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42화 (742/1,329)

8화. 할 일은 해야 말할 자격이 생긴다. Ⅱ (1)

도리질을 한 김지훈이 손뼉을 딱딱 치며 일어났다.

송진우의 얼굴이 유난히 벌게져 있었다.

약간 긴장한 것 같은 눈 속에 기대가 가득했다. 절대 외면할 수 없었다. 그동안 열심히 해 왔고 구미까지 따라 온 이상 메스를 건넬 때가 한참 지났다.

“진우야, 준비해.”

집도를 의미하는 말에 송진우의 입이 쭉 찢어졌다. 긴장과 후폭풍을 잊은 건 아니었다. 다만 과장으로서 각오를 다진 김지훈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불행히도.

금요일 밤.

오늘 하루의 네 번째 수술이 시작됐다.

선배 두 명이 어김없이 얼굴을 보였다.

새로운 느낌이다.

수술하는 내내 송진우의 손에 집중하며 미진한 점만이 아니라 수준까지 가늠하려 애썼다. 2년차로서 상당한 실력을 갖췄다는 사실과 지적할 부분이 무엇인지 눈에 보였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교육해야 할지 큰 틀을 잡을 수 없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보는 시각이 필요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침착함을 유지하며 무사히 수술이 끝났다.

‘자식! 정말 많이 노력했구나.’

내심 감탄할 정도로 깔끔하게 잘했지만 2년차 수준에서 그렇다는 말이었다. 김지훈의 눈에 미진한 점이 없을 수가 없었다.

열 손가락 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유난히 아픈 손가락이 있다. 또는 유난히 예쁜 손가락이 있을 수도 있다.

전과는 비교하기 힘든 가공할 화력에 송진우의 온몸이 불타올랐다. 쓰러질 듯 휴게실 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에 김현철이 꿀꺽 침을 삼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수술을 받지 말까?’

죽고 싶으면 뭔 생각을 못할까?

회복실로 나온 김지훈이 미소를 머금었다.

불평 한 마디 할 송진우가 아니었다. 1년차 확실하게 가르치라는 마지막 말도 절대 잊지 않았다. 문득 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고자 하는 말을 오해 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 고맙네.’

애정만으로 태우는 것은 한계가 있다. 확실한 계획과 목적을 더한다면 후배들을 최고의 써전으로 만드는데 분명한 일조를 할 것이다.

임시라도 과장이기에 더욱 그래야 했다.

최철한, 유석재와 자리를 했다.

늦은 밤에도 귀찮아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일반외과를 이끌어야 할지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미 개인 병원 과장을 하고 있어 그런지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던 김지훈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윤호와 이사회 문제를 상의할 사람이 필요했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일이 아니었지만 격 없이 지냈고 입 무거운 선배들이기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직접 들으니까 정말 심각하네. 이혁민 선생님께 대충 듣긴 했는데 판이 커진 모양이다. 이사회에서 김 과장을 불렀다는 건 아마 하윤호 교수에 관한 일 때문만은 아닐 거야.”

“그런 생각이 들긴 하지만 하성원 원장님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잖아요. 저 펠로우에요.”

“펠로우도 펠로우 나름이지. 김 과장이 보통 펠로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어디든 그런 사람들이 있지만 결국 올바른 선택을 한 사람이 웃더라. 나가야 할 사람은 나가는 것이 맞아. 당장 여기 구미가 말하고 있잖아.”

유석재가 주먹을 쥐어 보였다.

“김 과장,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 김 과장은 옳은 행동을 했고 상대가 누구든 부당하다면 머리 숙일 필요가 없다는 거야. 우리 과 선생님들이 어떤 분들인지 잘 알잖아?”

마음의 위안은 됐지만 채워지진 않았다. 자신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불확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신현수와 통화한 내용이 뒤통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올바른 선택이니까 앞만 보고 가라. 후우! 맞는 말인데 대처하기 참어렵네.’

고민이 많아지는 밤이었다.

곤히 잠든 고경아의 얼굴을 보던 김지훈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흔들었다.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두고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을 빼고는 다 같은 마음인데 내가 이럴 이유가 없잖아? 일단 하윤호 넌 절대 안 돼.’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왔다. 혹 욕먹을 행동은 했을지 몰라도 책잡힐 일은 하지 않았다. 스스로 떳떳하다면 가슴을 펴도 될 것이다.

지금은 싹 잊고 구미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힘내자.

간만에 외쳤다.

카르페 디엠! 아자! 아자! 아자! 파이팅!

‘너무 많이 외쳤나? 피곤하다.’

각오도 잠시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왔다. 요 며칠 갑자기 무리했다. 피곤 앞에 장사 없고 잠이 보약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김지훈이 세상모르고 꿈나라로 달려갔다

“하석아, 부탁한다.”

평소 하지 않던 잠꼬대까지 했다. 수술을 만들라는 건지 오늘 밤은 제발 쉬게 해 달라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토요일 오전.

회진을 마친 김지훈이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환자의 순조로운 회복은 보람이자 행복이었다. 사람인 이상 특히 어려운 수술을 한 환자에게 더 신경이 가고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터진 아뻬 환자는 19살 소녀 특유의 수다를 떨었다. 딸 바보 아빠가 좋아 죽었다. 장 폐쇄 환자는 수술 전에도 힘들었던 운동을 한결 수월하게 하고 있었다. 수술로 인한 통증은 거의 느끼지 못했다.

“선생님, 이놈의 코 줄은 언제 뺄 수 있습니까? 물 좀 먹으면 안 됩니까? 목말라 죽겠습니다.”

그동안 무척 힘들었기에 더욱 불편할 것이다.

“아직은 빠릅니다. 운동 열심히 하셔서 가스부터 나와야 코 줄 빼고 물도 드실 수 있습니다.”

“운동해서 방귀를 뀌어야 한단 말이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환자가 침대에서 일어나 복도로 향했다. 근 일주일 가까운 시간 동안 금식했는데 보행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만큼 덜 아프고 회복이 빠르다는 말이었다.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식은땀이 나도록 어렵게 수술했지만 정말 최고의 선택이었다. 덤으로 민혁기 원장만이 아니라 정성호 과장의 칭찬까지 받았다.

“원장님, 김 과장을 아예 구미에서 근무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최철한 선생하고 함께 일하면 장난 아니겠습니다. 중앙 의료원에 적극적으로 건의하시죠.”

완전히 마음이 기운 모양이었다.

“응? 그거 좋은 생각이다. 조금 있으면 온 동네에 소문 쫙 날 테니까 우리 병원이 확확 살겠지? 정 과장하고 김 과장이 투 톱(two top)으로 뛰어 주면 확실하겠네. 그럼 서울에 당장 연락······.”

‘어이쿠! 농담이라도 이런 소리는 안 하는 게 좋겠다. 송 원장님과 이준영 교수에게 멱살 잡을지도 몰라.’

기분은 좋았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에 못 들은 척했다. 그 때문인지 과장들을 볼 때마다 계속 따라붙은 칭찬과 묘한 눈빛에 흥분되면서도 한편으로 땀이 맺혔다.

‘다들 왜 이러세요? 안 됩니다.’

뭔가를 원하는 눈빛은 단호한 눈빛으로 대항하면 된다. 눈에 힘 꽉 주고 외래에 앉아 마음을 진정시켰다. 더 없는 신뢰를 받은 이상 과장으로서 해야 할 일을 방기할 수 없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깊게 고민한 후 전공의 셋을 앞에 앉혔다. 다들 갑작스러운 호출에 긴장한 얼굴이었다.

‘설마 또 일거리를 주시는 거 아냐?’

어젯밤, 다른 과 환자들로 고생했는지 송진우와 김현철이 힘들어 보였다. 안쓰러운 일이지만 환자와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김지훈이 냉장고에서 차가운 캔 커피 세 개를 꺼냈다. 선배의 마음에 피곤을 덜기 바랄 뿐이었다. 시원하게 한 모금 넘기는 것을 보며 입을 열었다.

“성민아, 전문의 논문 써야지? 라파로로 하자.”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조성민이 반색을 했다. 곧 4년차가 되는 상황에서 논문은 일거리가 아니라 절실한 문제였다.

전문의 논문은 혼자 쓸 수 없다.

교수의 확실한 감수가 없다면 통과를 장담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최철한이 혼자 근무할 때가 돼서야 쓰게 되면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다. 어쩌면 부족한 집도보다 더 불안하게 여겼던 부분일 수도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라파로로 쓰려면 아직 케이스도 많지 않고 제가 직접 수술해 봐야······.”

반색과 감사하다는 말이 아프게 다가왔다.

‘후우! 성민이 속도 모르고 뭐한 건지 모르겠네.’

“나 3개월 근무다. 준비되면 라파로가 아니라 그보다 어려운 수술도 언제든 줄 수 있어. 만일 그때까지 수술 못 받으면 다른 거 써야겠지? 최철한 선생님 무시무시한 분이니까 뒷감당은 네가 해.”

이제 2개월 조금 더 남았는데 그 안에 수술을 받으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농담으로도 듣지 못할 말이었다.

정말 자격이 된다면 반드시 수술을 줄 것이다.

조성민이 훅 숨을 내쉬며 입술에 침을 발랐다.

“자료 문제도 있습니다.”

또 생각지 못한 문제가 나왔다. 구미 병원 역시 논문 등을 보관하지만 서울이나 천안에 비해서 상당히 열악한 것이 사실이었다.

‘과장이라고 앉아서 왜 이렇게 생각이 짧지? 그나저나 이래서야 전문의 시험 준비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당장 다른 방법은 없었다.

“서울이나 천안 병원에서 자료 찾아야지 어떻게 하겠어? 내가 필요한 자료 목록 알려 줄 테니까 주말 오프 때 올라가서 준비해.”

“알겠습니다.”

여전히 걱정이 많은 얼굴이었다.

“진우, 너도 다음 주까지 주제 잡아서 논문 하나 써. 제대로 써서 학회에 발표 한 번 해 보자. 김현철, 너는 수술 몇 번 못해 봤지? 아뻬부터 단단히 준비해.”

송진우와 김현철의 어깨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자! 오늘도 힘차게 달려 보자.”

긴장이 쭉쭉 이어졌다.

최철한과 유석재가 혀를 내둘렀다.

‘일복 하나는 정말 끝내준다. 도대체 수요일부터 수술을 몇 개나 하는 거야? 김 과장 체력은 여전하네. 타고났어.’

금요일 밤 못 본 환자까지 토요일 밤에 모두 몰아서 봤다고 과언이 아니었다. 새벽 찬 이슬이 내릴 즈음 숙소로 돌아와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일요일 아침, 마지막 응급실 근무를 눈앞에 둔 오하석의 눈가에 피곤이 까맣게 내려앉아 있었다. 분명 집에 들어가 코까지 골았던 김지훈이 왜 함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몰골이 비슷하긴 했다.

인턴과 과장인데 말이다.

“선생님, 저 다음 주부터 내과 돕니다. 어제 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집에 가니?”

“아니요. 12시까지 근무한 후 인수인계하고 내과 돌 준비까지 하려면 시간이 없어요.”

그동안 고생 많이 했는데 밥 한 번 사 주지 못했다.

김지훈의 눈길이 주말 오프를 받고도 병원을 떠나지 않은 송진우에게 향했다. 오하석만큼 비참한 몰골이었다. 수술 한 건 받지 못해 밤새 뛰어다닌 보람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가장 힘들었을 김현철은 이미 숙소에서 뻗어 있었다.

“진우야, 오프 정말 안 갈 거야?”

“선생님이 안 가시는데 제가 갈 수 있겠습니까?”

“너랑 나랑 같아? 받는 월급이 다르고 근무 시간이 달라, 인마. 마음은 고맙다만 쉴 때 쉬어야지. 하석이 근무 끝나는 대로 맛있는 거 사 주고 쉬어. 오더야.”

“괜찮습니다. 선생님.”

“너 때문이 아니라 하석이 때문이야.”

송진우의 얼굴이 벌게지고 오하석은 유난히 반색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운을 잡아끌며 당직실로 들어갔다. 여자라고 해도 인턴 후배일 뿐인데 불타는 고구마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수상해. 혹시 저 자식들 만나는 거 아냐?’

눈을 가늘게 뜨던 김지훈이 응급실을 둘러보았다.

오전이라고 그런지 상당히 한가했다.

폭풍 뒤에 찾아온 고요함이랄까?

회식 날 벌어진 순댓국 참사 이후로 사라졌던 일복이 점점 돌아오고 있었다. 전공의와 간호사를 비롯해 의료진들의 과도한 피로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어색할 지경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적당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쉴 수 있기를 바랐지만 일요일 한낮의 한가로움이 제법 차가워진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혼자였다면 꽤 힘들었을 텐데 바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최철한과 유석재가 늦은 저녁까지 함께 했고 전공의들도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 확실했다. 혼자 잘난 세상도, 혼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세상도 아니었다.

고생 끝에 찾아온 낙은 크지 않았다.

아쉬움만 남을 순간이 다가왔다.

“김 과장, 수고해. 2주 후에 보자. 조성민, 새카맣게 타지 말고 수술 잘해.”

하성원 원장 일을 다시 한 번 상의할까 생각했지만 정식 근무를 시작하지 않았다. 구미 병원 일도 아니고 신경 쓸 일도 많을 텐데 지나친 부담 주고 싶지 않았다.

“안녕히 가십시오. 수고하셨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얼굴로 왔던 최철한과 유석재가 초췌한 몰골로 떠났다. 공연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또다시 혼자 근무해야 한다.

속상해 하지 말라는 모양이었다.

수술을 연이어 두 건이나 했다. 집도를 한 조성민은 수술실에 하얀 재를 수북하게 쌓았고 김현철은 어떻게 아뻬 하나 없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밥 사 주러 나간 송진우는 기별조차 없었다.

아! 점점 심하게 피곤해진다.

월요일 아침.

땅이 꺼질 것 같은 고경아의 한숨 소리를 벗하며 출근했다. 주말 대부분의 시간을 TV와 함께 홀로 보낸 데다 김지훈의 얼굴이 피로로 가득해 그럴 만도 했다.

“이번 주에도 이러면 어떻게 하지?”

“설마! 가끔 환자가 몰릴지는 모르지만 그 다음 주에 최철한 선생님 오시잖아요. 경주 아니면 부산이나 갈까요? 갈매기 끼룩끼룩. 해운대?”

“해운대? 좋아요. 이번 주 주말 당직은 어떻게 할 거예요? 이사회에서 무슨 말 나올지 연락 받은 건 없어요?”

고경아의 안색이 안 좋았다.

“일단 원장님께 사정 말씀드리고 올라가야죠. 현수가 신경 쓰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

“같은 과 교수 징계 요청을 했다고 다른 과장님들 시선이 나빠지는 건 아니겠죠?”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럴 리가 있어요? 다 좋은 분들이고 내가 잘못한 일도 없으니까 마음 푹 놔요.”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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