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12화 (712/1,329)

3화. 구미 가기도 전에. Ⅱ (1)

김지훈이 벌인 일도 아닌데 돌아누운 채 입도 빵긋하지 않았다. 구미를 생각하면 암담하고 고경아 볼 낯도 없어 죽을 맛이었다.

“경아 씨,”

“머리 아파 죽겠어요. 내일 얘기해요.”

밤새 뒤척였다.

긍정의 제왕, 김지훈도 쉽사리 마음을 풀지 못했다. 고경아가 함께 가기 때문이었다. 혼자 가야 하는 일이었다면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후우! 왜 이렇게 일이 꼬이지? 이게 다 하윤호 때문이야. 실력만 갖췄어도 이렇게 몸이 힘들지 않았을 테고 그러면 구미 가는 일도 한결 쉬웠을 거 아냐. 아휴! XXX. 그나저나 구미가 가까운 곳도 아닌데 누굴 데려가지?’

하늘 같은 마누라님이 제일 중요했지만 2년차 중 누구를 데려가야 할지도 보통 부담되는 일이 아니었다. 교수들이 그랬듯 충분히 고민하고 상의해야 할 일이었다.

어쨌든 준비는 해야 한다.

다음 날, 틈을 내 구미 일반외과 과장과 직접 통화했다.

같은 학교 출신이 아닌 탓에 자세한 얘기를 나누기 어려웠다. 곧 그만두는 사람에게 사소한 일까지 꼬치꼬치 캐물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일만 물었다.

(수술은 할 만큼 하고 있습니다만 어디나 비슷하지 않을까요? 혼자 근무하기에는 힘들 테니까 오셨을 때 부담되지 않도록 조치는 취하겠습니다.)

(당직 설 때 문제는 없으십니까?)

(환자가 얼마나 오느냐에 달린 일이겠죠.)

목소리가 어딘지 흐릿했지만 분명 한 명이 근무할 수 있는 여건은 아니었다. 특히 당직이 문제였고 갑작스러운 파견은 김지훈만이 아니라 전공의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시간 나는 대로 고민을 거듭하던 김지훈이 강병옥과 송진우를 불렀다.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둘 중의 한 명이 함께 가야 한다는 말을 했다.

“내일까지 고민해 보고 결정해. 누군가 한 명은 가야 하지만 상황이 허락하지 않으면 부담 갖지 말고 말해도 돼. 생각보다 수술이 많지 않은 것 같아서 힘은 덜 들 텐데 가 봐야 아는 일이겠지? 억지로 갈 필요 없다.”

구미는 서울에서 한두 시간 거리가 아니다. 전공의 인원이 적어 오프도 적을 수밖에 없다. 연고가 없는 이상 오프를 받아도 특별하게 할 일이 없는 곳이기도 했다.

결정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어라? 고민하는 눈치도 잠시였다.

‘이건 기회야. 3년차가 한 명밖에 없으면 치프가 들어가야 할 수술 말고는 다?’

두 놈 눈빛이 번쩍번쩍 빛났다.

서로 가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고민이 짧으면 후회도 많은 법이다.

“진우야, 병옥아, 생각은 해 보고 결정해야지.”

“아닙니다. 오더만 내리시면 바로 짐 싸겠습니다.”

“저는 집이 서울이 아니라서 아무 상관없습니다.”

김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진우야, 병옥아, 타지 생활 3개월이야. 웬만하면 생각 좀 하고 결정하자. 쉬운 일 아니다.”

“어차피 병원 생활이 타지 생활입니다.”

한 치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아무 이의도 없는 거지? 정말이지?”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뜻밖의 반응에 당황스러울 정도였지만 마음의 짐 하나는 확실히 덜었다.

누굴 선택해야 할까?

넘치면 넘쳤지 모자람은 없었다. 찬찬히 지난밤의 고민을 다시 정리한 김지훈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진우야, 네가 나하고 함께 가자.”

송진우의 얼굴이 벌게지는 순간 강병옥은 상당한 실망감을 보였다. 애써 표정을 감추려 했지만 서운함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역시 아직은 날 완전히 신뢰하시지 못하는구나. 환자 몇 명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겠지.’

얼굴만 보아도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망설임 없이 구미 파견을 자청했던 모습이 고맙기만 했다. 송진우를 선택한 이유를 말할 수밖에 없었다.

“병옥아, 구미가 한두 시간 거리도 아닌데 서운해?”

“아닙니다. 선생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자식이! 병옥아, 나 없는 동안 이준영 선생님이 간담도 환자를 혼자 다 보셔야 하잖아. 너까지 없으면 혁원이 혼자 어떻게 감당해? 진우 빠지면 그 파트도 힘들겠지만 교수가 세 명이나 있어서 상황이 달라.”

강병옥의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

“너희들 앞에서 할 말은 아니다만 우리 파트는 사실상 이준영 선생님 한 분만 남는 꼴이야. 이런 상황에서 병옥이 너한테 구미 가자고 할 수 있겠어?”

“전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습니다.”

“진우가 간다고 해서 다행이야. 못 간다고 버팅기면 어떻게 하나 걱정 많이 했다. 송진우, 구미 결코 편하지 않을 거야. 일도 일이지만 전공의들과의 관계도 중요해.”

“명심하겠습니다.”

의외로 가뿐하게 해결됐다.

한결 마음이 가벼웠고 후배들의 마음이 정말 고마웠다. 무슨 일인지 혈관 수술도 없어 모처럼 제 시간에 퇴근할 수 있었다. 이젠 남은 과제는 하나, 고경아의 마음을 달래야 한다.

그 생각을 알기라도 한 듯 고경아가 전화를 했다.

근무 중에 전화를 받기는 처음이었다.

“지훈 씨, 오늘 별일 없죠?”

순간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덜컥 겁이 났지만 이럴 땐 시치미 뚝 떼는 것이 살 길이다.

“그럼요. 웬일로 전화를 다했어요? 우리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갈까요?”

“갈 데가 있으니까 끝나자마자 바로 집으로 와요. 아니다. 7시에 병원 앞에서 만나요. 1분이라도 늦으면 알죠?”

다른 때라면 사정을 봐 주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정말 1분이라도 늦으며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긴장 늦추지 않고 회진 돈 후 부리나케 달려갔다.

다행이다.

정각 7시다.

김지훈을 본 고경아가 손을 잡고는 집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보통 급한 것이 아니었다. 이유를 물어봐도 숨이 차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서둘러? 숨 넘어 가겠네.’

배는 고픈데 밥 먹자는 소리도 없이 애마가 세워진 곳으로 향했다. 분위기도 별로 안 좋은 상황인데 외식을 할 리가 없었다.

“이 시간에 어디 가려고요?”

“시간 없으니까 빨리 운전해요.”

애마를 타고서야 행선지를 말했다.

김지훈이 살짝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곳이었다.

“백화점으로 가요.”

“백화점이요? 이 시간에 백화점은 왜?”

“늦으면 문 닫으니까 일단 빨리 가요.”

신사복 코너다. 양복에 넥타이까지 김지훈에게 맞춰 보며 부산을 떨었다. 옷을 팔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는지 점원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경아 씨, 무슨 일 있어요? 지금 있는 것도 많은데 갑자기 양복은 왜 새로 사요? 넥타이는 또 뭐에요?”

“지훈 씨, 구미에서 혼자 근무하잖아요.”

“그게 양복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하루가 됐던 한 달이던 과장님이잖아요. 과장이면 과장답게 입어야 하는 거예요. 이혁민 선생님이 어떻게 입고 다니시는지 매일 보면서도 몰라요? 외모로 평가하지 말라지만 갖춰야 할 때는 갖춰 입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책임지는 진짜 멋쟁이에요.”

어느새 마음을 정리한 모양이었다.

나이는 어린데 훨씬 생각이 깊었다.

사랑의 힘일 것이다.

‘나 정말 장가 잘 간 것 같다. 경아 씨, 사랑해요.’

김지훈이 감동의 물결에 눈만 껌벅거렸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고경아가 골라 주는 옷을 입으며 외모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하루 종일 가운과 수술복만 입고 다니는 탓일 수도 있지만 고경아의 마음 씀씀이를 알지 못했다.

미안하고 감사한 일이었다.

“이 옷이 잘 어울리나? 무늬가 너무 튀는 것 같기도 하고. 아이! 안 되겠네. 저 옷도 입어 봐요. 지훈 씨, 넥타이를 똑바로 매요. 그래야 잘 어울리는지 알 거 아니에요?”

감동의 물결이 어디론가 스르르 사라졌다.

공포의 쇼핑이다.

끝나는 시간이 임박한 탓에 보통 서둘러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옷을 사는 김지훈도 힘들 판인데 구두까지 새로 장만했다.

잠시 쉴 틈도 없었다.

가냘픈 고경아의 몸 어디에서 이런 가공할 힘이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 확실히 수술보다 더 힘들어.’

이왕 나온 김에 종로 뒷골목을 찾아 저녁을 해결했다. 생선 구이 냄새에 군침이 감돌았지만 오늘은 왠지 궁색했다.

“경아 씨, 옷도 사고했는데 우리 조금 비싼 데 가서 먹죠. 오늘 힘들었잖아요.”

“아껴야 잘 사는 거예요.”

손에 들린 가방이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자기 옷도 아닌데 백화점에서 비싼 옷 사고는 저녁 밥 값 아끼는 고경아의 말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쩐지 순순히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다가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물론 입은 찢어져 있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경아 씨, 경아 씨 옷은 안 사요? 내가 과장이면 경아 씨는 사모님이잖아요.”

“이제 그 생각이 나요? 빨리도 하네. 알아서 할 테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세요.”

눈을 흘겼지만 위기 모면이다.

막 집에 도착했을 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반가운 사람이다.

“형님, 웬일이세요.”

“잘 지냈지? 이번 주 금요일 밤 10시에 방송 나간다. 너하고 일석이, 송진우 선생, 강병옥 선생 다 나오니까 꼭 봐. 일반외과, 그 하루가 제목이야. 볼 만할 거다.”

와우! 오늘은 좋은 일의 연속이다.

매일 밤 홍간난 환자가 어떤지 확인할 때마다 힘들어 하던 간호사의 목소리도 한결 밝았다.

(한 시간 전에 치매 기운이 또 도진 것 같았는데 강병옥 선생님하고 송진우 선생님까지 오니까 몇 마디 하시고는 잘 주무세요. 이런 날 처음인 것 같아요.)

전화를 안 할 수가 없었다.

(병옥아, 너 구미는 꿈도 꾸지 마. 이준영 선생님 힘들게 하지 않은 사람은 혁원이하고 너밖에 없어.)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고마워야 할 사람은 도리어 김지훈 자신인데 강병옥의 목소리가 힘찼다. 천사 같고 사려 깊은 아내, 든든하고 믿음직한 후배 덕에 정말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지금 구미 과장님도 혼자 근무하잖아. 까짓 한 달 금방 지나갈 거야. 경아 씨, 기다려요. 최철한 선생님만 오시면.’

뭘 기다리라는 말일까?

모진 하루하루가 지나고 금요일 밤이 왔다.

여기저기서 흥분과 기대가 감돌았다.

김지훈은 고경아, 고경희와 신현수는 윤서연과 이경석은 가족과 함께 TV 앞에 모여 앉았다. 전공의들은 맥주 하나씩 들고 옹기종기 모여 방송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다들 긴장 풀지 마. 딱 두 시간만 조용히 지나가자. 변종수, 눈에 힘 안 줘? 응급실에 환자 뜨면 네 탓이다.”

이혁원의 말에 의국이 조용해졌다.

고성문과 최문옥 여사가 기대 섞인 표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고경철은 친구들과 소주잔을 들며 술집 벽에 걸린 티브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도 나올지 몰라. 잘 봐.”

“경철아, 매형은 두 번째 방송 타는 거라며? 역시 실력 있는 사람은 뭔가 달라.”

최훈이 조그만 아뻬 수술 자국을 만지며 웃었다.

방송을 기다리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교수들 대부분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고 심지어 정훈철도 한수임과 함께 TV 앞에 앉았다. 늦은 밤에도 승희의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누군가만 배알 꼴린다는 표정으로 티브이 앞에 앉았다. 같은 성을 가진 두 사람이다.

띠! 띠! 띠이이이!

밤 10시.

드디어 일반외과, 그 하루가 시작됐다.

날이 밝기도 전에 의료봉사를 떠나는 사람들의 부산함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초반부터 환호성과 품평이 쏟아졌다.

“어머! 어머! 언니, 나도 나왔어.”

“진우야, 넌 의료봉사를 가서도 얼굴이 벌게지면 어떻게 해? 김지훈 선생님하고 손일석 선생님 좀 봐라. 일반외과 의사가 저래야지.”

“허허! 화면 잘 받네. 잘 받아. 힘들게 일하고 휴가 가서 해마다 의료봉사를 하는데 얼굴이 안 좋을 리가 없지. 고성문 선생님이 아무리 엄해도 너희들 마음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허허! 잘했다. 잘했어.”

진료에 열중하는 의료진과 구슬땀을 흘리며 뛰어다니는 직원들의 모습은 병원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서서히 카메라 앵글이 돌았다. 구석진 곳에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누군가를 바라보는 시골 아낙이 보였다.

송진우의 어머니였다.

김지훈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자식을 보는 어머니의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언제 인터뷰까지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시골 노인들인 송진우 부모님의 어눌하고 어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우리가 뭐 아나요? 그저 진우가 열심히 일해서 아픈 분들 잘 고쳐 주고 같이 일하는 선생님들께 폐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오늘 진우 아빠가 가져온 거 맛있게 드셨는지 모르겠네. -

몇 마디에 불과했지만 수십 마디 말보다 무거웠다.

밥 먹다 말고 송진우에게 물 한 잔을 건네는 어머니의 손길과 겹쳐지자 모두들 눈시울을 붉혔다.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로 밝게 웃는 아버지의 모습도 결코 멀리 있지 않았다.

자주 찾지 못하는 우리의 부모님이었다.

잔잔하면서도 감동을 주는 화면이 스쳐 지나갔다.

담담함이 이내 사라졌다.

일반외과 의사로서의 삶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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