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조금씩 영역을 넓히자. (2)
상의하고 자시고 할 일이 아니었다.
수술 팀의 전체적인 능력이 떨어지면 집도의가 아무리 뛰어나도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걱정이 태산이었던 전공의 입장에서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대신 쉴 틈조차 없을 것이다.
“내일 치질 수술부터 준비하자. 교과서 말고는 자료가 없고 그나마 설명도 몇 줄 안 되니까 내가 말로 설명하는 게 좋겠다.”
“지금이요?”
“그럼 내일이 수술인데 언제 해?”
‘어휴! 깜박이는 절대 안 키시네.’
치질이라는 질환과 전통적 수술법은 똑바른 길 위에 놓인 기본이다. 직진하면서 깜박이 킬 이유가 없다. 김지훈은 달리고 싶을 뿐이었다.
불과 얼음, 비수는 당연히 따라오는 덤이다.
난이도에 따라 연차별로 차례차례 무너졌다.
“가장 기본적인 질환도 제대로 모르면 어떻게 해? 개인 과외라도 할까? 이론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기술자 되는 거야. 조성민, 송진우, 김현철, 똑바로 하자.”
평소에 자주 볼 수 있는 질환이기에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는 사실은 이유가 되지 않았다.
여기까지만 그렇다.
고무 밴드와 경화제를 이용한 방법은 김지훈에게도 생소했다. 누굴 태울 처지가 아니었다. 다행히 가르치면서 배운다더니 다소 모호했던 부분이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문이 따르는 과정은 김지훈도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차근차근 설명해 가던 김지훈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뭔가 말이 꼬이는 것 같은 느낌이 다가왔다. 이대로 가면 가르치기는커녕 잘못된 지식을 줄지도 몰랐다.
큰 스승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배움에는 창피함이나 체면이 없다고 했다.
전공의 앞이라고 가린다면 그게 더 창피한 일이었다. 의문 나는 점을 정리하고 홍재순과 통화했다. 항문 쪽 수술은 정말 많은 경험을 쌓은 것이 분명했다. 술술술 의문을 풀어 주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또 연락 드려도 되죠?”
(대학 교수가 가르쳐 달라는데 어떻게 거절을 해? 나한테도 영광이다.)
저절로 얼굴이 뻘게졌다. 함께 배운다는 마음으로 전공의들과 머리를 맞댔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마지막 정리를 하고 숙소를 나왔다.
조성민이 홱 고개를 돌리며 송진우를 보았다.
눈이 쫙 찢어졌다.
“진우야? 수술 전에 이론 부족하면 죽는다고 하지 않았어? 전반전은 몰라도 후반전에는 분위기 너무 좋잖아? 치질이라서 그런가?”
“그러게요. 시간이 촉박해서 그러실지도······.”
송진우가 김지훈 대변인도 아니고 사사건건 시시콜콜 모두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송진우가 손가락을 튕겼다.
다른 이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선생님, 김지훈 선생님도 우리하고 토론하면서 같이 배운 것 같지 않으세요? 내가 교수였으면 창피해서라도 전공의 앞에서 다른 선생님에게 연락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이게 정말 배워야 할 자세였네요.”
“설마 치질인데 그럴 리가 있어? 확인하는 차원이겠지.”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다.
노력만큼 필요한 것이 올바른 자세다.
송진우는 수술 경험이나 실력만큼 소중한 것을 또 하나 배우고 있었다. 바른 마음가짐을 갖는다면 단 한 번의 수술에서도 수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진우야, 그건 그렇다고 치고 치질 수술 경험이 많지 않다는 말인데 해바라기 수술을 잘 하실 수 있을까? 전에 한 번 피가 멎질 않아서 난리 났었거든. 게다가 처음 시도하는 방법이라고 하셨잖아?”
“생각해 보니까 저도 치질 수술하시는 걸 본 적이 없네요. 어후! 우리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시겠네요.”
송진우가 있는 자료, 없는 자료를 모두 긁어모았다.
개인 병원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시행되는 수술이 치질이다. 전신마취가 필요 없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만큼 간단하고 쉽게 할 수 있다는 요인도 컸다.
김지훈도 그 점을 믿는 걸까?
그날 밤, 일이 있어 외래에 들린 조성민이 입술을 모았다. 진료 책상 한구석에 치질 수술에 관한 자료와 김지훈이 작성한 수술 노트가 쌓여 있었다.
빼곡한 글과 그림에서 김지훈의 노력이 엿보였다.
‘처음 하는 수술이라 이렇게 준비하시는 걸까? 아니지. 그래도 우리보다는 훨씬 더 많이 아시잖아.’
이제야 송진우의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그 시간 내일 수술로 고민에 잠겼던 김지훈이 눈살을 찡그렸다. 밤 12시가 넘도록 전화 한 통 없었다. 오하석의 전화에 한 시간 정도 송진우와 김현철이 불려가긴 했지만 일반외과와 상관없는 환자였다.
김지훈이 고경아와 늦은 밤까지 깨를 털면서도 은근한 불안을 느꼈다. 환자가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온탕 냉탕을 오가서 그런지 과장이라는 책임 때문에 그런지 알 수 없었다.
화요일 아침, 치질 수술 직전이다.
김지훈이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치질 수술 경험이 가장 적다. 개인 병원에서 많이 하는 수술이라고 해도 자신감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수술 방에 교과서와 자료를 들고 오기는 오래 간만이었다.
홍재순과 함께 했던 응급 치질 수술이 떠올랐다.
흥건한 피, 확보되지 않는 시야.
‘환자와 내게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혹시 구미 병원이란 특수성과 실적에 무리한 욕심을 낸 건 아닐까?’
어제 밤부터 해 온 고민이었다.
문득 교과서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General Surgery.
농담 혹은 진심으로 G를 Great라고 하지만 결국 전반적인 분야를 모두 다루는 과, General이 바로 일반외과다. 세부 전공이 확립된 대학 병원을 제외한 모든 병원에서 한두 명의 의사가 다양한 수술을 시행한다.
‘세부 전공만을 따진다면 아뻬나 탈장도 마찬가지겠지. 원칙을 지키면 어떤 수술도 다르지 않아. 최선을 다해 준비했으니까 자신감을 갖고 하자.’
치질이 가져온 새삼스러운 생각에 빠졌던 김지훈이 수술실로 향했다. 수술복까지 입었던 김현철이 아침부터 응급실 콜을 받았다. 조성민에게 조용히 노티하고 수술 방을 나갔다.
곧 척추 마취를 하고 환자 자세를 잡았다.
항문이 온통 치질로 뒤덮인 해바라기다.
칼을 대면 만신창이가 될 상황이다.
‘후우! 험악하네.’
밴드와 경화제가 확실하면서도 쉽다고 했지만 여기저기 잘못 건드리면 똑같은 결과가 초래될 수 있었다. 간단한 대신 정확하지 않으면 100퍼센트 재발할 것이다.
김지훈이 말없이 병변을 바라보았다.
조성민과 송진우가 꿀꺽 침을 삼켰다.
탈의실을 같이 사용하는 탓에 못 볼 것을 봤다.
‘교과서까지 들고 오실 줄은 몰랐네.’
전공의로서 얼굴 벌게지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한 김지훈이 섣불리 손을 내밀지 못했다. 어제의 걱정이 되살아났다. 생명에 지장 없는 수술이라지만 제대로 하지 못하면 큰 불편을 초래한다. 도리어 이런 수술을 하고 항의와 불만에 직면하는 경우가 더 많다.
다소 시간이 지난 후에야 수술이 시작됐다.
“리트랙터.”
항문이 넓게 벌려졌다.
치질덩어리가 스르륵 밀려나왔다.
해바라기답게 항문 주위가 온통 치질덩어리였다.
그 하나하나에 치질의 원인인 크게 확장된 정맥이 숨어 있다. 점막은 쉽게 찢어지고 덩달아 그 속에 숨은 정맥도 쉽게 터진다. 줄줄 흘러나온 피로 가뜩이나 좁은 시야가 더욱 좁아질 것이다.
절대 만만하게 볼 상황이 아니었다.
‘손을 대야 할 부분이 모두 일곱 군데. 핵심은 세 군데.’
무사히 끝낼 수 있을까?
“포셉. 모스키토.”
3시, 7시, 11시 방향.
치질 호발 부위이자 핵심 원인인 확장된 정맥이 위치하기에 반드시 처리해야 할 부분이다.
3시 방향에 위치한 덩어리 하나를 잡았다.
너무 얕게 잡으면 정맥을 놓친다. 반면 너무 깊게 잡으면 주변 조직 괴사가 일어난다. 홍재순 말로는 1센티미터 정도 당겨 밴드로 묶으면 된다고 했다.
확신이 필요했다.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었다.
“조성민, 보비 준비해.”
살짝 점막을 열었다.
상의했던 수술법이 아닌데다 검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나오자 조성민이 흠칫 놀랐다.
송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 말씀도 없이 수술법을 바꾸시진 않을 텐데.’
“보비.”
출혈 부위를 잡은 포셉에 보비를 가져갔다.
따닥!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점막이 하얗게 익었다.
모스키토로 살살 점막 아래를 헤치자 굵은 정맥이 보였다. 이리저리 고개를 움직이며 정맥 위치를 확인한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홍재순에게 들었던 말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을 갖고 과감하게 진행해야 한다.
김지훈이 손을 내밀었다.
“수처. 밴드.”
절개했던 점막을 한 바늘 뜬 후 정맥을 포함해 살짝 잡아 당겼다. 기구 끝에 물린 고무 밴드를 활짝 벌려 치질덩어리 위에 위치시켰다.
정맥이 있는 부위까지 밴드를 밀어 넣었다.
기구에 가했던 힘을 서서히 풀자 밴드가 튕겨 나갔다. 정맥이 포함된 점막을 움켜잡는 것처럼 꽉 조였다. 밴드로 혈루가 차단된 치질덩어리는 서서히 녹아 없어질 것이다.
불안을 느낄 틈이 없을 정도로 간단했다.
일단 하나 처리했다.
7시, 11시 방향의 치질덩어리를 동일한 방법으로 처리했다. 리트렉터에 가해지는 힘을 줄이자 밴드 세 개가 항문 깊숙한 곳으로 밀려 들어갔다.
‘생각보다 훨씬 간단하네.’
남은 덩어리는 네 개다.
“경화제 주세요.”
정맥이 있는 부분까지 바늘을 찔러 넣었다. 끈적끈적한 경화제를 주입했다. 점막 일부분이 미세하게 부풀어 올랐다. 시간이 지나 경화제가 굳으면 정맥을 압박해 확장을 막을 것이다.
세 번 더 찔렀다.
쉽다고 생각하면서도 은근히 땀이 났다.
수술 후 결과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혈전이 발생한 부분만 남았다.
가장 간단했다.
점막을 열어 혈전을 제거하고 출혈을 제어한 후 한두 바늘 꿰매는 것으로 충분했다. 순조로운 진행에 타이하는 조성민의 긴장이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마지막 수처를 한 김지훈이 힐끗 시계를 보았다.
불과 한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칼을 댔다면 어림도 없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끝내면 되는 건가? 너무 간단하니까 어안이 벙벙하네. 한 번 더 확인하고 끝내자.’
“리트랙터.”
항문을 벌려 점막 손상이나 출혈 부위가 있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마치 수술을 안 한 것처럼 언뜻 밴드 세 개와 실매듭만 보였다.
마지막으로 수술 부위를 세척하고 끝냈다.
김지훈이 환자 상태를 살핀 후 보호자를 찾았다. 척추 마취기에 굳이 이용철 과장을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설명하고 올게.”
다들 멍한 얼굴이었다.
정말 수술이 끝난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까지 지었다. 기존에 흔히 보던 수술법이 아니라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민했는데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끝난 것이다.
“진우야,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이냐?”
“글쎄요. 너무 쉽게 하시네요.”
다른 방에서 마취를 주관하던 이용철 과장이 들어왔다. 조성민과 항문에 거즈를 대는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요란한 눈짓을 하며 물었다.
“성민아, 이런 수술 처음 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게 들었는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용철 과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야! 김 과장, 손 하나는 정말 끝내주네. 환자 분, 수술 정말 잘 끝났네요. 척추 마취 했으니까 내일 아침까지 꼼짝하지 말고 누워 있어야 합니다. 일어나 움직이면 머리 무지하게 아파질 수 있어요. 아셨죠?”
진정제에 잠깐 잠이 들었던 환자가 눈만 껌벅거렸다.
“성민아, 환자 옮겨. 척추 마취 부작용 다시 한 번 설명해야 한다.”
“예, 선생님.”
설명을 마치고 들어온 김지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특별히 지적할 일이 없었고 도리어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새로운 방법과 기존 방법의 새로운 적용.
의사는 사람의 목숨과 육체의 기능을 다룬다. 따라서 안전을 확신할 수 없는 수술 방법은 수용하기 힘들다. 하지만 변화에 둔감하거나 무작정 거부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었다. 때로는 선도적 위치에 서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대학 병원 교수라면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되겠지.’
곰곰이 고민에 잠긴 김지훈이 환자를 살피고는 조성민에게 눈길을 주었다. 예외는 없을 것이란 생각에 긴장하고 있던 조성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자 옮기자.”
예외는 어디에나 있는 모양이었다.
조성민이 내심 만세를 외치는 순간 김현철이 덧 가운을 입고 들어왔다. 우상복부의 심한 복통과 고열 및 오한을 주소로 내원한 환자가 있다는 노티를 했다.
“개인 병원에 들렀다가 바로 전원된 환자입니다.”
“임프레션(Impression:가진단)이 뭐야?”
“담낭염이 의심되는데 증상이 너무 심해서 담낭농증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일단 초음파 예약했습니다.”
“알았어. 바로 내려갈게.”
두 번째 주, 화요일 오전이 심상치 않았다.
이용철 과장이 수술 스케줄을 보며 말했다.
“성민아, 오후에 정형외과에서 양방 달라고 했다. 빨리 가서 확인하고 수술해야 할 환자면 바로 노티하고 스케줄 내. 담낭농증인데 뒤로 밀리면 김 과장 얼굴 안 좋아질 거야. 내 감을 믿어.”
“예. 선생님. 진우야, 이거 어떻게 하지?”
이제는 어떤 일이든 조금이라도 의심쩍으면 송진우에게 물어보는 조성민이었다. 치프 체면이나 자존심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방사선과 과장님께 직접 부탁해서 초음파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다른 검사 결과도 직접 챙기겠습니다.”
송진우가 헐레벌떡 응급실로 달려갔다.
서울에서는 이런 일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응급실에 환자가 있다는 말을 들은 김지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담낭염이 의심된단 말이지. 환자가 늘 징조일까’
복강경 수술을 할지 모른다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다. 구미 병원에 와 첫 번째 하는 담낭 절제 수술이 될 수도 있었다. 더구나 주 종목이다.
정화수 앞에 놓고 빌지는 못해도 정성이 필요했다.
꼼꼼히 옷매무새를 살피고 응급실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