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끝을 보자. Ⅱ (1)
한동안 김지훈을 보며 입을 열지 않았다.
마지막 확인이자 불안함이었다.
제자는 결코 스승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 속에 언젠가 보았던 눈빛이 있었다. 음성에서 비장 파열을 앞두고 두려워하던 자신을 보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결코 물러서면 안 된다!
‘스승님, 반드시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스승에 대한 믿음이자 신뢰였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바른 길을 가고자 하는 제자의 의지와 신념이었다. 꺾는 순간, 꺾임을 당하는 순간 김지훈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이준영 교수가 눈가에 힘을 주었다.
“이 과장, 진행하자.”
예상했던 말이었다,
이혁민 교수가 지동훈 교수를 보았다.
이제는 의견을 묻고 존중해야 할 소중한 동료였다.
“지 교수, 하 교수와 친한 사이는 아니라고 알고 있지만 같이 왔잖아. 어떻게 생각해?”
“과장님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박 교수는 뭐라고 할 것 같아?”
“오늘 오간 내용을 알면 당연히 동의할 겁니다.”
병원을 옮긴 이후 많은 면이 변한 박승준 교수였지만 지동훈 교수는 여전히 확고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이런 일을 두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최종 결정만이 남았다.
과장의 권한으로 징계 요청을 막을 수 있다.
모두들 이혁민 교수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나직한 한숨을 내쉰 이혁민 교수가 턱을 매만지며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했다. 김지훈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과 감정을 배제하고자 애썼다.
무엇이 일반외과를 위한 일인지가 가장 중요했다.
일반외과의 앞날과 하윤호의 징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일반외과 구성원은 무조건 따를 것이고 반드시 그래야 한다. 과장이란 자리가 오늘처럼 무겁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무거운 정적만이 흘렀다.
오랜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드르륵!
책상 서랍이 열렸다.
이혁민 교수가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이 모든 일이 마치 자신의 탓이라는 것처럼 참담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징계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을 지어야 할 것이다.
‘이걸 내가 아니라 김지훈이 쓰게 될 줄은 몰랐네. 다 내 잘못이다. 징계 위원회는 어차피 빨리 열릴 수가 없으니까 사전 절차만 다음 주로 미루면 김지훈, 네가 관여하지 않고도 일이 진행될 거야. 그나마 다행이다.’
징계 요청으로 끝나는 것과 위원회에 참석해 얼굴 보이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김지훈이 참석하지 못한다면 징계 위원을 비롯해 다른 과 교수들의 시선은 결국 과장인 자신에게 향할 것이다.
김지훈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 장치였다.
“징계 요청서다. 구미 가기 전까지 작성해서 가져 와. 오늘 일로 부담 갖지 마라. 개인적으로 우리한테 맡기는 것으로 마음이 변하면 좋겠다.”
요청서를 받아든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절 생각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하윤호 문제만은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징계 위원회가 바로 열릴 수는 없겠지만 사전 절차는 요청 사흘 이내에 열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반드시 참석해야 됩니다.’
“선생님, 내일 아침에 바로 제출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그 즉시 사전 절차를 밟을 수 있게 조치해 주십시오. 규정 상 주말이 꼈기 때문에 토요일까지 열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대와 달리 한 술 더 떴다.
신현수가 인상을 썼다.
징계 요청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모른다.
어쩌면 평생 꼬리표가 따라 붙을 수도 있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징계 절차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했는데 도대체 언제 알아본 거야? 지훈아, 잘 생각해. 넌 나와 평생 병원을 함께 이끌어 가야 할 사람이야. 만일 다른 과 교수들하고 문제 생기면 진료 부분을 어떻게 책임지려고 해?’
이혁민 교수는 물론 다른 교수들까지 흠칫 놀랐다.
“니 그건 어떻게 알았나?”
“규정은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규정이 있다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질문의 핵심은 세세한 내용까지 알고 있는 이유였다. 결국 오래 전부터 징계 요청을 염두에 두었다는 말이었다.
하윤호 제대로 걸렸다.
단호한 표정만큼 김지훈의 대답 속에 담긴 의미가 작지 않았다. 이혁민 교수가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꼭 그래야겠나?”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알았다. 나서야 할 때는 누가 뭐라고 해도 절대 물러나지 않는단 말이지. 내 김지훈이 다시 봐야겠다. 다들 골치 아플 텐데 오늘 이만 끝냅시다. 니들은 가서 일 봐라.”
펠로우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송재덕 교수가 중얼거렸다.
“나도 다시 봐야겠다. 다시. 그래. 우리도 저런 적이 있었잖아. 물 고이면 썩는다더니 우리가 그런 지도 모르겠다. 적절한 때가 있다고 기다리는 게 능사가 아니었어. 지훈아, 잘 해 보자. 경석아, 현수야, 너희들도 지훈이하고 같은 생각이지?”
“예. 선생님.”
신현수와 이경석의 표정이 복잡했다.
마지막으로 시선을 준 이준영 교수가 김지훈의 어깨를 잡았다. 잠시 눈을 마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탁탁 어깨를 두드리는 소리에 많은 의미가 담겼다.
집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훅 숨을 내뱉었다.
‘하윤호, 넌 끝났어. 그나저나 경아씨에게 뭐라고 하지?’
자청해서 총대 매는 남편을 두고 볼 아내는 없다. 직접적인 불이익이나 손해가 없다면 나서지 말라는 말부터 하는 것이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조금이라도 마음 편하게 몇 가지 일은 숨길까 생각도 했지만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이상 어차피 다 알게 될 일이었다.
김지훈이 솔직하게 낱낱이 말했다.
고경아의 호흡이 가빠졌다.
“교수님들께서 맡기라고 하셨는데 지훈씨가 직접 징계 요청을 했다고요?”
“그런 셈이긴 하지만 스승님이나 교수님들께 미룰 수는 없어요. 징계를 요구한 사람이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잖아요.”
고경아가 나직한 한숨만 내쉬며 입을 열지 않았다.
“경아씨, 언젠가 태어날 우리 아이한테 떳떳한 아빠가 되고 싶어요.”
말이야 그럴 듯 했지만 신경 쓰이다 못해 속까지 상하는 일이었다. 저녁 내내 불안과 초조함이 가득한 얼굴을 펴지 못했다.
또 머리 싸매고 누웠다.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12시가 넘었다.
이리저리 뒤척이던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고경아가 눈 떠 보라며 마구 흔들어댔다.
“그래요. 지훈씨가 옳다고 생각되는 일은 해야죠. 만일 다른 과 교수들이 눈총 주며 힘들게 한다면 개업해도 되잖아요. 교수가 인생의 끝인가? 보란 듯이 잘 살면 되지. 지훈씨 말대로 아빠를 자랑스러워 할 거예요.”
고마웠다.
고경아를 사랑하게 된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또 다른 길을 간다고 해도 본연의 일을 버리지 않을 수 있는 직업, 의사인 것 역시 행운이었다.
이런 용기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스승님, 큰 스승님, 선생님들, 식구들, 훈철이 형, 후배들까지 난 정말 행운아다.’
하윤호의 존재가 그동안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금 일깨워줬다.
그 시간 지동훈 교수와 마주 앉은 박승준 교수의 얼굴이 바짝 굳어 있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불평처럼 터트린 하윤호 교수의 말과는 달리 상황은 심각하기만 했다.
이미 술기운으로 얼굴이 벌겠다.
“선생님, 하윤호가 징계를 받든, 피하든 이젠 끝입니다. 더 이상 우리 병원에서 근무하지 못합니다.”
“제길! 징계 요청이라니.”
‘병신 같은 놈. 아무리 성질을 못 이겨도 그렇지 끼워 넣기만 해도 문제가 되는데 전공의는 왜 때려? 눈치가 제일 빠삭한 놈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까지 저지른 거야?’
하성원 원장의 힘으로 징계를 면할 수 있을까?
그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동훈 교수 말대로 일반외과 교수들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이상 대학 병원 교수로서의 생명은 끝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었다.
더 이상 미련을 둘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화려하고 쟁쟁한 모임이 떠올랐다. 하윤호가 떠나도 하성원 원장은 당분간 자리를 지킬 것이다.
‘변수는 없을까? 하성원 원장님에겐 큰 타격이 될 수도 있는데 손 놓은 채 두고 볼까? 그럴 리가 없어.’
중징계를 받는다면 하윤호를 교수로 임명한 하성원 원장도 급격하게 힘을 잃을 것이다. 그 점이 빤히 알고 있을 테니 필사적으로 막을 수밖에 없다.
모든 인맥을 총동원한다면 중징계를 면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교수 파면이나 해임은 교육부에서 최종 결정하기 때문에 어떤 결정이 날지 누구도 모른다.
감봉 등의 경징계를 받는다면?
하윤호 교수의 평소 행동을 볼 때 마지막까지 버티며 근무할 수도 있었다. 하성원 원장은 당연히 징계를 주도한 인물들에게 칼을 휘두를 테고 일반외과 교수들 역시 가만히 앉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가 이 싸움을 이길 지가 관건이었다.
원칙을 생각하면 명약관화해 보이는 일을 두고 고민이 깊어졌다. 모임에서 받은 명함의 무게가 보통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었다. 줄만 잘 서면 단번에 원하는 바를 이룰 지도 몰랐다.
‘응급 센터 센터장을 맡기고 싶다고 했지? 공연한 말이었을까? 동훈이는 어떻게 생각할까?’
“지 교수,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상당히 놀란 표정이다.
어이없다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으신 겁니까? 하윤호가 교수직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편들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걸 떠나서 자격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전에 없이 흥분하며 목소리까지 높였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일반외과에 국한된 일일 뿐이었다. 하윤호 교수와 참석한 모임의 면면을 보았다면 쉽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라 여겼다.
‘신중해야 돼. 굳이 한쪽 편에 설 이유가 없어. 어떤 결과가 나오든 김지훈 앞날도 순탄치 않겠군.’
“지 교수, 누가 봐도 좋은 일 아니다. 가만히 앉아서 지켜만 봐. 하윤호나 하성원 원장은 그렇게 쉽게 물러날 사람이 아니야.”
극도로 실망스러운 대답이었다.
지동훈 교수가 이를 악물었다.
“선생님, 정말 왜 이러십니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윤호를 감싸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전에 없이 높아졌다.
박승준 교수가 눈가를 찌푸렸다.
“하윤호가 파면 되도 간단하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야. 잘못 처신했다가는 너까지 피해 볼 수 있어.”
지동훈 교수가 벌떡 일어났다.
“실망입니다. 내가 알던 박승준 선생님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겁니까? 과장이든 그보다 더 높은 자리든 우리가 일반외과 의사라는 사실을 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잊으셨습니까? 돌아와 주십시오.”
“지동훈. 다 이유가 있어서 하는 말이야.”
“이유요? 앞날이 가장 창창한 펠로우가 피해를 감수하고 징계 요청을 했습니다. 우리에겐 창피한 일이란 말입니다. 두고 보려면 선생님 혼자 두고 보십시오.”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다신 보지 않을 것처럼 매몰찼다.
박승준 교수가 머리를 감싸 쥐며 벌컥 술을 들이켰다. 김지훈과 지동훈 교수의 얼굴이 교차했다. 동시에 마치 늪처럼 빠져드는 성공에 대한 열망이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전화기를 잡다말고 피식 웃었다.
‘하윤호,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자. 이번 일을 헤쳐 나가면 실력 하나 없는 널 교수까지 만들어준 그 잘난 배경을 인정해 주지.’
박승준 교수가 떠난 자리에 빈 술병 빈 술잔만이 남았다.
금요일 오전.
정식으로 징계 요청서를 제출했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이다.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하윤호에 대한 개인적인 미안함이나 동정 따위가 아니었다. 일반외과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아프고 슬플 뿐이었다.
이혁민 교수의 표정이 무거웠다.
“김지훈, 각오는 됐겠지? 요청서를 받아도 되겠나?”
어떤 결론이 나든 서로에게 좋은 결과는 없다. 하윤호나 김지훈 중 한 명은 병원을 떠나야 할 것이다. 떠나는 사람은 의사로서의 경력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사전 절차를 진행해 주십시오.”
무거운 탄식이 터졌다. 어떤 말로도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에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알았다. 오늘은 다른 생각하지 말고 쉬어라. 구미 갈 준비도 해야 하지 않겠나?”
하윤호 건이 아무리 중대하다고 해도 할 일을 방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지훈이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는 연구실로 향했다.
‘이번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악순환에 빠진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면 할 수 있는 말도 없겠지.’
몸이 힘든 것보다 몇 배나 더 힘든 일이었다.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
이혁민 교수가 눈가를 잔뜩 찌푸렸다.
사전 절차를 요청하기 전에 일반외과 내부 소명 절차가 필요했다. 그런데 하윤호 교수와 연락이 되질 않았다. 진료실, 교수실, 수술실, 병동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회진 때도 안 보이더니 도대체 어딜 간 거야?”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진지도 모르고 뭘 하고 있는지 갑갑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