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가능성을 엿보다. (2)
김지훈의 눈가가 서늘해졌다.
‘혈관은 확실히 무리네. 수술에 영향을 주지 않는 부위라 다행이지 다른 부분은 안 되겠어.’
당장 태워야 움츠러들기만 할 것이다.
조성민은 퍼스트를 서는 중이고 그간의 구미 병원 상황도 고려해야 했다. 더구나 기본기는 하루 이틀에 쌓을 수 없다. 직접 보여 주고 자연스럽게 쫒아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김지훈이 아무 말 없이 조심스럽게 다음 수처를 하고는 직접 타이했다. 조성민이 흠칫 놀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루뻬 너머 번쩍이는 김지훈의 눈빛은 고도의 집중을 요구하고 있었다.
봉합하고 직접 타이하고, 봉합하고 직접 타이하고 무엇 하나 등한히 할 수 없다. 많은 경험과 동시에 신기동 교수의 비수를 수없이 맞지 않았다면 엄청나게 힘들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 봉합과 타이를 끝낸 김지훈이 조용히 절개창을 닫기 시작했다.
조성민에게 다시 한 번 타이를 주었다.
혈관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부위였지만 서늘한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혈관만이 아니라 주변 조직 손상까지 최소화해야 하는 수술이 바로 혈관 수술이기 때문이었다.
단 한 번의 타이로 끝이었다.
3년차 치프에게 절개창 타이조차 주지 않는 모습에 전공의들의 안색이 꺼멓게 죽었다. 숨소리만 나직하게 울리는 가운데 수술이 끝났다.
가장 초조하고 두려운 사람은 환자다. 구미 병원에서 그것도 부임한지 얼마 안 되는 의사에게 수술 받은 사실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수술 잘 끝난 겁니까?”
“현재로서는 만족스럽지만 며칠 지켜봐야 합니다.”
잠시 안정을 취한 환자가 병실로 올라갔다.
김지훈이 힐끗 눈길을 주고는 조용히 휴게실로 들어갔다. 아뻬로도 탔다. 조성민이 고개를 푹 숙이고 알아서 따라 들어갔다.
“조성민, 혈관 수술에서 타이와 수처는 기본이 아니라 전부야. 처음 보고 익숙하지 않다는 것은 별개 문제다. 이런 식으로 타이하면 혈관 수술은 같이 못해.”
깜짝 놀란 조성민이 고개를 축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죄송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혈관 수술이 아니라고 해도 평생 익히고 닦아야 할 부분이 바로 기본이다. 큰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조여야 할 때 반드시 바짝 조여야 한다.
“방법까지 내가 알려 줘야 돼? 넌 아래 년차 교육시켜야 할 치프야. 배우기만 해도 되는 위치가 아니라는 사실 잊지 마. 똑바로 하자.”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분위기가 살벌했다. 김지훈의 눈 속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숯불의 뜨거움이 있었다. 원하는 수준이 이를 때까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어디서 이런 기운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 리틀 이준영!
그 말을 끝으로 김지훈이 병동으로 향했다.
수술이 끝날 때마다 살얼음 위를 걸어야 했다. 뒤를 따르는 조성민의 얼굴이 점점 심각하게 변했다. 송진우와 김현철은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김지훈이 혈관 수술을 받은 환자를 만나 주의할 점을 세세하게 설명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입가에 밝은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돌아서는 순간 웃음이 사라졌다.
뚜벅뚜벅 탈장 환자 병실로 향했다.
왠지 새로운 긴장감이 느껴졌다.
“환자 분, 많이 불편하세요?”
“배가 조금 땡기는 것 말고는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이놈의 코 줄이 더 불편하네요. 언제 뺄 수 있습니까?”
김지훈이 편안한 미소를 머금으며 복부 청진을 했다.
꾸루룩! 꾸루룩!
장 소리가 힘차게 들렸다. 가벼운 압통을 느꼈지만 수술 후에는 당연한 일이었다. 드레인을 감싼 거즈도 정상적인 양상으로 젖어 있었다. 먹는 문제만 빼고 통상의 탈장 수술 후 치료를 진행해도 좋은 상태였다.
“지금 빼드리겠습니다. 다만 장이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 금식하셔야 합니다.”
코 줄과 소변 줄이 빠지자 환자가 개운하다는 듯 기지개를 폈다. 운동 열심히 하라는 말과 퇴원은 장을 건드렸기 때문에 다음 주에 가능하다는 말을 하고 병실을 나왔다.
“아! 며칠 더 해야 할 줄 알았는데 이제야 살 것 같네. 대구까지 안 가고 여기서 하길 정말 잘했다. 젊은 양반이 용하다. 용해.”
김지훈이 갑자기 훅 숨을 내뱉었다.
수술은 잘 끝났지만 장이 확실하게 기능을 찾아야 안심할 수 있었다. 수술이 끝난 후 조금도 기뻐하는 내색을 하지 못한 이유였다.
이제야 수술 후 다가오는 감동이 진하게 느껴졌다. 복강경 기구로도 장을 안전하게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부분적으로나마 확인했기에 더욱 각별한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어떤 수술이 있을지 모르는데 나 혼자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니야. 수술 팀부터 제대로 만들어야 해.’
“조성민, 열심히 하자.”
조성민의 눈길이 저절로 송진우에게 향했다.
믿고 물어볼 사람은 단 하나였다.
“어후! 왜 이렇게 땀이 나냐. 한 번을 못 피하네. 진우야, 나 좀 심하게 혼난 거 맞지? 절개창 타이도 안 주신 거 보니까 화가 정말 많이 나신 것 같아.”
송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절대 화내신 거 아니고 이 정도면 타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선생님이 마음에 드신 것 같은데요?”
“나는 죽겠는데 무슨 말이야?”
“말로 하기 참 힘드네요. 화내시는 걸 직접 봐야 알 수 있는데 그게 보통 보기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요.”
“애매모호하네. 네 말이 맞는다면 정말 다행이지만 정말 불안해. 진우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다른 방법은 없다,
“선생님, 저하고 같이 타이 연습하시죠.”
“타이 연습?”
“솔직히 말해 김지훈 선생님과 선생님 타이가 다르게 보였습니다.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정교함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저도 반성 많이 했습니다. 후우! 김지훈 선생님 별명 중 하나가 따르륵 선생님이라는 걸 잊고 있었네요.”
‘따르륵’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를 들은 조성민과 김현철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3년차 치프가 돼서 타이 연습까지 해야 할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혈관 수술에만 국한된 일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면 혈관 수술이라 한 번은 봐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메이저라도 뜨면 정말 난리 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두려운 일은 타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뻬만으로도 탔으니 결코 잘못된 추측은 아니었다.
얼마 후 전공의 세 명의 손에 실이 들려 있었다.
혈관 수술에 쓰는 실은 대단히 비싸 싼 실크 중에서 가장 가는 실로 대신했다. 똑같은 감각을 줄 수는 없지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하하! 선생님들과 같이 하니까 재밌네요.”
“김현철, 지금 웃은 거야? 너 요새 간뎅이가 부은 것 같더니 감히 치프를 비웃어? 이리 가까이 와. 버릇없는 놈은 매가 약이지. 긴장 좀 하자.”
무심코 한마디 했던 김현철이 가공할 헤드 락과 날카로운 눈 화살에 맞아 죽었다. 빨간 펜이 난무한 혈관 수술 기록지에 한 번 더 맞아 죽었다.
‘어우 씨! 김지훈 선생님 오신 이후로 매일 혼나네. 내가 그렇게 일을 못했나?’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수술 기록을 수정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타이 연습은 기본이었다. 송진우가 던진 말은 살벌함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하다 수술 받으면 뼈도 못 추린다. 너만 아니라 나까지 죽을 수 있어. 정신 차려. 환자와 수술이 관련된 일은 무조건 긴장해.”
시도 때도 없이 벌게지는 얼굴인데 왜 그렇게 무서운지 모를 일이었다. 역시 한 다리 건넌 사람보다 바로 윗사람이 가장 무서운 법인 모양이다.
다들 이러저런 일로 고민이 많다고 해도 고경아만은 즐거움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제 수술 네 건 했고 정규 수술마저 없는 것은 미안한 일이었지만 대신 시간이 넘쳐났다.
남편과 함께 할 시간 말이다.
갈 곳이 없어도 좋았다.
저녁마다 꼬박꼬박 함께 식사하고 병원 주변을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담벼락을 따라 늘어선 포장마차는 더 큰 재미를 선사했다. 술 한 잔 할 수 없어 안달하는 김지훈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밤늦게 뜬 아뻬는 애교에 불과했다.
“아! 좋다. 매일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네.”
“이러다 나 과장 자리에서 쫓겨납니다.”
“지훈 씨 탓도 아닌데 설마 내쫓겠어요? 지훈 씨, 우리 꼼장어 먹으러 가요.”
“술도 못 먹는데 무슨 꼼장어?”
“앙탈 부리지 말고 빨리 따라와요.”
고경아의 눈가가 확 찢어졌다.
‘이건 내가 해야 할 대산데.’
“예. 마님. 드시고 싶다면 드셔야죠. 가시죠.”
즐거움, 한가함, 부담이 교차하는 가운데 어느새 금요일 일과가 끝났다. 한 주를 돌아보던 김지훈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윤호가 따로 없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실적이란 놈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전공의 교육 및 일반외과와 관련된 의료진들의 숙련도마저 걱정됐다.
어쨌든 회식 날이다.
일반외과 회식이 김지훈, 고경아 환영식까지 겹쳐 엄청나게 커졌다. 병동, 중환자실, 응급실, 수술실에 시간이 난 과장들과 외래 간호사까지 참석했다.
부지런히 안면 트고 구미 첫 복강경과 혈관 수술을 해 관심이 집중된 탓이었다. 예전 기억과 방송에 난 일까지 회식에 참석할 핑계거리가 넘쳐났다.
“지훈 씨, 인기 좋네요.”
“경아 씨가 같이 와서 그럴 거예요.”
“처신 똑바로 해요. 근데 회식비는 있어요?”
삼겹살이 싸다고 해도 인원이 장난 아니다.
남은 의국비가 담긴 봉투를 만지작거리던 김지훈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평소 입에 착착 달라붙던 삼겹살이 두려움으로 변할 줄은 몰랐다.
상이 다 차려지고 술 한 잔씩 앞에 두었다.
이제 고경아와 인사를 하면 회식이 시작된다.
김지훈이 입을 꾹 다물었다.
‘에라! 모르겠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데 일단 먹자. 경아 씨가 설마 날 죽이진 않겠지. 아우! 술 고파라. 최철한 선생님이 빨리 오셔야 촉촉하게 적실 수 있는데 아직 3주나 남았네.’
술 생각은 물론 마음까지 깨끗이 비웠다. 그 덕인지 기대하지도 못한 원군이 나타났다. 민혁기 원장이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다. 절대 손에 들린 찬조금 때문이 아니었다.
회식 때 전주가 길면 다들 지루해한다.
간단히 인사하고 건배를 외쳤다.
사람이 워낙 많아 식당 기둥이 흔들거렸다. 당직을 대신할 사람이 없기에 입술에 술만 묻힌 김지훈이 아쉬운 눈으로 자리에 앉았다.
고문이 따로 없었다.
간만에 허리띠 풀 기회를 맞은 전공의들의 입이 찢어졌다. 고소한 냄새에 침이 절로 고였다. 그때 식당 아주머니의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호호호! 원장님, 오신다고 미리 기별을 주시지. 항상 찾으셔서 급히 준비했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모락모락 김이 나는 뚝배기 하나를 척 내놓았다.
뭐지? 이 상서롭지 못한 냄새는?
순. 댓. 국.
순대와 곱창에 폐까지 퐁당 빠진 순댓국이다.
민혁기 원장이 입맛을 다시며 매운 양념장을 풀었다. 김지훈은 물론 전공의들 모두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식은땀까지 맺혔다.
김현철만 구석에 앉아 미처 순댓국을 보지 못했다. 상추에 삼겹살 세 쪽, 구운 김치, 마늘, 고추를 척척 올리고 감동에 찬 눈으로 입을 한껏 벌렸다. 그러나 미처 입에 넣지도 못하고 허겁지겁 허리춤을 뒤졌다.
(선생님, 오하석입니다.)
“환자 있어? 무슨 환잔데?”
(단체 TA(Traffic Accident)입니다. 환자 몰리면 연락하라고 하셔서 전화 드렸습니다. 회식 날 죄송합니다.)
큰일 면했다는 목소리였다.
김현철은 큰일이 생겼다는 표정이었다. 안타까운 눈으로 지글지글 익어 가는 삼겹살을 바라보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김지훈의 당부가 아른아른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송진우 선생님,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단체 교통사고랍니다.”
“그래? 같이 들어가자.”
송진우에겐 일상다반사였다. 다만 민혁기 원장에게 고개 푹 숙이고 일어났다. 이제야 상추쌈을 우겨 넣은 김현철이 아쉬운 표정으로 하나 더 싸들고 뒤를 따랐다.
일단 둘만 먼저 들어갔다.
노릇노릇한 삼겹살과 두 잔의 술이 고스란히 남았다.
띠리리리리!
“선생님, 저도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오늘 누가 오프야? 명색이 우리 과 회식인데 다 들어가면 어떻게 해?”
“제가 오픈데 아무래도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견하게도 조성민까지 사라졌다. 무릇 치프란 이래야 하는 법이다. 입안에 기름칠만 한 조성민도 힐끗 민혁기 원장을 보긴 했다.
주인 잃은 잔이 세 개로 늘었다.
띠리리리리!
“성민아, 왜 안 와? 우리 과 환자 있어?”
(예, 빤뻬리 의심되는 환자가 있습니다. 일곱 명이 한꺼번에 들어와서 응급실이 난립니다.)
“일곱 명에 빤뻬리?”
아! 위대한 순댓국의 힘이여!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지만 하필이면 회식 날에 환자가 몰려오는 건 누구를 탓해야 하는 걸까?
민혁기 원장? 주인아주머니?
“원장님, 죄송합니다. 응급실에 환자가 있어서 들어가야겠습니다. 드시고 계십시오.”
“자네까지 들어간다고? 수술 환자 있어?”
“예. 복막염이 의심되는 환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용철 과장이 화들짝 놀랐다.
“김 과장, 그동안 일복 사라진 것 같아서 좋아했는데 오늘 같은 날 발휘하면 어떻게 해? 그것도 하필이면 내가 당직일 때냐. 느낌 안 좋네.”
“죄송합니다. 순댓국……. 아닙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경아 씨, 미안해요. 최대한 빨리 올게요.”
오늘의 주인공 중 한 명인 김지훈마저 사라졌다.
일반외과는 아예 아무도 남지 못했다. 분위기가 약간 시들해졌지만 고경아가 남아 있다. 이미 삼겹살은 뜨거운 불판 위에서 몸부림친 지 오래였다.
흥을 돋우는 술이 있다. 민혁기 원장의 목소리에 힘이 철철 넘쳤다. 수술 방 간호사들 덕에 고경아의 입가에도 다시 미소가 걸렸다. 순대 국이 말끔하게 비워지며 슬슬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띠리리리리!
“흉부외과 과장은 술 마시다 말고 어딜 가?”
순댓국에 호흡 기관, 폐도 들었다.
“혈기흉 환자 한 명 있어서 김 과장이 직접 관을 박았답니다. 문제없겠지만 들어가서 확인하고 얼굴은 봐야죠.”
띠리리리리!
이용철 과장이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취과 전공의들이 있다고 해도 자신이 만든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다. 물론 눈가에 잔주름이 잡히긴 했다.
“이 과장, 술 안 마셨어?”
“불안해서 안 마셨습니다.”
줄줄이 여섯 명이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