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28화 (728/1,329)

1화. 가능성을 엿보다. (1)

내과 외래 간호사가 부지런히 달려왔다.

“김지훈 샘, 어디 가세요? 잠깐만요.”

수시로 내과 외래를 들락날락 한 덕에 생각보다 일찍 샘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활짝 웃으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김지훈이 깜짝 놀라며 반색했다.

컨설트다.

타들어 가는 갈증을 풀어 줄 한 방울의 단비였다.

찢어지는 입을 간신히 감추고 병실과 의뢰 내용을 확인했다. 김지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응급은 아니지만 내일로 미룰 수술도 아니었다.

서울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해 왔다.

‘처음부터 만만치 않은 환자를 보내시네.’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단 전화기부터 들었다.

“선생님, 컨설트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환자가 깐깐해서 수술 받을지 모르겠어.)

“알아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가 너머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컨설트 냈다고 전화까지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여하튼 좋은 징조다.

다시 번호를 눌렀다.

“성민아, 컨설트 있다. 빨리 내려와.”

(컨설트요? 무슨 환자입니까?)

“혈관이야.”

화들짝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전공의 세 명이 우르르 내려왔다.

서둘러 병실로 향하려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컨설트야 어디로 접수시키든 상관없었지만 전공의는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3년차 치프가 어떤 환자인지 먼저 파악하고 교수에게 노티하는 것 또한 교육의 일부였다.

“간호사, 앞으로 컨설트 접수되면 조성민 선생에게 먼저 연락해요. 성민아, 환자에게 수술 설명까지 하는 건 무리라고 해도 질환과 상태까지는 파악해서 노티해.”

“제가요?”

“뭘 그렇게 놀라? 너 치프야. 가자.”

병실로 올라가던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앞서가는 김현철과 송진우의 손에 혈관 수술 자료가 들려 있었다. 탈장 수술에 놀라 복강경부터 열심히 준비했을 것이다. 구겨짐 하나 없는 빳빳한 자료를 보는 순간 한눈에 알아챘다.

혹시 조성민은 읽어 봤을지 모르지만 하루 이틀 준비한다고 알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더구나 수술은 이론보다 훨씬 어렵다.

‘자식들! 노력은 가상하다만 써전은 손으로 말하는 거야. 퍼스트 못 서는 놈은 죽음이지. 오늘 수술하게 되면 한 번은 봐줄까? 참관 경험이 있는 송진우 너는 아니다.’

환자를 만났다.

전형적인 만성 신부전 환자였다.

까만 얼굴에 빼빼 마른 몸.

기운 하나 없는 얼굴.

다소 까칠하고 신경질적인 말투.

감정이나 기분에 휘둘리면 절대 환자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환자 역시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라 만성 신부전이란 병이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환자 분. 일반외과 김지훈입니다. 수술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들렸습니다. 이번이 첫 수술이 아니시네요.”

“왼쪽 손목 다 써먹고 오른쪽에 해야 하는데 수술 잘할 자신 있습니까? 경험은 많아요? 내과 과장님이 하도 잘 치료해 주셔서 말씀에 따르기는 하는데 자신 없으면 고마 때려치소. 얼굴 보니까네 많이 젊네.”

역시 삐딱하다.

에둘러 말하지도 않았다.

경상도 특유의 억양이 겹친 탓인지 강한 불신까지 느껴졌다. 그러나 구미 생활 이미 여러 번 했다. 말투만 다를 뿐 환자의 속마음은 어디나 다르지 않다.

의사에 대한 신뢰는 의사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김지훈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경험이 적지는 않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말로는 누구나 다 잘할 수 있다고 안 캅니까?”

자만이 아니라면 자신감을 보여도 좋을 때였다.

“제게 혈관 수술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께서 항상 3년 이상 쓸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 지키기 위해 열심히 배웠습니다.”

“3년 이상?”

환자 표정이 묘해졌다.

3년보다 오래갈 수도 있고, 훨씬 빨리 망가질 수도 있는 것이 혈관이다. 세월이 흘러 기술이 좋아지면 더 오랜 시간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 그 전에 또 다른 혈관 수술을 받아야 한다. 투석을 해야 하는 환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믿어도 됩니까?”

“환자 분이 믿지 못하시면 수술 못합니다.”

의사와 환자 간의 신뢰는 말 몇 마디로 얻을 수 없다.

김지훈이 자세한 설명을 이어 가며 차분하고 조심스럽게 환자의 손목을 잡았다. 동맥을 따라 전해지는 박동이 제법 강했다.

“이 정도면 좋은 결과를 기대해도 되겠습니다.”

‘젊은 의사가 되게 꼼꼼하네.’

자신을 진찰하는 모습을 보던 환자의 표정이 변한 것 같았다. 그때 김지훈을 유심히 보고 있던 환자 한 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며 중얼거렸다.

“저 선생님 얼굴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아! 방송. 일반외과 그 뭐라고 했는데. 뭐였지?”

“내도 봤다. 일반외과, 그 하루. 맞제?”

TV에 나왔다고 하면 일단 뜬다.

6인실에 입원한 환자와 보호자 중 단 두 명만이 방송을 봤는데 갑자기 떠들썩해졌다. 없는 얘기, 있는 얘기가 요란스럽게 오고갔다.

눈가를 찌푸린 채 듣고 있던 환자의 눈빛이 서서히 변했다. 대사 부인까지 수술했다는 말에 의외라는 눈치를 보이며 김지훈을 보았다.

“저 사람들이 하는 말 맞습니까?”

“방송에 나오긴 했습니다.”

“뭘 그러게 고민해? 현관에 붙은 포스터도 못 봤나?”

“봤다. 그기에는 혈관 수술이 없잖아. 기지배처럼 무슨 말이 그렇게 많나? 수술 니가 받나? 내가 받는다.”

“기지배? 니 지금 날보고 기지배라고 했나?”

떠들썩했던 병실에 고성까지 오고 갔다. 이러다 수술 승낙을 받기는커녕 싸움 구경만 할 판이었다. 불구경에 버금가는 재미라지만 지금은 사절이다.

김지훈이 손을 저으며 중간에 끼어들었다.

“환자 분 말씀이 맞습니다. 의사를 믿지 못하면 수술 받을 수 없죠. 의사 역시 신뢰를 받지 못하면 수술하기 힘듭니다. 아시다시피 혈관 수술이 쉽지 않으니까요. 마음 편하게 결정하시면 됩니다.”

솔직한 말 때문일까?

빤히 김지훈을 보던 환자가 한동안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꽤 젊어 보이는데 경험이 많은 모양입니다. 그라모 내 한 번 믿고 수술 받겠습니다. 만일 실패하면 책임져야 합니다.”

혈관 수술 경험인지 아니면 환자를 본 경험을 말하는지 몰라도 생각보다 쉽게 결정됐다. 무엇이 됐든 간에 방송과 홍보 덕을 무시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서 훈철이 형님 덕을 보네.’

“알겠습니다. 그럼 정성호 과장님과 상의해서 오늘 중으로 수술하겠습니다.”

“오늘 중으로요?”

“지금 사용하는 혈관이 거의 다 망가졌는데 하루라도 빨리 받으시는 것이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나야 좋지만 지금 시간이······.”

내일이면 마음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김지훈이 정색을 하며 바로 조치를 취했다.

직접 정성호 과장을 찾아 인사를 했다. 빠른 진료와 기대하지 못한 수술 결정에 도리어 고맙다고 해야 할 정성호 과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꽤 까칠한 환잔데 벌써 수술 결정까지 다했어? 환자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잘 아는 모양이네. 그런데 이게 인사 받을 일이었나?’

김현철이 스케줄을 들고 수술 방으로 달려갔다. 조성민이 초조한 기색으로 송진우를 닦달했다. 그러나 송진우도 혈관은 참관 경험만 있다 뿐이지 실조차 잡아 본 적이 없다.

자료 뒤지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가 내려왔다.

이럴 때는 한 시간이 마치 일 분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머릿속이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진 조성민이 사색이 됐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가고 있었다.

“어후! 큰일 났다. 진우야,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 딱 하나만 말해 봐.”

송진우가 잠시 뜸을 들였다.

핵심은 몰라도 기본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만에 하나 타이하게 되면 무지하게 잘해야 합니다.”

“무지하게?”

“예. 김지훈 선생님도 타이하고 수처 제대로 못한다고 신기동 선생님께 매일 타셨을 정도입니다.”

“타이하고 수처 때문에 김지훈 선생님이 탔다고?”

“참관만 해도 땀이 날 정도로 살벌합니다.”

“난 죽었다. 뭔 놈의 수술이 모 아니면 도냐. 이왕 오는 거 적당하게 섞어서 오면 안 되나? 진우야, 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입맛 다시는 소리만 들렸다.

세상 무심하게 환자는 빨리도 내려왔다. 최대한 느릿하게 수술실로 옮겼지만 1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조성민의 가슴이 논바닥처럼 타들어 갔다.

김지훈이 눈을 감은 채 수술 과정을 상기했다.

서울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몇 건씩 했던 수술이지만 구미에서는 처음이다. 비수를 날리며 조언해 줄 신기동 교수도 없다. 만약 실패한다면 예민한 만성 신부전 환자들은 결코 새로운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구미에서는 무슨 수술을 해도 처음인데 차분하게 늘 했던 대로 하자. 원활하게 하려면 참관이라도 한 진우가 나은데 어떻게 하지?’

누구나 첫 번째 수술이 있기 마련이다. 조금이라도 편하기 위해 이런저런 핑계를 댄다면 트레이닝은 아예 생각하지 않아야 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교수로서, 집도의로서, 과장으로서 전공의 교육조차 못 시킬 정도라면 직함을 내려놓은 것이 맞았다. 생각을 정리하자 어렵지 않게 결정할 수 있었다.

소독을 하려던 조성민이 멈칫거렸다.

김지훈의 손이 떡하니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조성민, 오늘 수술 잘 봐. 만성 신부전 환자는 면역력이 약하기 때문에 소독부터 철저히 해야 돼. 혈관 수술은 기회가 딱 한 번뿐이니까 수술 중에 절대 잡생각 하면 안 된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김지훈이 직접 수술 준비를 시작했다.

마치 눈에 확실히 박아야 한다는 듯 하나하나 세심하고 천천히 진행했다. 조성민이 눈가를 좁혔다. 소독 정도는 다른 수술과 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김지훈의 손을 보니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할 일도 없는데다 혈관 수술 역시 처음이기에 전공의 세 명이 모두 들어왔다. 김지훈이 직접 소독을 하자 더욱 강한 긴장, 초조, 두려움, 불안이 한데 뒤섞여 감돌았다.

혈관 수술 때 분위기를 잘 아는 송진우가 가장 긴장했다. 어시스트를 서야 하는 수술 방의 이 간호사 역시 전공의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얼마나 있을지 모르지만 혈관 수술은 당분간 내가 어시스트 설게요. 조심해야 할 일이 너무 많거든요.”

“고 샘, 고마워요.”

당연한 일일수록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갖는 힘은 크다. 탈장에 이어 두 번째 수술을 들어온 고경아가 웃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한다면 구미 3개월이 힘들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 것이다.

수술이 시작됐다.

손목을 절개하는 손길이 여간 섬세한 것이 아니었다. 지혈 역시 주변 조직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바늘처럼 가느다란 보비 팁을 사용했다.

“보비.”

너무 긴장한 탓에 조성민의 손이 살짝 떨렸다.

김지훈이 슬쩍 눈길을 주었다.

신중한 손길을 따라 동맥과 정맥이 노출됐다.

박리된 부분이 말끔해 보였다.

절개 부위에 작은 리트랙터를 거는 송진우의 손길이 침착하고 정확했다. 퍼스트는 단 한 번도 서 보지 못했지만 역시 보고 들은 것이 있었다.

“혈관 겸자 주고 이리게이션 준비합시다. 조성민, 수술 중에 혈액 응고 발생하면 기능에 문제 생긴다. 석션할 때 혈관 건드리면 안 돼. 못 써먹을 수도 있어.”

김지훈이 세세하게 주의할 점을 설명했다.

자료를 백번 본다한들 배울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국소마취인 탓에 소곤거리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말해 모두들 바짝 귀를 기울였다.

고경아가 혈관 겸자를 건넸다.

드디어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과정이 시작됐다.

동맥과 정맥 양쪽을 혈관 겸자로 잡았다.

“루뻬 주세요.”

본격적인 수술이다.

고경아의 눈짓을 따라 이 간호사가 김지훈과 조성민의 이마에 루뻬를 씌워 주었다. 익숙함과 어색함의 차이가 극명하게 보였다.

초점을 맞추고 정맥부터 주행 방향에 따라 길게 절개했다. 심장으로 향하던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이리게이션!”

고경아가 조성민에게 헤파린을 섞은 식염수가 담긴 주사기를 건넸다. 맑은 물방울을 따라 정맥 내 피가 희석됐다.

“석션!”

혈관 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애를 쓰던 조성민이 움찔거렸다. 루뻬가 주는 어색함이 거리 감각마저 무디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손의 위치를 기준 삼으면 수월해.”

동맥이 같은 방향으로 절개됐다.

혈관 겸자 끝이 박동을 따라 톡톡 움직였다.

조성민이 침을 꿀꺽 삼켰다.

석션조차 쉽지 않을 정도로 대단히 섬세한 수술이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욱 심한 긴장이 다가온 것이다.

“혈관 연결합니다.”

김지훈이 첫 번째 수처를 했다.

루뻬가 혈관과 가느다란 봉합용 실을 확대해 주지만 생각 이상으로 정교한 손길이 필요한 부분이었다. 급하게 읽은 자료를 떠올리던 조성민이 눈가를 좁혔다.

‘정말 교과서대로 수술하시네. 그나저나 실이 이렇게 가는데 타이를 어떻게 하지? 끊어 먹는 거 아냐?’

두려워하던 순간이 눈앞에 닥쳤다.

“타이!”

조성민이 신중에 신중을 기해 타이했다. 살짝 불안했지만 실은 끊어지지 않았다. 매듭도 잘 만들어졌다. 처음치고는 제법 잘했다는 생각이 든 조성민이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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