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또 하나의 벽을 넘다. (1)
김지훈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다행히 복강경으로 끝냈습니다. 맹장이 터졌고 주변에 고름까지 잡혀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것 때문에 며칠 두고 봐야 합니다. 최악의 경우 다시 고름 집이 잡히면 배를 열 수도 있습니다.”
“아이고! 고생하셨습니다. 설마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복강경 수술 잘하신다는 소리 들었는데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딸 바보 아빠는 물론 타박하던 엄마까지 좋아 죽었다. 수술이 잘 끝난 후에만 누릴 수 있는 기쁨이었다. 찜찜함의 이유 중 하나인 시간에 관한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돌아서던 김지훈이 어이없는 듯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야 땀으로 푹 젖은 수술복이 갑갑함을 전했다.
‘서울에서는 이런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라파로를 할 때마다 땀을 쪽 빼네. 하긴 하윤호였으면 개복을 했어도 이것보다 더 걸렸겠지.’
첫 술에 배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의사의 욕심일 수도 있었다. 더구나 이번 경우는 남달랐다. 그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질환을 복강경으로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회복실에 모두 모였다.
“신중하게 결정해야겠지만 염증이 심한 경우나 장에 문제가 생겼을 때도 라파로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전주에 한 탈장과 이번 수술을 통해 많을 것을 배웠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질환을 말하는 거야?”
최철한의 물음에 김지훈이 의외의 대답을 했다.
“정말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경험이 좀 더 쌓이면 담낭농증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담낭농증까지?”
메이저만이 실력을 가늠할 기준이 아니었다. 아뻬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엿볼 수 있다. 더더욱 남들이 어렵다고 혹은 불가하다고 하는 방법이라면 말이다.
김지훈이 어디까지 발전할지 모를 일이었다.
이번은 휴게실 문을 열 수술이 아니었다. 조성민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병실로 올라가는 김지훈의 뒤를 따랐다.
드레싱을 하던 중 터진 보호자의 호들갑스러운 감탄이 터졌다. 카메라를 넣었던 절개창이 배꼽 속에 쏙 들어가 보이지 않은 것이다.
“세 군데라고 들었는데 상처가 두 개밖에 없네요. 그것도 코딱지만 하네. 야! 이걸 어떻게 하신 겁니까?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딸 여기서 수술받기 정말 잘했지? 아빠 말 들어서 손해 볼 거 없다.”
눈가림이라고 해도 확실한 차이였다.
그때 마취 기운이 주는 나른함에 빠져 있던 환자가 몸을 뒤척였다. 수술 직후에는 누구나 조금만 움직여도 아파한다. 그런데 눈가만 살짝 찡그릴 뿐이었다.
“우리 딸 안 아프나? 살살 움직여라.”
“나 하나도 안 아프다. 아빠, 수술 끝났나?”
공교롭게도 통증에 상당히 둔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보호자들의 인사를 한 번 더 받았다. 병실을 나오는 순간까지 아빠의 감탄과 칭찬이 또 따라 붙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찜찜함이 싹 사라졌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던 김지훈의 얼굴이 벌게졌다. 송진우가 곁눈질을 하며 각오를 다졌다.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지만 그래서 더더욱 넘어야 했다.
최철한과 유석재가 왔으니 당연히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응급실에 들른 김지훈이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며 눈가를 좁혔다.
“오하석 선생, 오늘 같은 날은 환자 안 만들어도 돼.”
“무슨 일 있으세요?”
“중요한 분들이 오셔서 삼겹살 먹으러 간다.”
“9시가 넘었는데 이제 가세요? 노력하겠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저도 힘들어요. 삼겹살 먹고 싶어요. 헤헤!”
응급실은 여자 남자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배고프게 만든다. 뭐라도 사달라는 오하석의 간절한 눈빛을 뒤로 하고 김지훈이 손만 흔들었다.
울상 짓는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럴 때 후배 안 챙기면 두고두고 욕먹는다.
“성민아, 응급실에 보쌈이라도 시켜 줘라.”
조성민이 응급실에 전화해 먹고 싶은 것을 시켜 주었다. 정성도 무색하게 앉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삼겹살 특히 진달래 식당 삼겹살은 운이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새를 못 참고 응급실이 아수라장이었다.
청룡 열차가 오르막을 탄 것이 분명했다.
응급실 과장이기에 외면할 수 없었다.
급한 불만 끄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혈복강 환자 한 명에 이어 새벽 1시에 아뻬가 하나 더 떴다.
배가 등짝에 붙은 지 오래였지만 김지훈으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미안한 일이기도 했다.
복강경만이 배워야 할 수술은 아니었다.
최철한과 유석재가 삼겹살은 내일이라도 먹을 수 있지만 수술은 언제 뜰지 모른다며 김지훈의 손에 집중했다. 써전에게는 수술의 경중을 떠나 어떻게 수술하는지도 무척 중요한 문제였다.
조성민도 아쉬운 눈을 하며 약속을 지켰다.
수술은 수술 당직이!
퍼스트에 이어 또 한 번 집도까지 한 송진우는 아예 좋아 죽었다. 물론 2년차의 한계는 바퀴벌레처럼 언제 어디서든 나타난다.
“송진우, 수술 잘하네.”
유석재의 칭찬도 무색하게 수술 후 조용히 문이 닫히고 열렸다. 고구마 하나가 결코 꺼지지 않을 것 같은 불길에 활활 타고 있었다.
음지가 있으면 양지가 있는 법인데 오늘은 유독 음지가 많이 보였다. 수술도 들어오지 않은 놈이 우거지상을 했다. 한 놈은 무조건 추가였다.
‘어후! 하필이면 오프 날.’
조성민이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김현철 역시 연이어 지는 아뻬에 한껏 수술 욕심을 냈지만 1년차는 아직 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만 깨달았다.
김지훈이 곤히 잠든 환자들 사이를 귀신처럼 움직여 수술한 환자를 살폈다. 시간이 너무 늦었다. 내일로 미뤄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최철한이 미소를 머금고 말았다.
자신이 가르쳐 준 일을 교수가 된 지금도 후배들 앞에서 몸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몰라볼 정도로 발전한 실력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실력이든 이론이든 행동이든 기본을 조금도 잊지 않았기에 가능했겠지?’
“역시 김 교수 일복 하나는 끝내주네. 유석재 선생, 오늘 김 교수가 수술 몇 개 했지?”
“우리가 오고 나서 네 개 했네요.”
오자마자 수술실로 향해야 했던 최철한과 유석재의 눈가에 까만 피곤이 내려앉았다. 그만한 즐거움이 따라 붙었다. 밤늦게 전공의들과 함께 먹는 라면은 옛 맛 그대로였다.
김지훈이 어마어마하게 먹어댔다.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악어가 떠오를 지경이었다. 라면 다섯 개도 모자라 밥을 말아 먹는 무시무시한 대식가로서만 말이다.
그렇게 수요일 밤이 지나고 목요일이 왔다.
몇 시간 눈도 붙이지 못했지만 의미가 남다른 정규 수술을 앞에 두었다. 찬물에 세수하고 몸을 정갈히 한 후 탈장과 담낭 절제술을 차례로 시행했다.
풍부한 경험을 가진 수술이다.
능숙하다 못해 마치 손으로 수술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쉽게 끝났다. 응급 수술과는 또 다른 손을 본 최철한과 유석재가 고개를 흔들었다.
“석재야, 어제는 맛보기였나 봐.”
“그러게요. 저 정도 하니까 터진 아뻬를 그렇게 쉽게 했겠죠. 지훈이 가르친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한참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수술을 끝내고 나온 김지훈이 일단 조성민과 면담 한 차례 가졌다. 휴게실이 불타오른 후에야 최철한, 유석재와 함께 인사를 다녔다. 민혁기 원장이 좋아하면서 마지막에 엉뚱한 말을 했다.
“김 과장, 어제도 하고 오늘도 라파로 두 개 했다며? 이 추세면 최철한 선생 올 때쯤이면 둘이 근무해도 월급값 하고도 남겠어. 힘내자. 파이팅!”
정성호 과장은 웃고만 있다 진료실을 나가는 최철한에게 조용히 한마디 했다.
“최철한 선생, 두 달만 같이 근무하지만 김 과장 때문에 긴장해야겠어. 내일 수술까지 하면 이번 주에 라파로만 다섯 개 하는 거지? 참! 혈관도 미리 배워. 결과가 아주 좋아.”
소리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은근한 긴장과 부담을 느낀 최철한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직 제대 날짜가 꽤 남은 유석재도 다를 바 없었다. 아무리 잘났어도 후배인 김지훈 때문에 이런 기분을 느낄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한가한 오후였다.
점심 먹고 잠시 눈을 붙였지만 가시 방석이었다.
시간을 죽이느니 환자를 보는 편이 낫다.
내일 수술할 환자들을 면담하고 마지막으로 장 폐쇄 환자를 보았다. 둘러선 의사들의 눈이 모두 벌겠다. 가장 일이 많은 김현철은 문에 기대 졸고 있었다. 송진우가 툭툭 치며 고갯짓을 했다.
‘빨리 가서 세수하고 와.’
똑같은 몰골로 말이다.
김지훈이 뻑뻑한 눈을 비비며 눈가를 찌푸렸다.
증상이 더 이상 좋아지지 않았다.
복부 사진도 호전되지 않았다.
환자나 의사 모두에게 상당히 답답한 일이었다.
“최철한 선생님, 수술하는 게 좋겠죠?”
“입원한지 5일 됐는데 풀리긴 힘들지. 이러다 나빠지면 결과만 안 좋아질 텐데 내일 하는 게 어때?”
“그게 좋을 것 같네요.”
조성민을 보며 스케줄을 챙기라고 하던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한동안 생각에 잠긴 채 고민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배를 연 것이 원인이지만 배를 열어 수술하는 것 또한 원칙이다. 개복이 반복되면 재발 가능성이 점점 더 높아진다. 일종의 악순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장 유착이 얼마나 발생했을지 모르기 때문에 개복 말고 다른 방식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탈장, 아뻬 환자가 동시에 떠올랐다.
‘라파로로 장 문제를 일정 정도 해결할 수 있었는데 유착된 부분도 박리도 가능할까?’
장끼리 꼬이고 달라붙은 상황은 같지만 원인은 염증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발생한 흉이다. 흉 자체가 상당히 질긴 조직인데다 폐쇄까지 진행된 이상 장은 더 약할 수밖에 없다.
더더욱 큰 문제는 이런 수술을 했다는 보고조차 없다는 사실이었다. 당연히 실제로 본 적은 없었고 대가라 불리는 이준영 교수마저 시도하지 않았던 질환이었다.
수많은 어려움과 위험이 떠올랐지만 배 속을 확인하기 전에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알량한 경험이 다였지만 솔직히 욕심이 났다.
“이 환자도 라파로로 할 수 있을까요?”
최철한이 깜작 놀랐다.
“뭐? 수술 후 발생한 장 폐쇄를 라파로로 한다고? 에어 집어넣다 장이라도 찢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내가 라파로를 잘 모르긴 해도 터진 아뻬하고는 차원이 다르잖아.”
“그렇긴 한데 유착만 심하지 않다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파로로 하면 재발 가능성이 개복보다 현저하게 떨어지는데 아쉽잖아요.”
다들 말이 없다.
장 폐쇄는 분명 복강경 적응증이 아니었다.
누구나 욕심이 지나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무리한 시도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환자를 위한 방법이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통해 실력까지 쌓을 수 있는 기회였다.
김지훈은 고민을 멈추지 않았고 포기하지도 않았다.
갑작스러운 생각이 아니라 환자를 볼 때마다 복강경을 떠올린 것 또한 사실이었다.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정리한 후 결정을 내렸다.
“성민아, 이 환자 내일 라파로로 스케줄 올려. 세트가 세 개 뿐이니까 수술 방에 잘 준비하라고 미리 말해 놔. 회진 끝나고 바로 컨퍼런스하자.”
모두들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무조건 끝까지 라파로로 한다는 소리 아니다. 일단 시도해 보고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배 열거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마. 어후! 배고파. 밥부터 먹자.”
여유인지 태평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제의 기억을 살려 삼겹살은 피했다.
김치찌개에 계란 프라이를 곁들여 밥 말아 먹고 재빨리 내일 있을 수술 준비에 들어갔다. 일종의 강의처럼 김지훈이 주로 설명했다.
장 폐쇄는 무모한 도전일지 몰라도 담낭 절제는 일정 수준 이상에 도달했다. 잠깐 방심했던 조성민이 그야말로 까만 숯으로 변했다. 송진우는 덤이었고 김현철은 보너스였다.
“내일 해야 할 라파로가 세 개다. 내가 구체적인 수술 방법을 묻는 게 아니잖아? 절대 기본을 잊지 마.”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배움의 길이었다.
최철한과 유석재가 웃고 말았다.
결코 전공의들만의 일이 아닐 텐데 말이다.
‘야! 태울 때는 인정사정없구나. 이젠 교수가 맞네. 자식들! 불만 갖지 말고 이럴 때 잘해라. 애정 없으면 태우지도 않는다. 그나저나 장 폐쇄를 라파로로 할 수 있을까?’
김지훈이 나름의 계획을 설명하고 함께 논의하는 사이 시간이 꽤 지났다. 전화는 물론 휴대폰까지 얌전했다.
아차! 실수다.
오하석이 오프다.
그간의 경험을 통계적으로 분석해 볼 때 응급실이 태평성가를 부를 확률이 높아지는 날이었다. 삼겹살로 기름칠해도 시간 넉넉했을 것이다.
“구미 일복은 하석이였구나. 진우야, 네 말 잘 듣던데 우리 상황에 맞춰 당직 세워라. 말 안 들으면 활활 태워. 아니다. 당직이 문제가 아니네. 일 잘하고 수술이나 환자에게 관심도 많으니까 아예 우리 과 시키자.”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
송진우도 모를 리 없고 누구나 맞장구를 치며 웃고 넘어갈 일이었다. 그런데 얼굴이 벌게졌다. 번뜩 뭔가 하나 뇌리를 스쳤는데 희미하기만 했다.
‘이 자식 눈치가 좀 이상하네. 하석이 말만 나오면 더 심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
톡 건드리기만 해도 스스로 불타는 고구마와 약간은 선머슴 같은 오하석과 어울릴까?
생각이 산으로 뻗친 김지훈이 피식 웃으며 자리를 끝냈다. 오래 간만에 만나면 으레 해야 하는 남자들의 일이 빠졌다. 최철한, 유석재와 함께 맥주를 앞에 두었지만 딱 한 잔만 마실 수 있었다.
구미에 온 이후 알코올 섭취를 못했다. 배 속에 든 술 벌레가 아우성을 쳤지만 최철한이 정식으로 근무하기 전까지는 그림의 떡, 아니 그림의 술이었다. 정말 평생 해오지 않았던 짓, 안주 빨만 세웠다.
솔직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직을 떠나 장 폐쇄 수술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그 때문에 보다 많은 대화를 나눠야 했다.
자리가 길어질수록 압박감이 심해졌다.
이럴 때마다 당연히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늦은 밤이지만 이해해 주고도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