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21화 (721/1,329)

7화. 이 상황은 뭐지? (2)

일반외과 대선배인 장인어른이었다.

(김 교수, 얘기 다 들었어. 걱정하지 마. 마음에 안 들면 손 대위하고 내 병원에서 일해. 그런 놈들하고 얼굴 마주치지 않아도 돼.)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더니 틀린 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단순히 입에서 입이 아니라 아끼고 어여삐 여기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놈이 아니라 놈들이라?

지당한 말씀이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잘될 겁니다.”

(그래. 알았다. 구미 잘 다녀와.)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평소와 똑같이 툭 전화를 끊었지만 마음이 따뜻해졌다. 어떻게 알았는지 정훈철까지 전화를 했다.

(지훈아, 구미하고 인연이 있는 모양이다. 시간 나면 놀러갈게. 경주나 가자. 손 대위까지 남자들끼리 어떻게 안 될까? 하하!)

“예. 형님. 남자들끼리요? 좋죠.”

인연이 닿은 모든 사람들의 응원과 격려에 없던 힘이 불끈 치솟았다.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파면이라고 하셨지? 맞아. 해임 이상은 받아야 다른 대학 병원에 취직할 수 없는데 당연히 그래야지.’

이사회까지 거쳐야 하지만 신동철 이사장이 있다.

징계 결과는 의심하지 않아도 좋았다.

다음 날 아침, 송진우와 함께 구미로 떠났다.

이삿짐센터 1톤 트럭이 달달달 뒤를 따라왔다.

송진우에게 미리 했어야 할 말을 못한 김지훈이 세세하게 얘기하다말고 얼굴을 찡그렸다. 하윤호는 정말 여러모로 도움이 되질 않았다.

‘어휴! 구미 병원 상황을 먼저 확실하게 파악했어야 하는데 하윤호 때문에 완전 백지네. 구미 과장님하고 통화한 것으로 충분할까?’

“진우야, 도착하자마자 전공의들부터 만나. 다들 동문이니까 별문제 없을 거야.”

웬일인지 얼굴이 벌게지지 않았다.

그 점만은 걱정 말라는 것 같았다.

어느새 구미 병원이 보였다.

덩그러니 선 본관과 전공의 숙소가 있는 별관, 본관 뒤에 위치한 장례식장과 조금 떨어진 곳의 오래 된 관사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예전 모습 그대로네. 다들 잘 있겠지? 한 달간 혼자 근무해야 하는데 수술은 얼마나 있을까? 주말인데 응급실은 얼마나 바쁠까?’

- 복강경 수술 시행 -

바람에 나부끼는 현수막이 가장 먼저 반겨 주었다. 구미에 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기에 약간은 긴장되고 설렜다. 부담감이 적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다.

첫 한 달을 잘 보내는 것이 최대 관건이었다.

훅 숨을 내뱉은 김지훈이 송진우를 보았다.

각오를 단단히 한 얼굴이었다.

“진우야, 짐 정리하고 들어갈 거니까 혹시 환자 있으면 바로 전화해. 전공의들하고 인사 잘하고.”

“걱정하지 마세요. 알아서 하겠습니다.”

간단하게 챙겼다는데 저녁이 거의 다 돼서야 짐 정리가 끝났다. 병원 앞 식당에서 칼칼한 김치찌개로 배를 채우고 고경아와 함께 병원으로 들어섰다.

단 한 통의 전화도 없었다.

‘희한하네. 좋은 징조일까?’

수술만 적당하게 있다면 이보다 환영할 일은 없었다. 욕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혼자 근무한다는 점과 고경아를 생각하면 서울 병원과 같은 생활은 한 달만이라도 사절하고 싶었다.

“우리 과 병동은 4층에 있고 수술실은 2층에 있어요. 구내식당은 지하에 있는데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동네마다 맛이 다 다르잖아요.”

“내 입맛을 바꾸면 되죠. 관사도 깨끗하고 연락도 없어서 정말 좋아요. 지훈 씨, 내일 아침에 인사까지 하려면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병원 식구들에게 인사 안 해요?”

“안 그래도 응급실하고 중환자실, 병동, 수술실은 먼저 들르려고 했어요.”

고경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다네. 그럼 어디가 남아요?”

응급실 앞에 선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구미 병원에 내딛는 첫발이다.

약간은 무덤덤했는데 응급실 특유의 냄새가 느껴진 탓인지 은근히 가슴이 떨렸다. 정들었던 사람들 혹은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근무하다는 기대일지도 몰랐다.

힘차게 문을 열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요일 저녁 치고는 의외로 한가했다.

환자 두세 명이 침대에 누워 있을 뿐이었다.

간호사 세 명이 스테이션에 앉아 수다를 떨다 김지훈과 고경아가 들어오자 습관적으로 입을 열었다.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환자 분은 저기 누우시고 보호자 분은 접수부터 해 주세요. 어머! 어머! 쌤! 김지훈 쌤 맞죠? 일요일인데 오신 거예요?”

얼굴 보자마자 곧바로 알아보았다.

너무 반가운 탓일까?

샘이 아니라 쌤이다.

어쨌든 귀에 착 달라붙을 정도로 정겨운 말이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낯이 상당히 익었다. 구미 마지막 근무가 3년이 넘었는데 어떻게 이름까지 기억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인사 안 하고 뭐해? 김지훈 쌤 보고 싶다고 했잖아. 이 쌤이 바로 김지훈 쌤이야.”

처음 보는 간호사들도 유난히 반가워했다.

“오래 간만이에요. 잘 지냈죠?”

“쌤 없어서 잘 못 지냈어요.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요. 근데 이 분은 누구에요? 아! 쌤 와이프시구나. 안녕하세요.”

김지훈이 고경아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반가워하는 건 좋은데 누가 들으면 사귄 줄 알겠네. 그런데 왜 계속 쌤이지. 이거 마음에 안 든다는 소리 아니었나?’

“안녕하세요. 고경아에요. 잘 부탁드려요.”

“어머! 정말 미인이시네요. 수술 방에서 근무하시는 거죠? 자주 못 보겠네. 아! 전공의 쌤들 아직 못 보셨죠?”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말할 틈조차 찾기 힘들었다.

잠시 후 송진우와 함께 전공의 두 명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주말 당직을 서는데 머리가 단정하고 가운이 깨끗했다. 눈가에 나른한 졸음기까지 실려 있었다.

일반외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이건 완전히 피부과 전공의 얼굴인데 그렇게 수술이 없나. 분명히 할 만큼 한다고 하셨잖아?’

“안녕하십니까? 3년차 조성민입니다.”

“1년차 김현철입니다.”

목소리는 힘찼다. 김현철은 낯설었지만 무척 반가워하는 조성민의 얼굴이 눈에 딱 들어왔다.

“조성민, 네가 구미에 있었구나. 이게 몇 년 만이야. 반갑다. 근데 2년차는 왜 안 보여? 오프 갔어?”

새로운 교수가 오는데 전공의가 오프를 갔다면 예의가 아니다. 그런 이유치고는 조성민과 송진우의 안색이 상당히 어두워졌다.

“얼마 전에 그만뒀습니다.”

“뭐? 제일 힘든 1년차 마치고 그만두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일 있었어?”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몇 번 통화했는데 복귀할 생각이 아예 없었습니다. 이유는 저희들끼리 있을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남들 앞에서 말하기 곤란한 기색이었다.

연차 당 한 명밖에 없다지만 상대적으로 몸과 마음이 편한 구미 병원이다.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외과 의사 한 명 줄었다는 사실에 착잡함이 스쳤다.

현실적인 문제까지 발생했다. 송진우와 함께 온 덕에 그나마 전공의 인원을 맞췄다. 구미 과장이 왜 말을 안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달랑 세 명이면 양방으로 수술하기도 곤란하잖아. 이런 일을 말씀 안 하실 분이 아닌데 이혁민 선생님도 모르셨나?’

“알았다. 성민아, 우리 와이프야. 수술 방에서 보겠지만 미리 인사해. 사적으로는 몰라도 병원에서는 내 와이프가 아니라 간호사니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대하면 돼.”

“안녕하세요. 고경아에요. 편하게 대해 주세요.”

고경아와 인사를 나누던 조성민이 상당히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던 김지훈이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오자마자 그만둔 전공의 2년차, 병원 직원 특히 일반외과 전공의와 고경아의 관계까지 생각지도 못한 일과 맞닥뜨렸다.

‘고민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네.’

응급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정말 많은 추억이 깃든 곳이었다.

예전 풍경 그대로인데 한 가지가 빠졌다.

정신없을 정도의 분주함이었다.

응급실에 들어온 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사이렌 소리는커녕 단 한 명의 환자도 내원하지 않았다. 마치 구색만 갖춘 시골 병원 응급실처럼 없어도 너무 없었다.

김지훈이 입술을 내밀었다.

‘설마 자주 이런 건 아니겠지? 하긴 맨날 바쁘면 어떻게 살아? 이런 날도 있어야지.’

“성민아, 2년차 문제는 차차 생각하고 일단 우리 넷이 잘해 보자. 일요일 저녁인데 응급실이 한가하다.”

“평소에도 정형외과 환자 없으면 그렇게 바쁘진 않습니다. 환자들이 대구로 많이 갑니다.”

예전에도 그런 면이 없지 않았다. 구미 오기 전 대충 상황을 듣고 웬만큼 짐작했다. 하지만 전공의 입에서 같은 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생각 이상으로 심각하다는 말이었다.

편해서 좋다고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래? 지금도 비슷하구나. 정식 근무하기 전이지만 회진은 돌아야지? 중환자실, 수술실 들려서 올라갈 테니까 먼저 올라가 있어.”

막 응급실을 나오려는 찰나 당직실 문이 열리며 하얀 가운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응급실 인턴 오하석입니다.”

중성적인 이름이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지금 막 세수를 하고 나왔는지 여기저기 물기가 묻어 있었다. 또랑또랑한 목소리와는 달리 눈가에 걸린 졸음을 지우지 못했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전공의들과는 달리 일에 지친 졸음기였다.

“오하석? 반갑다. 그런데 우리 전공의 선생들보다 네가 더 피곤해 보인다. 오전에 환자 많았던 모양이지?”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인턴이 부족해서 이틀에 한 번씩 당직 섭니다.”

당직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조금은 갑갑해졌다.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래? 세 명이 서도 힘든데 괜찮아?”

“이젠 적응이 돼서 할 만합니다. 저 실습 돌 때 선생님 많이 뵀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단발머리에 말투까지 남자 이상으로 씩씩했다. 두 눈 깊숙이 숨어 있는 열정이 보여 가슴 한 구석을 답답하게 했던 찜찜함까지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나도 잘 부탁해. 열심히 하고 또 보자. 아! 인턴은 지금도 순환 근무하잖아? 서울에서 한 번도 못 봤다.”

“일반외과하고 응급실은 안돌았습니다. 헤헤!”

“그래서 못 봤구나.”

첫인상이 상당히 좋은 오하석이었다. 그 때문인지 웃음소리까지 기분 좋게 들렸다.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두드리려던 김지훈이 후딱 손을 감췄다.

인턴이라고 해도 여자다. 오하석이 의아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어색한 미소를 머금으며 돌아서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우 저 자식은 왜 얼굴이 벌게졌지?’

시도 때도 없다는 말이 딱 어울렸다.

이번에는 무엇 때문일까?

누구나 무심코 지나칠 일에 벌게졌을 것이다. 피식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응급실을 나와 차례차례 들려야할 곳을 찾았다.

쌤! 샘! 쌔앰! 새앰!

구미에서 쌓은 인연이 이렇게 많았던가?

온갖 다양한 의미가 담긴 말을 들으며 일일이 인사했다. 생각 이상으로 반가워하는 사람이 많아 얼떨떨할 지경이었다. 표정이 묘해진 고경아를 먼저 관사로 보낸 후 병동으로 올라갔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가 왠지 찜찜했다.

병동에서도 아는 간호사들이 보였다.

반응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반갑게 고개를 숙이며 스테이션에 섰다.

김현철이 환자 차트를 앞에 놓았다.

환자가 달랑 다섯 명이었다.

“성민아, 내가 지금 입원 환자 차트를 모두 보고 있는 거지? 정말 이게 다야? 또 없어?”

“예. 과장님 새로 오신다고 수술을 거의 안 하셨습니다.”

전임 과장에게 들은 말하고 차이가 너무 컸다.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는 사정을 감안해도 환자가 적어도 너무 적었다. 당황스럽다 못해 놀라울 지경이었다.

“원래는 어느 정도였는데?”

조성민이 머뭇거렸다.

“많으면 열다섯 명 정도고 적으면 열 명 이하로 떨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설마 두 분이 근무하셨을 때는 아니지?”

마치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표정이 더욱 안 좋아졌다.

“그보다 조금 많긴 했는데 여름부터는 거의 이랬습니다.”

당혹? 당황? 어이상실?

“왜 이렇게 환자가 없지? 환자 구성은?”

“주로 마이너 환자 위주였습니다. 라파로까지 하실 예정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서울에서 들었던 말과 완전히 달랐다.

부담이 적으면 좋은 일이긴 하지만 이건 절대 웃을 일이 아니었다. 교수 한 명과 전공의 세 명이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탱자탱자 놀아도 되는 수준이었다.

‘후우! 명색이 대학 병원인데 트레이닝조차 가능한 수준이 아니네. 2년차도 그래서 그만둔 거 아니야?’

과장이 자주 바뀌는 과는 환자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마이너 수술이 거의 전부인 상황에서 의욕까지 없는 상태였다면 수술마저 회피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상황에서는 다른 어떤 과보다도 환자가 적을 수밖에 없는 과가 바로 일반외과다. 과의 위상이 추락하면 전공의의 사기와 열정도 자연스럽게 깎인다. 이런 상황이 얼마나 지속돼 왔는지 모르지만 상당히 심난했다.

전공의 앞에서 단 한 명뿐인 교수마저 의기소침해서는 안 된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어차피 지나간 일일 뿐이다. 앞으로 잘하면 될 것이라 믿었다.

김지훈이 어깨를 활짝 폈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앞으로 열심히 해 보자. 그래도 다섯 명은 너무했다. 회진부터 돌자.”

김현철이 재빨리 앞장섰다.

1년차다운 발걸음을 보여 다행이었다.

“성민아, 인턴 선생은?”

“오프 보냈습니다.”

새로운 교수가 온다고 해서 인턴 오프까지 뺐을 이유는 없다. 그런 면에서 조성민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별 이유도 없이 후배 족쳐대는 선배만큼 꼴불견도 없다.

하윤호 생각은 왜 날까?

회진 도는 동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뻬, 탈장, 치질.

예상했지만 질환이라고는 그것이 다였다.

이제 시작이고 편하길 바랐다지만 너무했다. 말라 죽기 직전의 하윤호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 처참하기만 한 일반외과 상황에 조금도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