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14화 (714/1,329)

4화. 끝을 보자. (1)

44세 남자 환자.

일단 나이와 성별만으로도 오전에는 불가했다.

Huge Lipoma on Flank.

(옆구리에 발생한 거대 지방종)

병명이 거창하게 들리지만 그냥 양성 종물이다.

즉, 옆구리 살에 혹이 하나 생긴 것이다.

이런 질환은 절대 응급이 될 수 없다.

원칙대로 순서를 배정해야 하는 경우였다.

“선생님, 국소마취로 하실 거 아닌가요? 수술실이 비어야 가능한데요.”

“병명 못 봤어? 사이즈가 커서 전신마취로 해야 돼.”

“그렇습니까? 그래도 이 환자는 오전에 넣을 수 없습니다. 내일 마취과에 직접 부탁하셔서 방이 나오면 하시거나 마지막 수술로 하시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무슨 소리야? 한 시간이면 끝나. 오전 수술로 잡아. 늦게 갖고 왔지만 어차피 내가 펠로우들보다 우선권이 있으니까 이 수술만 하나 넣어. 아! 김지훈은 구미 가니까 수술도 없겠네. 간단한 수술을 두고 뭘 그렇게 따져?”

명백한 끼워 넣기다.

단 한 번도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없었다.

백번 양보해 한 시간 안에 한다고 해도 원칙을 벗어난 이상 절대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부당한 일이었다. 전공의가 교수의 오더를 쉽게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혁원은 총치프고 그렇게 배웠다.

눈가에 힘을 준 이혁원이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원칙이 있는 것 아닙니까? 스케줄에는 넣지만 마지막으로 배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다하다 못해 전공의 새끼까지 덤비네.’

“하성원 원장님께서 직접 부탁하신 환자야. 무슨 말인지 너도 감이 오지? 내 입장까지 곤란하게 하지 말고 오전으로 배정해.”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주 기어오르는구나. 건방진 새끼.’

혀끝까지 뛰쳐나온 욕을 간신히 참았다.

큰소리 나면 좋을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물러날 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성원 원장이 명령조에 가까운 부탁을 했다. 양천석은 아버지 위세를 믿고 평소에도 안하무인인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과장이나 되면 모를까 교수 정도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절대 만만치 않은 하윤호 자신마저 한 수 접어야 할 정도였다. 수술을 미뤘다간 난리가 날 테고 그것도 월요일에나 가능하니 하윤호 입장에서는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내일 오전에 수술 안 된다고 하면 지랄하면서 퇴원할 놈인데 어떻게 하지? 양 회장은 원장님도 쩔쩔맬 정도로 더 지랄 맞은 사람이잖아.’

하성원 원장까지 난리를 칠 것이다.

진퇴양난이었다.

욕을 먹더라도 애초에 외래에서 일정을 조정해야 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지만 발목을 잡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양천석의 요구에 고개를 끄덕인 순간 내일 수술하는 것 이외에는 답이 없었다.

적어도 하윤호 교수 자신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간단한 수술 하나 받고 일반 병실 환자와는 비교도 안 될 비용을 지불할 것이다. 성격 나쁜 환자라고 해도 비위 맞춰 가며 잘 보이면 도리어 큰 득이 될 수 있었다.

‘이 정도로 편의를 봐주면 내가 투자한 건에 신경을 더 쓰겠지?’

저울이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하윤호 교수가 얼굴을 잔뜩 굳혔다.

이혁원은 아직도 물러날 태세가 아니었다.

‘그냥 모른 척하고 내면 누가 안다고 이 지랄이지? 다들 자기 수술하느라 바빠서 신경도 못 쓸 게 빤하잖아.’

짜증이 솟구쳤다.

전공의까지 무시한다는 기분이 들어 화가 치밀었다. 가장 주의해야 할 김지훈은 곧 구미로 가니 하루 이틀만 잘 넘기면 유야무야 묻힐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결정적인 방심에 김지훈을 향한 적개심과 짜증까지 겹쳤다.

“이혁원, 잔말 말고 스케줄 올려. 이런 경우를 못 본 모양인데 다른 병원에서는 심심찮게 벌어지는 일이야. 때론 융통성이 필요한 법이다. 두 번 말 안 한다.”

“안 됩니다.”

“뭐? 안 돼?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죄송합니다. 원칙대로 하겠습니다.”

‘씨펄! 누가 이준영이 지 애비 아니라고 할까봐 뻗대는 거야? 이래서 나종진을 치프 시켜야 한다니까.’

“정말 안 돼?”

하윤호 교수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이혁원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예. 원칙대로 해야 합니다.”

말로만 거부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양천석 환자의 스케줄을 맨 뒤에 놓고 있었다.

평소라면 어떻게든 잔머리를 굴렸을 하윤호 교수였다. 그러나 지난 6개월간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고 최근에는 강한 심리적 압박에 시달렸다.

‘이 새끼도 김지훈하고 똑같은 놈이네. 내가 교수로 보이지도 않는단 말이지?’

총치프라고 해도 이혁원은 전공의에 불과하다.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눈이 뒤집혔다. 부르르 눈가가 떨리고 볼살은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켰다.

주먹을 쥐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가 정말. 넌 전공의야. 인마. 교수 말이 말 같지 않아? 싸가지 없는 새끼. 빨리 앞에 안 넣어?”

쌍욕까지 해대자 이혁원이 흠칫 놀랐다. 당황도 잠시 도리어 원칙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안 됩니다.”

이혁원이 조금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눈가에 힘을 준 채 정면으로 부딪쳤다. 김지훈의 눈빛이 보였다. 그 순간 하윤호 교수가 이성을 잃었다.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눈깔에 보이는 게 없어?”

하윤호 교수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이혁원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찼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맞아 본 사람만이 안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이혁원이 이를 악물며 인상을 썼다.

“어쭈? 니가 지금 개기는 거야?”

수련 중 숱하게 맞았던 하윤호 교수였다.

지금도 많은 병원에서 은밀하게 구타가 벌어지지만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런 기억과 사실이 자신의 폭력을 둔감하게 만들었다.

퍽! 퍽! 퍽!

정강이를 사정없이 내리 걷어찼다.

‘윽’ 소리와 동시에 이혁원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단단한 구둣발에 인정사정없이 얻어맞았으니 건장한 체격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이 새끼가 어디서 엄살을 부려? 빨리 일어나. 스케줄 제출 안 해? 전공의 새끼가 교수를 뭘로 보고. 건방진 새끼.”

씩씩 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이혁원이 이를 악물었다.

교수라고 해도 전공의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자신의 요구를 따르지 않는다고 폭력까지 쓰다니 참을 수 없었다. 상대는 교수 같지도 않은 하윤호에 요구 자체가 부당한 일이었다.

불끈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하마터면 이성의 끈을 놓을 뻔했다.

‘확 들이박고 옷 벗어?’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김지훈이었다.

혈관 수술을 앞두고 오전에 박승준 교수와 함께 수술한 환자를 확인하기 위해 잠깐 올라온 참이었다. 의국에 들를 틈이 없었지만 난데없이 들려온 신음 소리에 문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김지훈이 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일그러진 이혁원의 얼굴에서 고통이 보였다.

‘뭐야? 왜 주저앉아 있어? 표정이 왜 저래? 설마 혁원이를 때린 거야?’

일반외과에서 폭력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더구나 총치프가 교수한테 맞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눈앞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닐 것이라 믿었고 아니어야 했다.

하윤호 교수가 흠칫 놀랐다.

머릿속에서는 이성을 잃게 할 정도로 초조함과 분노를 일으키던 김지훈이었다. 그런데 막상 얼굴을 보자 부글부글 끓던 가슴이 서늘하게 식었다.

데굴데굴 눈알을 돌렸다.

‘이 자식은 수술하다 말고 왜 올라온 거야? 재수 없는 새끼. 제길! 더 밀어붙이면 일만 커진다.’

이 자리에 있어 봐야 전과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치명적인 문제가 될 것이 빤했다. 양천석이고 뭐고 일단 물러나야 할 때였다.

이제야 잔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윤호 교수가 이혁원을 잡아 일으켰다.

“에이! 어쩔 수 없네. 수술 취소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수술 확실하게 취소한다. 내가 분명히 말했어. 원장님 입장 곤란하겠네. 조심 좀 하지 칠칠맞게 부딪치기나 하고. 쯧!”

이혁원의 입까지 확실하게 막아야 문제될 소지를 모두 차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수술 취소를 연달아 말하며 하성원 원장까지 언급했다.

“나도 곤란하지만 이혁원 네 말대로 원칙은 지켜야지. 그렇게 하자. 눈 똑바로 뜨고 다녀.”

‘지금 일 떠벌리고 다니면 재미없을 줄 알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한마디 더 던지며 이혁원을 노려보았다. 입 꽉 다물라는 무언의 경고를 다시 한 번 날리고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이 순간에도 잔머리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지. 완전히 취소하면 더 난리 칠 게 분명해. 오후에라도 잡아 놓아야 할 말이 있지. 재수 좋으면 수술할 수도 있고 말이야.’

의국 문을 열던 하윤호 교수가 돌아섰다.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혁원, 혹시 모르니까 취소하지 말고 마지막에 넣어. 퇴원하지 않고 수술 받으면 다행이잖아. 그렇게 하자.”

무슨 말일까?

이혁원이 한동안 무릎을 펴지 못했다. 눈치를 보며 슬쩍슬쩍 정강이를 문지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엇인가 일이 벌어진 것은 분명했다.

눈가를 찡그리던 김지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의외로 나직했다.

“무슨 일이야?”

이혁원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지금도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김지훈의 얼굴을 보는 순간 머릿속은 이미 차갑게 식었다.

‘병옥이 일로 대판하셨는데 솔직하게 말하면 또 싸우시겠지? 아버지 말로는 한 번 더 그런 일이 생기면 선생님에게도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절대 안 돼. 스케줄은 원칙대로 한다고 했으니까 나만 입 다물면 넘어갈 수 있어.’

“별일 아닙니다.”

말과는 달리 얼굴이 벌겋게 달아있었다.

“다리는 왜 그래?”

“책상 모서리에 부딪쳤습니다. 아직 수술 남으셨을 텐데 안 내려 가세요?”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지나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도 하윤호 교수와 연관된 일이었다. 몇 번을 물어봐도 고개를 저었고 도리어 웃기까지 했다.

이혁원의 속마음을 알 것 같았다.

“이혁원, 내가 분명히 하윤호하고 관계된 일은 나서지 말라고 했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똑바로 얘기해.”

“정말입니다. 아무 일 없었습니다.”

김지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윤호는 너무 많은 말을 했다.

“그래? 스케줄 줘 봐.”

여전히 나직한 목소리에 이혁원이 침을 꿀꺽 삼켰다. 불쑥 겁이 났지만 김지훈과 하윤호 교수가 또 충돌하는 일은 훨씬 더 두려운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늦어서 지금 바로 내야 합니다. 선생님.”

“내가 낼 테니까 이리 줘.”

이혁원에게 뺏다시피 스케줄을 받아 들고 확인하던 김지훈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아무 문제없는 스케줄을 두고 목소리를 높이진 않았을 것이다. 하윤호 교수 수술은 지방종 한 개였고 마지막 말을 똑똑하게 기억했다.

수술을 취소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를 언급했을 때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순간 감이 왔다.

끼워 넣기에 폭력이다.

“원장님 입장 곤란해진다고 했나? 이혁원, 601호 특실 맞지? 이 환자 스케줄 두고 말 나온 거 아냐? 똑바로 말해. 나 지금 터지기 직전이야. 내 추측만으로 행동해도 되겠어?”

이혁원이 다급해졌다.

정확하게 추측했지만 전후 사정 확실히 모르고 나섰다가는 김지훈에게 더 큰 문제가 일어날 수 있었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선생님, 사실은 수술 순서 때문에 잠시 목소리가 높아지긴 했지만 들으신 것처럼 원칙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이혁원이 차포 떼고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혹시 몰라 하윤호 교수와 또 충돌하면 생각 이상의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는 이준영 교수의 말까지 언급했다. 하윤호 교수가 하성원 원장을 언급한 것과 똑같은 실수였다.

‘네 말이 맞는다면 지나갈 일일 수도 있는데 그런 일로 스승님 말씀까지 얘기해? 아니야. 내가 하윤호와 충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넘어가려고 하는 것이 분명해. 혁원아, 이건 아니다.’

폭력 행사는 더 큰 문제였다.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다.

“모서리에 부딪친 놈이 지금까지 쩔쩔매?”

이혁원이 손사래를 쳤다.

어떤 일이 있어도 김지훈에게 이 문제만큼은 숨겨야 했다. 확실하게 아는 순간 난리가 날 것이다. 하윤호와 자신 사이에 벌어진 일로 가장 존경하는 선배이자 친형 같은 사람을 곤경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그건 정말 탁자에 부딪친 겁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리며 이를 악물었다.

‘맞네. 하다하다못해 혁원이까지 때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목덜미를 잡아채 패대기치고 싶었다. 이혁원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절대 넘어갈 수 없었다.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벌떡 몸을 일으키던 김지훈이 갑자기 멈춰 섰다. 감정을 따라 행동하지 말라는 강한 경고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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