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끝을 보자. Ⅲ (1)
무릎 꿇고 싹싹 빌었다면 파국은 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윤호는 독 오른 뱀처럼 빳빳이 고개를 들고 오히려 김지훈에게 독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려 제가 동문이거나 새로 온 교수가 아니었다면 이런 일이 생겼겠습니까? 박승준 선생님도 처지가 다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김지훈을 떠나 일반외과 전체를 모욕하는 말이었다. 송재덕 교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불행히도 하윤호 교수는 보지 못했고 입을 멈추지도 않았다.
“그럼 폭력 문제는 뭐라고 할 거야?”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었다.
상대가 하필이면 총치프였다는 사실은 분명 불리함이었다. 하지만 이준영 교수의 아들이란 점이 유리할 수 있다고 여겼다. 누구나 세상 사람의 눈을 의식하기에 가장 껄끄러운 사람인 이준영 교수는 나서지 못할 것이라 믿은 것이다.
“폭력이란 말은 과합니다. 교수가 전공의 몸에 손대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설마 이준영 교수님의 아들이라고 문제를 더 키우는…….”
불리함을 선택하고 용서를 구했어야 했다.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지난 6개월 동안 헛짓거리를 하느라 눈앞에 있는 교수들이 어떤 사람인지도 파악하지 못했다. 그나마 유일하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박승준 교수마저 고개를 저었다.
‘후우! 이준영 선생님이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몰라? 스스로 무덤을 파는구나.’
이준영 교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이 나서면 행여 그렇게 보일까 우려해 지금까지 말을 아껴 왔다. 절로 주먹이 꽉 쥐어졌다. 미처 말을 하기도 전에 벼락이 쳤다.
“야야야!”
천둥소리처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깜짝 놀란 하윤호가 입만 벙긋거렸다. 서울 병원 원장이지만 동네 아저씨라고 해도 믿을 수밖에 없는 송재덕 교수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네가 교수야? 어디서 그따위 말을 지껄여? 이 과장, 다른 생각 할 거 없어. 당장 징계 회부해. 하윤호, 너 지금 이 시간 부로 진료도 수술도 모두 하지 마.”
“진료도 하지 말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가 눈도 귀도 없는 줄 알아? 넌 자격이 없어. 자격이. 다 떠나서 최소한 실력은 갖춰야 할 거 아냐? 창피당하고 싶지 않으면 당장 옷 벗어.”
구둣발이 움찔움찔거렸다.
징계 상황이 아니었다면, 사유 중 폭력 문제가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걷어찰 기세였다. 얼굴이 시뻘게진 송재덕 교수가 ‘끙’소리를 내며 회의실을 박차고 나갔다.
더 볼 필요 없다는 명백한 표현이었다.
뜨거운 불길 뒤로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이 과장, 진행하자. 희망이 없다.”
가장 날카로운 신기동 교수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준영 교수는 입을 꽉 다문 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도리어 더 큰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사색이 된 하윤호 교수가 이혁민 교수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제 말은 그게 아닙니다. 징계가 그렇게 쉽게 거론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해가 있다면 서로 이해하고 말로 풀어야지 같은 과 교수끼리 이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돌아온 말은 차디찼다.
“지난 밤 김지훈 선생의 징계 요청을 신중하게 검토했다. 교수 전원이 이유 있다고 인정했고 오늘 소명을 들어본 결과 타당하게 들리지도 않는다. 철회는 없다. 위원회가 열리면 그때 직접 해명해라.”
난리 났다.
하윤호의 목소리가 떨리고 눈빛이 흔들렸다.
“과장님, 위원회라니요?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니 눈에는 교수님들 반응이 안 보이나? 우리가 누구 자식이라고 편들 사람으로 보이나?”
말밖에 없는 사람이 말로 망하고 있었다.
하윤호가 부들부들 떨며 자신을 옹호해 줄 교수를 찾았지만 단 한 명도 없었다. 박승준 교수조차 눈가를 좁힌 채 말이 없었다.
‘정말 능력이라고는 무엇 하나 찾을 수가 없군. 어떻게 교수할 생각을 했지? 그 잘난 네 집안과 하성원 원장님 힘밖에 없는 거야?’
틀린 생각이 아니었다.
하윤호 교수에게 남은 사람은 실제로 하성원 원장뿐이었다. 곧바로 찾아가 대책을 숙의했다.
“뭐? 김지훈 그 자식이 뭘 요청해? 싸가지 없는 새끼. 교수들은 뭐라고 해?”
하성원 원장이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 동의했다고? 이 인간들이 뭐 하자는 거야? 감히 중앙 의료원 원장을 호구로 봐? 당장 김지훈 불러.”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김지훈이 징계 요청을 철회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술 중이라는 소리에 하성원 원장이 냅다 재떨이를 던졌다. 뭔가 얼굴 옆으로 휙 스쳐 지나가자 하윤호가 바짝 움츠렸다.
“하윤호, 너는 뭐하는 새끼야? 양 회장이 새벽부터 전화해서 난리친 건 알아? 그런 일 하나 매끄럽게 처리도 못하면서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죄송합니다.”
“말이면 다야? 내가 투자한 돈이…….”
조카 앞이라도 할 수 있는 말은 따로 있다. 하성원 원장이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김지훈이 올 때까지 고함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방음은 제대로 되는 방인지 모를 일이었다.
이준영 교수, 신기동 교수와 서울 병원에서의 마지막 수술을 마치고 나온 김지훈이 원장실로 향했다. 어떤 사달이 난지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알았다면 큰 힘이 됐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김지훈이 누군가?
이준영 교수의 변함없는 무뚝뚝함과 날카로움을 잃지 않은 신기동 교수의 모습에서 스스로 힘을 찾았다. 의연하게 평소와 똑같이 행동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문을 열려던 김지훈이 옷매무새를 살폈다.
예의를 떠나 겉모습이 추레하면 깔보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짐작대로 하성원 원장이 얼굴을 보자마자 노발대발 분기를 감추지 못했다.
“김지훈 선생, 같은 과 교수한테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서운하고 불편한 일이 있으면 내부에서 해결해야지 징계 요청이라니 이게 말이 돼? 당장 철회해.”
“죄송합니다. 못합니다.”
“왜 못해?”
김지훈이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이미 각오하고 다리를 건넜다.
작은 아버지와 조카다.
하성원 원장의 추천으로 교수가 됐다.
결국 책임은 하윤호에게만 있지 않다는 말이었다. 더욱이 사유조차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혈연이나 감정으로 대응한다면 상대가 중앙 의료원 원장이라고 해도 당당히 맞서는 것이 합당한 일이었다.
“요청서에 사유를 기재했습니다. 먼저 내용을 정확하게 보시고 판단해 주십시오.”
“사유? 이따위 것들이 사유가 될 것 같아? 너 병원에 붙어 있고 싶으면 당장 내 말대로 해. 어디서 펠로우가 건방지게 자기 윗사람을 고발해?”
또 자리 얘기가 나왔다.
하윤호가 입에 달았던 말이었다.
원장이라는 사람이 사리분별을 하지 못했다.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올라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랫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누르고 윗사람이나 이득이 되는 사람에게는 손바닥 열심히 비볐겠지.’
갑자기 가슴 한구석에 자리했던 불안감이 사라졌다. 잘잘못을 떠나 분란이 커지면 신동철 이사장과 작성한 계약서가 무용지물이 될 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도리어 잘한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문득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소리가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보였던 하성원 원장의 웃음과 여유는 가식이었을 뿐이었다.
“뭐해? 올해로 끝내고 싶어?”
“전임 자리에 연연했으면 징계를 요청했겠습니까? 하윤호 교수는 환자 몸에 칼을 대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철회 못합니다. 징계위원회에서 정확한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하실 말씀 없으면 가 보겠습니다.”
김지훈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원장실을 나갔다.
“너, 너 당장 거기 안 서? 김지훈, 내 말 안 들려?”
설 거면 애초에 뒤돌아서지도 않았다.
하성원 원장이 부들부들 떨었다.
하윤호도 입만 벌리고 있었다.
‘앞뒤 분간 못하고 날뛰는 놈 때문에 이게 무슨 창피야. 흠 잡히기 전에 어떻게든 막아야 돼. 하윤호, 저놈의 새끼는 도대체 처신을 어떻게 한 거야?’
“김지훈, 이놈의 자식이 감히. 김 비서, 당장 부원장하고 진료 부장 연결해. 하윤호, 넌 입도 뻥끗하지 말고 교수실에 박혀 있어. 에이! 조카라는 놈이.”
전화통에 불이 났다.
“신상민 선생, 불미스러운 일이 하나 벌어졌습니다. 같은 병원 내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어떤 일인지 직접 상의 드려야 하니까 미안하지만 내 방으로 와 주세요. 허어! 다 내 불찰입니다.”
“진료 부장, 어디 가지 말고 방에서 대기해. 싸가지 없는 놈 하나 때문에 난리도 아니다. 뭐? 가긴 어딜 가? 다 취소하고 기다려.”
사람은 어렵고 불리할 때 본색이 드러난다.
지금은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해야 할 때였다. 하윤호 교수가 조카라는 사실, 자신이 추천했다는 사실을 모두 잊고 과연 직분을 다할 수 있는 의사인지 객관적이고도 냉정하게 평가해야 했다.
유일한 살 길을 찾지 못했다.
개인적인 득을 보려고 했던 일이 비수가 돼 돌아올 판이었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펠로우가 항명했다는 사실에 구겨진 자존심이 분노만 일으켰다.
둘 다 애초에 자격이 안 되는 인간이었다.
누군가의 실수이자 잘못이 분명했다. 불행히도 번지르르한 언변과 경력, 그리고 사람 좋은 웃음 뒤에 숨겨진 가식을 꿰뚫어 본 사람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당당하게 대처하는 김지훈의 모습에 하윤호가 두려움을 느꼈다. 펠로우 때문에 전임강사인 자신이 잘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이준영 교수의 얼굴색이 좋지 않았다. 원장실로 불려간 이상 무슨 말을 들었을지 모를 수 없었다.
“스승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결정과 행동을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당당하게 대응하겠습니다.”
김지훈은 의외일 정도로 차분했다.
“내일 사전 절차가 진행된다. 사유 정확하게 설명하고 구미에만 신경 써.”
“죄송합니다. 구미 병원에서도 최선을 다하겠지만 하윤호 교수 문제만큼은 마지막까지 신경 쓰겠습니다. 스승님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올라와야 할 일이 있다면 올라오겠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무언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혹시 혁원이가 관련됐기 때문은 아니겠지?’
아버지와 아들, 스승과 제자, 더없이 돈독한 선배와 후배, 얽히고설킨 이 모든 관계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자신이 그러하듯 김지훈도 개인적인 감정에 이끌리지 않을 것이다. 사안이 크든 작든 변함없는 원칙이었다.
당당한 태도가 이를 웅변하고 있었다.
‘후우! 누굴 닮아서 고집이 이렇게 센지 모르겠다. 부당함과 불의를 지나치고 외면하는 의사가 환자를 제대로 볼 수는 없겠지. 지훈아, 불안하지만 정말 자랑스럽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더욱 단단해지고 있었다.
아무리 각오했다고 해도 이런 일이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심적 압박감이 강했던 밤이 지났다.
고경아가 새로 산 양복을 꺼냈다.
와이셔츠 깃과 넥타이를 반듯하게 잡아 주고는 평소처럼 웃음을 보였다.
“사전 절차 진행할 때 대충 들어가지 말고 옷 구겨지지 않았는지 꼭 살펴요. 예의를 확실하게 갖춰야 누구도 함부로 보지 못한다는 거 알죠? 기죽지 말고 당당히 할 말 다해요. 그렇다고 흥분하면 안 돼요.”
가장 강한 힘이자 응원이었다.
“아이! 속상해. 이럴 때 입으려고 산 옷이 아닌데.”
고맙고 미안했다.
거실에 쌓여 있는 짐에 눈이 갔다.
석 달을 구미에서 지내야 하는 탓에 가전이나 가구만 없지 이사나 별반 다름이 없었다. 틈틈이 손을 보탰지만 대부분 고경아의 손을 거쳤다.
미안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짐은 다 싼 거예요?”
“몇 가지만 더 정리하면 돼요. 이삿짐센터에 내일 아침에 출발한다고 했는데 구미 병원에 연락은 된 거죠?”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고생 시켜서 미안해요.”
“그런 소리 말고 빨리 출근해요.”
구미 갈 준비에 휴가까지 낸 고경아는 또 고된 하루를 보낼 것이다. 현관문을 열던 김지훈이 돌아서 고경아를 꼬옥 안았다.
‘경아 씨, 사랑해요.’
‘지훈 씨, 힘내요.’
가슴으로 전해지는 뜨거운 사랑과 신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전 내내 하윤호 교수가 보이지 않았다.
교수들도 무거운 안색으로 말을 아꼈다.
“지훈아, 일과 끝나고 바로 사전 절차가 진행될 거야. 네가 징계 요청한 이유를 확실하게 말해.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네가 피해 볼 수도 있다는 사실 명심해야 한다.”
송재덕 교수의 말투가 판이하게 변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넌 교수다. 교수야.”
스승의 묵묵한 눈빛과 함께 또 하나의 응원이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연못 하나를 흙탕물로 만든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하윤호 문제로 오전 내내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김지훈이 몇 남지 않은 환자들과 일일이 인사를 했다. 이제는 퇴원을 얼마 남기지 않은 홍간난 환자와 긴 시간을 보냈다. 이혁원과 강병옥에게 힘들겠지만 최선을 다해 달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너는 내일 아침 9시까지 필요한 짐 챙겨서 병원 앞으로 나와. 같이 가자.”
송진우까지 챙겼다.
12시 정각, 토요일 일과를 모두 끝냈다.
이로써 서울 병원의 일은 단 하나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