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23화 (723/1,329)

8화. 풀린 매듭을 조이자. (2)

키는 한 뼘 정도 작고 천생 여자 눈이었다.

“오하석 선생?”

“예. 오하석입니다.”

“응급실 인턴이 왜 들어왔어? 환자 있어?”

“마침 환자가 없어서 수술하시는 거 보려고 들어왔습니다. 저 구경해도 되죠? 헤헤!”

이름도, 말투도, 하는 행동도 중성적이다. 웃음소리는 어린 남자아이처럼 귀여웠다. 긴장해야 할 수술실에서 함부로 웃으면 경을 치지만 열정 때문인지 대견하게만 보였다.

“혹시 일반외과 하고 싶어?”

“그건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겸사겸사 들어왔습니다.”

“잘 모르겠다는 말은 하고 싶다는 말 아니야?”

“예의상 드린 말씀입니다. 헤헤!”

기분 좋은 웃음소리만 들렸다.

오자마자 자꾸 웃게 만드는 오하석이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예의상 수술실에 들어올 리 없지. 여자 일반외과 의사라! 체력이 따라 줄까?’

성급하다 못해 엉뚱하기만 한 생각을 하던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아뻬인데도 불구하고 수술 방 당직 간호사들이 모두 다 들어왔다. 눈가에 궁금함이 한껏 걸려 있었다. 게다가 어느 틈에 고경아까지 보였다.

‘메이저 수술도 아닌데 이게 무슨 난리야?’

생각과는 달리 묘한 긴장이 다가왔다.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구미 첫 수술이다.

펠로우 2년차이자 구미 과장이라는 사실을 싹 잊고 수술 과정을 되새겼다. 마치 첫 집도를 앞둔 전공의 1년차처럼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조성민의 눈빛이 묘해졌다.

어느새 마취가 끝났다.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네. 김 과장님, 시작하세요.”

메스를 든 김지훈이 긴장을 끌어올렸다.

2센티미터 정도 절개했다.

너무 작은 절개창에 조성민과 김현철이 흠칫 놀랐다.

켈리로 슥슥 복벽을 벌려 가며 복막까지 열었다.

“아미(Army).”

김지훈이 필요한 기구의 정확한 이름을 댔다.

아미 네비(Army navy) 리트랙터는 가장 작은 리트랙터의 일종으로 줄여서 아미라고 부른다.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춘 서울이라면 리트랙터라고 해도 알아서 주겠지만 구미 간호사에게는 낯설 것이다.

급히 아미를 준비하느라 잠깐 수술이 지연됐다.

절개창이 너무 작아 간신히 복벽을 걸 수 있을 정도였다. 세컨을 서는 송진우가 익숙하게 아미를 걸었다. 그래도 배 속이 간신히 보일 지경이었다.

“롱 포셉(long forcep), 두 개.”

맹장 주변을 뒤적이는 순간 아뻬가 툭 튀어나왔다.

송진우 얼굴처럼 빨갛게 잘 익었다.

순식간에 자르고 묶었다.

퍼스트인 조성민이 할 일은 거의 없었다.

아미로 한쪽 복벽만을 걸고 배 속에 무영등 초점을 맞췄다. 롱 포셉을 적절하게 사용해 제법 깊숙하게 위치한 소장과 대장까지 확실하게 확인했다.

첫 수술이니만큼 끝까지 마무리하고 싶었다.

“배 닫습니다.”

“벌써? 김 과장, 아뻬 뗀 거 맞지?”

여유롭게 모니터를 보고 있던 이용철 과장이 당황했다. 서둘러 호흡 마취제를 중단하며 고개를 내밀었다.

“큰일 났네. 배 닫을 때까지 환자 못 깨울지도 모르겠다. 간호사, 빨리빨리 약 줍시다.”

어느새 마지막 봉합이 끝났다. 마취 시작부터 중간에 지연된 시간을 포함해 불과 25분이 조금 더 지났을 뿐이었다.

수술 시간은 훨씬 짧을 수밖에 없다.

이용철 과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확실히 다르네.’

아직도 환자는 깨어나지 못했다.

몇 분 지나고서야 환자가 몸을 비틀었고 기관 내 삽관을 제거할 수 있었다. 고경아와 송진우를 제외한 모든 의료진들이 조금은 묘한 눈빛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어쩌면 전임 과장들과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사실 손 빠른 써전은 얼마든지 있다.

빠른 손이 기본이라면 얼마나 정확하고 깔끔하게 끝내는지에 따라 평가가 갈린다. 비록 아뻬지만 김지훈의 첫 수술은 흠 잡을 곳 없었고 가벼운 감탄까지 자아냈다.

절개창마저 작아도 너무 작았다.

‘수술 잘하신다는 말은 들었는데 정말 빠르시네. 확실히 다른 것 같다. 김지훈 선생님이라면 메이저 수술도 많이 잡으시겠지? 꼭 그랬으면 좋겠다.’

조성민과 김현철의 솔직한 느낌이자 바람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 이 간호사도 수고했어요. 참! 과장님,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듯 이용철 과장이 빙그레 웃었다. 의료진의 편의와 상호 간의 양해도 중요하지만 수술 문제는 최대한 환자 입장에 맞추는 것이 마땅했다.

“앞으로 응급 수술 떴을 때 메이저야 바로 해 주시겠지만 마이너 수술도 신경 써 주십시오.”

이용철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좋아. 단, 예전처럼 새벽 3시 이후에 오는 아뻬는 아침에 하자. 근데 아뻬가 뜰까?”

“쌤, 3시요?”

간호사의 비명 소리가 들렸지만 이용철 과장이 힐끗 눈길만 주었다. 김지훈이 와 상황이 바뀌었을 뿐인데 놀랄 일이 뭐가 있냐는 눈빛이었다. 도리어 김지훈이 살짝 미안한 얼굴을 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 구미하면 아뻬 아닙니까?”

“아뻬 밭이란 소리는 옛날 말이지 지금은 그렇게 많지 않아. 김 과장이 전공의 때 무식하게 떼어 댔는데 남아날 리가 있겠어? 구미 인구가 얼마나 된다고.”

“저희 때 그랬나요?”

“시치미 떼지 마. 주말 오프 때 아뻬 때문에 저녁 늦게 간 일 잊었어? 그것도 양방이었다.”

새록새록 추억이 다가왔다.

정말 손가락에 쥐가 날 정도로 수술했었다.

아뻬만으로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환자가 병실로 올라갔다.

‘경아 씨하고 오하석 선생은 언제 나갔지?’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오하석을 찾으며 수술 방을 나갔다. 김현철은 오더를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별 생각 없이 숙소로 향하려던 조성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우야, 어디가? 숙소는 이쪽이야.”

“병실 안 가세요?”

“학교 다닐 때도 성실하더니 여전하구나. 현철이가 올라갈 거야. 피곤할 텐데 오늘은 쉬어.”

“안 됩니다. 김지훈 선생님 벌써 병실에 올라가셨을 거예요. 어떤 수술을 해도 환자는 꼭 보고 가십니다.”

“그래? 야 인마, 그런 건 일찍 얘기했어야지. 구미 상황만 들으면 끝이야? 이 자식 큰일 날 놈이네. 현철아, 빨리 올라가자.”

조성민이 등짝을 한 대 후려치며 후다닥 사라졌다.

헐레벌떡 병실로 올라갔을 때는 김지훈이 환자 상태까지 확인한 후였다. 병실을 나오는 순간 입가에 걸렸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어떤 경우든 첫 단추가 중요하다.

눈빛이 서늘해졌다.

“조성민, 똑바로 하자. 첫 수술부터 이런 식이면 곤란해. 송진우, 넌 구미 왔다고 긴장 푼 거야? 내일이라도 병옥이하고 바꿀 수 있어.”

똑바로 하라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뇌리를 강타했다. 한겨울이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찬바람이 휙휙 불었다. 조성민과 송진우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진우야, 분위기 싸하다.”

아무 말도 없었다.

얼굴 벌게진 놈만 보였다.

다음 날 아침, 습관처럼 일찍 눈을 뜬 김지훈과 고경아가 한참 동안 눈만 멀뚱거렸다.

“지훈 씨, 너무 이르죠?”

“그러게. 너무 일찍 일어났네요. 응급실 들를 일도 없고, 회진은 일이십 분이면 끝나고, 오전 수술도 없고, 외래는 9시부터 시작인데 뭐하지? 8시쯤 나가서 밥 먹고 각자 갈 길을 가면 되지 않을까요?”

준비 다했는데 아직 30분도 더 남았다.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이용철 과장이었다.

“김 과장, 어제 내가 깜빡 잊고 말을 못했어. 8시에 과장 회의 있으니까 빨리 가서 밥 먹고 회의 참석하자. 인사도 해야지.”

“과장 회의요? 저도 참석해야 합니까?”

“뭘 그렇게 놀라? 그럼 일반외과에서 누가 참석해? 적응 좀 빨리 하자. 과장이란 말이 그렇게 어색해?”

알고 있는 것과 귀로 듣는 것은 다른 모양이었다.

여전히 과장이라는 말이 심하게 어색했지만 할 일도 없던 차에 차라리 잘됐다. 고경아를 인사시키고 함께 출근했다. 걸어서 5분도 안 걸리는 거리다.

“지금은 제수씨, 병원에서는 고 간호사. 이러면 되겠죠? 내가 말은 안 했지만 김 과장을 동생처럼 여기거든요.”

“네. 과장님. 잘 부탁드려요. 편하게 대해 주세요.”

밥부터 먹었다.

예전 그 맛 그대로였다.

주방 아주머니는 바뀌지 않은 모양이었다.

의외로 맛있다며 잘 먹는 고경아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환경도 낯설고, 친구도 없는데 입맛까지 안 맞으면 타지 생활 배로 힘들어질 것이다.

‘우리 경아 은근히 생활력 강해. 다행이다.’

수술 방 휴게실로 올라가 커피 한 잔하며 주간 근무를 시작하는 수술 방 식구들과 인사를 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인사만 하고 다녀야 할 것이다.

8시 10분 전이다.

이용철 과장과 함께 회의실로 향했다.

각과 과장들이 하나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일반외과 김지훈입니다.”

첫인상 대단히 중요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일일이 인사했다. 나이 차는 제법 나지만 대부분 학교 선배라 낯이 익었다. 그런데 정작 가장 밀접하게 협력해야 할 내과 과장은 본 적이 없었다.

“김지훈 선생, 반가워. 내과 정성호야. 내 얼굴 잘 모르지? 나 수련할 때 학교 들어왔을 테고 내가 근무한지 이제 3년째라 볼 수가 없었네. 앞으로 잘해 보자.”

왠지 표정이 밝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구미 병원 원장이 자리에 앉았다.

간단한 소개에 이어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난생 처음 참석하는 과장 회의가 열렸다.

프린트물과 함께 전반적인 병원 설명이 이어졌다. 핵심은 현재 구미 병원이 어렵기에 모든 과장들이 최선을 다해 달라는 말이었다.

“김지훈 선생, 오자마자 이런 말부터 해서 미안한데 일반외과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줘. 입원 환자부터 수술 건수까지 바닥이야. 아무리 대학 병원이라지만 월급은 나와야 할 거 아니야?”

그동안 어떤 상황이었는지 파악한 탓에 민혁기 원장의 얼굴이 상당히 답답해 보였다. 한편으로는 당혹스러웠다. 지금까지 이런 자리에 참석한 적은 물론 이런 말을 들어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과장 회의가 이런 건가? 실무에 관한 말은 생각했지만 월급 얘기까지 나올 줄은 몰랐네.’

“우리 정성호 과장하고 잘 협조해서 라파로든 뭐든 일반외과 좀 살려 줘. 라파로 말고 특별하게 하는 수술은 없나?”

일반외과에서 특별한 수술이 뭐가 있을까?

자신을 갖고 할 수 있는 수술 중 특별함을 꼽으라면 혈관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내과에서 투석을 얼마나 하는지에 달린 일이었다.

“만성 신부전 환자 혈관 수술이 가능하긴 합니다만 내과 사정을 잘 몰라서······.”

조용히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던 정성호 과장이 갑자기 고개를 내밀었다.

“김지훈 선생, 혈관 수술 할 줄 알아?”

“예, 신기동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그래? 케이스 있으면 보내도 돼?”

“언제든지 보내 주십시오.”

정성호 과장이 입술을 모은 채 잠시 김지훈을 보았다.

눈가에 주름까지 잡혔다.

확실하지 않지만 믿어도 되는지 의심하는 눈치였다.

수술 실력을 못 믿는 걸까?

‘분위기 묘하네. 내과 과장님 눈치가 저러면 도대체 전임 과장은 일을 어떻게 한 거야?’

책임은 없지만 같은 일반외과 의사이자 후임 과장이라는 사실 때문인지 은근히 신경 쓰였다. 곧 잡다한 일들까지 빠르게 논의한 후 회의가 끝났다.

김지훈이 먼저 일어났다.

“이용철 선생님, 별일 없으면 먼저 가 보겠습니다. 외래 간호사와 인사를 못해서요.”

“그래. 빨리 가 봐. 이따 점심 같이 먹자. 아! 원장님이 빼먹은 얘기가 있어. 일반외과 과장이 응급실 과장까지 겸하는 거 알지?”

“응급실 과장까지요?”

“그래. 당장 서울 병원 돌아가는 것처럼 안 되도 철한이 오기 전까지 체계는 확실하게 잡아 줘. 마취과 과장이 아니라 부원장으로서 말하는 거야. 잊지 마.”

헉! 이용철 과장이 부원장을?

병원이 작은 덕도 있지만 그만큼 애정과 열정을 갖고 일해 왔다는 의미였다. 자리와 나이가 반드시 비례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김지훈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부원장님.”

“형식만 그런 거니까 과장이라고 불러.”

김지훈이 사라지자 정성호 과장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이용철 과장에게 다가왔다.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김지훈 선생 괜찮은 사람이야?”

“전 주에 내가 한 말 잊었어? 말해 뭐해. 진국이야. 진국. 나도 최근에 수술 줄어서 눈치 보였는데 기대가 커. 어젯밤에 벌써 아뻬 한 건 했어.”

“아뻬 하나 한 게 대수야?”

시답잖은 표정을 지었다.

“안 터진 아뻬니까 그렇지.”

“서울에서는 어떻게 일했는지 모르지만 여긴 구미야. 혼자 근무하니까 힘은 들겠지만 과장 타이틀을 목에 걸었잖아. 게다가 3개월만 일하면 끝인데 얻을 게 뭐가 있다고 열심히 하겠어? 티 나는 일도 아니고. 전에 근무했던 과장보다야 낫겠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이용철 과장이 고개를 저었다.

“두고 봐. 깜짝 놀랄 거야. 괜히 가자미 눈 하지 말고 일단 믿고 예쁘게 봐. 후배잖아?”

“이 과장도 사람 너무 잘 믿어서 탈이야. 당장 일반외과 당직부터 생각해 봐. 둘이 서도 불만이 있었는데 혼자 어떻게 서? 하루 이틀 빠지다 보면 그냥 쭉 쉬게 되는 거야. 멀리서 찾지 마. 강기웅 때도 고생 무지하게 했다며.”

“도대체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야? 지훈이는 강기웅하고 비교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요.”

정성호 과장이 코웃음을 쳤다.

“그 이후로 일반외과가 저 모양 저 꼴 된 거 아니야. 강기웅보다 낫다고 해도 사람 속을 어떻게 알아? 수술만 잘한다고 다 용서되는 게 아니잖아?”

사람을 알기도 전에 불신이 팽배했다.

입맛 다시는 소리만 들렸다.

이해 못할 바가 아니었다.

구미에서 가장 열정 넘치는 의사가 바로 정성호 과장이었다. 부임한 이후 환자를 상당히 많이 늘렸고 그만큼 강한 신뢰와 인정을 받았다.

환자 욕심도 대단했다.

순수 내과 환자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내과 치료에 실패한 환자들 다수가 외과 치료를 요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따라서 두 과의 협력이 매우 중요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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