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22화 (722/1,329)

8화. 풀린 매듭을 조이자. (1)

일단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나름 성심 성의껏 회진을 돌던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외과 병동인데 내과 환자가 결코 적지 않았다. 내과 주 병동이 3층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상당히 많다는 말이었다.

그중 수술을 요하는 환자 비중은 얼마나 될까?

모르긴 몰라도 현재 외과 입원 환자 수보다 많을 것이다.

가장 긴밀히 협조해야 할 과가 내과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든 아니면 하다못해 알력까지 무엇인가 심각한 문제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내과 과장님을 만나면 알 수 있겠지.’

상당히 힘 빠지는 상황이었다. 애매모호하고 난감한 기분이 드는 순간 조성민이 눈에 들어왔다. 가히 의사 인생이 걸렸다고 할 정도로 큰 문제가 보였다.

한 명이라고 해도 3년차 치프다.

1년 후에는 전문의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이론은 몰라도 수술 부분에서 필요조건조차 충족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성민아, 전문의 시험 때 필요한 수술 수첩 받았지?”

“예. 받았습니다.”

“보자.”

김지훈이 대답도 듣지 않고 전공의 숙소로 향했다. 조성민이 얼굴을 붉히며 수술 수첩을 꺼냈다. 첫 장을 펼치는 순간부터 한숨이 나왔다.

대부분 마이너 수술이었다. 메이저 수술은 가물에 콩 나듯 보였다. 그나마도 몇 개월 전이었다. 불현듯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아무리 그만둔다고 해도 몇 달을 이런 식으로 일해? 후배들을 책임지지 못하면 하윤호와 다를 바가 뭐가 있어?’

계속 답답한 일만 벌어졌다.

이럴 바에는 몸이 힘든 것이 차라리 나았다.

후배들을 앞에 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성민과 김현철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몸이 편한 이상으로 마음고생 많이 했을 것이다. 원하지 않는 일이 불가항력적으로 벌어지면 더욱 그렇게 된다. 눈빛과 표정을 보니 이제는 의욕마저 상당 부분 꺾인 것 같았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수술은 당장 어쩔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일부터 해야 했다. 뚜렷한 목표가 있다면 활기와 열정을 되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급하게 생각하면 도리어 일만 꼬인다. 일단 상황부터 확실하게 파악하고 차근차근 정리해 나가자.’

터덜터덜 관사로 돌아갔다.

지금까지 단 한 통의 전화도 오지 않았다.

정식 근무 전이라지만 당직인데 어색하다. 이런 어색함은 인턴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둘이 살기에 관사는 꽤 넓었다. 한쪽 벽에 머리 대고 온몸을 쭉 뻗어도 TV까지 꽤 공간이 남았다. 그 덕에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가셨다. 병원에서 배려한 덕에 기본적인 세간까지 갖춰져 있었다.

김지훈이 소파에 몸을 던졌다.

“얼굴이 왜 그래요?”

상황을 설명하자 고경아의 표정이 묘해졌다.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식구가 아니라 간호사로서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도 잠시, 소파에 몸을 묻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아야! 왜 꼬집어요?”

고경아가 손톱을 세운 채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여자는 신경 안 쓸지 모르지만 정말 아프다.

눈에 쌍심지를 켠 모습이 상당히 섬뜩했다.

“구미에서 도대체 어떻게 생활한 거예요? 병원 간호사 중에 지훈 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네. 일 안 하고 나 몰래 데이트하고 다닌 거 아니에요?”

사나운 불길까지 쏟아졌다.

안 그래도 관사로 돌아갈 때 표정이 불안했다.

눈곱만치도 제 발 저릴 일이 없었는데 막상 할 말도 없었다. 점점 무시무시해지는 고경아의 눈을 보는 순간 생존 본능이 발휘됐다.

순간적으로 휙휙 머리가 돌았다.

무엇이 됐든 수긍할 수 있는 멋진 핑계가 있어야 한다. 빠르게 스치는 생각 중 하나를 잡아 다급하게 토해 냈다.

“내가 워낙 열심히 일해서 기억할 거예요. 그리고 방송 본 모양이지. 일반외과 그 하루! 내가 서울에서 인턴 할 때 방송에 나왔었잖아요. 그때도 알아봤는데 내 얼굴을 모를 수가 있겠어요?”

고경아가 갸웃거렸다.

“현수막까지 걸렸으니까 더 궁금했겠지.”

말하고 보니, 듣고 보니 그럴 듯했다.

사실 맞는 말일 지도 몰랐다.

병원을 나오다 현관에 붙은 홍보물을 무심코 보았다.

복강경 소개와 함께 떡하니 김지훈 과장이라고 소개돼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방송까지 탔으니 병원 식구들이 주의 깊게 보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김지훈의 연이는 말이 효과를 발휘했다.

단, 앞으로 매사에 처신과 행동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반갑다고 덜컥 손이라도 스쳤다가는 매서운 손톱 맛을 보아야 할지도 몰랐다.

상황이 진정됐다.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는 사이 슬슬 졸음이 몰려왔다. 고경아도 몹시 피곤해 보였다.

“응급실 환자가 별로 없다는 거네. 그거 하나는 다행이네요. 그래도 혼자 당직을 어떻게 다 서?”

“환자 늘려 가면서 잘 서야죠.”

아차! 말 잘못했다.

후다닥 흐릿한 조명만 남기고 이불 뒤집어썼다.

‘오늘은 푹 자고 내일 힘차게 출근하자.’

스르륵 눈을 감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조성민이었다.

(선생님, 아뻬 환자 한 명 있습니다. 지금 11시가 거의 다됐는데 내일 아침에 하시겠습니까? 일단 입원시키고 항생제 쓸까요?)

역시 김지훈의 일복은 구미 상황을 훌쩍 뛰어넘고도 남았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내일 하자고?”

(예. 급하지 않은 환자는 그렇게 해 왔습니다.)

김지훈의 눈이 말똥말똥해졌다.

미루자는 근거도 빈약하고, 서울에서 어떻게 일했는지 빤히 아는 놈, 송진우는 뭐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성민아, 이제 11시밖에 안 됐어. 항생제로 아뻬 진행을 조금은 지연시키겠지만 내일하면 10시간이 넘어. 그러다 터지면 어떻게 할래? 옆에 진우 없어?”

전화기 너머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송진우가 옆에 있었다. 혹시 다른 이유가 있다면 마취과에서 마이너 응급 수술을 꺼려 할 수도 있었다.

“이 시간에 아뻬 수술하면 마취과에서 뭐라고 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전공의도 있고 교수님 두 분 아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자신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확실하게 터진 아뻬가 아니면 거의 한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좋아하시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공의 때는 물론 인턴 때도 이런 일이 없었다. 불과 이삼 년 만에 분위기가 확 바뀌다니 의아하면서도 놀라웠다.

‘이건 아니다. 아뻬라고 이 시간에 수술 못하면 결국 응급이라는 의미가 없잖아. 우리 과는 물론 마취과나 응급실도 밤에는 있으나 마나지.’

병실이 없거나 혹은 수술실이 꽉 찼을 때 양해를 구하고 넘어갈 일이었다. 만일 마취과에서 난색을 표한다면 첫날이라고 해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구미 근무가 순조로울 것이다.

결코 일을 자처하는 것이 아니다.

원칙을 지킬 뿐이었다.

김지훈이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지금 나갈게. 마취과에는 내가 직접 연락할 테니까 일단 수술 준비해.”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어쩐지 불안하더라.”

고경아가 첫날부터 응급 수술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일복 어디 가지 않는 것일까?

못들은 척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응급실은 관사 코앞이다.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응급실에 들어선 김지훈이 환자부터 살폈다.

아뻬가 확실했다.

진찰하는 내내 오하석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전공의들보다 더 큰 열성을 보였다. 다른 환자가 없다지만 기특한 일이었다. 환자와 보호자에게 수술해야 한다는 설명을 하고 마취과 당직을 찾았다.

“오늘 누가 당직이에요?”

“이용철 과장님이세요.”

김지훈이 눈만 껌벅거렸다.

인턴 때부터 보아왔고 무척이나 자신을 아끼고 귀여워해 주었던 사람이 바로 이용철 과장이었다. 지금은 꽤 직급이 높아졌을 테고 전공의까지 있는데 주말 당직을 서다니 의아한 일이었다.

‘이용철 선생님이 아직도 당직을 서시나? 그런데 마취과에서 꺼려한다고? 그럴 분이 아니잖아.’

“전공의는 없어요?”

“계시긴 한데 과장님들도 돌아가면서 함께 서세요. 쌤, 터진 아뻬도 아닌 것 같은데 지금 바로 하시려고요?”

조성민과 똑같은 말을 했다.

“다들 왜 이래? 예전에는 물어볼 일이 아니었잖아요. 이제 11시밖에 안 됐는데 당연히 그래야죠.”

간호사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예전하고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방송 보니까 휴가 중에도 환자 때문에 병원으로 돌아오셨던데 그거 진짜죠?”

고경아에게 둘러댄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방송 봤어요?”

“그럼요. 쌤, 진짜에요? 가짜에요?”

별걸 다 의심한다.

씨익 웃음만 던지고 연락을 재촉했다.

(여보세요.)

정말 간만에 듣는 목소리였지만 아주 익숙했다.

“선생님, 김지훈입니다. 별일 없으셨죠? 그동안 인사도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김지훈? 지훈이, 너 왔구나? 야! 오래 간만이다. 이게 얼마만이야. 잘 지냈지? 지금 도착한 모양인데 피곤하지 않아? 내일 볼 텐데 뭘 전화까지 하고 그래. 일단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얘기하자. 지훈아. 어이쿠! 이젠 이름 부르면 안 되는데 미안하다. 김지훈 선생, 정말 반갑다.)

미안할 정도로 격하게 좋아했다.

수술 얘기를 꺼내기가 난감할 지경이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밤늦게 죄송합니다만 인사도 드릴 겸 환자 한 명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환자? 무슨 환자?)

“예. 아뻬 하나 있습니다.”

(그래? 김지훈 선생 열정은 여전하네. 오자마자 수술하자고? 알았어. 환자 올릴 준비해 놔. 금방 나갈게. 응급실로 갈 테니까 기다려.)

역시 이용철 과장이었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동의하는 모습은 예전과 똑같았다. 수술 방이 아닌 응급실로 온다니 말뿐인 반가움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인데 야간 응급 수술을 아침으로 미뤘다니 점점 더 의아함이 커졌다.

잠시 후 이용철 과장이 응급실로 들어왔다.

같은 관사 건물에 살아 서두른다면 5분도 채 걸리지 않을 거리였다. 김지훈에 대한 마음과 마취과 의사로서의 책임감이 아니면 훨씬 더 오래 걸렸을 것이다.

이용철 과장이 김지훈을 보자마자 활짝 웃었다.

또 한 번 인사가 오갔다.

“참! 제수씨도 같이 온 거 맞지?”

“예. 지금 집에 있습니다. 수술 방 파견인데 야간 수술에도 불러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거야 일반외과 과장 마음이지만 아뻬 수술하는데 부를 필요가 있어? 수술 방 간호사들 기분 나빠한다.”

“그렇겠죠? 우리 과 과장님이 어떻게 결정을 하실지······.”

김지훈과 이용철 과장이 동시에 서로를 보았다.

혼자 근무한다.

최철한이 오기 전까지는 엄연히 과장이다.

“김지훈 선생이 과장이야, 과장. 혼자 결정하면 돼.”

“하하! 그러네요.”

왠지 뿌듯하면서도 상당히 쑥스럽다.

“선생님, 그런데 분위기가 예전하고 다른 것 같네요. 이 시간에는 당연히 수술했잖아요?”

“흐음! 그게 말이야. 수술하는 과 과장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잖아. 귀찮을 수도 있고 하기 싫을 수도 있고. 어쨌든 우리 마취과는 달라진 것 없다. 이제야 일반외과가 제대로 돌아가겠네.”

결국 전임 일반외과 과장이 문제였다는 말이었다. 길게 말해 봐야 제 얼굴에 침 뱉기였다. 마취과가 변하지 않았다면 원칙은 금방 회복될 것이다.

그사이 수술 준비가 모두 끝났다.

환자를 올리고 수술 방으로 향했다.

수술실 네 개, 전공의와 교수가 함께 사용하는 탈의실 및 휴게실, 간호사들을 위한 공간까지 있을 건 다 갖췄지만 규모는 참 단출했다. 명색이 대학 병원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옹색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김지훈의 눈에는 아담하고 정겨웠다.

추억 때문일 것이다.

“이 간호사, 김지훈 선생 처음 봤지? 전공의 때부터 수술 잘하기로 유명한 선생이었어. 지금은 라파로까지 말할 것도 없으니까 어시스트 잘 서야 될 거야.”

“과장님, 아까 벌써 인사드렸어요. 그리고 내가 못할 것 같아요? 쌤 말에 쪼금 서운하네요.”

“그렇다고 쌤이라고 하냐? 내가 더 서운하다. 그냥 잘 지내라고 한 말이야. 근데 자넨 누구야? 처음 본다?”

“안녕하세요. 일반외과 2년차 송진우입니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눈가가 벌게졌다.

“아! 김 과장 혼자 근무해서 전공의 한 명 더 온다고 했지? 당장 환자가 많지는 않겠지만 열심히 해. 조성민, 김현철, 텃세 부리지 말고 신경 바짝 써.”

“선생님, 왜 이러세요. 누가 들으면 나쁜 놈인 줄 알겠네요. 학교 다닐 때부터 진우하고 친하게 지냈습니다.”

적절한 선을 지키며 전공의나 간호사와 허물없이 친근하게 지내는 모습 역시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아직도 찌릿한 눈빛을 날리고 간호사를 뒤로 하고 이용철 과장이 마취 준비를 시작됐다.

구미 첫 수술이라고 조성민, 김현철, 송진우까지 모두 들어왔다. 그런데 송진우 옆에 낯설면서도 낯익은 눈 하나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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