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조금씩 영역을 넓히자. (1)
전적으로 김지훈 때문은 아니겠지만 전주와 비교도 하기 힘들 정도로 환자가 많이 왔다. 그러나 김지훈 입장에서는 도긴개긴이었다.
100퍼센트 증가하면 뭐할까?
1에서 2로 증가한 것과 100에서 200으로 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김지훈이 태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조성민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제 시작인데 너무 좋아하시네.”
‘시작? 이게? 아주 우리가 죽길 바라시나?’
민혁기 원장은 그저 좋아 죽었다.
“주말에 고생 많이 했구나. 우리 간호사들 힘들었지?”
“그럼요. 원장님, 힘들어 죽겠어요. 맛있는 거 많이 사 주세요. 월급도 올려 주시고요, 일반외과 샘들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우리 다 쓰러졌을 거예요.”
“월급? 흠흠! 맛있는 거 많이 사 줄게.”
민혁기 원장이 조성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누구 할 것 없이 피곤이 꺼멓게 내려앉아 있었다. 전공의와 간호사들의 열악한 처우를 생각하면 미안하지만 흐뭇함 또한 솔직한 마음이었다.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김지훈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일만 열심히 해 오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과장이라는 직분 때문인지 전공의들의 모습이 다르게 보였다.
‘월급! 배우는 과정이라지만 합당한 대우를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그렇게 생활했다고 후배들도 똑같이 대우 받아야 한다는 건 아니잖아?’
문득 20만 원이 조금 넘었던 월급이 떠오르며 마음이 심란해졌다. 과장이나 교수가 결정할 부분도 아니었다. 어쨌든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응급실 상황도 불과 3일 간 벌어진 일이었고 앞으로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물론 민혁기 원장 입장은 또 달랐다.
운영을 책임지는 사람 입장에서는 바람직한 일이었다. 과장 회의에서 여실하게 드러났다. 덩달아 바빠진 각 과 과장들에게까지 고마움을 표했다.
다들 그 이유를 모를 수는 없었다.
성과 여부를 떠나 새로운 변화의 중심에 김지훈과 일반외과 전공의가 있었다. 환자를 끌어모으지는 못해도 언제든 빠르게 대처하고 치료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춰 가고 있었다.
더 이상 미운 오리 새끼만은 아니었다.
“김지훈 선생, 수고했어. 다들 수고했어요.”
쑥스러움을 뒤로 하고 외래에 들어서는 순간 반가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샘, 오늘 11시에 두 분 예약됐어요.”
드디어 외래 진료가 예약됐다. 2년 전 첫 외래 진료가 떠오를 정도로 기뻤다. 간호사도 마치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하긴 하루 종일 탱자탱자 노는 것도 눈치 보이는 일일 것이다.
“샘, 근데 너무 피곤해 보이세요. 제가 연락드릴 테니까 회진 도시고 잠깐이라도 주무시고 오세요.”
전임 과장과 너무 차이가 나는 모양이었다.
“자라고요? 하하하! 괜찮습니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김지훈이 회진을 돈 후 전화기에 매달렸다. 먼저 할 일이 있었다. 치질 환자 수술 방법 때문이기도 했지만 겸사겸사 홍재순의 목소리도 듣고 싶었다.
‘항문 쪽은 개인 병원이 훨씬 더 빠르게 발전한다는데 새로운 방법이 있을까?’
월요일은 어디나 바쁘다.
간곡한 부탁 끝에 홍재순과 통화할 수 있었다.
(김지훈 선생? 야! 이게 얼마만이야. 간다 간다하면서 연락도 제대로 못했네. 송재덕 선생님과 과장님과는 가끔 통화했어. 다들 잘 지냈지?)
무척 반가워했다.
“아닙니다. 제가 먼저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 구미 내려와 있어요.”
(구미? 거긴 왜?)
사정을 설명하자 홍재순이 크게 웃었다.
(그런 상황이면 당장 가야지. 역시 우리 김지훈 선생이 제일 믿음직해. 멋있다. 일복 터지는 사람인데 환자 많지?)
“하루 종일 놉니다. 선생님,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
치질 환자를 설명하자 홍재순의 입이 쉬질 않았다.
역시 이론의 대가다.
지금은 대장 항문 병원의 원장이니 실전에서도 대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다양한 수술법을 설명하고는 한 가지를 강력하게 추천했다.
(해바라기라고 해도 세 군데만 확실하게 잡으면 되는 거 잘 알잖아. 밴드로 잡아 주기만 해도 곧 좋아 질 거야. 자잘한 거는 경화제만 주입해도 돼. 무리해서 칼 댈 필요 없어. 수술하는 사람이나 환자만 힘들다.)
칼을 대 치질 덩어리 전체를 제거하는 전통적인 수술법과는 비교도 하기 힘들 정도로 간단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가장 경험이 적은 분야가 항문이었다. 머릿속에서 그려질 때까지 최대한 자세하게 물었다.
“밴드나 경화제는 예전에도 있었지만 이런 경우에는 재발 위험이 크다고 적용하지 않았잖아요. 결과는 확실하게 괜찮은 거죠?”
(김 교수, 트렌드가 바뀌고 있어. 걱정하지 마. 난 이틀 정도 보는데 불안하면 삼사 일정도 지켜보고 퇴원시키면 돼.)
옛 방법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통화를 하는 사이 11시가 다됐다.
언제 시간 내 술 한잔 하자는 말로 통화를 끝냈다.
목소리가 너무 좋았고 수술도 상당히 많이 한다는 말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대학 병원 교수든 개인 병원 원장이든 앞만 보고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간다면 후회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잠시 추억에 잠겼던 김지훈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구미에 와 사실상 첫 외래 진료인데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이 중요했다.
담석증 환자다.
드디어 전공 환자가 왔다. 반색하는 김지훈과는 달리 환자의 눈초리가 이상했다. 기대와 상당히 다르다는 것 같았다. 역시 경험이 부족해 보이는 나이가 문제일 것이다.
“복강경으로 하길 원하신다고요?”
“예. 돌이 크고 여러 개라서 아프기 전에 빨리 하는 게 좋다 카네요. 대구로 갈까 했는데 유명하신 분이 오셨다고 해서 상의하러 왔습니다. 가장 빠르게 하면 언제 할 수 있겠습니까?”
진료하는 김에 물어보는 눈치였다.
“바로 입원하시면 기본 검사 시간까지 고려해서 수요일에도 가능합니다. 아직은 수술이 많지 않아서요.”
“그래요?”
환자가 살짝 놀란 눈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수술이 적다고 말하는 의사는 없다.
경험이 부족하다는 소리일 수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보여 절대 도움 될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조급함보다는 여유가 느껴졌다. 수많은 경험에서 절로 우러나오는 자신감과 태연을 가장하는 것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었다.
도리어 그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 잠시 고민하던 환자가 빠르게 결정을 내였다. 성격이 꽤 급한지 화요일에 입원하고 목요일에 수술 받기를 원했다.
마다할 일이 없었다.
“좋습니다. 내일 입원하시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시작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다음 환자는 탈장 환자였다.
입도 열기 전에 복강경 수술을 먼저 말했다.
이번 경우는 확실히 의외였다.
“전 주에 수술한 환자 있지요? 그노마가 나랑 상당히 친합니다. 하나도 안 아프다고 니캉 내캉 찾으면서 이참에 수술하는 게 마음 편할 끼라고 하네요. 그게 정말 좋겠습니까?”
“탈장 부위부터 볼까요?”
꼼꼼하게 진찰하고 수술 방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원칙대로 당장 급한 것은 아니지만 최대한 빨리 하는 것이 불편과 합병증을 막는 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일주일이면 퇴원할 수 있습니까?”
“복강경으로 하면 삼사 일 내에 가능합니다. 지금 수술하신 분은 장 문제가 겹쳐 오래 계실 수밖에 없습니다.”
환자가 깜짝 놀랐다.
“그래요? 세상 마이 좋아졌네. 알겠습니다. 하루 이틀만 쪼매 고민해 봐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그러셔야죠. 응급실에서만 안 보면 됩니다. 재수 없으면 말씀하신 환자 분처럼 일주일 이상 입원하실 수 있습니다. 장 안 자른 게 다행이죠.”
어차피 받아야 할 수술이었다.
슬쩍 협박 아닌 협박을 곁들이고 진료를 끝냈다.
혹시 시간이 안 맞을지 몰라 환자 앞으로 미리 입원장을 작성했다. 오는 즉시 입원 후 수술이다. 두 환자 모두 복강경이라는 사실에 콧노래까지 나왔다.
서울이면 오전 한나절에 끝날 일을 두고 좋아하다니 정규 수술이 단 한 건도 없었던 탓이었다. 생각해 보면 주말도 반짝일 가능성이 높았다. 내색은 안 했지만 혈관 수술까지 도맡고 있을 신현수 생각에 초조하기까지 했다.
문득 하윤호 생각이 났다.
표현은 안 했지만 구미에 내려온 이후 항상 뒷덜미를 잡아끌고 있었다. 징계가 번갯불이 콩 구워 먹듯 진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지만 은근히 초조한 것도 사실이었다.
‘징계 건은 어떻게 됐지? 선생님들이 계시니까 잘될 거야. 스승님이 고생 많이 하시면 안 되는데.’
궁금함을 꾹 눌러 참고 병동으로 올라갔다. 숙소에 있어도 아무 문제없을 조성민과 송진우가 스테이션에 서 있다 후다닥 달려왔다.
‘자식들 피곤할 텐데.’
“이 시간에 자료 검토나 하지 왜 여기 있어?”
“장 폐쇄 환자 사진 다시 찍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아침에 찍은 복부 사진은 응급실 소견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 또 찍을 이유는 없었다.
“왜? 증상이 심해졌어?”
“통증이 더 심해진 것 같아서요. 그런데 선생님은 왜 올라오셨습니까?”
“치질 환자 보러.”
먼저 치질 환자부터 만났다.
제대로 앉지도 못할 정도로 통증이 심해 걱정이 많았다. 자세하게 방법을 설명하고 내일 아침에 수술하기로 했다. 지금도 수술실이 비어 있지만 보다 확실하게 수술 방법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막 병실을 나왔을 때 김현철이 필름을 차례차례 뷰 박스에 걸었다. 장 폐쇄 환자 사진이다. 단순 복부 촬영에도 많은 것이 숨어 있다.
“현철아, 어때 보여?”
“조금도 변화가 없습니다. 코 줄로 나오는 위액량도 적지 않습니다. 차라리 빨리 수술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성민이하고 진우는?”
“지금 바로 수술하는 것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내일이나 모레까지 아예 뚫리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부종이 상당히 심해 보여 수술 중 장 손상을 입힐 것 같습니다. 이삼 일 더 지켜보시죠.”
“저도 조성민 선생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연차와 경험의 차이다.
슬쩍 김현철을 본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코 줄에 석션기 연결하자.”
증상이 심하지 않다면 코 줄을 통해 위에 고이는 침과 위액 등을 자연 배출 시킨다. 반면 증상이 심한 경우에는 석션기를 연결해 음압을 걸어 주기도 한다.
위 손상을 주지 않을 정도의 압력 차이를 통해 위 속을 최대한 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속이 비면 빌 수록 폐쇄된 부분이 뚫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기본적으로 금식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김지훈이 잠시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유착만이 아니라 밴드가 장을 조였거나 어디 한 부분이 꼬인 것 같은 느낌이 드네.’
폐쇄 원인이나 부위를 정확하게 찾는 것은 복부 CT를 찍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단지 느낌일 뿐이었지만 또 다른 생각이 아른거렸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왜 이래?’
“환자 변동 있으면 바로 연락해.”
고개를 흔든 김지훈이 한마디 툭 던지고는 외래로 내려갔다. 무슨 생각인지 도중에 방향을 틀어 혈관 수술한 환자를 찾았다. 아침 회진에 이어 또 수술 부위를 살피자 환자는 물론 전공의들까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닙니다. 아침에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있어서요. 먼저 청진부터 하겠습니다.”
눈을 감고 조용히 청진기에 귀를 기울였다.
슉! 슉! 슉!
동맥에서 정맥으로 피가 넘어가는 소리가 힘차게 들렸다. 혈류는 충분했다. 수술한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정맥이 위치한 부분이 살짝 부풀어 있었다. 수술의 목적인 정맥 확장 또한 순조롭다는 의미였다.
“경과가 아주 좋습니다. 기존의 쓰시던 부분이 막히면 바로 사용하셔도 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우리 선생들도 확인하겠습니다.”
기뻐하던 환자가 미소를 싹 감췄다. 수련 병원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도 환자들 반응은 어디나 다르지 않았다.
“이 선생님들이 전부 다요? 내가 실험실 쥐새끼도 아니고 너무한 거 아닙니까?”
만성 신부전 환자 특유의 까칠함이 나왔다.
“규모는 작지만 대학 병원입니다. 귀찮으시더라도 환자 분과 다른 환자 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언젠가는 여기 선생들 중 한 명이 환자 분을 수술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못마땅한 얼굴을 한 환자가 손목을 내밀었다.
조성민부터 차례차례 청진을 했다. 김지훈의 설명을 따라 슉슉 들려오는 소리와 수술 부위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확실하게 기억해. 지금 정도 돼야 안심할 수 있어. 환자 분,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해? 인사 드려.”
“환자 분. 감사합니다.”
서로 예의를 갖추면 그만큼 관계가 부드러워진다. 전공의들의 깍듯한 인사에 환자가 다소 마음을 풀었다. 또 하나의 지식과 경험을 쌓은 전공의 세 명이 부리나케 숙소로 달려갔다.
“목요일에 담낭하고 탈장 수술할지도 모른다고 하셨지?”
“예. 빨리 준비해야겠습니다.”
“근데 주변 환자들 분위기 보니까 혈관 수술도 또 하실 것 같지 않아? 큰일 났네. 저걸 언제 다 읽지?”
읽는 것은 끝이 아니다. 머릿속에 단단히 박지 않으면 자신의 지식이 될 수 없다. 수술이 많아진다면 저절로 습득할 부분이 적지 않지만 구미다.
그 때문에 더욱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이런 고충을 생각하지 않을 리 없었다.
서울 병원에서도 메이저나 어려운 수술이 뜨면 펠로우와 해당 전공의가 모두 모여 논의했다.
‘나 아니면 가르칠 사람이 없고 성민이나 진우 경험 정도로 대비할 수 없겠지. 한동안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수술은 함께 준비하는 것이 좋겠어.’
간호사에게 행선지를 말하고 전공의 숙소로 향했다. 김지훈이 연락도 없이 나타나자 조성민이 바짝 긴장했다. 송진우와 김현철은 어지러운 숙소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