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또 하나의 벽을 넘다. (2)
내일을 위해 자리를 끝내고 전화를 했다.
(이 밤에 무슨 일이야?)
언제나 듣던 그 목소리, 그 말투 그대로였다. 무뚝뚝함 속에 숨어 있는 반가움에 김지훈이 미소를 머금었다.
“별일 없으셨죠? 밤늦게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6년이란 세월이 무색하게 전공의 1년차로 돌아갔다. 지난 두 건의 수술과 장 폐쇄 수술을 설명하는 목소리에 스승의 도움을 구하는 간절함이 실렸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이미 장 박리를 해 봤다면 조심해야 할 부분이 어딘지 알 테니까 그 점만 유의해.)
미세하지만 분명한 떨림이 느껴졌다. 뿌듯함까지 서려 있는 것 같았다. 스승의 성격을 생각하면 실로 대단한 반응이었다.
보다 자세하고 구체적인 조언을 구했다.
느낌뿐이었을까?
그럴 리 없었지만 역시 스승이다.
(집도의가 누구야?)
“예? 예. 접니다.”
(그럼 됐어.)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조언 대신 확고한 신뢰를 전했다.
언제나 그렇듯 무뚝뚝하고 짧은 말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지식이나 경험이 아니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일지도 몰랐다.
‘스승님 목소리만 들어도 편안해지네.’
이대로 지나갈 스승이 아니었다.
(학회에 케이스 보고하자.)
이미 성공이나 한 것처럼 일거리 하나 툭 던졌다. 하윤호 징계 건이 혀끝까지 밀려 나왔지만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아 묻지 못했다.
스승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경아는 옆에 있어?)
다행히 막 관사에 들어왔다.
“어머! 선생님, 잘 지내셨죠?”
(그래. 경아 너도 별일 없지? 아는 사람도 없는데 불편하지 않아? 타지 생활이 다 그래. 내가 도울 수 있으면 다 도울 테니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 전화해.)
자상한 말이 참 길게도 이어졌다. 한동안 웃음꽃이 피었고 김지훈은 옆에 앉아 입맛만 다셨다. 명색이 제자인데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무려 10분이 더 흐르고 나서야 통화가 끝났다.
경이적인 일이었다.
놀랍기도 했지만 기분 좋은 일임은 틀림없었다. 고경아를 아끼고 보살펴 주는 말 속에 김지훈에 대한 기대와 애정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그날 밤 늦도록 관사 불이 꺼지지 않았다.
“지훈 씨. 특별히 준비할 기구는 없어요?”
“날카로운 기구만 조심하면 될 것 같아요.”
부부가 함께 고민하고 준비하는 일은 더 즐겁다.
금요일 오전, 깔끔하게 두 건의 수술을 끝냈다.
탈만큼 탄 조성민도 퍼스트 역할을 상당 부분 숙지하고 있었다. 한동안 고경아의 도움을 받아야 하겠지만 이 간호사의 어시스트 역시 제법이었다.
12시가 막 넘었다.
“오늘도 라파로 두 건이 세 시간 만에 끝났네. 김 과장, 남은 수술 이어서 할 거야? 점심시간이 빠듯하다.”
서울이었으면 바로 이어서 장 폐쇄 환자를 수술했겠지만 더 이상 예정된 수술은 없다. 뒤를 받쳐 줄 이준영 교수도 없는 상태다. 처음 시도하는 수술이기에 충분한 여유를 갖고 매사에 조심하는 것이 좋았다.
점심 먹고 어제 못한 수술 준비도 할 겸 오후 2시에 하기로 했다. 전공의들과 또 머리를 맞댔다. 무지막지할 정도였지만 누구도 과하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어제 밤 응급실이 한산했던 덕을 여기서 봤다. 수술 과정을 설명하는 동안 머리가 꽤 맑았다. 몸도 개운했고 그 덕인지 마음까지 편안했다. 의도치 않았지만 환자와 수술이 적은 덕분일 것이다.
“최철한 선생님, 일인 당 하루에 서너 건씩만 하면 무리할 일이 하나도 없겠습니다. 선생님 오시고 평균 여덟 건 정도면 딱 좋겠네요. 가능할까요?”
연이어지는 복강경에 고무된 김지훈이 목표를 변경했다. 허황되지만 않으면 꿈은 크고 원대하게 잡아도 좋을 것이다.
“하루에 여덟 건? 김 과장, 여기 구미야.”
최철한이 자연스럽게 과장이라고 불렀다.
누구도 어색해 하지 않았고 호칭 변화를 의식하지 못했다. 대학 병원 과장 역시 의사이기에 행정적인 능력보다 기본적으로 실력을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윤호에겐 늙어 죽을 때까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 김 과장 말이 무리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라파로가 활성화되면 우리 과 인지도가 상당히 높아질 겁니다. 그 다음에는 메이저 수술까지 저절로 늘지 않을까요? 정성호 선생님까지 환자 팍팍 밀어주시면 불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다. 최철한 선생님, 이참에 압력 좀 넣으시죠.”
유석재의 말에 조성민이 한마디 보탰다.
“대구로 가는 환자들만 다 잡아도 꽤 될 겁니다.”
김지훈이 손가락을 튕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평균 여덟 건에 응급 수술까지 더하면 월급값 하고도 남겠네. 최철한 선생님, 선생님 오시기 전에 열심히 달려 보겠습니다. 성민이하고 진우가 이 악물고 열심히 해 주면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 환자가 받쳐 주는 게 관건이네요.”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여덟 건이 생각했던 여덟 건이 아니었다.
하루에 정규 수술만 여덟 건을 목표 삼다니 구미 병원 사정을 생각하면 욕심을 넘어서도 한참 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전공의들까지 은근히 압박하고 있었다.
“선생님, 그게 가능할까요?”
“성민아. 목표는 크고 원대하게 잡아야지. 노력하면 불가능은 없다. 서울에서도 했는데 구미라고 안 될 이유가 없잖아? 진우야, 안 그래?”
“예? 예. 그렇긴 하겠죠.”
뜨뜻미지근한 반응이었지만 어쨌든 즐거운 상상이었다. 하루 네 건 이상이라고 해도 폭주하지 않으면 원하는 일은 다 할 수 있다.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재충전에 필요한 충분한 휴식까지 취할 수 있다.
그보다 이상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유쾌한 시간도 잠시.
부담스러운 수술을 앞두고 있다.
“최철한 선생님, 그럼 다음 수술 최종 점검 할까요?”
몇 번째 반복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제 했는데 또?”
환자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고 본 적도 없는 수술입니다.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료조차 미비해서 불안하네요.”
말과는 달리 김지훈의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
어제 밤, 장 폐쇄 환자 수술에 대해 더욱 깊은 고민을 했는지 예상되는 어려움과 난관, 보다 구체적인 수술 방법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열정적인 목소리였다.
자신이 선택한 수술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자만이 아닌 자신감, 새로운 시도에 대한 각오와 기대까지 서려 있었다. 환자가 당면해야 할 위험과 안전에 대해서도 결코 등한히 하지 않았다.
“조성민, 송진우, 라파로로 장 폐쇄 환자를 수술하기 위해서는 개복 때 직면하는 어려움과 주의할 점을 확실하게 파악해야 하겠지? 뭐가 있어?”
기본이 부족하면 응용은 불가능하다.
이 또한 중요한 교육이었다.
말이 흐릿하거나 놓치는 부분을 지나치지 않았다.
“기본은 이론과 실제를 가리지 않아. 이론이 부족한데 수술을 잘할 수 있겠어? 배를 열고 하는 수술은 기본 중의 기본이야. 손이 안 되면 라파로는 때려 죽어도 못한다.”
불과 10분도 되지 않아 불길과 비수가 난무했다. 얼어붙었던 조성민과 송진우가 하얗게 재로 변했다. 김현철의 몸이 점점 쪼그라들다 못해 책상 밑으로 사라졌다.
한 수술을 두고 세 번이나 토론을 반복했다. 이 정도면 최소한 노력이 부족하다는 말은 듣지 않을 것이다.
어느새 오후 2시가 다가왔다.
이제 수술만 남았다.
“조성민, 송진우, 김현철, 똑바로 하자. 오늘 우리가 토의한 내용은 기본이야 기본.”
김지훈이 탁탁 손뼉을 치며 수술 방으로 향했다. 그 뒤를 후줄근해진 전공의 세 명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전문의 두 명이 뒤따랐다.
‘석재야, 지훈이 보통이 아니다.’
‘그러게요. 아주 하드 트레이닝이네요.’
수술 방 앞에서 보호자를 만나 다시 한 번 상세하게 설명했다. 개복 가능성은 언제든 열려 있지만 최선을 다해 수술하겠다는 말에 자신감이 실려 있었다.
왠지 과장 냄새 정도는 나는 것 같았다.
‘아뻬 환자처럼 미리 겁먹고 불안해 할 필요 없어. 유착된 장을 박리하는 게 다야. 자신감을 갖고 반드시 성공한다는 확신을 가져야 성공할 수 있어.’
이용철 과장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요새는 수술실이 꽉꽉 차네. 장 폐쇄를 라파로로 시도했다는 소리는 어디서도 못 들었는데 성공할 수 있을까?’
상황이 그렇긴 하지만 어제 오늘 연이어 복강경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수술실이 꽉 찼다. 일반외과 6명에 간호사 3명과 자신까지 하면 무려 10명이었다.
수술과 마취에 지장만 없다면 마취과 과장이자 부원장으로서 즐거운 일일 따름이었다.
“2주 만에 일곱 번째 라파로를 하네. 이 추세로 가면 일주일에 10개는 무난하겠어. 김 과장, 마취 시작한다.”
김지훈 목표대로 일주일에 마흔 개 정도 수술하려면 복강경 열 개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최소 두 배는 해야 할 것이다.
꿈같은 일이다.
“첫 시도라니까 우리 마취과도 긴장합시다.”
최철한이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모았다.
문득 오늘 수술의 의미가 얼마나 큰지 다가왔다.
김지훈에게 부담을 줄까 우려해 말은 안 했지만 일이 주 전에 이미 구미 일반외과 사정을 파악했다. 무척 속이 상했다. 하지만 이용철 과장 말대로 이 추세가 지속되고 자신까지 가세한다면 몰라보게 변할 것이다.
대구에서도 어려워하는 수술을 척척 해내는 구미 일반외과, 생각만 해도 벅찬 일이었다.
‘수술 몇 건으로 우리 과에 대한 불신을 단박에 종식시킬 수는 없겠지. 하지만 환자들에게 믿음을 줄 가능성은 훨씬 높아질 거야. 나도 최선을 다해 배울 테니까 김지훈, 꼭 성공하자.’
최철한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며 김지훈을 응원하고 있었다. 혼자 근무해야 할 때의 부담감은 생각할 계제가 아니었다.
오간 말을 알 리 없는 이용철 과장이 힐끗 눈길을 주며 마취를 시작했다. 스르르 눈을 감은 환자가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긴장이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말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수술 준비는 다른 수술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지만 김지훈이 집도의 자리에 서는 순간 아홉 쌍의 눈이 수술 부위에 집중됐다.
궤양 천공으로 수술을 받은 환자다.
첫 수술 시 다행히 배꼽 상방만 열었다.
배꼽과 하부에는 흉이 지지 않았을 테니 장이 달라붙어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방심하면 예기치 못한 문제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
칼을 잡기 전에 긴장부터 유지해야 한다.
“아뻬 환자 때처럼 배꼽 속을 열겁니다.”
이미 고경아와 수술 과정을 충분히 공유했다. 이 간호사 역시 고경아와 함께 대비했을 것이다. 메스가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며 수술이 시작됐다.
배꼽 속을 열고 신중하게 배 속을 확인했다.
절개창 밑으로 들러붙은 장은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넣었다.
첫 번째 관문이다.
소장과 대장이 기존 수술 창을 따라 너무 심하게 달라붙어 있다면 공기조차 넣을 수 없다. 기구 조작이 가능한 공간이 부족해도 시도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모든 경우를 충족해도 집도의의 실력이 뛰어나지 않다면 성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운과 실력이 모두 필요한 상황이었다.
수술 팀의 시선이 일제히 모니터로 향했다.
누군가 꿀꺽 침을 삼켰다.
포셉를 이용해 배꼽 주변을 들어 올렸다.
소장 일부가 딸려 올라오며 카메라를 가렸다.
기존 절개창을 따라 달라붙은 것이다.
조심스럽게 카메라 방향을 바꾸었다.
부종이 동반된 채 빵빵해진 부분과 거의 정상적으로 보이는 부분이 뒤섞여 있었다. 장 폐쇄를 유발한 부위를 기점으로 상부와 하부의 차이였다.
‘정상으로 보이는 부분이 예상외로 많이 보이네. 이 정도면 에어를 넣어도 되겠어.’
조금 더 확인해야 진행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복벽과 카메라 사아의 틈을 단단히 막았다.
“에어 온(on)!”
스위치가 올라갔다.
처컥! 처컥!
규칙적인 기계음을 따라 서서히 복부가 부풀어 올랐다. 유착이 얼마나 심한지 확실하게 알 수 없기에 무작정 공기를 주입할 수는 없었다.
“에어 오프(Off)!”
어느 정도 시야가 확보돼 보다 많은 정보를 얻었다.
다행히 트로카를 넣을 공간이 있었고 복벽에 달라붙은 부위는 대략 10센티미터 정도였다. 유착 부위는 소장의 상부 부분에 국한돼 있었고 어딘가 강하게 조여지고 있는 양상이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예상대로 밴드가 원인일 가능성이 높아. 복벽에 붙은 부분과 유착을 안전하게 해결할 수 있을까?’
부종이 발생한 부분은 염증이 생긴 것과 다름이 없다. 복벽에 달라붙은 부위는 부종이 심하지 않았지만 단단한 흉으로 연결돼 있을 것이다.
쉽게 박리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
탈장과 터진 아뻬를 하며 장을 다뤘던 감각을 떠올렸다. 분명 자신감을 주는 경험이었지만 예전 이경석과 했던 장 폐쇄 수술을 떠올리는 순간 그에 못지않은 불안감이 다가왔다.
과연 손으로도 엄청나게 힘들었던 과정을 기구로 대신할 수 있을까?
갑자기 갈등이 다가왔다.
장 손상을 피할 수 있는 절대적 방법은 없었다. 손으로 수술한다고 해도 말이다. 오로지 기구를 조작하는 집도의의 실력과 경험에 수술의 성패가 좌우되는 상황이었다.
이준영 교수가 있다면 모르지만 지금은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했다. 그에 따르는 책임도 오롯이 집도의의 몫이었다.
모두들 결정을 기다렸다.
‘최선을 다해 준비했고 라파로로 실패한다고 해서 해결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고민하고 있지?’
어떤 일이든 처음이 가장 어렵다. 돌이켜 보면 벌써 첫 시도만 세 번째였다. 위험도가 더 높다고 해서 실패를 예단하고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감을 갖고 시도하자!’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에어 온! 트로카 주세요.”
강한 긴장이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