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31화 (731/1,329)

2화. 슬슬 바빠지는 걸까? (2)

뭔가 확실히 빼먹었다. 거사를 치르기 전 반드시 준비해야 했던 것, 복강경 수술 때 담낭을 넣는 그 물건을 까먹었다. 나른하게 남아 있던 여운이 스르륵 사라졌다.

“경아 씨, 뭐 잊은 거 없어요?”

“빨리도 기억하네요. 괜찮아요.”

“괜찮은 게 아니지. 어라? 그럼?”

고경아가 수줍게 웃으며 가슴을 파고들었다.

우하하하! 갑자기 힘이 난다.

드디어 바라던 날이 왔다.

궁디 팡팡!

파견 대신 얻은 대가인지 모르지만 분명히 반갑고, 기쁘고, 즐거운 일이다. 그동안 손잡고 눈만 마주쳐도 오는 삼신할미 막기 정말 어려웠다. 드디어 그 모든 난관을 헤치고 당당히 맞이할 수 있었다.

모든 힘을 다해 노력했으니 필승이다.

공연히 두근거리는 가슴이 졸음을 쫓았다.

회식만 2차가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어느 부부보다 궁합이 잘 맞는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한 번보다 두 번이 확률을 높일 것이다. 노력이 배가 되면 쌍둥이를 낳을지도 모른다.

고경아의 온몸에서 향긋한 바람이 불어왔다. 돌연 불끈불끈 힘이 솟으며 감춰 두었던 불씨가 화르륵 되살아났다. 꼬리를 말았던 늑대가 이빨을 드러냈다.

“어머머! 왜 이래요?”

몸 따로 마음 따로 볼이 빨개진 고경아가 눈을 감으며 가슴을 파고들었다.

“경아. 날이 참 좋네. 이런 날에는 말이야.”

옛날 영화 흉내 내며 마수를 드러내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고경아의 팔에서 힘이 쭉 빠졌다. 훼방꾼은 사람과 소리만이 아니었다.

드르르르르! 드르르르르!

진동 모드로 바꾸었던 핸드폰이 조그만 탁자 위에서 난리 법석을 떨었다. 집어 드는 순간 분위가 확 깨졌다.

병원이다.

(조성민입니다. 33세 남자 환자가 폴 다운(fall down:추락)으로 내원했습니다. 혈복강이 의심됩니다.)

눈가에 머물던 졸음까지 싹 사라졌다.

“바이탈은?”

(의식은 명료하지만 100에 60정도 됩니다.)

“알았어. 바로 들어갈게.”

회식 때도 모자라 하필이면 이럴 때 바이탈이 흔들리는 환자가 오다니 슬슬 일복이 돌아오는 걸까?

바라마지 않았던 일이지만 참사 중의 참사, 대참사다. 고경아의 나직한 한숨 소리가 마음에 걸렸지만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찬물 샤워로 노곤한 몸을 간신히 추슬렀다.

돌아가자! 밟아라!

애마가 헐떡거릴 정도로 급하게 병원으로 돌아갔다. 수술을 들어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된 고경아가 머뭇거렸다.

김지훈이 단호한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경아 씨, 수술 들어갈 필요도 없지만 몸 아껴요.”

“무슨 소리에요?”

“만에 하나를 위해.”

이만저만 성급한 것이 아니었지만 고경아가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관사로 들어갔다. 안전하게 들어간 것을 확인한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이제 환자에 집중할 때였다.

비장 파열 환자다.

전공의들의 가운은 이미 피로 물들어 있었다. 골백번을 보아도 사람의 피는 긴장 그 자체다. 끈질기게 남아 있던 나른함과 노곤함이 완전히 사렸다.

송진우의 오더가 떨어지지 무섭게 오하석이 사라졌다. 거의 달리는 수준이었다. 여자에게 응급실 근무는 벅찰지도 모른다는 잘못된 생각이 산산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오하석, 너 때문이라도 환자는 무조건 살겠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헤이해진 건 아니겠지?’

도리어 인턴에게서 자극을 받았다.

도처에 배움이 있었다.

감상도 잠시, 시간이 생명이다.

바이탈이 잡히자마자 수술 방으로 옮겼다.

가뜩이나 빠른 손이 번개처럼 비장을 제거했다. 복막염을 할 때와는 또 다른 손이었다. 얼마나 많은 경험과 노력이 있었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정말 대단하시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네.’

놀람도 잠시 혀를 빼물던 조성민이 하얀 재가 돼 휘날렸다. 김현철은 송진우의 날카로운 빨간색 펜을 피하지 못했다. 꽤 늦은 시간임에도 조용히 병실을 찾는 김지훈을 보며 누구도 반발할 수 없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다시 수술 방으로 들어온 조성민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게도 편안했던 휴게실이 이제 문만 보아도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채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전화벨이 울렸다.

환자가 이어졌다.

드물기만 한 기흉이 또 왔다.

김지훈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조성민이 약간은 불안한 손으로 흉부 도관을 삽입했다. 도관 끝을 정확한 부분에 위치시키기 위해 두 차례 도관을 움직여야 했다.

당연히 환자는 고통을 호소했다.

필연적으로 불길이 쏟아졌다.

안면에 철판 깔고 흉부외과 과장을 조르고 졸라 배웠다. 일반외과 환자도 아닌데다 처음 시도한 술기인데 혼 구멍이 나다니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아얏 소리 못하게 타고 난 후에 도착한 흉부외과 과장이 제대로 삽입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음에 또 맡겨도 되겠다는 말에 조성민이 자신도 모르게 김지훈을 보았다.

‘이게 우연은 아니겠지? 수술이 끝날 때마다 신나게 탔지만 결국 나를 위한 일이잖아.’

서슬 퍼런 김지훈의 얼굴에 개인적인 감정은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럴 이유 자체가 없었다. 있다면 오직 자신이 일반외과 전공의이자 치프라는 사실 하나였다.

송진우가 뛰어난 이유가 있었다.

문득 비장을 절제하는 손이 떠올랐다.

비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조성민 스스로 부족함을 인정했다.

인정과 긍정은 곧 힘이다.

최고의 노력이 동반된 경험은 진짜 실력이 될 것이다. 송진우의 부러움에 찬 눈빛은 결코 잘못된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았다.

각오를 다지는 시간도 잠시, 조성민과 김현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금요일이 지난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환자가 또 몰려들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이런 날이 연이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손이 너무 부족한 상황이었다. 일반외과 전공의들이 가세하자 오하석이 지치지도 않고 날라 다녔다.

키만 작을 뿐 가히 원더우먼이다.

“송진우 선생님, 저 환자는 어떻게 할까요?”

얼굴이 벌게 진 송진우의 의견을 유독 자주 구했다. 대답을 하자마자 착착 실행에 옮겼다. 어디 내놓아도 절대 빠지지 않는 인턴이었다.

쉴만한 때쯤 아뻬까지 하나 했다.

진한 어둠이 깔린 2시 30분에 말이다.

“3시 이전에 오는 환자는 수술하기로 했으니까 바로 스케줄 내고 준비해.”

마취과 당직 전공의의 입이 오리주둥이가 됐지만 김지훈 앞에서는 어떤 이유도 용납되지 않았다. 서늘한 눈빛 앞에서 빠르게 꼬리를 말았다.

고생을 했으면 대가를 주어야 한다.

“이번 수술은 진우 손 좀 보자.”

구미 온지 일주일만이다. 드디어 기회를 얻은 송진우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수술실로 들어갈 때까지 수술 과정을 중얼중얼 되새기고 있었다.

조성민이 피식 웃었다.

‘너도 탈까봐 꽤 겁이 나는구나. 그래도 아뻰데 도대체 몇 번을 반복하는 거야? 얼굴이 더 뻘게졌네.’

평소에도 툭하면 보는 모습이었지만 긴장 때문이라고 여겼다. 서울 병원에서 제 아무리 경험을 쌓았다 해도 2년차가 호랑이 같은 김지훈과 수술을 하니 그럴 수도 있었다.

‘이론과 실제는 다른데 잘할까? 웬만큼은 하겠지?’

완전히 잘못 생각했다.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얼마 전 그만둔 2년차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김지훈은 이마저도 만족하지 못하는지 한동안 따로 시간을 가졌다.

공포의 휴게실 문 사이로 화끈한 열기가 터져 나왔다. 가공할 불길에 도리어 한기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초죽음이 됐을 것이라 여긴 송진우가 시뻘게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 자식이 너무 혼났나? 진우야, 괜찮아? 정신 차려.”

“저 말짱합니다. 이게 혼나는 건가요? 김지훈 선생님 덕분에 어떤 면에 신경 써야 할지 조금 더 확실해졌어요. 빨리 배워서 병옥이 형 정도는 해야 하는데.”

“병옥이? 내가 아는 그 병옥이 형?”

“예. 수술 끝내줍니다. 보고 있으면 같은 연차인지 의심이 될 정도라니까요. 이론까지 모든 면에서 전 아직 멀었습니다. 김지훈 선생님도 공식적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송진우보다 더 잘난 2년차가 있다?

“강남 스타일이 개과천선했단 말이야?”

학교 다닐 때 받은 인상으로는 일반외과와 어울리지 않는 선배였다. 하지만 송진우의 말이었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벌게진 얼굴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았다.

조성민에게는 충격이었고 김현철에게는 놀라움이었다. 강렬한 자극에 몸서리까지 치고 말았다. 그러나 입 벌리고 놀랄 틈이 없었다.

응급실은 여전히 아수라장이었다.

송진우가 당연하다는 듯 손을 보탰다.

결국 창문 밖이 환하게 밝아질 때까지 아무도 응급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눈가에 까만 피로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나마 간호사가 건넨 시원한 주스 하나가 위안이었다.

“샘, 너무 고생하셨어요. 고마워요.”

전과 달리 간호사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했지만 그 정도에 풀릴 피로가 아니었다. 조성민과 김현철이 빡빡한 눈을 비비며 어기적어기적 숙소로 향했다.

“현철아, 아뻬하고 비장 하나 떼기 위해 어제 저녁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나봐.”

“소쩍새요? 난 못 들었는데 정말이에요?”

“에휴! 농담을 하면 뭐 하냐. 근데 진우는 어디 갔어?”

송진우가 슬그머니 당직실 문을 열고 있었다.

오하석이 가운도 벗지 못하고 지쳐 쓰러져 있었다. 잠시 잠든 얼굴을 보던 송진우가 주스 하나를 침대 맡에 놓았다. 얼마 후 누군가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일요일이라고 오전 회진을 안 돌 수는 없다. 잠깐 눈을 붙인 탓에 더 무거워진 다리를 질질 끌고 전공의 세 명이 회진을 돌았다.

김지훈이 비장 절제 환자를 비롯해 이미 회진을 돌고 간 후였다. 깜짝 놀란 조성민이 목소리를 높이며 간호사에게 왜 연락을 안 했는지 물었다.

간호사의 눈초리가 험악해졌다.

“조성민 쌤, 김지훈 샘이 쌤들 쉬어야 한다며 혼자 도신다고 했어요. 왜 나한테 뭐라고 그래요?”

“그래요?”

은근히 감동이다.

생각해 보니 환자가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김지훈은 목소리조차 높인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의국비를 받았고 전임 과장들과는 달리 함께 식사하고 회식까지 했다. 보이는 모습이 다는 아니겠지만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후우! 갑자기 일할 맛이 팍팍 나네.”

조성민이 중얼거리며 가운을 벗었다.

“어디 가시게요?”

“입도 깔깔한데 나가서 먹자. 간만에 밤샜는데 보충해야지. 뭐 먹을까?”

“이 시간에 해장국밖에 더 있겠어요?”

손가락이 탁 튕겨졌다.

“싱글벙글 가자. 복 매운탕 시원한 게 아주 좋아.”

김현철이 눈을 크게 떴다.

“김지훈 선생님도 같이 가시자고 할까요?”

“그럴까? 그런데 피곤하시지 않을까?”

김지훈 체력 무시했다.

전화를 하자마자 콜을 외치며 고경아와 나타났다.

탁월한 선택이다.

의국비 또 굳었다.

일요일 한낮의 평화로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누구 일복인지 3연타다. 조성민과 김현철은 확실히 아니고 오하석이 조금 의심스럽긴 했지만 오늘은 오프다. 그렇다면 김지훈과 송진우 둘 중 한 명일 것이다.

응급실 간호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언제 연락을 받았는지 김지훈까지 나왔다.

그동안 가장 많은 환자를 보아 온 정형외과 전공의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지경이었다. 일반외과가 힘을 보태지 않았다면 정형외과 1년차 확실하게 죽어나갔을 것이다.

그 많은 환자 중 일반외과 환자 한 명 없을까?

1년 전 복막염으로 수술했던 환자가 장 폐쇄를 주소로 내원했다. 당장 수술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보존 치료를 하며 지켜보기로 했다.

“사오 일 정도 지켜보고 만약 호전이 안 되면 수술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장 폐쇄 원인이 개복이기 때문에 재수술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치질이 무척 심한 환자까지 내원했다. 역시 당장 수술할 상태는 아니었지만 삐져나온 치질 덩어리 때문에 불편함을 넘어 심한 통증까지 호소했다. 덩어리 내에 발생한 혈전이 원인이었다.

“부종과 통증이 너무 심해서 입원 치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수술은 상황 봐 가며 바로 하겠습니다.”

환자들로 바글거리는 응급실 덕인지 두 환자 모두 별말 없이 입원했다. 손님으로 북적이는 식당에 사람이 더 몰리는 이치와 같을지도 몰랐다.

수술 예약 한 명에 가능성 한 명이다.

‘슬슬 소문이 나나? 좋은 조짐이야.’

응급실이 북새통이었는데 이렇게 지나면 서운하다.

복막염 환자 한 명 더 수술했다. 토요일에 수술한 비장 파열과 아뻬 환자까지 세 건에 불과했지만 구미 첫 주말치고는 준수한 성적을 올렸다.

이제야 일 좀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가는 크게 치르지 않았다.

김지훈에게 이 정도는 가뿐했다.

‘아! 이제야 일하는 맛이 나네.’

무슨 이유인지 토요일 밤에 가공할 열정을 보인 송진우와 거의 눈이 감긴 조성민과 김현철에게는 해당 없는 일이었다. 사실 힘쓰는 일은 과장이 아니라 전공의가 하니 당연한 결과였다.

‘아! 쉬고 싶다. 아! 피곤하다. 아! 죽고 싶다.’

첫 주말이 지나가는 동안 여러 가능성을 엿보았다.

전공의들에 대한 기대, 의료진들에 대한 기대, 앞으로 환자가 팍팍 늘 것이란 기대까지.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다.

오하석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체력이 강해도 응급실이 아수라장으로 변하면 당해내기 힘들다. 하물며 여자다. 하루 쉰 덕에 얼굴은 말끔했지만 얼굴 곳곳에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선생님, 주말에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목소리는 여전히 힘찼다.

힘들다는 내색 하나 하지 않았다.

‘얼굴은 여잔데 하는 짓은 딱 우리 과네.’

“안 힘들어? 언제까지 응급실 근무야?”

“다음 주부터 내과 돌고 마지막으로 일반외과 돕니다. 서울에서 일반외과 한 번 더 돕니다. 헤헤!”

연이어 메이저과 돌면서 좋아하는 인턴 없는데 참 잘 웃었다. 웃음이 전염된 모양이었다. 응급실 보고를 받으며 미소 짓던 김지훈이 급히 인사를 했다.

“원장님, 이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응? 별일 아니야. 혹시 주말에 바빴나? 조성민 선생, 내 눈치 보지 말고 빨리 보고해.”

민혁기 원장이 입이 점점 크게 찢어졌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깔끔했던 조성민이었다. 180도 변한 모습만 봐도 답이 딱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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