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43화 (743/1,329)

8화. 할 일은 해야 말할 자격이 생긴다. Ⅱ (2)

주말 내내 뛰어다닌 조성민이 확실하게 응급실 보고를 했다. 그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초췌해진 얼굴 탓인지 오늘따라 새삼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 때 들은 스승과 교수들의 한 마디는 큰 힘이었다.

사소함 속에 숨은 따스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수고했어. 고생했다.”

‘갑자기 왜 이러시지?’

조성민의 의아한 얼굴 뒤로 민혁기 원장이 얼굴을 비쳤다. 주말 실적을 확인하며 김지훈과 조성민의 어깨를 툭툭 쳤다. 미안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활짝 웃음을 머금고 응급실 여기저기를 살폈다.

왠지 눈길이 갔다.

“수간호사, 이리 와 봐요. 환자가 제법 많이 늘었는데 부족한 거 없나?”

“일회용 물품이 많이 부족하고 교체해야 할 장비도 몇 개 있어요. 이 상태로 가면 인력이 많이 부족할 것 같아요. 충원 계획은 없으세요?”

“간호사 인원 문제는 전체 회의 때 같이 상의합시다. 그놈의 돈이 문제지. 장비 교체에 예산이 얼마나 들까?”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의료 장비는 의외로 비싸다. 노후화돼도 쓸 수 있을 때까지 쓰는 것이 현실이었다.

“여력이 되는 선에서 최대한 마련해 주세요. 중앙 의료원에서는 아직도 지원이 안 되고 있나요?”

민혁기 원장이 헛기침을 하며 김지훈을 보았다. 자신의 머리까지 톡톡 두드리며 화제를 돌리는 것이 어째 딴청을 피우는 것 같았다.

말하기 곤란한 문제인 모양이었다.

“어이구! 요새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지 모르겠네. 김 과장, 최철한 선생하고 유석재 선생 잘 갔지? 식사 한 번 제대로 못했는데 인사도 소홀히 했네. 미안해서 어쩌지?”

“최철한 선생님도 마음에 걸리는지 전화 드린다고 했습니다. 주말에 쉬시는데 연락드리기 죄송했던 모양입니다.”

“아직 근무 시작도 안 했는데 내가 미안하지. 김 과장 덕분에 사람 문제까지 고민하게 됐어. 하하하!”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과장이 해야 할 일은 아니지만 진료 이외에도 신경 써야 할 문제가 정말 많네. 장비나 물품보다 함께할 사람 챙기는 게 가장 우선이겠지? 남은 기간만이라도 과장답게 일하자.’

전에 없는 책임감이 느껴졌다.

과장 회의 중 나오는 말에 더 귀를 기울였다. 각 과가 느끼는 고충, 불편함은 물론 필요한 의료 장비나 비품 구입 등 사소한 구석까지 과장이 건의하고 챙겨야 할 일이었다.

‘우리도 라파로 장비가 하나 쯤 더 있으면 좋겠는데 사놓고 못 쓰면 어떻게 하지?’

생각을 읽었는지 민혁기 원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김지훈 선생, 전주에 라파로만이 아니라 응급 수술까지 꽤 많이 했네. 수고했어. 혹시 부족한 장비가 있으면 최대한 확보해 줄 테니까 서류 작성해서 정식으로 올려. 너무 비싼 장비는 안 돼.”

“감사합니다.”

김지훈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입맛을 다셨다.

복강경 장비 엄청 비싸다. 막대 끝에 켈리 하나 달린 기구가 수십만 원을 호가했고 신제품이라도 나오면 입이 쩍 벌어질 정도였다.

‘그래도 한 세트 더 장만해야 원활하게 돌아갈 텐데.’

“한시름 덜어서 내가 고맙지. 요즘처럼 모든 과가 잘 돌아가면 주름살까지 줄겠어. 허허!”

이용철 과장이 속삭였다.

“정 과장, 내가 뭐랬어? 바뀔 거라고 했지?”

지난주 실적 표를 보던 정성호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복강경 수술도 놀랍지만 눈에 뜨일 정도로 확 늘은 응급 수술에 더 눈이 갔다.

‘웬만한 환자는 다 수술했네.’

“김 과장, 지난주에 대구로 보낸 환자는 없었어?”

“다행히 그 정도로 심각한 환자는 없었습니다.”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어?”

신기동 교수 저리가라 할 정도로 직설적이었다. 개인적인 호감과 능력 문제는 별개다. 라파로에 특출하다고 해서 모든 수술을 잘한다는 소리도 아니다.

혼자 근무한다는 점을 감안했을 수도 있지만 듣기에 따라 자존심이 확 구겨지는 물음이었다. 김지훈이 그 정도로 속이 좁거나 생각이 얕지는 않다.

도리어 눈을 반짝였다.

내과 과장의 질문이다.

관여할 일이 없는 응급 수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규 수술에 대해 묻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분명히 암 환자 수술이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고 해도 절실한 수술이 바로 메이저 수술이었다. 환자와의 신뢰, 전공의 교육 그리고 김지훈, 자신의 손까지 모든 면에서 필요했다.

일일이 질환을 들어가며 대답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감을 갖고 확신을 전하면 된다.

“보내만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수술하겠습니다. 지금도 낮에는 놀고 있습니다.”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복강경 수술 이후 정성호 과장의 확고한 신뢰를 얻기 시작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착각이라고 해도 분명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기분 좋은 과장 회의였다. 반면 부담과 불안감도 함께 커졌다. 지금은 외래 환자가 없어 오로지 컨설트와 응급 환자에 기대야 하기 때문이었다.

내외산소, 말 그대로 메이저 과의 중추로써 자부심은 충만한데 정작 스스로 돌아갈 힘이 없다는 의미다.

그것처럼 서러운 일도 없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소극적인 대처로는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었다. 적극적인 태도만이 답이었다. 규모는 작아도 구미 지역 거점 병원이기에 병원 내부만이 아니라 외부에도 기회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학회에 보고할 만한 수술을 세 개나 한 마당이었다.

마침 민혁기 원장이 마지막까지 남아 과장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따라 일이 없는지 시간을 재촉하지 않았다. 완벽한 기회였다.

“원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할 말이 있다고? 어서 말해.”

민혁기 원장이 내용도 묻지 않고 반색을 했다. 언제 어디서든 항상 아래 사람의 말을 경청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지훈이 며칠 전부터 생각해 왔던 일을 말했다.

핵심은 간단명료했다.

명분도 그럴 듯했다.

“복강경 수술 홍보를 강화했으면 좋겠습니다. 운이 좋긴 했지만 다른 병원에서 못한 수술을 성공한 것도 알리고 주변 지역 개인 의원과 병원에도 일일이 협조를 요청했으면 합니다.”

민혁기 원장이 손가락을 튕겼다.

“아! 나도 그 생각을 했는데 잘됐네. 김 과장, 외래 환자 없지. 나하고 같이 가자. 이 과장, 잠깐 시간 좀 내줘.”

보기와는 달리 성격 꽤나 급했다.

이용철 과장까지 함께 총무과로 향했다.

민혁기 원장이 총무 부장을 앞에 앉히고는 홍보에 필요한 사항을 상의했다.

“김 과장, 제안을 했으면 문구 정도는 정해야지 뭐해? 병명도 알기 쉽게 정리해 주고. 그래야 내가 일을 할 거 아냐? 이 과장이 보기에는 어때?”

“환자만이 아니라 의사들에게도 말하는 거니까 두 번째 안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김 과장도 괜찮지? 총무 과장, 최대한 빨리 만들어서 바로 연락 줘. 일일이 찾아가서 부탁해야 하는데 시간 많이 걸리겠다. 김 과장, 나만 믿어. 이따 점심 같이하자.”

열정적이면서도 원장답지 않은 소탈함 속에 권위가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문득 펠로우 운운하며 소리 지르던 하성원 원장이 생각났다.

‘오늘따라 원장님이 너무 멋지시네.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보다 훨씬 더 권위가 있어 보인다.’

꼭 기억해야 할 모습이었다.

병동으로 향하는 김지훈을 보던 민혁기 원장이 좋아 죽었다. 이용철 과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이 과장, 보물이 왔어. 3개월 더 있으면 안 되나?”

이미 접은 생각이었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서울에서 난리 날 것 같지 않습니까? 이준영 선생님이 허락하실 리가 없죠.”

“맞아. 난 이 교수 보면 너무 무뚝뚝해서 솔직히 무섭더라. 입에 자물쇠 달고 있는데 응급 센터는 어떻게 맡았는지 몰라. 실력 때문이겠지?”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어깨를 부르르 떨자 이용철 과장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 모습에 반해 구미 병원에 더욱 정이 가는지도 몰랐다.

김지훈도 한 주를 즐겁게 시작할 수 있었다.

제법 쌓인 차트와 다양한 의미가 담긴 수술에 회진을 도는 발걸음이 힘찼다. 신규 환자 한 명 없는 외래에 내려가서도 힘을 잃지 않았다.

3주째 근무였지만 이제야 새로운 시작이란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든 전체적인 틀 속에서 동료와 함께 고민하고 결정해야 할 것이다.

과장이라고 불리는 한때가 아니라 평생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 마땅했다. 직위와 상관없이 시간이 갈수록 어깨에 걸리는 책임이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하루 일과는 다를 바가 없었다.

석사 논문과 학회 보고를 준비하며 외래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누구든 언제든 불러만 주면 달려갈 태세를 갖췄다. 그런 마음을 아는 것처럼 오하석이 기특한 짓을 했다.

“이게 뭐야?”

“내과 환자 리스트입니다. 혹시 도움이 되실지 몰라서 가져 왔습니다. 매일 아침 외래에 갖다 놔도 될까요?”

일반외과와 내과가 불가분의 관계임을 똑똑하게 알고 있었다. 어떤 환자가 있는지 알면 정성호 과장과의 대화가 훨씬 매끄러워질 것이다. 잘만 마시면서도 메슥거린다는 커피보다 훨씬 강력한 무기가 될지도 몰랐다.

너무 예뻐 볼이라고 꼬집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야! 하석아! 우리 과 하자. 마음에 쏙 든다. 참! 진우가 맛있는 거 사 줬어?”

“헤헤! 가 보겠습니다.”

꾸벅 고개만 숙이고 사라졌다. 뭔가 의심스러웠지만 병원에서 살다시피 일하는 송진우였다. 시간이 있어야 뭔 짓을 해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과 환자 리스트라!’

어떤 행동이든 사소할지라도 변화를 불러온다. 왠지 모를 희망에 부풀었고 세상일 간만에 마음을 따라 주었다. 월화 내리 신규 환자가 무려 두 명씩이나 온 것이다.

간단한 양성 종물 환자 둘에 개인 의원에서 의뢰한 아뻬와 소아 탈장이었다. 작든 크든 수술이었고 진료 시간 내내 논문만 붙잡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소아 탈장이 가장 신경 쓰였다.

“이제 8개월 됐는데 전신마취 해도 괜찮을까요?”

“아이가 건강하게 잘 커서 큰 문제없습니다.”

“애들은 복강경으로 안 되죠?”

“예. 애초에 배를 여는 수술이 아니고 아이들은 도리어 큰일 날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입원 수속부터 밟아 주세요. 아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테니까 모레 아침 첫 수술로 하겠습니다.”

응급실은?

오하석이 내과로 간 탓인지 환자가 줄긴 했지만 꾸준히 응급실 문이 열렸다. 진단이 애매모호한 환자와 흉부외과 환자까지 겹쳐 전공의들은 결코 한가하지 않았다.

겸사겸사 체력도 회복할 겸 그럭저럭 만족할 수 있는 이틀이었다.

수요일 오전, 8개월 아이의 탈장 수술을 시행했다.

이용철 과장이 직접 마취를 했고 아이들은 탈장 주머니만 제거하면 된다. 서혜부를 1.5센티미터 정도 열고 반투명 비닐봉지처럼 보이는 막을 찾아 자르고 묶었다.

간단해 보이지만 경험이 부족하거나 해부학적 구조가 헷갈리면 엄청 헤매는 수술이다. 서울에서 파트를 가리지 않은 덕을 톡톡히 봤다.

깔끔하게 끝났다.

조성민도 깔끔하게 탔다.

“으아아앙!”

엄마 품에 안겨 크게 울어 대는 아이를 보던 김지훈이 미소를 머금었다. 남의 집 애 울음소리 좋아하는 사람 없는데 이상스럽게 예뻐 보였다.

문득 고경아가 생각났다.

‘이번 주 일만 제대로 끝나면 확실하게 만들어 보자. 보문단지와 해운대 중 어디가 좋을까?’

갑작스럽게 빠져들었던 상상의 나래가 나직한 목소리 하나에 산산이 깨졌다.

“선생님, 더우십니까?”

“왜? 병실 히터를 세게 틀었나?”

“아니요. 얼굴이 벌게지셔서요.”

어후! 창피하다.

“너나 잘해. 인마.”

애꿎은 송진우가 핀잔을 받았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문지르며 외래로 내려가 간신히 논문에 집중했을 무렵 조성민이 들어왔다. 컨설트 용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반색을 하던 김지훈이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관리했다. 명색이 과장인데 촐싹거리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컨설트 왔구나? 무슨 환자야?”

목소리까지 낮게 깔았다.

“예. 대장암 환자입니다.”

관리 들어가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하마터먼 조성민 앞에서 만세를 부를 뻔했다. 이미 마음속으로는 수십 번도 더 불렀다.

“그래? 환자 봤지? 몇 기야?”

조성민이 콧등을 찡그렸다.

“상행 결장암인데 3기까지 진행됐습니다.”

쉽지 않은 수술에 예후마저 좋지 않은 환자였다.

기쁨도 잠시 답답한 한숨을 쉬며 병실로 올라간 김지훈이 검사 결과를 확인한 후 환자를 만났다. 심신이 모두 지쳐 보일 정도로 병색이 완연했다. 보호자는 대구로 가야 할지 구미에서 받아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누구도 강요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술 전 준비만 사흘 정도 걸립니다. 이번 주까지 결정을 내려 주셔야 다음 주에 수술할 수 있습니다. 이왕이면 빨리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보호자는 어두운 안색으로 말이 없었다.

문득 1년차 때 대장암 말기로 잃었던 17살 소녀가 생각났다. 살아 있었다면 대학을 졸업할 때쯤 됐을 것이다. 오래전 일인데 아직도 마음이 아플 정도로 심란했다.

“수술 후에도 많이 힘드실 겁니다. 환자 분만이 아니라 보호자 분들도 마음 편하게 수술 받을 수 있는 병원을 택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환자를 두고 반색한 일이 후회스러웠다.

질병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의사로서 활동하는 한 두고두고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무사히 회복돼 퇴원하는 환자의 웃음이 없다면 애초에 반색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마음 편한 직업 없다지만 아픈 환자 보는 건 항상 힘드네. 적응이 될 일일까?’

감정은 감정이고 일은 일이다.

외래로 내려가며 마음을 추스른 김지훈이 조성민을 보았다. 눈길만 주었는데 바로 답이 나왔다.

“대장암 준비 철저히 하겠습니다.”

“결정도 안 났는데?”

“환자 분 분위기를 보니까 선생님께 받을 것 같습니다.”

“네 말대로 됐으면 좋겠다.”

김지훈도 간만에 수술 책을 꺼내 대장 파트를 펼쳤다. 상행 결장 암 수술 부분을 찾다 말고 피식 웃었다.

- 지훈아, 교수야, 복강경 수술 잘 끝났지? 이젠 할 만큼 했으니까 대장하자. 대장. 좋다. 좋아. -

환청이 참 길게도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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