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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707화 (707/1,329)

10화. VIP란. (2)

잠시 떠들썩했던 자리가 조용해졌다.

“그만하고 회진 돌자. 이런 일 벌어졌다고 환자 파악 못했으면 알지? 땀 냄새 나니까 환자 가까이 붙지 마.”

김지훈의 말에 후다닥 소리가 따라 붙었다.

가장 먼저 앞장섰던 강병옥이 환자 파악을 못한 대가를 단단히 치렀다. 김지훈이 매몰차다고 할 정도로 목소리를 높였다.

“강병옥. 종철이 곧 퇴원해도 될 것 같다고 하지 않았어? 검사 결과도 제대로 모르면 어떻게 해? 드레인은 도대체 언제 뺄 거야?”

“죄송합니다.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이혁원, 오늘 일로 혹하지 말고 교육 단단히 시켜. 조금 있으면 3년차 될 놈이 말이야. 쯧!”

까맣게 탄 강병옥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타면서 기분 좋기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 속에 담긴 김지훈의 마음을 본 덕분일 것이다.

홍간간 환자에겐 도리어 김지훈이 혼났다.

“의사 선생, 왜 남의 집 멀쩡한 자식을 혼내고 그래? 그럼 못써. 누군지 몰라도 잘생겼네. 뉘 집 자식이야?”

그새 강병옥을 기억하지 못하는 홍간난 환자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치매가 수술 및 수술 후 치료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할머니를 제일 잘 알아야 할 사람인데 몰라서 혼내는 겁니다.”

홍간난 환자가 며느리를 보며 눈을 껌벅였다.

“애기야, 우리 친척이야?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긴 한데 도통 기억이 안 나네. 에이구! 늙으면 이래서 죽어야 돼. 너 누구야?”

홍간난 환자의 손가락 끝에 강병옥이 걸려 있었다.

치매 걸린 어머니를 보는 아들과 며느리의 슬픔이 보였다. 치료할 수 없는 병 하나에 치료하기 정말 힘든 병이 또 하나 있다. 그런 어머니를 보는 것만큼 힘든 일도 없을 것이다.

의사도 마찬가지다.

이혁원이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 정신과에서도 특별한 치료가 없다는데 치매 때문에 정말 걱정입니다.”

“나도 걱정이다.”

김지훈도 한숨을 푹푹 쉬었다.

정말 고단한 하루였다. 일단 퇴근해서 푹 쉬고 싶었다. 그때 변종수가 계단 입구에서 뛰어나오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혁원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넌 회진 다 돌았는데 어디 갔다 온 거야?”

“죄송합니다. 응급실에······.”

응급실? 아! 당직이다.

아뻬다.

모든 준비가 끝나도록 김지훈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강병옥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수술에 대한 열망을 참기 어려웠다.

준비 됐을 때 수술을 주겠다는 말이 지금도 생생했다. 중간중간 혹시 수술을 줄지 모른다는 기대를 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시간만 나면 최종철을 찾은 것도, 홍간난 환자를 찾아 거리를 헤맨 것도 김지훈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만했다고 혼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욕심내서는 안 돼. 진우, 선배님들, 김지훈 선생님 눈에 내가 변하려 애쓴다는 사실을 보이려고 한 일이 아니잖아.’

대가를 바라고 환자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열심히 환자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대가가 따라온다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이 어느새 수술 방이었다.

김지훈이 무심한 표정으로 물었다.

“혁원아, 환자 올라왔어?”

“아직 안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아뻬를 왜 병옥이하고 들어왔어? 진우, 너는 오프 아냐? 왜 따라 들어왔어?”

아직도 부족한 걸까?

강병옥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종수가 오늘 오프입니다. 진우는 갈 데가 없다고.”

“그래? 이럴 시간에 여자 친구나 만들지. 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셋 다 나 좀 보자.”

김지훈이 이혁원, 송진우, 강병옥과 마주 앉았다.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했다.

“강병옥, VIP 환자가 있나? 벨기에 대사 부인을 수술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묻는 거야. 고민하지 말고 그냥 네 생각을 말해 봐.”

잠시 입술을 모은 채 생각에 잠겼던 강병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때는 VIP 환자가 있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최종철과 홍간난 할머니를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 이혁원, 송진우, 너희들은?”

“저희야 뭐······.”

이혁원이 머리만 벅벅 긁었다.

송진우야 안 봐도 빤했다.

애초에 VIP란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연히 똑같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두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젠 생각이 바뀌었어. VIP 환자는 당연히 있다.”

깜짝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벨기에 대사 부인, 정승옥 환자, 최종철, 홍간난 할머니를 비롯해 우리가 수술하고 치료하는 모든 환자가 다 VIP 아닐까? 어떤 환자도 차별해서는 안 돼. 모두가 우리가 가진 모든 정성과 실력을 쏟아부어야 할 사람들이야.”

P는 person이 아니라 patient였다.

아니, person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세상에 귀중하고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심지어 하윤호마저도 누군가에게는 그런 존재일 것이다. 그 사람이 환자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왠지 숙연한 분위기였다.

‘이 자식들이 별말도 아닌데 왜 이래?’

콧소리를 낸 김지훈이 이혁원을 보았다.

“혁원아, 내 말이 맞아 병옥이 말이 맞아?”

“선생님, 당연히 선생님 말씀이 맞죠.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VIP 환자 있습니다. 당연히 있죠.”

딸랑! 딸랑!

“하하하! 역시 내 후배야. 가자. 바퀴 소리 난다. VIP 환자 올라오신 모양이다.”

농담은 여기까지다.

수술 준비가 다 끝나도록 김지훈은 언제나 그렇듯 조용히 환자만 보고 있었다. 이혁원과 함께 복부 소독을 끝낸 강병옥이 세컨 자리에 서려는 순간 김지훈이 고개를 돌렸다.

예사로운 눈빛이 아니었다.

“강병옥, 스스로 준비가 됐다고 생각해?”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강병옥이 머뭇거렸다.

“수술 시작해야 한다. 빨리 대답해.”

갈등이다.

‘내가 정말 변했을까? 김지훈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준비가 됐을까? 됐다고 하면 수술을 주시겠지? 아니야. 솔직하게 말하자.’

모두가 보고 있다.

“죄송합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김지훈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이 캄캄해지며 가슴이 또 쿵 내려앉았다.

강병옥의 착각이었다.

원하던 말이었다.

“그래? 그럼 확인해 보자. 집도해. 이혁원, 퍼스트 서.”

기대도 못한 말에 강병옥이 깜짝 놀랐다.

“선생님, 정말 수술을 주시는 겁니까? 전 아직······.”

“강병옥, 나도 준비가 다 안 됐어. 2년차밖에 안 된 놈이 어디서 건방지게 날 추월하려고 해? 평생 노력해야 하는 일이야. 시간 없어. 빨리 시작해.”

강병옥이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김지훈은 세컨 자리에 서서 눈길만 주었고 도리어 이혁원이 목소리를 높였다. 송진우의 눈가에는 부러움이 입가에는 즐거움이 실려 있었다.

“선생님, 뭐해요? 마취 시간만 길어집니다.”

번뜩 정신을 차린 강병옥이 수술을 시작했다.

역시 실력은 뛰어나다.

빠르게 배를 열고 아뻬를 절제했다.

강병옥의 눈빛과 손놀림이 전과 분명히 달랐다. 진지한 자세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결코 실수하지 않겠다는 듯 수술에만 집중했다.

자만과 자신이 아닌 신중함만이 보였다.

수술 내내 김지훈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마지막 수처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킨 김지훈이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진우야, 많이 긴장해야겠다.”

송진우의 벌게진 눈가에 피식 웃으며 강병옥의 어깨를 한 대 툭 쳤다. 김지훈이 수술실을 나간 후에도 강병옥은 입을 열지 못했다.

이보다 더 기쁜 말은 없었다.

간절하게 바랐던 일이었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문득 붉어지는 눈가에 강병옥이 고개를 숙였다.

이혁원이 밝게 웃었다.

“강병옥 선생님, 열심히 하세요.”

“에이! 얼마나 긴장해야 되는 거지?”

정말 보기 드문 송진우의 투덜거림까지 들렸다.

수술실을 감도는 차가운 냉기 속으로 한 줄기 따스함이 흘러들었다. 강병옥은 이제야 진짜 일반외과 수련을 시작하는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아뻬 환자 병실을 찾아 상태를 확인한 후 연구실로 향했다. 전공의들과 마주 앉아 오더를 내던 이혁원이 입맛을 다셨다.

“구미 가실 날이 얼마 안 남았네. 홍간간 환자 퇴원할 때쯤 가시겠지? 일이 좀 줄어들까? 종진아, 몸은 편할 것 같은데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다.”

“아쉬워? 그럼 따라가.”

“그게 우리 마음대로 돼? 김지훈 선생님 내려가시면 3개월 동안 지옥일 텐데 구미에 누가 있더라.”

“그 정도로 환자가 많지는 않다고 들었어.”

“없는 환자도 만드는 선생님이야. 얼마나 가겠어? 아마 환자 없으면 공부라도 하자고 다른 과제 엄청 내 주실 거다.”

나종진이 크게 웃었다.

“네 말이 맞다. 몸이 힘드나 머리통이 터지나 그게 그거지. 아이고! 신현수 선생님 당직이 늘 텐데 걱정이다. 정색하실 때는 김지훈 선생님보다 더 무섭잖아.”

“그러게. 왜 이렇게 산이 많지? 험난하다.”

오가는 말과는 달리 이혁원의 눈빛에 아쉬움이 진하게 서렸다. 다들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허구한 날 타고 혼나면서 쌓인 정이 적지 않았다.

연구실로 올라간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결정해야 할 일이 있었다.

‘스승님과 홍간난 환자 수술에 대해 상의하기 전에 일단 수술 팀은 미리 정해야겠다.’

애초에 신현수나 이경석을 생각했다.

그 이상의 수술 팀은 없었지만 오늘 강병옥을 보며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스승은 아무리 어려운 수술이라도 김지훈을 믿고 퍼스트를 세웠다.

이혁원은 총치프다.

함께 췌장까지 제거했다.

강병옥의 열정과 정성이 살아나고 있었다.

믿음과 신뢰 그리고 실력 중 어느 하나 모자란 것이 없었다. 어쩌면 집도의의 실력이 가장 불확실할지도 몰랐다. 고민하며 갈팡질팡할 문제가 아니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

이혁원과 강병옥을 찾았다.

“홍간난 환자 수술 준비 철저히 해.”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시는 오늘 같은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설마 그 일 때문에 퇴근 못하신 건 아니시죠?”

“그 준비 말고. 이혁원, 강병옥, 내 손 못 따라오면 둘 다 죽을 줄 알아.”

“예? 우리가 들어갑니까?”

기대도 못한 모양이었다. 그동안 어려운 수술은 모두 펠로우들로 팀을 구성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불가피했다고 해도 한편으로는 미안한 일이었다.

내색하면 미안함 마음만 더 커진다.

“뭘 그렇게 놀라? 이혁원, 퍼스트 설 자신 없어?”

“아닙니다.”

“강병옥. 설마 세컨도 자신 없는 건 아니지?”

말도 끝나기 전에 강병옥이 소리쳤다.

“세컨 설 자신 있습니다.”

“자신감이 확실해?”

“예. 절대 자만하지 않겠습니다.”

퍼스트를 서야 하는 이혁원의 각오와 세컨을 서면서도 긴장하는 강병옥의 얼굴이 가슴에 박혔다. 송진우는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믿음은 필연적인 변화를 부르는 법이다.

다음 날, 이준영 교수와 함께 휘플 수술을 준비했다.

신현수와 이경석도 참석했다.

당연히 참석해야 하는 이혁원과 강병옥이 단 한 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바짝 기울였다. 송진우는 당직이라며 자연스럽게 얼굴을 내밀었다. 열정이 실린 왕성한 지적 호기심에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준비가 거의 끝날 무렵 이준영 교수가 물었다.

“누구하고 할 거야?”

이미 수술 팀을 짰지만 은근히 떨렸다.

이준영 교수는 강병옥을 신뢰하고 있을까?

“혁원이와 병옥이하고 할 생각입니다.”

“수술 팀 구성 괜찮다.”

이준영 교수의 눈길이 강병옥을 향해 있었다.

또 한 명의 전공의를 확실하게 인정하고 있었다. 함께 자리한 신현수와 이경석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강병옥이 가빠지는 숨을 참느라 얼굴까지 벌게졌다. 가장 기쁠 수밖에 없는 김지훈이 헛기침을 하며 눈짓을 했다.

이준영 교수와 펠로우들만 남았다.

어제 나눴던 말을 꺼냈다.

“하윤호 문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내부적으로 결론 내렸어.”

상대가 누구든 간에 좋은 일이 아니지만 개운해지는 속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젠 펠로우들끼리 왈가왈부 고민할 이유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크게 만족할 수 있었다.

“강병옥 잡아주느라 다들 수고했다.”

“저희들이 특별하게 한 일은 없습니다. 병옥이가 스스로 깨달아서 다행입니다.”

이준영 교수의 눈길이 김지훈에게 머물렀다.

‘사람 바꾸는 일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고 했는데.’

은근히 쑥스러워진 김지훈이 딴청을 피웠다.

‘이대로 쭉 갔으면 좋겠다.’

강한 신뢰는 칭찬과 다름없다.

강병옥이 최종철 환자 치료에 더욱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밥을 먹기 시작한 이후에도 틈만 나면 세척을 했고 마침내 결실을 보았다.

드디어 드레인을 제거할 때가 왔다.

“강병옥, 드레인 제거해.”

최종철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머니는 손을 모은 채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강병옥이 떨리는 손으로 드레인을 잡았다.

서서히 드레인이 배 밖으로 빠져나왔다.

보통 조심스러운 손길이 아니었다.

마침내 생명줄이면서도 항상 거북하고 불편한 통증을 유발하던 드레인이 제거됐다.

최종철이 훅 숨을 내뱉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번 주 지켜보고 다음 주 월요일에 피검사와 초음파, CT까지 전체적으로 확인한 후 이상이 없으면 퇴원해도 되겠습니다.”

김지훈이 퇴원 날짜까지 지정하자 눈물 반, 웃음 반이었다. 가장 기뻐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강병옥이었다.

“형,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진우야, 그동안 왜 이런 즐거움을 몰랐는지 모르겠다. 오늘 최종철이 웃는데 솔직히 가슴 벅차고 행복한 느낌까지 들었어. 진우야, 미안하고 고맙다.”

송진우의 얼굴이 벌게졌다.

“갑자기 징그럽게 왜 이래요? 홍간난 할머니 수술도 확실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 동네 분이에요.”

“최선을 다할게. VIP 환자잖아. 맞아. 확실히 VIP야.”

“당연하죠.”

송진우가 활짝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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