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05화 (705/1,329)

9화. 분명 좋은 일이다. (2)

이준영 교수 말로는 긍정적이었다지만 윗사람 앞에서 무작정 고개를 저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상황을 설명하려니 은근히 초조했다.

지나친 걱정에 불과했다.

뜻밖의 반응에 멍청하게 얼굴만 보았다.

“지훈 씨, 우리 구미 가요.”

“그래도 되겠어요?”

“뭐가 문제에요? 초빙이잖아요. 초빙.”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인데 괜찮겠어요?”

“그래서 더 가야 할 것 같아요. 당직을 이틀에 한 번씩 서야하는 것 말고는 다 좋은 것 같아요. 구미가 서울보다는 많이 한가하다니까 둘이 같이 있을 시간이 많아질 거 아니에요. 경희도 없잖아요. 거기다 파견 수당까지 각각 준다는데 액수가 제법 돼요.”

한가할 것이라는 말이 왠지 불안했지만 나머지는 맞는 말이다. 꿩 먹고 알 먹고, 도랑치고 가재 잡고, 마당 쓸고 돈 줍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일타 삼피다.

주은 돈이 다 고경아 호주머니 행이라는 점을 빼면 장밋빛 달콤한 3개월이 될 것이다. 물론 한 가지 불안은 안고 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수술 적은 것 말고는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는데 혈관 수술은 어떻게 하지? 이건 정신 바짝 차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구미 식구들은 잘 지내고 있나? 몇 명이나 남아 있을까?’

좋게 생각할 일 아니, 여러모로 좋은 일이었다. 고경아와 함께 진지하게 상의한 후 확실하게 결정을 내렸다. 마지못해 가는 것보다는 마음 편히 제 발로 가는 편이 낫다.

질질 끌어야 쓸데없는 고민만 많아질 것이다. 최철한을 비롯해 새로운 사람과 환경은 또 다른 경험과 배움의 길을 제공할 것이라 믿었다.

다음 날 아침, 바로 이혁민 교수를 찾았다.

“선생님, 결정하시면 바로 파견 가겠습니다.”

“파견이 아니라 초빙이다. 잘 생각했다. 니가 가면 최철한 선생만이 아니라 우리도 든든할 거야. 아직 시간이 제법 남았으니까 천천히 준비해.”

교수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이혁민 교수가 정식으로 구미 파견에 대해 설명했다. 이미 내부적으로는 얘기 다 끝난 상태였다.

송재덕 교수가 무척 좋아했다.

“그래그래. 철한이하고 석재가 간곡히 부탁하더라. 잘 생각했다. 잘 생각했어. 지훈아, 이건 좌천이 아니고 초빙이야. 초빙. 아무나 초빙하니? 실력은 물론이고 성품이 따라 줘야 가능한 일이야. 아직 시간이 남았다만 구미 가서 많이 배우고 많이 가르쳐 줘라. 좋다. 좋아. 셋이 함께 수련했잖아? 그치? 내 말이 맞지?”

은근히 기분이 붕 떴다.

신기동 교수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김지훈, 가기 전까지 혈관 수술 확실하게 하자. 대충하고 가면 다시 왔을 때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이혁민 교수가 이미 이유를 설명한지 모르는 눈치였다. 김지훈이 모른 척하고 힘차게 대답했다. 연수의 의미와 3개월이란 공백에 각오 단단히 했다.

“예. 선생님. 현수하고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는 묘한 표정을 지었고 하윤호 교수는 머리를 굴리느라 바빴다.

‘눈엣가시 같은 놈이 안 보이면 마음은 편하겠지만 이준영 교수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네. 당분간 무리한 수술은 모두 피하는 수밖에 없겠어. 어쨌든 수술이 늘겠지?’

이해득실을 따질 수 없는 일을 두고 손가락을 꼽고 있었다. 눈에 보이게 대립하고 있는 김지훈을 당분간 볼 일 없다니 앓던 이가 빠진 느낌이었다.

이런 면에서는 당연히 김지훈도 똑같은 마음이었다.

뒷마당에 잔뜩 쌓여 있는 처치 곤란한 똥덩어리를 한동안 보지 않아도 된다는 느낌이었다. 어딜 가든 고약한 냄새는 풍기겠지만 말이다.

회의실에서 나온 이경석이 고개를 흔들었다.

“어제 밤 내내 생각해 보니까 라파로 때문만은 아니야. 가장 주요한 이유는 실력이겠지. 현수야, 마누라에게 욕먹더라도 우리 더 분발해야 할 것 같다. 저 자식하고 평생 싸워야 할 모양이다. 나쁜 놈.”

이경석도 신현수와 똑같은 마음이었다.

“그나저나 너희 둘 일석이 조심해라. 내년에 혈관 파트 맡는 거 알면 총 들고 쫒아올지도 모른다.”

‘아! 일석이도 있었지?’

신현수가 피식 웃고 말았다.

한때는 경쟁자로 생각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눈에 안 보여도 긴장해야 한다니 세상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손일석과 이경석도 라이벌이 된지 오래였다. 김지훈이 너무 강력했기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루하루가 훨씬 더 바빠졌다.

10월 중순으로 예정된 구미 파견에 맞춰 외래 진료와 수술 스케줄을 잡는 것은 보통 골치 아픈 일이 아니었다. 파견 직전 일주일 동안은 수술하지 않는 것이 환자에 대한 기본적인 의무이자 예의였다. 결국 수술 예약이 넘쳐 이준영 교수에게 환자를 보내야 했다.

의외로 너무 안타까웠다.

‘그나마 스승님이니까 다행이지 하윤호였으면 성질이 나다 못해 가슴이 터졌을 거야. 환자 보낸다고 할 수나 있겠어?’

석사 논문을 써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자료를 미리 챙겨야 했다. 틈틈이 잡은 초안을 검토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요구됐다.

‘펠로우가 돼서도 탈 수 없잖아.’

회진, 진료, 수술, 응급실까지 퇴근 후에는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혈관 수술이 있는 날은 아예 피 곤죽이 됐다. 신기동 교수 탓이 아니었다.

“선생님, 이 부분 처리가 전번 수술과는 조금 다르게 됐는데 이 정도는 괜찮은 겁니까? 조금 더 조밀하게 연결해 주는 것이 더 나을까요?”

도리어 머리를 들이밀었다. 적극적인 태도와 열정에 감동해 3개월 공백을 잊을 신기동 교수가 절대 아니었다. 아예 밤새 칼을 갈고 나왔다.

“김지훈, 물어보기만 하면 뭐해? 제일 주의해야 한다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말한 부분이잖아? 어휴! 굼벵이도 아니고 어떻게 구미를 보내지?”

이준영 교수의 눈초리도 점점 심상치 않게 변해갔다. 마치 표적이 된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하는 환자는 보람이자 힘이었다.

특히 최종철의 경우는 더욱 큰 보람이었다.

죽을 먹은 지 나흘 만에 밥을 시작했다. 복도를 걷는 두 다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여전히 이리게이션을 멈추지 않는 강병옥의 정성과 열정 덕분이었다.

눈에 꽉꽉 차기 시작했다.

‘이제는 적당한 때 수술을 줘도 되겠어.’

최종철이 옆구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선생님, 저 이거 언제 빼요?”

“그거? 난 잘 모르니까 강병옥 선생한테 물어봐.”

“선생님이 결정하셔야 뺄 수 있는 거 나도 다 알아요.”

“그런가? 그래도 강병옥 선생한테 물어봐. 나보다 훨씬 더 친하잖아. 이제와 친한 척 해야 소용없어. 너무 늦었다.”

최종철과 어머니가 활짝 웃었다.

보호자 앞에서 환자와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퇴원이 멀지 않았거나 그만큼 깊은 관계를 형성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담낭농증 환자가 최종철보다 먼저 퇴원했다.

남몰래 눈여겨보고 있던 김지훈과 이준영 교수가 이제야 안심했다. 뜻하지 않았던 일 아니, 솔직히 원했던 일까지 벌어졌다. 퇴원하는 날 진료 및 간호 기록은 물론 수술 기록까지 요구한 것이다.

하윤호 교수의 초조함이 눈에 보였다.

자신이 내뱉은 말을 따라 수술 기록 지는 세세한 부분까지 자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누가 언제 누구와 함께 어떤 과정을 어떻게 진행했는지까지 말이다.

이혁원과 강병옥의 작품이다.

아무 과실이 없어도 불안할 판인데 재수술을 다른 의사가 했으니 두 발 뻗고 잘 수 없을 것이다. 고소라도 당하면 재임용에 중요 참고 사항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면 이번 일이 치명타가 될 지도 몰랐다.

‘구미 가기 전에 결론이 날까? 힘들겠지?’

김지훈이 아쉬움을 금하지 못했다.

목요일 일과가 시작됐다.

점심 먹고 오후 환자 몇 명 보는 사이 3시가 다됐다. 은근히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렸던 환자가 보호자와 함께 들어섰다.

77세 여자 환자. 홍간난.

여전히 황달기가 보였지만 전체적인 몸 상태는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아들 내외와 인사를 한 후 그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었다.

눈물부터 글썽였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 아니었으면 우리 어머니 치료도 못 받고··· 원장님께는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아닙니다. 다른 생각하지 마시고 어머니 치료에만 신경 쓰시면 됩니다. 할머니, 수술 받으셔야 한다고 말씀 들으셨죠?”

“안 해요. 그냥 이렇게 살다가 가면 되는데 이 나이에 수술은 해서 뭐해? 자식들한테 폐나 끼치지. 의사 선생님. 간단한 수술이면 안 해도 되잖아요? 차비만 들지 뭐 할라고 여기까지 와 사서 고생을 해.”

흔히 보는 늙은 부모의 고집이었다.

답답하면서도 가슴 아픈 말이었다.

고성문도 홍간난 환자를 설득하느라 별 병 아닌 것처럼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1기라고 해도 조만간 담도를 막을 테고 곧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며 빠르게 쇠약해진다.

수술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수술 안 하시면 되게 아픈 병에 걸리셨어요. 이 병은 약도 안 들어요. 할머니, 꼭 수술하셔야 합니다. 보호자 분, 원장님께 설명은 들으셨죠?”

“예, 선생님.”

“일단 입원부터 하시고 필요한 검사 진행하겠습니다.”

아들 내외가 입도 열지 못할 정도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인연이라고는 의료봉사 때 얼굴 본 것이 다였다. 그런데 장인은 어마어마한 치료 비용을 모두 부담하고 수술은 사위가 한다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생님, 돈이 많이 들겠죠? 얼마나······.”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은 할머니 치료만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나이가 많으신 데다 치매기까지 있으셔서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네요.”

다행히 4인실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입원 수속을 하는 동안 원주에서 가져 온 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아들과 단 둘이 마주 앉았다.

김지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설명 들으셨겠지만 젊은 사람도 버티기 힘들 정도로 대단히 위험한 수술입니다.”

“나이도 많고 몸도 좋지 않으신데 수술 받으실 수 있을까요? 치매도 걱정입니다.”

“이미 암덩어리가 담도를 막기 시작했습니다. 황달이 일찍 발생해서 조기에 발견한 것만 해도 천운입니다. 반드시 수술 받으셔야 합니다.”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겁니까?”

“없습니다. 수술을 포기하면 환자 분이 힘든 것은 물론 보호자 분들도 지켜보시기 힘들 겁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마약으로도 통증을 조절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수술과 마취의 위험성, 수술 후 합병증 및 항암 치료의 어려움까지 모두 설명했다. 항암 치료를 빼면 모두 사망할 수 있는 요인이었다. 다른 어떤 수술보다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반드시 언급해야 했다.

아들의 안색이 어둡다 못해 꺼멓게 변했다. 수술을 받고도 결국 고통 속에 어머니를 떠나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이해하고도 남았다.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일단 추가 검사 시행하고 자세하게 다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저로서는 반드시 수술하셔야 한다는 말씀 밖에 못 드려 죄송합니다.”

“고성문 원장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까지 오며 단단히 마음먹었는데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막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평생 고생만 하셨고 남들 다 가는 여행 한 번 시켜드리지 못했는데 왜 이런 몹쓸 병까지······.”

아들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어머니를 향한 미안함과 죄책감일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김지훈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 상황은 다르다고 해도 부모 마음이 변치 않는 것처럼 자식 마음도 그럴 것이다.

가슴이 먹먹해진 김지훈이 조용히 기다렸다.

이럴 땐 가끔 간담도를 택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초기에 발견해도 양성 질환과 악성 질환의 예후와 경과가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었다. 수술하는 의사에게서 어려움과 느껴지는 부담은 극과 극이었다.

아들이 눈가를 쓰윽 훔치며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확신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 다만 할머니도 그렇고 보호자 분도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셨으면 합니다.”

“치매 기운까지 있으셔서 더 걱정입니다.”

“저도 걱정입니다. 치매는 딱히 치료제가 없다는 것 아시죠? 우리도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겠지만 보호자 중 한 분은 반드시 어머님 곁을 지키셔야 합니다.”

나직한 한숨을 내쉰 아들이 고개를 숙이고는 어머니와 아내를 찾았다. 홀로 남은 김지훈이 복부 CT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분들께 웃음을 찾아 드릴 수 있을까? 다음 주에 수술하면 파견까지 2주 정도 남네.’

수술 후에도 숱한 고비를 넘겨야 한다.

부담감이 더욱 심해졌다.

몰려오는 두려움과 답답함을 떨치려는 듯 길게 숨을 내쉰 김지훈이 어깨를 휘휘 돌렸다. 순간 스승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홀로 서야 할 때였다.

스승은 그렇게 말한 지 이미 오래였다.

결코 자신감을 잃으면 안 된다.

기다리던 검사 결과가 모두 나왔다.

담도암 1기가 확실했다.

유일한 위안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췌장관과 담도가 만나는 부분 직상방이었다.

황달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상당히 진행된 후에 발견했을 것이다.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말과 함께 시한부 선고를 내려야 한다는 말이었다.

의사가 보기에도 가장 무서운 암 중의 하나였다.

크기는 1센티미터도 되지 않았지만 해부학적 구조상 휘플이라는 수술을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위 절반, 십이지장, 담낭, 담도와 췌장 일부분까지 제거해야 한다.

77세 고령 환자가 버티기에는 너무도 큰 수술이었다.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술에 대비해 홍간난 환자의 몸 상태를 최대한 회복시키는 일에 주력했다. 수시로 보호자를 만나고 환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마지막 결정만이 남았다.

김지훈이 병실을 찾았다.

“다음 주 수요일로 수술 날짜를 잡겠습니다. 준비할 것이 많아서 내일 아침까지 수술 여부를 확실하게 결정해 주셔야 합니다. 비슷한 경우에 처한 분들이 수술을 포기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후회 때문에 괴로워하시는 것을 종종 봅니다. 두렵다고 피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홍간난 환자는 아들만 보면 성화다.

“간단한 수술이라면서 도대체 며칠이나 병원에 있어야 하는 거야? 애비야,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집에 가자.”

“어머니, 아무 때나 수술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래요. 오늘도 수십 명이 수술을 받았다는데 금방 되겠어요?”

도리어 어머니의 성화가 아들의 결심을 앞당겼다. 반드시 수술받아야 한다는 고성문의 간곡한 전화도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선생님, 부탁드립니다. 우리 어머니 꼭 살려 주십시오.”

“잘 결정하셨습니다. 예정대로 준비하겠습니다. 할머니, 수요일이에요. 수요일. 며칠 안 남았으니까 제 말 잘 들으셔야 됩니다.”

막상 수술 날짜가 확실히 정해지자 홍간난 환자도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치매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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