편으로는 직원들 월급 주면 거의 남는 게 없잖아. 일반외과, 흉부외과는 거의 매달 적자였고 말이야. 어쨌든 장비 구입이다 뭐다 해서 해마다 보조를 받았는데 올해 대폭 삭감됐고 내년에는 어떨지 걱정이야. 설마 일부러 그러지는 않으셨겠지.”
적자라는 말에 두 사람 얼굴이 벌게졌다.
이용철 과장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비록 나이는 젊지만 전체 병원 원장단 회의를 할 때 구미 부원장 자격으로 참석했다. 좋게만 보였던 하성원 원장이 그런 일을 했을지는 생각도 못한 얼굴이었다.
“신상민 부원장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이 과장, 금경태 알지? 같은 과 과장이었으니까 김 과장이 가장 잘 알겠네. 그 사건 이후로 이사장님이 손을 너무 많이 뗐어. 우리 손으로 직접 뽑았으니까 할 말이 없지만 한 사람에게 권한을 너무 몰아주었고 말이야.”
민혁기 원장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마에 난 주름 골이 유난히도 깊었다.
겉보기와는 달리 정말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혼자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진 탓일 것이다.
항상 그렇듯 제도가 아니라 운영하는 사람이 문제였다. 만일 중앙 의료원 원장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일일지도 몰랐다. 물론 제도가 갖는 허점도 충분히 개선해야 할 것이다.
이용철 과장이 답답한 듯 눈가를 잔뜩 찌푸렸다.
“왜 혼자만 고민하시고 제게 말씀을 안 하셨습니까?”
“내가 자네 성질 너무 잘 알아서 그래. 한바탕 난리 치면 속이야 시원하겠지만 나 다음에 원장은 누가 맡아? 중앙 의료원 원장 임기가 2년이야. 대개 한 번 더 맡는데 그렇게 되면 이 과장이 원장 할 수 있을 것 같아?”
“원장님! 누가 원장 시켜 달라고 했습니까?”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나 귀 안 먹었어. 괜히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어. 무슨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자네들과 내 병원이다 생각하고 일하는 직원들이 우리 병원을 끌어가야 앞날을 볼 수 있어.”
답답한 듯 물 한 잔을 들이켰다.
“때가 되면 쓴소리하고 들이박을 사람은 나야.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음성 병원 어떻게 됐는지 잊었어?”
민혁기 원장의 눈가에 잡힌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구미 병원과 직원들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 느껴졌다. 그만큼 원망도 많을 것이다.
한동안 하성원 원장의 권한과 관련된 말이 이어졌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김지훈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정말 너무한 사람이네.’
명백한 직권 남용이자 전횡이었고 의도하지 않았던 귀중한 정보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증거도 없이 함부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단, 이사회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더욱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눈에 안 보여도 결국 다 알게 되는데 왜 우리는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하지 못할까? 하성원 원장에게는 자신의 자리가 무겁지 않은 걸까?’
민혁기 원장이 김지훈을 보며 갑자기 웃었다.
“김 과장 덕에 속이 좀 시원해졌다. 집에서 기다릴 텐데 다들 퇴근하자. 아니다. 오래간만에 와이프 동반해서 과장 회식 한 번 할까?”
번개다.
분위기를 전환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가끔 있었던 일인 모양이었다. 찜찜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이용철 과장이 숨 한 번 크게 쉬고는 활짝 웃었다.
“회식할 돈은 있으십니까?”
“이 과장, 나 애들 다 시집 장가보냈다. 어쩌다 한 번은 살 능력 있어. 빨리빨리 비상 연락망 돌리지 않고 뭐해?”
비상 연락망?
김지훈의 눈길에 주덕현 과장이 대답했다.
“유비무환! 혹시 몇몇 과가 감당하지 못할 사태가 생길 때를 대비한 거야. 김 과장, 힘내.”
“김 과장, 힘 너무 내지 마라. 응급실에 환자 몰려올지도 몰라. 회식 날은 마음 놓고 먹자.”
“오늘 당직이세요?”
“나? 오프야. 제수씨하고 둘이 많이 먹으라고. 저번에 피 같은 삼겹살 그대로 남았잖아.”
정성호 과장은 무얼 하고 있을까?
“최 과장, 원장님이 회식하자고 하니까 와이프하고 빨리 나와. 애들? 당연히 같이 나와야지. 원장님 사비야.”
이미 여기저기 전화를 하고 있었다.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
일이 있는 과장과 사춘기의 혼란함, 진지함에 빠진 아이들 빼고 다 모였다. 고경아도 여자들 틈에서 수다를 떨었다. 그동안 혼자 있는 줄 알았는데 많이 친해진 모양이었다.
왁자지껄, 화기애애한 자리다.
돌발 사태는 항상 벌어진다.
“술안주로는 역시 순댓국이······.”
가끔은 마음 놓고 먹을 자리가 필요했다. 단순히 금기나 미신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었다. 김지훈과 이용철 과장이 동시에 소리쳤다.
“원장님, 오늘은 안 됩니다.”
“그럴까? 거 참!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게 하고 왜들 그래? 기분 꿀꿀할 텐데 고기라도 많이 먹어.”
무척 태연한 말이었지만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전번 회식 때 순댓국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오늘은 한 발 물러서도 되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김지훈의 몰골을 볼 때 지금은 굳이 먹을 필요가 없었다.
일로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