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슬슬 낮에도 바빠진다. (2)
집도의의 믿음과 퍼스트의 자신감은 절대적 요소다. 김지훈이 평온하면서도 확고한 신뢰의 눈빛을 보냈다.
‘집중해. 넌 할 수 있어.’
담낭 동맥을 묶는 조성민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숨조차 내쉬지 못했다.
잠시 후 손이 빠져나왔다.
만일을 위해 바짝 긴장한 채 지켜보던 김지훈이 타이를 확인했다. 두꺼운 실이 단단하고 동맥을 묶고 있었다. 안심할 수 있었다.
조용히 다음 과정이 진행됐다.
담낭관 역시 같은 상태에서 자르고 묶었다.
마침내 담낭이 제거됐다.
더 이상의 실수가 없었던 덕에 고경아의 말대로 두 시간 만에 끝났다. 조성민은 수술 내내 초긴장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덧 가운까지 땀에 젖을 정도였다.
아직 남은 과정이 있다.
담도 내 돌을 제거하고 T-tube를 삽입해야 한다.
따르륵! 따가각!
김지훈이 평소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기구들을 능숙하게 사용해 담도 주변을 박리하고 2센티미터 정도 절개했다. 담석으로 인한 담즙 정체로 까맣게 변한 담즙이 흘러나왔다.
“이리게이션. 석션.”
담도 안을 맑은 물로 씻어 내자 담즙과 함께 담석이 쓸려 나왔다. 조성민이 재빨리 석션하며 절개 부위를 노려보았다.
‘동맥 타이할 때와 거의 같은 위치다. 방금 전에 느꼈던 깊이와 감각을 잊지 말아야 해.’
“T-tube 주고 수처 준비합시다.”
어느새 T-tube를 삽입한 김지훈이 슥슥 손을 놀렸다. 모두 네 곳을 수처했다. 좁고 깊은 수술 부위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타이!”
조성민이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넣었다.
김지훈이 최대한 공간을 확보해 주며 조용히 지켜보았다. 강한 긴장 속에 첫 번째 타이가 끝났다. 튜브와 담도 사이가 확실하게 밀착됐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두 번째 타이를 진행했다. 세 번째, 네 번째 타이를 하는 손에서 긴장이 떨어지질 않았다.
‘실수를 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해. 손놀림이 복막염 할 때와 달라진 것 같은데 연습 좀 했나?’
치프라면 보다 능숙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 만족스러웠다. 확신할 수 없어도 노력하고 있다는 티까지 났다. 이대로 쭉 나간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치프의 손을 볼 수도 있다는 기대가 다가왔다.
수술 부위를 마무리했다.
담낭농증에 준할 정도로 염증이 심했는데 상당히 깔끔하게 끝났다. 퍼스트의 노력 덕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드레인을 넣은 김지훈이 장갑을 벗으며 눈짓을 했다.
“조성민, 마무리해.”
퍼스트로서 첫 마무리였다.
실을 끊어먹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에 조성민이 훅 숨을 내쉬었다. 한 바늘 한 바늘 정성스럽게 수처했다.
이제야 리트랙터 대신 타이를 하게 된 송진우도 여간 신경 쓰는 것이 아니었다. 절개창이 불과 10센티미터도 안 된다는 것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치프에다 2년차나 된 놈들이 말이다.
“컷!”
담낭농증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전공의와 김지훈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말이 터져 나왔다. 수술실에서 나가는 김지훈을 보던 이용철 과장이 소리 내 웃고 말았다. 수고하셨다는 말에 즐거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야! 집도의 손도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열고 담낭농증을 수술해? T-tube는 또 어떻게 넣은 거야? 고 간호사하고 우리 이 간호사 어시스트도 대단해. 고 간호사, 내가 또 놀랄 일이 있을까?”
고경아가 좋아 죽었다.
“글쎄요.”
“볼 게 아직 많이 남았다는 소리 같네. 아! 우리 와이프가 오늘 저녁 같이 먹자네. 김 과장하고 같이 건너와요. 지난번처럼 과일 사 오지 말고.”
“어머! 또요? 매번 폐를 끼쳐서 어떻게 해요?”
“괜찮아요. 김 과장하고 나하고 형 동생인데 어때? 우리 와이프하고 애들이 더 좋아해.”
같은 관사에 살고 있는 덕도 있지만 김지훈과 고경아를 살뜰하게 챙기고 아껴 주는 이용철 과장 부부였다. 정리를 하던 이 간호사가 입을 쏙 내밀었다.
뾰족한 목소리가 터졌다.
“쌤, 우리는요?”
“툭하면 쌤이라고 부르면서 뭘 바라? 성민아, 너도 치프 맞긴 맞구나. 중간에 타이 한 번 끊어 먹어서 그렇지 처음 하는 수술인데 김 과장이 한 마디도 안 하네.”
조성민도 은근히 우쭐거렸다. 혈관 수술 때와 달리 모든 타이를 맡겼고 마무리까지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송진우가 남몰래 입맛을 다시며 한숨을 쉬었다.
‘아직 안심하기는 이릅니다.’
그렇다.
큰소리 났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바로 호출이다.
조용히 휴게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조성민, 너 치프 맞아? 조금 있으면 4년차 되는 놈이 잡생각을 해? 한 번만 더 수술 중에 집중력 잃으면 그냥 안 지나간다. 알았어?”
정말 화가 난 것 같았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 중 가장 강도가 강했다.
화르륵 치솟은 불길 사이로 차가운 비수까지 날았다. 단 몇 마디에 허옇게 탈색된 조성민이 덜덜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간신히 빠져나왔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송진우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조성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긴 것 같더니 갑자기 웃었다.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아니면 이력이 생긴 것일 지도 몰랐다.
“왜 그러세요?”
“진우야, 혼나긴 혼났는데 내가 걱정했던 일이 아니었어. 타이 끊어 먹은 건 한 마디도 안 하시고 집중력 잃은 것만 말씀하시네. 이거 내가 타이 정도는 잘하고 있다는 말 아니야?”
1년차도 아니고 치프가 타이는 인정받았다며 좋아했다. 긴장 풀리면 언제든 탈 수 있는데 큰일이었다. 송진우가 우려 섞인 표정을 짓자 조성민이 어깨를 탁탁 쳤다.
“걱정 마, 인마. 연습과 노력의 힘이라는 거 잘 알고 있어. 뭐해? 김지훈 선생님 병실 가시기 전에 빨리 올라가자.”
불과 1주일이 조금 넘었는데 슬슬 틀이 잡혀 가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능력을 가진 김지훈, 최고의 열정을 가진 송진우와 함께 고민하고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외래로 내려온 김지훈이 표정 관리에 애를 먹었다.
담석증 환자와 탈장 환자가 모두 입원했다.
목요일에 복강경만 두 건 예약이었다.
드디어 복강경을 정규 수술로 하게 됐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할 정도였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은근한 흥분을 즐기던 김지훈이 귀를 쫑긋거렸다.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이젠 익숙해진 외래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컨설트?
“조성민 선생님, 내과에서 담석증 환자 컨설트 왔어요. 2명이고 빨리 봐 달래요.”
예감 적중이다.
그것도 담석증 환자 두 명이었다.
‘보낼 환자 없다고 그러시더니 빨리 봐 달라고?’
의문도 잠시 김지훈이 그대로 튀어 나갔다.
마침 내과 외래가 한산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또 인사를 왔어? 이거 참!’
이번에도 어김없이 캔 커피 하나가 들려 있었다. 정성호 과장이 살짝 반가운 티를 내다 말고 헛기침을 했다. 캔 커피를 슬그머니 책상 뒤로 감췄다. 김지훈이 올 때마다 마셨다가는 날밤을 새거나 토하거나 둘 중의 하나는 감수해야 할 지경이었다.
“뭐가 감사해? 컨설트 말하는 거야? 감사할 일이 아니지. 그건 그렇고 목요일에 할 수 있을까? 환자들이 이왕 수술 받는데 빨리 해 달라고 재촉을 하네.”
“목요일이요? 라파로를 원하시는 거죠?”
이미 두 건이 예약돼 있다.
서울이었다면 별 문제없이 진행하겠지만 구미다. 더구나 최대 제약은 시간이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라파로 기구 세트가 달랑 세 개였다.
‘한 세트 정도는 만일을 대비해 남겨 놔야 하잖아. 그리고 성민이와 현철이를 생각하면······.“
정성호 과장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무슨 문제 있어?”
“목요일에 담석증과 탈장 환자 두 건이 이미 라파로로 예약돼 있습니다. 세트가 부족하기도 하고 전공의 트레이닝을 생각하면 하루에 몰아 하는 것보다 나눠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환자 분들과 잘 얘기해서 금요일에 수술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상당히 놀라는 눈치였다.
‘벌써 외래에서 라파로를 잡았어? 그럼 이번 주에 네 건을 하는 건가? 이 과장이 없는 소리를 한 건 아니었네.’
“죄송할 것까지는 없지. 날짜야 집도하는 사람이 정하는 거잖아. 환자 분들한테만 말 잘해 줘. 생각보다 수술 많이 하네. 고마워.”
“예. 가 보겠습니다.”
입이 찢어진 채 돌아서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고맙다고 하신 거 맞지?’
한마디 말에 불과했지만 정성호 과장의 입이다. 드디어 신뢰를 받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료에게조차 믿음을 얻지 못하면 환자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일 것이다.
기분 좋은 시작이었다.
진료실로 돌아가 조성민의 노티를 기다리며 석사 논문을 뒤적거렸다. 자꾸 시계에 눈이 가 집중이 안 되는 참에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샘, 전화 왔어요.”
“전화? 누구에요?”
“유석재라는 분인데요.”
‘헉! 유석재 선생님이?’
한 번 선배는 영원한 선배이자 하느님과 동기 동창이다. 유석재나 최철한 앞에서는 언제나 인턴 막 마친 전공의 후배일지도 몰랐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미 전화기를 잡고 있었다. 전화를 돌리면 되는데 직접 달려와 받는 모습에 간호사가 꽤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세까지 빳빳했다.
‘되게 중요한 사람인 모양이네. 내가 뭐 실수한 건 없나?’
쓸데없는 걱정까지 했다.
“선생님, 김지훈입니다.”
(잘 지내지? 별일 없어?)
“환자가 없어서 죽겠습니다.”
웃음소리가 들렸다.
(김 교수하면 일복인데 엄살은. 혼자 근무해서 많이 힘들지? 미안해.)
“진짜 환자 없다니까요.”
(정말이야? 그러면 안 되는데. 내일 밤에 최철한 선생님하고 같이 내려가기로 했거든. 우리 둘 다 어렵게 휴가 받았는데 그 정도로 수술이 없어?)
무조건 반가운 일이었다.
게다가 내일 밤이 지나면 목금이다.
다행히 체면치레는 했다.
아니, 월급값 하고 있는 걸까?
“그건 아니고요. 목요일에 라파로 두 건 있고 금요일에도 잘 하면 두 건 있을 것 같습니다.”
김지훈의 목소리는 반가움에 방 떴는데 유석재는 말이 없었다. 나직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김 교수, 목금에 라파로만 네 건을 하면서 수술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해? 역시 가자마자 칼바람 날리고 있구나. 한 건도 없다는 줄 알고 걱정했잖아. 잘됐다. 내일 저녁에 보자.)
전화를 끊은 김지훈이 멍청히 천장을 보았다.
구미 과장들을 비롯해 유석재의 눈에는 결코 수술 건수가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너무 적다고 느끼는 것은 서울에서 수술을 너무 많이 한 탓일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아니다. 정규 수술만 일주일에 최소 20건 이상은 해야 돼. 응급이야 어쩔 수 없지만 정규 수술을 늘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꿈은 크고 야무지게 가질 일이었다. 하지만 인력으로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다. 지금까지 해 온 대로 최선을 다하며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구미 병원이 태생적으로 가진 한계를 의사 한 명의 힘으로 극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주어진 일부터.’
손뼉을 딱딱 치며 각오를 다지는 사이 조성민이 들어와 노티를 했다. 병실로 향하는 김지훈의 뒷모습을 보던 송진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따라 힘이 더 넘치시는 것 같네.’
그 때문일까?
김지훈이 자신감을 갖고 환자에게 정공법으로 다가갔다. 자신감 있는 말투와 태도로 수술 필요성과 방법을 설명했다. 목요일에는 이미 예약이 잡혀 금요일에나 가능하다는 말도 한몫했다.
“오늘 아침에 과장님이 원하면 언제든 수술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서울에서 유명한 복강경 전문 의사이라고 하더니 정말인갑네.”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대구에서나 하는 수술을 척척 하다니 참 대단한 사람이네. 이리 되면 우리 운 좋은 거 아니가?”
“하모. 그런 것 같다.”
날짜를 받아든 환자들이 수술이 주는 불안과 동시에 집도의가 주는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김지훈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복강경 수술만 네 건이다.
100퍼센트 성공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수술 팀 전체가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실패하는 수술이 생길 수도 있었다.
즉시 소집이다.
비디오테이프가 돌았다. 김지훈의 입이 열릴 때마다 흠칫 놀라며 자료를 뒤지느라 여념이 없었다. 최선을 다했건만, 틈틈이 준비까지 했건만 아무도 불길과 비수를 막지 못했다.
“눈앞에 닥쳐서야 땀 흘리지 말고 너희들끼리 준비할 때 땀을 흘려. 내가 라파로 때문에 구미 온 거 빤히 알면서 이 정도밖에 못해?”
대꾸할 말이 없었다.
김지훈이 일과 중에도 모자라 일과 후에도 혹독하게 밀어붙였다. 외래 환자도 없고 응급실까지 조용해 꽤 시간이 지나고서야 이론 준비가 끝났다.
조성민과 김현철이 그대로 무너졌다. 이젠 숙달이 되고도 남은 송진우가 자료를 정리하며 묵묵히 생각에 잠겼을 뿐이었다.
그렇게 바쁜 하루가 지나갔다.
딱 김지훈이 숙소에서 나올 때까지였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낮 동안에는 제법 이리저리 뛰어 다녔는데 매우 편안한 화요일 밤이 지났다.
다음 날.
응급실 보고를 받던 김지훈이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하루하루 롤러코스트를 타고 있었다. 다른 과 환자도 많지 않았지만 일반외과 환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에 입이 썼다.
“하석아, 환자 좀 만들어 와라.”
“제가요?”
“어제 오프였지? 네가 당직 안 서니까 환자 씨가 말랐잖아. 우리 전공의하고 내 힘으로는 안 될 것 같다. 너라면 될 것 같은데 어때”
“연짱 당직은 어렵고요. 근무할 때는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보겠습니다. 헤헤!”
‘참 잘 웃네. 설마 환자 앞에서 눈치 없이 웃는 건 아니겠지. 하긴 그랬으면 큰소리 몇 번 나와도 벌써 나왔겠지.’
언제 들어도 이상하게 밉지 않은 웃음소리였다.
오하석의 웃음을 위안 삼고 회진을 돌았다. 이틀 밤 내리 잘 잔 조성민과 김현철이 뽀송뽀송했다. 송진우의 얼굴에서는 왜 피곤이 떨어지지 않는지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