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끝을 보자. Ⅲ (2)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지훈아, 사고 쳤다며?)
목소리 한 번 발랄하다.
(사고는 무슨. 경희한테 들었어?)
(자식이 내 정보망을 뭘로 보는 거야? 대형사고 맞아. 인마. 오늘 사전 절차인지 뭔지 밟는다고 들었어. 가슴 딱 펴고 할 말 확실하게 해. 내가 봐도 결론 빤한 일이니까 걱정하지 마. 최악의 경우 엉뚱한 결정 나면 난 아예 병원 안 들어간다. 나랑 같이 개업이나 하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너 혈관 안 해?)
(지훈아, 나 강호의 도의를 철저하게 지키는 하오문주다. 칼만 무기가 아니야. 창도 있고 활도 있어. 신기동 선생님께 몇 대 줘 터지고 끝내지, 뭐. 설마 죽이시겠냐?)
농담 반 진담 반이었지만 힘이 되는 말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끊어. 나 들어가야 돼.)
(지금 들어가는 거야? 김지훈, 파이팅! 카르페 디엠! 내가 이 말까지 했으니까 게임 끝이다. 믿어.)
부랄 친구처럼 허물없는 친구, 손일석.
그 자체로 은근히 어깨가 펴졌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김지훈이 회의실로 향했다.
침착함과 확신을 유지해야 할 때였다. 회의실에 도착하자 신현수와 이경석이 먼저 와 있었다. 묵묵히 눈길만 주었지만 무슨 말을 하려하는지 알 수 있었다.
“현수야, 여기 왜 왔어? 오래 걸릴 지도 몰라. 나 들어간다. 경석이 형, 걱정하지 말고 퇴근해요.”
“잘 될 거야. 힘내자.”
애써 여유를 보였지만 문 열리는 소리마저 부담스러웠다. 차가운 냉기 때문인지 회의실 내 분위기가 상당히 무거웠다.
병원 설립 이후 초유의 사태라는 점이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를 떠나 공개적으로 의사 표현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일종의 압박이었다.
직접적인 이해가 걸린 일반외과 의사들은 배제하고 단 다섯 명의 의사가 참석했다. 원장단은 예외였기에 중앙의료원 부원장인 신상민 교수 및 내과 양승철 교수와 진료 부장 옆에 서울 병원 원장인 송재덕 교수가 자리했다.
심의에 참석한 보직 의사 다수, 즉 세 명만 반대하면 징계 요청은 자동 철회된다. 경우에 따라 쉽다면 아주 쉬운 일일 수도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하윤호와 친인척 관계인 하성원 원장이 주관을 한다는 점이었다. 불합리해 보였지만 사전 심의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윤호도 이 점을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 일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 합리적인 사람은 수없이 많고 이런 일을 앞두고 가만히 앉아 보고만 있을 사람도 없다. 하성원 원장과 하윤호 교수가 지난 밤 신상민 부원장과 진료 부장을 만난 것처럼 말이다.
사유 검토를 하기도 전에 누가 회의를 진행할지를 두고 의견이 충돌했다.
“정식 징계도 아닌데 내가 회의 주재를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규정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안 됩니다. 하 원장님이나 저나 이해 당사자기 때문에 주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제외하고 다른 분이 맡아야 합니다. 다른 분이.”
“송 원장님, 내가 개인적인 감정으로 일을 처리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이 사안에 대해 누구보다도 엄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걸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하 원장님 말씀대로 객관적이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보기에 그렇게 보이겠습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하 원장님과 제가 애초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송재덕 교수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한동안 말싸움에 가까운 격론이 벌어졌다. 누군가 강하게 의견을 내지 않는 한 결론이 나지 않을 상황이었다.
양승철 교수가 나섰다.
“두 분 말씀 모두 일리가 있지만 외부 시선도 당연히 고려해야 합니다. 제 생각에는 신상민 선생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이 가장 합당하게 보입니다.”
하성원 원장이 불만에 찬 콧소리를 냈다.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진료 부장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결과는 예측불허였다. 노골적으로 한쪽 편을 들었다가 자칫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김지훈과 대면할 수 있었다.
사전 절차가 시작됐다.
신상민 교수의 눈빛이 매서웠다.
개인적인 호불호와 징계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지 못하면 또 다른 논란을 부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김지훈 선생, 지금도 징계를 철회할 의사는 없나?”
곧바로 이어진 물음에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침착하게 당당하게.’
“없습니다.”
하성원 원장이 인상을 썼다.
‘건방진 놈.’
“징계 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결정이 내려질 경우 도리어 김지훈 선생이 징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전임 임명에 큰 난관이 될 수도 있어.”
신상민 교수는 어느 한 쪽으로 기울거나 허언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각오한 일이었지만 새삼 강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하윤호는 일반외과는 물론 병원에도 해악이었다.
‘환자와 우리를 위한 일이다. 물러나서는 안 돼.’
김지훈이 눈빛을 굳혔다.
“알고 있습니다.”
당당한 목소리에 신상민 교수의 눈이 반짝였다.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잘 헤쳐 나가길 바란다. 이번 일이 다른 과에도 경종이 됐으면 좋겠군. 하성원 원장, 지금까지 잘 버텨왔지만 이젠 무사하지 못할 거야. 후우! 김지훈, 그 전에 나부터 설득시켜야 해. 반드시.’
“알고 있다니 신중하게 대처하길 바라네. 그럼 사유에 대해 말해 볼까? 여러 가지를 나열했지만 이런 일은 과 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아닌가? 정말 징계를 요청할 만한 사유가 된다고 생각해?”
하성원 원장이 의외라는 표정을 보이면서도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제는 뜨뜻미지근하더니 신상민 교수도 현실을 직시할 줄 아네. 내 얼굴을 생각하면 당연히 무리한 징계 요청으로 끝내야지.’
송재덕 교수는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미 숱하게 나왔던 말이기에 충분히 대비했을 것이라 믿었다. 자신의 감정을 못 이겼거나 이득을 위해 나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한 확신이었다.
모두들 김지훈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김지훈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눈빛을 보이며 가슴을 활짝 폈다. 그동안 말을 못해서 아꼈던 것이 아니었다. 정말 필요할 때는 웅변가도 울고 갈 정도로 달변인 김지훈이었다.
찬찬히 머릿속을 정리했다.
“하나하나를 보면 관점에 따라 사소한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오늘의 사태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꾸준히 문제가 발생하는데도 불구하고 인정과 개인적인 감정에 휩싸여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말은 좋지만 추상적인 말은 도움이 안 돼.”
날카로운 지적에 징계 자체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직감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수술 순서 변경과 끼워 넣기는 절대 관행으로 치부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가 짊어지게 되고 이득은 부정한 방법을 쓴 의사가 얻기 때문입니다. 같은 의사라고 해서 지나치고 변호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말이 많은 문제긴 해. 하나는 실제로 벌어졌고 하나는 이루어지지 않았군. 다음은?”
“전공의에게 폭력을 행사한 일은 교수로서의 자격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충동적인 일로 치부하고 넘어가면 일상적인 폭력을 야기하고 모두들 용인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질문과 대답이 이어질 때마다 참석한 의사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특히 하성원 원장이 가장 큰 변화를 보였다.
‘그깟 정강이 두어 번 때리는 것 같고 고려할 게 뭐가 있어? 신상민, 펠로우가 감정에 휩싸여 벌인 일에 불과해.’
속마음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신상민 교수가 손을 들며 말을 끊었다.
“불행한 일이지만 일부 과에서는 아직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지 않나? 형평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야. 누구 징계하고 누군 그냥 놔둔다면 불공정하지 않겠어?”
하성원 원장이 입가를 말았다.
‘그렇지. 말 잘하네. 신상민이 뭘 알긴 알아.’
김지훈 입장에서도 당연한 말이었다.
“저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번 일은 우발적인 일이 아닙니다. 교수가 자신의 이득을 위해 부당한 요구를 하다 벌어진 일입니다. 교육을 담당하는 대학 병원이기에 더욱 엄격하고 중대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런 면도 고려는 해야겠군. 어쨌든 바람직한 일은 아니야. 그럼 실력 부족은 뭐지? 이것 역시 주관적인 판단으로 보이는데 증명할 수 있겠어?”
“제가 경험하고 느낀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동안 수술 중 벌어졌던 일을 빠짐없이 말했다. 핵심을 놓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간략하게 말했지만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실력 부족이야 말로 가장 큰 문제입니다. 환자는 의사의 성격은 물론 품성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진료를 받습니다. 따라서 의사에게 요구되는 품성만이 아니라 기본적인 실력을 필수적으로 갖춰야 합니다.”
김지훈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냉정했다.
지난 일을 정리하며 잠시 숨을 돌릴 뿐이었다.
“더구나 대학 병원입니다. 일반외과는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과입니다. 동료조차 신뢰하지 못하는 의사에게 어떻게 환자를 맡길 수 있겠습니까? 환자에게 지켜야 할 신의와 약속을 저버린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수술 못하는 일반외과 의사라!’
‘같은 과 의사에게도 신뢰를 못 얻는다?’
병원 입장에서는 가장 중대한 문제였다.
성격 나쁜 의사는 찾아도 실력 없는 의사는 찾지 않는 존재가 바로 환자이기 때문이었다. 경쟁이 치열하게 격화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병원의 위상이 걸린 진료 수준은 생존을 좌우할 수 있는 지표기도 했다.
심사 위원들의 표정이 조금씩 나빠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하성원 원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장 피하고 싶었던 순간이었다.
당장이라도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실력 문제가 나오는 순간 할 말이 없었다. 벨기에 대사 부인의 일이 언급됐을 때는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개놈의 새끼. 연수까지 갔다 온 놈이 라파로도 못해서 나까지 창피를 당하게 해? 김지훈, 너도 하윤호를 욕하면 날 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잘 알 텐데 바득바득 우겨서 여기까지 와? 죽일 놈.’
신상민 교수가 입술을 모았다.
‘심정적으로는 충분하지만 아직 부족해. 하성원 원장이 아무 소리도 못할 정도가 돼야 전체 징계 위원회가 열렸을 때 통과될 수 있어.’
“김지훈 선생, 자네가 도와줘야 할 정도로 실력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환자들은 무사히 퇴원한 것 아닌가? 평가 기준으로는 다소 애매모호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럴 수 있다.
실력 문제를 입증할 수 있는 환자가 남았다.
첫 번째는 재수술을 한 담낭농증 환자다.
“최근에 담낭농증 환자를 수술 했습니다. 총수담관에 손상을 줘서 이준영 선생님과 제가 재수술을 했습니다. 집도의가 바뀐 것도 문제지만 수술 시기가 더 문제였습니다. 환자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 역시 실력입니다.”
어쩔 수 없이 이준영 교수까지 거론했다. 스승이기에 김지훈이 입장에서는 최대한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다른 방법이 없는 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스승님, 혹시 저 때문에 기분 나쁜 일이 생길 지도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김지훈의 마음과는 달리 이준영 교수를 거론한 것 자체만으로도 의외의 효과를 발휘했다. 양승철 교수는 물론 진료 부장의 표정까지 확연하게 달라졌다.
신상민 교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의료 과실일 수 있단 말인가?”
김지훈이 눈빛을 굳혔다.
“제 판단으로는 절대 배제할 수 없습니다.”
다들 깜짝 놀랐다.
의사가 입에 담기에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말까지 나왔다. 어마어마한 책임이 따르는 말이었다. 근거 없는 말을 했다가는 도리어 역풍을 맞을 것이다.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김지훈이 억측이나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그렇게까지 생각한단 말이지? 병원 위상과도 관련된 이상 자네 생각보다 과한 말일 수 있어. 책임 질 자신이 없다면 이런 문제는 정말 신중하게 말해야 해. 또 다른 케이스는 없나?”
마지막 환자가 남았다.
“양천석이란 환자가 있습니다.”
단순 양성 종물 제거를 못해 김지훈이 대신 했다는 말에 누군가의 실소가 터졌다.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모든 사달을 감수하고 수술한 양천석이 도리어 하윤호 교수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흐음! 이 환자는 소아과 의사인 내가 생각해도 심각하군. 양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눈가를 잔뜩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소아과, 내과 의사다. 메스와는 거리가 먼 의사들조차 인정한 이상 일종의 결정타였다.
몇 가지 질문이 더 이어졌다.
해야 할 말은 이미 속 시원하게 다했다
단순한 확인 차원에 불과했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느낌에 하성원 원장이 심각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김지훈 선생, 자세하게 잘 들었어. 다른 분들은 질문하실 문제없습니까?”
기회였다.
하성원 원장이 진료 부장을 노려보았다.
“김지훈 선생, 여기 보니까 미니콜레라는 말이 있는데 하 교수가 오기 전에는 우리 병원에서 시행하지 않았던 수술 아닌가?”
하필이면 수술 실력을 또 거론했다.
하성원 원장이 급히 눈짓을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렇습니다.”
“하 교수가 시작한 수술이면 실력이 없다는 말은 과한 말 아니야? 유난히 합병증이 많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면 주관적인 판단에 불과할 수도 있어. 곤란해.”
김지훈이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수술 시간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같은 수술을 두고 두 배 가까운 시간을 소모합니다. 케이스가 아무리 달라도 매 번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일반외과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 모든 외과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지금은 제가 미니콜레를 더 많이 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를 생각해 봐도 모든 수술을 그렇게 진행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아뻬도 교수가 하는 수술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정도입니다.”
“아뻬까지? 그건 아주 기본적인 수술이잖아?”
“수술 팀의 불안이 심각합니다.”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하윤호 교수의 실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갈수록 불리해진 하성원 원장이 서둘러 진행을 막았다.
“부원장님, 징계 요청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들을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하 교수 말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훨씬 더 자세하게 들어야 할 겁니다.”
신상민 교수가 송재덕 교수와 양승철 교수를 보았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하윤호 교수는 어떤 말로 자신을 변호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