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24화 (724/1,329)

9화. 풀린 매듭을 조이자. Ⅱ (1)

강기웅 이후 툭 하면 바뀐 일반외과 과장들은 정성호 과장이 원하는 만큼의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컨설트를 내도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내과와 직접적인 상관은 없지만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응급 환자마저 대구로 보내는 사태까지 속출했다. 결국 여기저기서 잦은 충돌이 일어났고 불신으로 이어진 것이다.

여파는 당연히 원인을 제공한 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처참할 정도로 떨어진 일반외과 수술과 입원 환자가 바로 그 결과였다.

“난 최철한 선생 올 때만 기다릴 거야. 붙박이하고 뜨내기는 달라도 한참 달라요.”

김지훈이 졸지에 뜨내기가 됐다.

3개월 한시적 근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같은 재단이라지만 전공의 순환 근무가 폐지되면서 교류마저 거의 없어진 탓이기도 했다. 서울이나 천안 병원에 올라가기 위해 눈도장 찍을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후우! 지훈이가 바로 분위기 확 잡아 주고 철한이가 빨리 와야 할 텐데 걱정이네. 정 과장 성격 만만치 않은데 설마 초반부터 쏘진 않겠지.’

두고 볼 일이었다.

구미에서 근무했던 그때의 김지훈이 맞는다면 걱정할 일이 없었다. 강한 불신마저도 서로를 모를 때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사소한 일에 불과할 것이다.

이용철 과장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김지훈이 연신 하품을 하며 눈가를 닦았다.

회진은 15분 만에 돌았고 예약 환자는 한 명도 없었다. 대신 다른 일거리가 있긴 했다. 외래 간호사가 서류 몇 장을 들고 왔다. 지난 주 입원과 수술 실적을 비롯해 일반 직원들이 담당하는 업무에 대한 서류까지 있었다.

“이거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 거예요?”

“한 번도 안 해 보셨어요?”

“난 이런 거 본 적도 없어요. 설마 이런 일을 매일 해야 되는 건 아니죠?”

“원래 토요일마다 작성하는데 쌤은 처음 오셔서 미리 해 보시라고 보낸 게 아닐까요?”

환자 문제만으로도 골치가 아픈 상황인데 엉뚱한 일까지 해야 했다. 첫날이라고 대충 적어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정성스럽게 작성했다.

그래야 9시 30분이다.

아무리 진료와 수술이 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숨 쉬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얼마나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는지 의자가 뜨끈뜨끈해지며 바지에 땀이 찰 지경이었다.

결단코 인턴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었다.

어제부터 계속 어색한 일만 이어졌다.

한가할 때 안면이라도 확실히 트면 좋을 것이다. 화장실 가는 척하며 슬쩍 다른 과 외래를 보니 월요일답게 다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은 돌아다녀 봐야 눈치만 보이겠다.’

좀이 쑤셨다.

2시간 째 외래에서 죽 치던 김지훈이 기지개를 펴며 일어났다. 손에 들고 있던 십자수를 재빨리 책상 아래에 숨긴 간호사가 물었다.

“쌤, 심심하세요?”

“많이 심심하네요. 외래 환자가 원래 적은 과지만 이건 너무한데요? 이번 주 예약 환자는 있어요?”

“수요일에 실밥 뽑으러 오는 환자 2명 있어요.”

“2명이요? 그나마 다행이네. 수술도 별로 없었다는데 전임 과장님은 근무시간에 뭐하셨어요?”

“컴퓨터 오락 하거나 아니면 관사에 가셔서 쉬셨어요.”

컴퓨터 오락?

불현듯 전공의 시절 며칠 간 잠 못 자며 불 태웠던 삼국지가 떠올랐다. 강렬한 유혹이 온몸을 휘감았다. 어딘 가에 숨겨져 있을 삼국지를 찾고 싶은 열망에 사로 잡혔다.

‘통일할 때까지 딱 한 판만 해 볼까?’

순간의 유혹의 넘어갈 뻔했던 김지훈이 고개를 강하게 흔들었다. 삼국지는 체질이자 악마의 게임이다. 환자까지 없는 마당인데 손댔다가는 그대로 폐인이 될지도 몰랐다.

‘어후! 몇 년 전인데 아직도 이런 생각이 들지?’

벌떡 일어나 찬물에 세수하고 진료실 문을 열었다. 수술 방으로 올라가 다른 과 수술이라도 보든지 아니면 응급실 탐방이라도 해야 몸이 풀릴 것 같았다.

그때 민혁기 원장이 불쑥 나타났다.

“김 과장, 어디 가나?”

“아닙니다. 할 일이 없어서 수술 방에 가려고 했던 참입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민혁기 원장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래. 가만히 있으면 올 환자도 안 오는 법이야. 내가 잘 왔네. 커피 한 잔 하면서 얘기 좀 하세.”

지난 기간 실적 통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누구 솜씨인지 일목요연한 것이 눈에 딱 들어왔다. 내과와 정형외과가 단연 돋보였고 심지어 흉부외과도 평균 입원 환자가 많았다.

그야말로 바닥을 기고 있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민망해진 김지훈이 입도 열지 못했다.

“이게 올해 일반외과 실적이야. 이런 말하기 싫지만 너무 하지 않아? 처참할 지경이야. 김 과장, 과장이란 자리가 자기 입만 풀칠하면 되는 게 아니야. 외래 간호사, 관련된 파트 간호사 그리고 검사실 직원에 행정 직원들까지 먹여 살려야 할 입이 한둘 아니다. 전공의 월급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나?”

민혁기 원장이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내가 행정적인 문제는 최대한 빼 줄게. 최철한 선생이 오면 신경 쓸 것도 없어. 김 과장은 오로지 일반외과 살리는 데만 전념해 줘. 이러다 병원 망하겠어.”

과장된 얘기도 있겠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이러저런 당부의 말을 한 민혁기 원장이 뭔가를 꺼내 들었다.

정말 민망한 일이 벌어졌다.

하얀 봉투였다.

“이거 이번 달 의국비야. 먼데서 왔는데 필요한 일에 쓰고 직원들과 얼굴 익히는 데도 썼으면 좋겠어.”

아! 의국비!

과장에게 주는 일종의 활동비일 것이다. 또한 열심히 일해 달라는 압박이기도 했다. 차마 손 내밀기 힘들었지만 마다할 성격의 돈이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봉투를 받아 든 김지훈이 살짝 놀랐다. 이번 달은 이미 보름 가까이 지났는데 은근히 두툼했다. 민혁기 원장이 나가자마자 액수를 확인했다.

파란 지폐가 무려 백 장이다.

‘한 달에 백? 병원 경영도 어렵다면서 환자도 없는 과에 무슨 돈을 이렇게 많이 주시지?’

세상에 공짜는 없다.

돈 줄 때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받는 돈 이상으로 일하라는 말이다. 정식 과장으로 부임하는 최철한이 올 때를 대비했을 지도 몰랐다.

어쨌든 공돈이 생겼다.

민망함도 잠시 씨익 웃으며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하던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삼국지에 이어 또 다른 유혹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비자금!

아서라! 말아라!

당장은 달콤하겠지만 정의가 아니다.

한 번 빼돌리면 계속 빼돌리게 된다.

‘에이! 의국에는 전공의들도 포함되는데 이 돈을 꿀꺽하면 사람이 아니지. 과장이면 과장답게.’

돈의 유혹 상당히 무서웠다.

더 흔들리기 전에 깔끔하게 해결해야 했다.

곧바로 전공의들을 불렀다.

숙소에서 퍼질러 자고 있던 조성민의 머리가 부스스했다. 그나마 김현철은 조금 나아 보였고 송진우만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일과 시간이다.

당장 한소리 하고 싶었지만 환자가 없어 찾아온 나태함일 뿐이었다. 먼저 과장으로서 할 일을 한 후에 질책해야 가슴으로 느낄 것이다.

‘같이 노는 처지에 무슨 말을 할까?’

“성민아, 지금 근무시간이고 넌 3년차다.”

가벼운 경고 한마디 날리고 50만 원을 내밀었다.

“의국비야. 유용하게 써.”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 의국비요? 갑자기 이게 무슨 돈입니까?”

“원장님이 너희들 밥 먹으라고 주신 돈이야. 삼겹살이라도 자주 사 먹어. 간호사, 이리 와 봐요.”

“커피라도 드릴까요?”

10만 원을 내밀었다.

“앞으로 커피든 과자든 이 돈으로 알아서 해결해요.”

“어머! 돈 남을 텐데요.”

“남으면 밥 먹읍시다.”

남은 돈도 적지 않다.

김지훈이 아직도 도톰한 봉투를 만지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비를 들여서라도 한 번은 회식할 생각이었는데 40만 원은 그야말로 횡재였다.

“성민아, 우리 과 전체 회식할 거니까 병동, 응급실, 수술 방 식구들 빠짐없이 챙겨. 이번 주 금요일에 하자.”

“예, 그럼 이 돈을 그때 사용하면 되겠네요.”

“그 돈은 너희들끼리 밥 먹을 때 써.”

조성민이 또 한 번 놀랐다.

돈 백만 원의 사용처가 밥, 밥, 밥이다.

아직도 남부럽지 않은 대식가답다.

사실상 근무 첫날에 전공의들과 마주한 자리다.

어제 밤부터 원장과 대화를 하는 동안까지 생각한 일이 있었다. 이론이 겸비되지 않은 트레이닝은 반쪽에 불과했다. 더구나 구미는 실전까지 매우 부족한 상태였다.

일단 하나라도 먼저 채워야 했다.

김지훈이 전공의들을 둘러보며 씨익 웃었다.

“다들 따라와.”

은근한 두려움이 싸악 퍼졌다.

응급실부터 들렸다.

환자도 없는데 오하석이 쪼르르 달려 나왔다.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어느 순간부터 응급실 보고가 사라진 상태였다. 지금은 민혁기 원장이 간간히 확인하는 차원에 불과했다.

응급실이 탄탄하고 체계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서울 병원 방식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특별할 것은 없었다. 보고를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직급이 한 단계 내려가면 된다.

“성민아, 내일부터 아침 7시 30분에 응급실 환자 보고를 받을 거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보고해.”

“예? 다른 과 환자들까지 보고해야 합니까?”

“우리 과에서 응급실을 맡았으니까 당연하지. 진우야, 만일 환자 때문에 손이 딸리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예. 선생님. 간호사, 환자 밀리면 나나 현철이에게 연락하세요. 바로 내려올 겁니다.”

김현철은 깜짝 놀라고 간호사들은 반색했다. 오하석은 아예 좋아 죽었다. 총 환자 수가 적다고 해도 한 번 몰리면 정신없긴 매한가지기 때문이었다.

김지훈이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

“성민이 너도 당직 때는 마찬가지야.”

주머니 속에 든 의국비가 전하던 즐거움이 슬슬 사라지기 시작했다. 응급실 밖으로 나가는 김지훈의 뒤를 따르던 조성민과 김현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행선지가 엉뚱하다.

“선생님, 어디 가십니까?”

“주차장. 따라와.”

애마 앞에 섰다.

트렁크를 열자 책과 자료에 비디오테이프까지 한가득이었다. 김지훈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내가 구미에 왜 왔는지 알지? 라파로하고 혈관 수술에 관한 자료야. 언제 수술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전까지 확실하게 숙지해.”

조성민이 깜짝 놀랐다.

“예? 저걸 다요?”

“설마 많다고 그러는 거야? 수술도 없는데 하루 종일 뭐하려고 그래? 잠은 밤에 자고 나머지 시간에 공부라도 해. 빨리 갖고 가.”

김지훈이 홱 돌아섰다.

‘첫날부터 이게 무슨 일이지?’

멍한 표정을 짓던 조성민이 송진우를 보았다.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했다.

“진우야, 언제 확인하실 것 같아?”

“확인은 따로 안 하실 겁니다. 대신 수술이 잡히면 이삼 일 전부터 죽었다고 복창하면 됩니다. 이론으로라도 전 과정을 완전히 꿰고 있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 생각보다 빨리 잡히면 죽을 수도 있겠네. 환자는 전과 다름없는데 갑자기 일이 훅 늘어나는 느낌이 진하게 다가온다. 깜박이도 안 키시네.”

어딘지 모르게 손일석 냄새가 풍겼다.

“김지훈 선생님 일복 터지면 당직 때 잠자기 힘듭니다. 미리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뭔가 섬뜩한 느낌이 든 조성민과 김현철이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묵직한 자료의 무게에 낑낑대며 숙소로 올라간 전공의 세 놈이 정리부터 시작했다.

그마저도 꽤 시간이 걸렸다.

“아! 졸립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항상 바쁘게 사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팽팽 노는 것은 사람을 더욱 늘어지게 만든다.

최근 몇 달간 2년차가 없는데도 무척 편하게 살아왔던 조성민과 김현철이었다. 이제 자료 정리가 끝났을 뿐인데 벌써부터 피곤한 기색을 보였다.

김현철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에휴! 의국비 주실 때 삼겹살 생각에 좋았었는데 이거 다 공부하려면 언제 삼겹살 먹죠?”

“설마 며칠 내에 이런 수술이 뜨겠어? 오늘은 정리까지만 확실하게 하고 삼겹살부터 먹자. 당직은 돌아가면서 서면되니까 현철이부터 시작해. 백듀티는 상황 봐 가면서 정하자.”

송진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생님, 한 명씩 돌아가면서 서면 수술 떴을 때 응급실은 어떻게 합니까? 메이저 수술 퍼스트도 현철이가 섭니까?”

“메이저는 무슨. 대부분 대구로 가니까 당분간 그럴 일 없어. 환자가 확 늘면 모르지만 혼자 서도 무리 없이 잘 돌아가. 일복도 기본적으로 환자 많을 때 얘기 아니야?”

“그래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떠야 마이너고 무적의 인턴 있잖아.”

“만일 메이저 뜨면 인턴만 데리고 들어가실 겁니까? 김지훈 선생님이 절대 용납 안 하실 겁니다. 편하고 안 편하고를 떠나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성민이 입맛을 다셨다.

“너 왜 이렇게 빡빡해졌어? 만에 하나 환자가 늘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흘에 한 번 오프면 힘들어.”

갑자기 얼굴 벌게진 송진우가 소리쳤다.

수술에 대한 갈증은 절대 사라질 놈이 아니었다.

“그럼 제가 평일 오프를 포기하겠습니다. 선생님과 현철이는 이틀에 한 번씩 오프 가십시오.”

가슴에서 우러나온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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