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30화 (730/1,329)

2화. 슬슬 바빠지는 걸까? (1)

그동안 내내 조용하다 회식 날 이런 가공할 참사가 벌어지다니 세상 일 정말 알 수 없었다. 김지훈이 오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미신이라도 좋다.

일반외과 구성원이라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흉부외과 과장도 같은 생각을 할까?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남은 사람은 즐겨야 한다. 악조건을 딛고 분위기를 띄워 줄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1차 자리가 한창 무르익을 때쯤 흉부외과 과장만 돌아왔다.

정성호 과장의 눈가에 잔주름이 생겼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다들 수술 들어갔어?”

“예. 방금 전에 빤뻬리 수술 들어갔습니다. 수련 받을 때 변상훈 과장님께 배웠다더니 흉부 도관 박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네요.”

“허허! 응급실이 이제야 확확 돌아가네. 김지훈 선생이 오자마자 월급 값은 하는 것 같아.”

민혁기 원장이 좋다고 웃다가 헛기침을 했다.

직원들은 물론 과장들 눈초리까지 심상치 않았다. 똑같이 월급 받는 처지라고 해도 원장과 직원의 시각 차이는 어쩔 수 없는 법이다.

수술 방이다.

수술복으로 갈아입은 조성민과 송진우가 기 싸움을 벌였다. 얼굴 벌게진 채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눈빛과 물러서 달라는 눈빛이 불꽃을 튀겼다.

조성민이 선공을 날렸다.

“진우야, 서울에서 수술 많이 들어갔잖아. 이번 수술 내가 들어가자.”

“선생님, 오늘은 제가 수술 당직입니다.”

“나 3년차야. 혈관 수술 들어가서 혼나는 거 봤잖아. 이러다간 전문의 수술 노트도 제출 못할지도 몰라.”

“크게 혼나신 적은 없죠. 수술 노트야 그렇긴 한데 앞으로 엄청 들어가실 겁니다. 저도 온지 일주일이 다 됐는데 퍼스트는 한 번 서봐야죠. 이러려고 구미 온 게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감히 치프에게 덤비다니 단단히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사실 무척 기대하고 왔는데 생각보다 훨씬 적은 수술에 누구보다도 실망하고 있었다.

몇 번을 말해도 요지부동이었다.

환자는 곧 올라온다.

힐끗 시계를 본 조성민이 타협책을 제시했다.

“진우야, 그럼 다음 주부터는 무조건 수술 당직이 들어가는 것으로 하고 이번 주만 내가 들어가자. 오죽하면 회식을 다 마다했겠어? 약속한다.”

은근히 절박했다.

서울 치프에게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말투와 목소리마저 사뭇 다른 느낌까지 들었다. 송진우가 눈가를 찡그린 채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말하기 창피하지만 빤뻬리 들어가 본 지 너무 오래됐다. 내 사정 좀 봐 줘.”

과장이겠지만 송진우에겐 결정타였다.

얼굴이 점점 붉어지다 못해 시뻘게졌다.

송진우가 결국 두 손 들고 말았다.

“그럼 다음 주부터는 무조건 수술 당직이 들어가는 겁니다. 약속하셨습니다.”

“알았어, 인마. 고마워. 어휴! 내가 2년차한테 사정까지 할 줄은 몰랐네. 진우 너라서 봐준다.”

조성민이 이를 하얗게 드러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강압적으로 나오지 않는 치프의 모습에 송진우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김지훈 선생님 일복만 터지면 끝인데.’

고경아가 들으면 큰일 날 일을 간절히 빌고 있었다.

환자가 올라왔다.

수술실로 들어온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성민아, 오프라며? 너까지 들어오면 회식 자리에 아무도 없잖아. 그래도 우리 과 회식인데 치프가······.”

순간 만면에 희색을 띄는 송진우를 본 조성민이 급히 입을 열었다. 체면까지 내팽개치고 어렵게 정말 어렵게 만든 기회였다.

“메이저 가까운 수술을 처음 하시는데 제가 들어와야죠. 진우가 저보다 생각이 깊네요.”

생각나는 대로 한 말인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김지훈이 웃으며 조성민과 송진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

둘 다 결정 잘했다는 의미였다.

“알았다. 치프가 알아서 잘 조정해. 대신 다음 주부터는 가급적 수술 당직 지켜. 진우하고 현철이 손도 봐야지.”

송진우가 자신도 모르게 만세를 불렀다.

“참! 너희들 흉부 도관 박는 법 과장님께 확실히 배워 놔. 다음에도 내가 해야 되면 알지? 오하석 선생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

어떻게 될지 잘 안다.

송진우의 얼굴색이 확실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묘한 위압감에 전공의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미처 소름이 가시기도 전에 이용철 과장이 마취를 시작했다.

위궤양 천공으로 인한 복막염이었다.

김지훈이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조성민 역시 최선을 다했다.

환자가 없는 와중에도 열심히 노력한 흔적을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메이저에 가까운 수술이라 그런지 김지훈이 마지막 마무리까지 했다.

역시 깔끔하고 말끔했다.

불과 한 시간 반 만에 수술이 모두 끝났다.

조성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복강경이나 혈관 수술 때는 비교할 능력조차 없어 단지 빠르다는 감만 왔었다. 빤뻬리 수술을 보고서야 김지훈의 실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와! 김지훈 선생님 손 엄청 빠르시네. 그냥 열고 닫은 것 같은데 끝났네. 수술 정말 잘하신다. 예전 과장님하고는 확실히 달라. 어후! 사흘 내리 수술 들어가서 그런지 어깨까지 뻐근하네. 진우야, 그래도 잘 끝났지?”

그렇게 믿은 조성민과 김현철이 웃었다.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된 모양이었다.

송진우가 콧등을 찡그리며 입을 꽉 다물었다.

김지훈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수술 도중 설명이나 칭찬은 곧잘 하지만 혼은 좀처럼 내지 않는 김지훈이었다. 경험 상 한 바탕 불길이 쏟아지지 직전이라는 감이 확연하게 다가왔다. 마무리를 직접 했다는 사실도 암시하는 바가 컸다.

‘수술 중 무엇을 보신 걸까? 그걸 확실하게 알아야 실력이 되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네. 역시 기본일 가능성이 높겠지?’

웃고 있는 얼굴에 재 뿌릴 수는 없지만 지금은 희희낙락 할 때가 아니었다. 이럴 때가 아니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김지훈이 뜻밖에도 김현철에게 눈길을 주었다.

“현철아, 위장 천공 수술 방법에 뭐가 있지?”

“예? 그게···. 그러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는지 알고 있는 내용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수술 경험이 없다고 해도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할 내용이었다.

“성민아, 진우야.”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조성민과 송진우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손 안 대고 코 풀었다.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김현철을 피바람 속으로 밀어 넣었다.

과장이 상대해야 할 전공의는 1년차가 아니다.

휴게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닫혔다.

한참이 지나서야 조성민이 나왔다.

기를 쓰고 들어가 새카맣게 탔다.

문 열고 닫히는 바람에 푸스스 재가 흩날렸다.

말을 붙일 분위기가 아니었다.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식은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생각에 잠겼던 조성민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흔들어댔다.

‘위를 타이하는 손이 치프 손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실망할 필요 없어. 마지막 말씀이 핵심이야. 지금까지 잘했고 앞으로 최선을 다하면 써전다운 써전이 될 수 있어.’

“김현철, 오더 다 냈어?”

“예. 수술 기록 지까지 거의 다 작성했습니다.”

온몸에 힘이 쪽 빠진 김현철의 시선을 받은 송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시무시한 눈길로 빨간 펜을 흔들며 말이다.

“마무리는 진우하고 하고 빨리 병실 올라가자.”

조성민의 어깨에 힘이 팍팍 들어갔다.

혈관 수술 환자까지 고작 다섯 명 수술했지만 기회는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김지훈의 수술 실력은 감히 평가할 수조차 없었다. 인정받는 일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지만 반드시 밟아야 할 계단이었다.

‘주말에 환자 팍팍 와라.’

아자! 아자! 아자!

숙소로 돌아간 전공의 세 명의 손에 실과 니들 홀더가(봉합용 기구) 들렸다. 회식도 잊고 틈틈이 두툼하게 쌓인 자료를 읽으며 타이 삼매경에 빠지고자 했다.

“아! 잊을 뻔했네. 김현철 선생님, 이리 와 보실까요? 그걸 대답 못해서 치프 얼굴을 붉어지게 만드십니까? 넌 죽었어. 공부 안 할래? 어디부터 손봐줄까?”

비명이 터지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이 자식들이 나만 남겨 놓고 뭐하는 거야?)

뒤늦게 2차 자리에 참석한 김지훈의 호출이었다.

본의 아니게 김현철을 살렸다.

부리나케 달려야 했다. 맥주를 앞에 두고 제사 지내기도 힘든데 말짱한 정신으로 노래방까지 가야했다.

급하게 부른 이유가 있었다.

가무에 젬병인 김지훈에겐 죽을 맛이었다.

수술보다 더 힘들다.

그래도 쇼핑보다는 덜 힘들다.

순대 국의 효력이 다 떨어졌는지 이럴 때는 환자도 안 온다. 한 그릇 아니, 몇 그릇 더 시키고 싶었다. 이럴 바에는 먹고 죽는 게 나을 것이다.

첫 주말이다.

토요일 아침 과장 회의가 또 열렸다.

한 주를 결산하는 민혁기 원장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있었다. 다른 과에 비교해 일반외과 실적은 여전히 형편없었지만 분명한 변화에 만족해하고 있었다.

수술 건 수는 물론 질까지 좋아진 것이다.

월요일과는 분명 다른 얼굴이었다.

“이번 주는 특별히 당부할 말이 없네. 김지훈 선생, 다음 주에는 보다 확실하게 응급실 체계 잡아줘. 수고 많이 했어. 정성호 과장은 환자 아끼지 말고 외과에 많이 보내 주고. 그럼 다들 주말 잘 보내고 다음 주에 봅시다.”

‘서울에서는 하루면 하는 수술을 했을 뿐인데.’

은근한 부담을 느끼며 외래로 향한 김지훈이 즐거운 고민에 빠져 들었다. 당직이지만 고경아와 함께 보낸 시간은 충분할 것이라 믿었다.

‘경주는 너무 멀고 일단 금오산부터 가 볼까?’

고경아는 물론 정훈철 가족과 추억을 만든 곳이다.

벌써부터 설레고 즐거워졌다.

월요일에 작성했던 것과 비슷한 서류들을 또 받았다. 한 번 해 봤다고 나름 수월하게 서류 작업을 마쳤다. 잠시 논문을 수정하고 응급실과 병동을 들린 사이 일과가 모두 끝났다.

입원 환자가 무려 일곱 명이다.

첫 날 수술한 아뻬 환자는 이미 퇴원했고 혈관 환자는 내과 소속이다. 라파로, 빤뻬리, 아뻬 환자를 뺀 나머지는 단순 외상으로 입원 중이다. 그나마도 동병상련인 흉부외과 환자를 뺏어온 덕이었다.

하하하! 땀난다.

그래도 주말이다.

응급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번 주만은 조용하기를 바랐다. 추세를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루 밤의 부산함과 의사 한 명으로 순식간에 바뀔 분위기가 아니었다. 온다고 해도 수술 환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번 주말 당직은 누구야?”

“셋이 모두 서기로 했습니다.”

“환자도 없는데 셋이 다 설 필요 있어? 내 눈치 보지 말고 알아서 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아서 가겠습니다.”

“난 괜찮으니까 꼭 가라. 전공의 때 오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사람 없어.”

과장이 당직을 서는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신신당부를 한 김지훈이 관사로 향했다. 일주일 사이 뽀얗게 살이 오른 고경아가 배시시 웃으며 옷을 꺼냈다.

김지훈도 다르지 않았다.

편하긴 편했던 모양이다.

“자! 갈까요?”

애마에 올라타 곧장 금오산으로 향했다.

천고마비의 계절답게 하늘은 높고 김지훈과 고경아의 볼 살은 포동포동했다. 살살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별 구경할 데도 없는 곳을 구석구석 걸었다.

승희가 떠오른 김지훈이 솜사탕을 물었다.

고경아의 손에는 핫도그가 들려있었다.

“왜 이렇게 달기만 하지? 예전 맛이 안 나네.”

“핫도그는 괜찮은데. 그럼 이거 먹을래요?”

역시 유원지에서 팔짱 끼고 군것질 정도는 해줘야 데이트하는 맛이 난다. 반쯤 남은 핫도그를 홀라당 입에 넣은 김지훈이 좋다고 웃었다.

걷고 쉬고 떠들고.

오래 간만의 여유에 취한 사이 어느 새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때운 김지훈의 눈빛이 심상치 않아졌다.

관사도 좋지만 아직 낯설다. 마침 새로 오픈한 것처럼 보이는 모텔이 보였다. 뜨거운 눈길을 받은 고경아의 손에서 은근한 힘이 전해졌다. 맥주 한 잔 걸치지 않았는데 분위기는 이미 달아올랐다.

최대 훼방꾼 고경희도 없고 전화기는 침묵 모드다.

가자!

낯설긴 마찬가지지만 샤워하고 나오는 순간 모든 것이 필요 없었다. 오직 체력 빵빵해진 김지훈과 고경아만 남았다. 살짝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이 섹시했다.

뼈와 살이 불타는 밤이다.

거친 호흡을 따라 뜨거운 숨결이 맨몸을 휘감았다.

땀이 뚝뚝 떨어진다.

그마저도 가슴 떨리는 자극이다.

화르륵 치솟은 불길이 사랑하는 연인을 불살랐다.

모조리 다 탔다.

김지훈은 불씨를 감춘 하얀 재가 됐다.

고경아의 볼에 홍조만 남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나른한 여운이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고경아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스르르 눈을 감던 김지훈이 화들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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